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301화 (301/318)

<검신재생 301화>

301. 칼이 미끄러졌네

“그게 말이 돼요?”

천무백이 하는 말이라면 우선 믿고 보는 제갈설아여도, 지금만큼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빽 질렀다. 하나 천무백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금부터 나는 마도 진영에 숨어들 것이오.”

“……!”

혹시나 했던 의도를 담담히 밝히자 제갈설아의 입이 쩍 벌어졌다.

“저들은 날 불러내려고 결전을 준비한 것이오. 오만하다고 생각하지 마시오. 백도가 지켜보는 코앞에서 항마의 상징이 된 날 죽여서 의지를 무너뜨리려는 게 저들의 진짜 목적이오.”

“그, 그건…….”

당연히 오만한 발언은 아니다. 물론 저것이 가장 큰 이유는 아니겠지만, 마도가 결전을 준비하는 이유 중에 분명 큰 비중을 차지할 건 자명한 일이다.

저번 정마대전처럼 창천검신이란 압도적 존재는 없다. 너희들이 믿고 숭앙하는 천룡겁협도 버티지 못하고 죽는다.

이걸 보여 주려는 속셈은 분명하리라.

거기까지 말하자 제갈설아는 천무백의 행동이 조금씩 이해됐다.

제갈여강이 한시라도 빨리 섬서성으로 움직여 달라는 연락을 제갈설아를 통해 전한 이후, 천무백은 우선 섬서성으로 방향을 잡았다. 동시에 자신의 움직임을 철저히 숨겼다.

오죽하면 제갈설아가 정의맹에 보고하려는 것조차 막았다.

“정보가 흘러나갈 걸 우려하셨나요?”

“정의맹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전쟁에서 세작이란 어디에도 있는 존재 아니겠소?”

이미 비다라라는 희대의 무기를 만들어 낸 마도다.

백도 사이에 비다라를 이용하든, 아니면 일부 백도인들을 포섭하든, 백도에 세작을 숨겨 놨으리라는 건 누구나 쉽게 예측할 수 있다.

하여 정의맹조차 천무백의 움직임을 모를 정도로 꼭꼭 숨겼다.

‘그렇다면…….’

제갈설아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사실 제갈설아는 천무백을 설득할 생각이었다. 아버지의 뜻대로 정의맹에 합류하여 같이 싸우는 것이 전력에 큰 도움이 되리라 여겼으니까.

하나 천무백이 연락을 받자마자 행적을 숨겼다는 건, 곧 곧장 마도로 들어갈 뜻을 굳혔단 얘기다.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달은 제갈설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지금 전장에서 마도 쪽으로 가겠다는 건가요?”

“그렇소, 마도의 진영이오. 나는 마인으로 분한 채 거기에 끼어들 것이오.”

“……!”

“재미있지 않겠소? 저쪽은 천마가 나와서 날 잡으려고 하는데, 정작 나는 싸움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위험해요. 마도 진영 속에 숨어서 활동한다는 건 불가능해요. 백도의 무공은 저들과는 확연하게 다르니까요.”

마공과 정종 무공은 확연히 다르다.

일개 하급 마졸도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상극이지 않은가.

제갈설아의 의문은 당연했다.

곡지흠의 신에 달한 역용술? 아니면 안면 근육을 비틀어버리는 축골공?

다 불가능이다. 단전에 쌓인 내기 자체가 다르니까. 숨결에 섞여서 호흡 때마다 흘러나오는 기운을 저들이 눈치 못 채겠는가.

설령 내기를 갈무리해 잘 숨긴다고 해도, 막상 위급한 상황이 닥친다면 방법이 있을까.

하나 천무백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어려운 일 아니오.”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요?”

글쎄. 그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면, 백도에서 자객을 마도 진영 깊숙이 들여보내서 고수들을 암살할 시도라도 하지 않았을까.

그런 제갈설아의 미심쩍은 눈빛에 천무백이 어깨를 으쓱였다.

“전례가 있으니 못할 것도 없소.”

“전례라니…… 아?”

제갈설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딱 하나 있다.

그런 전례가. 마도 진영에 깊숙이 잠입한 백도 고수가 마도를 절반 이상 무너뜨린 전설적인 이야기.

“암천검제(暗天劍帝)의 마도행…….”

암천검제.

인생의 절반은 마인으로 살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마도의 장로들을 몰살시킨 채 유유하게 강호를 떠났던 무인.

정마대전이 벌어지기 직전,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전쟁을 끝내 버린 전설적인 존재가 역사에 분명이 또렷이 존재했다.

