소설리스트

검신재생-302화 (302/318)

<검신재생 302화>

302. 이제야 재밌어지는데

피바람이 불었다.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피와 살점이 난무했다.

“끄르륵!”

“아이쿠, 검이 계속 미끄러지네.”

“커헉!”

“귀신이 들렸나. 검이 마음대로 움직이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으며 착실하게 마인들의 목을 베는 천무백의 모습은 황당하다 못해 당황스러웠다. 갑작스런 사태에 화산과 종남 무인들은 어찌할 줄도 모르고 굳어 버렸다.

“대, 대체 이게 무슨……”

황망한 얼굴로 마인 진영에서 벌어지는 일대 사건에 국보마저 어찌할지 모르고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비교적 멀리서 상황을 바라보는 이들도 그럴진데, 바로 코앞에서 목이 떨어지고 피가 튀는 마인들은 오죽하겠는가.

“마, 막아! 백도 놈의 세작이다!”

“어허, 그 무슨 섭섭한 소리를. 내 칼끝에 마기가 실린 거 안 보여?”

비명을 내지르던 마인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렸다.

천무백의 검 끝에서 아스라이 피어오르는 건 마기(魔氣)다.

물론 자세히 살피면 무언가 이질적인 느낌을 발견할 수 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자세히 살필 수가 있는가.

어쨌든 마기가 분명했다.

잠입한 백도의 세작이 흉악한 이빨을 드러낸 거라고 여기던 마인들의 얼굴에 혼란이 가중됐다.

뭐지? 배신인가? 마인이 백도의 편에 붙은 건가?

“마공……! 마인이 어찌 같은 마인을……!”

“실수야, 실수. 칼 쓰다 보면 미끄러질 수도 있지.”

“이익! 어떻게 미끄러져야 같은 편의 목을 깔끔하게 쳐내?”

마인이 분통을 터뜨렸다.

천무백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나 광종 출신이야, 광종. 가끔 머리가 헤까닥 돌아서 나도 모르게 피를 보고 싶어지더라고. 이해해 주시오. 미친놈이라서 그래. 이해해줘. 응?”

그야말로 농락이었다. 마인들의 낯빛이 파랗게 질렸다. 그래, 차라리 칼이 미끄러졌다는 말도 안 되는 실수라고 치자.

그럼 정상적인 공격이 검격이 아니어야 한다. 검에 힘이 빠지고, 휘두르는 데 전력을 다한 공격이 아니리라. 분명 그래 보였다. 보법은 밟지도 않은 채, 두 다리는 땅에 붙어 있고 검만 휘적휘적 움직인다.

그런데 어느 하나 막을 수 없었다.

벌써 넷.

촌각 사이에 쓰러진 마인의 숫자였다. 하필이면 그들 모두 최고 서열이었다.

우두머리, 우두머리가 죽으면 바로 지휘권을 이어받을 이인자, 그리고 다음 서열들이었다.

머리들이 단발마의 비명만 남기고 픽픽 죽어 나가버리니, 마인들이 혼란을 추스르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 천무백의 검이 한 번 더 휘둘러졌다. 얼굴이 빨개진 채로 소리를 바락 지르던 조금 전 마인, 다섯 번째 서열의 마인이었다.

불쑥 공간을 베어 오는 검을 보고 기적적인 반사 속도로 검을 세웠다.

‘막았다……!’

마인의 얼굴에 환희가 차올랐다. 막았다. 좋아, 이제 반격만 하면…….

‘어?’

한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로는 분명히 검을 찌르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건만.

손은 그대로였다.

아니, 오히려 밑으로 천천히 허물어졌다.

그제야 목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감각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았다.

‘늦었구나.’

검을 세워 막았다고 생각했을 때, 이미 천무백은 자신의 목을 베고 검을 회수한 상태였다.

눈으로 좇지도 못할, 오감으로 파악도 못 한 그야말로 범접할 수 없는 경지.

이런 자가 마도에 있었던가? 광종이라면 천광마? 아니, 그 작자도 이 정돈 아니다.

마인은 점멸해 가는 삶의 마지막에서 간신히 무언가 떠올렸다.

‘마인이 아니야…….’

애석하게도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천무백은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곤 아무런 감정 없는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계속 실수로 동료를 죽이니 여기 있을 수 없겠군. 광기가 뇌에 침투한 거 같으니, 난 가서 마의(魔醫)한테 치료받아야겠어.”

태연하다기보단, 숫제 뻔뻔함이었다.