“전례가 있으니 못할 게 뭐가 있겠소. 더구나 암천검제는 인생의 절반을 마도에서 살았는데도 들키지 않았는데. 난 기껏해야 한 달도 안 될 거요.”

“…….”

제갈설아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어졌다.

한 달.

그 시간 안에 전쟁을 끝내겠다는 의미다.

“하지만 암천검제가 어떤 수법을 사용해서 마도에 잠입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어요. 그분의 수법을 배울 수 없는데……”

“걱정 마시오. 소저.”

천무백은 더 설명을 멈췄다. 아니, 사실 설명할 수도 없는 부분이었으니까.

“어려울 건 없으니까.”

사실, 암천검제가 나라서 말이야.

한번 해 본 일이거든.

* * *

땡땡땡땡땡!

“움직여라! 어서 움직여!”

타종소리가 격렬하게 울림과 동시에 무사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각자 애검을 굳게 쥔 채 결연한 얼굴로 움직였다. 그 움직임이 신속하기 짝이 없었고, 정예하기 그지없었다. 무사들 중 제일선에 서 있는 비교적 젊은 무인이 전령을 불러 물었다.

“무슨 일이지? 어디로 가야하나?”

“여산(驪山)에서 지원 요청입니다.”

“여산이라면, 종남일 텐데.”

무인의 미간이 미미하게 좁혀졌다.

이미 최종결전은 시작되고 있었고, 곳곳에서 치열한 싸움이 국지전 형태로 벌어지고 있었다.

진시황이 온천을 찾기 위해 각도(閣道)를 설치한 여산도 마찬가지.

특히 여산에는 종남파의 무인들 일부가 진채를 꾸리고 있었다.

“우리한테 지원을 요청할 정도면 위급하겠군.”

사내는 미간을 좁혔지만, 사사로운 감정으로 대의를 거스를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고개를 돌린 채 준비를 마친 무사들을 둘러보았다.

매화가 그려져 있는 무복을 갖춘 이들. 그들의 면면은 믿음직하기 짝이 없는 자태였다.

“들으라. 우리는 종남을 구하러 간다. 비록 종남이 우리의 형제도 아니고, 참으로 가증스럽기까지 한 놈들이지만, 마도 앞에서 사사로운 감정을 꺼내지 말라. 우리는 같은 백도의 형제들을 구하러 가는 것이다. 나, 매화일검(梅花一劍) 국보가 가장 앞에서 싸우겠다.”

바로 화산 제일의 후기지수인 매화일검 국보와 화산파의 검객들이었다.

섬서에서 결전이 시작되는 만큼, 화산과 종남은 문파의 모든 저력을 동원해 싸움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국보는 무사들을 이끌고 거침없이 움직이면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마인들은 계속 집결하고 있고, 중원 곳곳에서 백도 무인들도 모여들고 있다. 그때까지 우리 세력을 최대한 보존하고, 마도 세력을 최대한 깎아 내야 해.’

산발적으로 벌어지는 국지전은 전초전이라 볼 수 없을 정도로 치열했다.

종남과 화산 무인들이 수두룩하게 죽어 나갔고, 속가문파도 벌써 몇 곳이 멸문되기까지 했다.

텁텁한 공기가 별안간 코를 훅 찔렀다.

‘전장 냄새…….’

끈적끈적하고 불쾌한 기운이 여산에 진입하자마자 온몸으로 느껴졌다.

살기를 넘어선 무언가.

살이 썩어들고, 피가 굳고, 무인들의 땀내와 며칠이고 굳어 버린, 온갖 오물들의 냄새가 뒤섞인 전장의 냄새.

이미 몇 번 싸움을 해서 익숙해졌다고 느꼈지만, 여전히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국보는 이 싸움이 한시라도 빨리 끝나길 바랐다.

어렸을 때 듣기만 했던 정마대전의 영웅들의 이야기는 그저 환상에 불과했다.

‘영웅은 없다. 모두가 죽고, 살기 위해 칼을 휘두를 뿐이야.’

충격적이었다.

고매하고 도도해서 한없이 존경스러웠던 화산의 장로들이 흉신악살의 얼굴로 마도들을 참살하는 모습은.

지독한 살기와 투기로 뒤섞인 눈빛은 마치 짐승의 눈처럼 번들거렸다.

하지만 이해했다.

화산을 지키기 위해 격정적으로 변한 그들의 모습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 역시 마찬가지니까.

이야기 속의 도도한 영웅은 없다. 그저 살기 위해 검을 휘두르는 하나의 무사만 있을 뿐.

그러다 문득, 국보는 머릿속에 누군가 떠올랐다.

‘……천룡검협.’

언제였던가.

아직 그가 명성을 얻기도 전인 섬서의 장보도에서 처음 봤었다.

그저 장보도를 노리는 무인인 줄 알았지만, 혈사문이란 암중단체와 싸우는 의인이었다.

뿐이랴. 그 이후의 행보는 하나같이 혈귀곡으로 대표되는 마도와의 지독한 싸움이었다.

모두가 대두하고 있는 마도라는 이름을 애써 외면할 때, 홀로 중원을 오가며 마도와 싸운 사람이다.

귀마, 혈불, 독마, 천광마…….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마도 인물을 격살하여, 사실상 홀로 마도의 전력을 깎아 먹은 유일한 존재다.

정의맹을 결성하고, 구파일방을 결집하고…….

이 모든 일이 단 한사람의 칼끝에서 시작됐다.

영웅이 있다면, 단 한 명이지 않을까.

‘저번 정마대전 때 창천검신이란 영웅이 전쟁을 끝냈듯, 천 공자가 끝낼 수 있지 않을까.’

백도 무인들이 속속히 집결하고 있다. 최근에는 오대세가를 이끌고 검성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모두가 환호했지만, 다들 누군가를 아직도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새 행방이 묘연해진 천무백이었다.

‘빨리 와야 할 터인데…….’

국보의 상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주위의 분위기가 확 변한 걸 느낀 그는 안력을 돋궜다.

“다행이군.”

종남파의 무사들이 보였다. 큰 부상을 입은 자들이 보였고, 주위에 시신도 가득했지만, 전부가 당한 건 아니었다. 맞은편에 있는 마인들 역시 피해가 커 보였다.

국보는 급히 소리쳤다.

“삼대(三隊)는 부상자들을 확인하고 호송할 준비 해라. 일대와 이대는 내 지시에 따라 남은 마인들을 격살한다.”

국보의 추상같은 명령이 떨어지자 화산파 무인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버티고 있던 종남파 무인들은 화산파의 구원에 미묘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안심한 얼굴로 고마움을 전했다.

“구원을 와 주셔서 고맙소. 나는 종남의 유선자(柳宣子)요.”

종남파의 장로였다. 국보는 급한 와중에도 예를 잃지 않고 포권을 취했다.

“화산의 매화일검입니다. 소식을 듣고 곧장 달려왔습니다. 다행히 늦진 않은 것 같군요.”

한데 유선자의 얼굴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소식이라니……? 우리는 따로 지원 요청을 청한 바가 없소만……?”

“……!”

국보의 얼굴이 무서운 속도로 굳어졌다. 그때였다. 별안간 멀리서 광소가 들려왔다.

“이거야 원, 백도 놈들은 이래서 좋아. 서로 원수지간처럼 껄끄럽게 여겨도 도와줄 땐 확실하게 도와준다니까?”

동시에 주위에서 마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숫자는 화산무인들보다 훨씬 많았다. 단순히 숫자뿐만이 아니었다.

하나같이 지독한 마기가 흘러나오는 고수였다.

‘함정……’

그제야 함정임을 깨달은 국보는 황급히 판단했다.

‘적어도 다섯 명은 수준이 다르다. 내가 한 명, 여기 유선자께서 한 명 정도 상대할 수야 있겠지만…….’

자칫하면 여기서 몰살당할지도 모르는 함정이었다.

마인들 중 우두머리는 실소를 흘렸다.

“화산의 매화일검인가? 종남의 장로에 매화일검이 이끄는 정예들이라. 오늘 수확이 좋아.”

“…….”

국보가 굳은 얼굴로 검을 쥐었다. 그야말로 암울한 상황이었지만, 지레 놀라 포기할 순 없었다.

결연한 얼굴의 국보가 검을 겨누자 우두머리는 웃으면서 손짓했다.

“쳐라.”

차차차창!

마인들 사이로 검이 번쩍이면서 뽑혀 나왔다. 무시무시한 기세가 쏟아졌다.

서걱!

“……!”

하나 이어지는 상황에 결연한 자세로 검을 쥐던 화산 무인들이 일제히 어안이 벙벙해졌다.

바닥에 떨어지는 머리 하나.

방금 전까지 마인들에게 지시를 내리던 우두머리였다.

모두의 시선이 단 한사람에게 집중됐다. 칼끝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표정 없는 얼굴의 사내는 분명 마인이었다. 마인들과 똑같은 행색을 하고 있었고, 마인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 있었으니까.

혼란스러운 시선이 집중되자, 사내의 입이 열렸다.

“아이쿠. 칼이 미끄러졌네.”

단 조금의 감정 기복도 없는 무심한 목소리.

주위가 질식할 것 같은 어색한 침묵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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