단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제멋대로 늘어놓고 천무백은 훌쩍 자리를 떠났다.

경공이 얼마나 빠른지 순식간에 까마득한 점으로 보일 정도였다.

“…….”

“…….”

무언가 한차례 폭풍이 몰아치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잠잠해진 듯한 느낌이었다.

국보는 순간 상념에서 번쩍 깨어났다.

‘지금 죽은 놈들, 기껏해야 내가 두 놈 정도 감당할 수 있던 놈들이다!’

저들 중 가장 강한 마인 다섯 명.

국보가 경계했던 다섯이 전부 죽었다. 공교롭게도 정체불명의 괴인이 딱 그 다섯만 죽인 것이다.

마치 자신이 다섯을 경계했던 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정의맹에서 마도 진영에 잠입시켜 놓은 세작이 있었단 말인가?’

그런 의문은 당연했다. 하나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다섯 마인이 죽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마인은 숫자만 많지, 충분히 공략 가능한 놈들이다.

국보가 버럭 외쳤다.

“놈들을 단 하나도 살려 두지 마라!”

* * *

천무백이 마도 진영에 들어온 지는 벌써 나흘이 지났다.

의외로 어렵지 않았다.

지금까지 마인들은 중원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싸움이 일으키지 않았던가.

그런 이들이 한곳에 집결하고 있다. 자연히 빈틈이 생기기 마련이다. 실종되고, 죽은 자는 수도 없이 많다. 그들 중 하나로 위장해 잠입하는 건 일도 아니다.

물론 마인 특유의 마기 때문에 잠입이 쉬운 건 아니다.

쉽다면 백도가 정예고수 모두를 마인들 사이에 섞어 놓았겠지.

“…….”

제갈설아는 자신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마기에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대체 뭐야…….’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기에 제갈설아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물론 그렇다고 단전에 마기가 침투한 건 아니다.

‘대체 무슨 수법인지 모르겠어.’

일종의 위장이다.

제갈설아는 여전히 제갈세가만의 정종의 심법을 사용했다.

당연히 단전에 있는 내기도 모두 정순한 것들이었다.

마기와는 상극이었다.

하나 겉으로는 마치 마기처럼 느껴졌는데, 천무백의 솜씨였다.

“한때 암천검제가 사용했다던 비술을 천 공자가 어떻게 아시는 거지?”

궁금해하던 제갈설아에게 천무백은 암천검제의 비술이라며 일축했다.

타인의 비술(祕術)에 대해 더 묻는 건 분명한 실례라 그걸 어찌 얻어 냈는지조차 더 물을 수 없었다.

‘그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천무백이나 제갈설아나 둘 다 겉으로 보기엔 마기가 언뜻 느껴지니 마인인 척 위장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마도 진영에 들어가 당당히 움직이는 건 또 다른 얘기였다.

아무리 허술하다고 해도, 마도 수뇌부들이 그렇게까지 호락호락하진 않다.

철저하게 호구조사가 뒤따른다. 어느 종단 출신이며, 어느 마공을 익혔고, 누구 밑에서 어디에서 싸우다가 집결했는지까지.

하나 역시 문제없었다.

“비록 볼품없이 쪼그라든 종단이지만, 한때 마류칠종이었던 역사는 분명하니 새삼 내 출신에 고마움이 들더랍니다. 소저.”

“아, 장노. 오셨군요.”

상념에서 깨어난 제갈설아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장노가 흐뭇한 미소를 띤 채 다가왔다.

“덕택에 무사히 들어올 수 있었어요. 지금도 아무 제약 없이 움직일 수 있고요.”

“저야 도련님의 계획을 착실히 따를 뿐입니다.”

다름 아닌 마류칠종의 검종의 실력자 장노의 보증이 있어 호구조사도 쉽게 통과했다.

비록 쪼그라든 검종이지만, 귀마와 혈불을 비롯한 혈귀곡의 공인을 받아 마도의 품에 다시 돌아온 검종이 아닌가.

한때 마류칠종 중 하나였던 역사 때문에, 검종을 께름칙하게 여겨도 감히 무시할 순 없었다.

장노가 이곳에 온 것도 바로 천무백의 안배였다.

“천 공자님은 보이지 않으시네요.”

“아까 마인들과 칼을 찬 채 나갔습니다. 듣자 하니 종남 무인들과 전투가 벌어지는 곳이라고 하더군요.”

“또 현장에 나가셨군요…….”

제갈설아의 얼굴에 걱정의 기색이 떠오르자 장노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천무백이 얼마나 강한지, 그 범접할 수 없는 경지를 잘 알고 있는 제갈설아다.

그런데도 늘 걱정을 하는 제갈설아의 모습에 장노는 무언가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저. 지금까지 그랬듯이 아무 문 없을 겁니다. 도련님이 활약할수록, 백도의 무사들은 더 많이 생존하니까요.”

“네,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빨리 제 일을 다 해야겠어요.”

“차도가 있습니까?”

“으음, 아직 난해하긴 한데 그래도 가능성은 보여요.”

제갈설아는 마도 진영에 들어와서 한 가지 일에 착수하고 있었다.

진영 곳곳에 기문진법을 설치하는 일이다.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임무였다.

곳곳에 진법을 설치하고 있지만, 이건 제각각 따로 효과를 발휘하는 각기의 진법이 아니었다.

수십, 수백 개의 진법이 하나가 되어 그 효력을 발휘하는 기문진법이라,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었고 최대한의 집중력을 발휘해야 했다.

하물며 자신도 문헌으로만 들었지, 실제로 성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도 못 하지 않았는가.

“천 공자님은 대체 이런 진법을 어떻게 아는지 모르겠어요.”

“약선 어르신이 전해 준 진법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암천검제의 비술부터 이 진법까지.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는 느낌이에요.”

진법의 출처야 청성표국에 머무르는 약선이 알려 줬다고 둘러댔지만, 제갈설아로선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

“이거 하나만 완성되면, 싸움은 어쩌면 쉽게 끝날지도 몰라요.”

“그러니 도련님이 저리도 열심히 움직이는 것일 겁니다.”

지금 사태론 백도가 집결하기 전에 화산과 종남이 먼저 무너질 위기였다.

마인들은 천마라는 이름으로 단결되어 있지만, 백도는 아니다.

정의맹과 오대세가를 비롯한 검성도 이제 막 도착했지만, 당장 종남과 화산이 같이 싸운다고 해도, 제각기 따로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이와 같은 상황에서 마도가 확실히 백도를 압도하고 있었다.

천무백은 여기서 백도가 무너지는 현장마다 직접 나서 균형추를 되돌리고 있었다.

백도가 무너지지 않고 버텨 줘야 한다.

바로 제갈설아가 지금 준비하고 있는 진법이 완성되기까지.

“천 공자님이 더 위험에 처하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만들어야겠어요.”

제갈설아가 의지를 다졌다. 하나 장노는 내심 속으론 씁쓸하게 웃었다.

장노는 알았다.

단순히 백도가 밀리지 않게 균형을 맞추며 시간을 끄는 게 아니었다.

백도가 계속 집결하고 있는 것처럼, 마도 역시 지금도 집결중이다.

아직 그 고고한 천마 역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쩌면…….

‘세상 모든 마인이 한곳에 모이기까지 시간을 끄는 것이겠지요. 마인들이 전부 모여들기 전에 백도가 무너져선 안 되니까.’

오히려 장노의 눈에는 천무백이 일부러 마도가 다 집결하기까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천마까지 전부. 그 전부가 모인 순간까지.

그때였다.

땡땡땡땡땡땡!

격렬한 타종소리가 연이어 흘러나오더니 마인들이 일대 집결하기 시작했다.

장노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집결하고 전투가 벌어지기를 반복했지만, 지금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이내 전해지는 소식에 장노가 눈을 크게 떴다.

“검성이 오대세가의 가주와 정예들을 이끌고 나섰다는데? 형씨, 당장 칼 들고 나와. 단명왕(短命王)이 직접 지휘를 맡아 나간다니까.”

마인들이 일제히 몰려나가는 모습은 흉흉하기 짝이 없었다.

장노 역시 굳어진 얼굴로 칼을 잡았다.

“아니, 장노는 여기 계시오.”

그때 별안간 천무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막 도착한 천무백은 제갈설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소저께선 계속 일을 진행해주시오. 장노께서 곁을 지켜주시고. 저긴 내가 나가야겠소.”

“도련님, 괜찮으시겠습니까? 검성과 오대세가의 가주들이 나온다면, 이쪽에서도 그에 걸맞은 상대가 나갈 겁니다. 자칫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격렬한 싸움일 테니까요.”

“그래서 내가 가야 하오.”

천무백이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이제야 좀 재밌어지는데 빠질 수야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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