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298화 (298/318)

<검신재생 298화>

298. 모두가 보는 무대

머리를 잃은 조직은 필연적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상한 분위기를 가장 먼저 느낀 건 제갈설아와 척마대였다.

자리를 비운 천무백을 대신해 부대주로 이끄는 척마대는 창설 이유에 맞게 활약해 왔다.

가장 위험한 전장을 찾아 제일선에서 싸우는 것.

아무리 핵심 거점에서 웅크려 지킨다는 전략이었지만, 그래도 타격대인 척마대는 이곳저곳을 오가며 가장 많은 전투를 겪어왔다.

이제는 그 누구도 후기지수들로만 이뤄진 타격대라고 무시할 수 없는 성과도 제법 쌓아 올렸다.

때문에 제갈설아는 흐름이 묘하게 바뀌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상해.”

“뭐가 말이오? 부대주.”

황보숭이 칼을 닦으며 물었다. 방금 전까지 격렬한 전투를 치뤘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그의 전신은 핏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비단 황보숭뿐만이 아니다.

당수군, 소항, 교문척, 그리고 남궁진천까지.

척마대의 핵심 인원 전부 피곤한 기색으로 신변을 정리하고 있었다.

제갈설아는 모두가 휴식을 취하며 정비하는 가운데,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천무백이 자리를 비운 사이, 척마대를 이끌어 가야 하는 건 그녀 본인이었으니까.

하여 제갈설아는 최선을 다했다.

‘혈불을 잡으셨다고 했지. 듣기론 표국에서도 떠나셨다고 했는데, 아직 어디로 가셨는지 연락은 없고.’

조만간 정의맹으로 오리라고 생각은 들지만, 도통 어디에서 무얼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하나 때때로 개방을 통해 정보를 구해갔다는 걸 듣고 있으면.

분명 어디선가 자신만의 싸움을 하는 게 틀림없었다.

“지금 이 기류가 너무 이상하지 않아요?”

“기류 말이오?”

“마인들의 움직임이 묘해졌어요.”

“음.”

황보숭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로서는 최전선에서 그냥 무작정 싸우다 보니, 그런 건 잘 몰랐다. 하나 예민한 건 의외로 당수군이었다.

사천당가 출신답게 예민한 감각을 가진 그는 제갈설아의 말에 동의했다.

“부대주 말이 맞아. 얘들, 움직임이 이상해. 일사불란하진 않아도, 너무 쉽게 지리멸렬하고 있거든.”

“그야 약한 놈들이고, 우리가 강해졌으니까 그런 거 아닌가?”

황보숭은 퍽 당당하게 말했다. 그간 숱한 실전으로 척마대의 실력은 순식간에 늘었다. 마치 둑이 무너진 것처럼 콸콸콸 시원하게 뚫린 느낌이랄까.

그 감각이 어디서 오는지 잘 알았다.

바로 천무백의 수련.

수련을 받을 땐 정작 몰랐지만, 막상 싸움에 임하니 수련의 성과가 빛을 발했다. 벽을 뛰어넘듯 실력이 쑥쑥 느는 걸 체감했다.

그래서 황보숭의 자신감은 어쩌면 당연했다. 하지만 언젠가 다가온 남궁진천이 낮은 목소리로 주의를 줬다.

“명심하라. 우린 강하지 않다. 마도의 하류 마인들만 잡았을 뿐이야. 혈불 같은 고수를 만나면 우린 모두 죽어.”

일전에 혈불에게 쫓겨 죽을 뻔한 위기를 겪은 그는 잊지 않겠다는 듯 치욕에 몸을 떨었다.

그리곤 제갈설아를 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부대주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군.”

남궁진천은 칼솜씨만큼 머리까지 명석했다. 하여 제갈설아가 말하는 게 무엇인지 단번이 이해했다.

“아무래도 놈들의 내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 같지?”

“맞아요. 마치 머리를 잃은 꼬리처럼 목적이 보이지가 않아요.”

“목적이라.”

“이전에는 마인들의 공격목표가 명확했어요. 이곳저곳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긴 했지만, 난잡하진 않았죠. 오히려 철저하게 계산된 공격만 이어졌어요. 그런데 지금은 아니에요.”

“산발적으로 벌어지거나, 우리 예상을 벗어나는, 쓸모없는 곳에 전투가 벌어지거나.”

“네. 아무래도 이 계획을 짜고 움직이던 머리가 사라진 것 같아요.”

“머리라면.”

“천광마요.”

“그 마인이 이 전투의 흐름을 다 움직였다고? 내가 듣기론 그냥 미친놈이라고 알고 있는데.”

“정확히는 천광마 곁에 머리를 쓰는 사람이 있었겠죠. 어쨌든, 마인들은 지금 혼란에 빠진 것처럼 흔들려요. 이건, 분명해요. 천광마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어요.”

그 말에 척마대의 시선이 일제히 향했다.

“문제라면…….”

“죽거나, 거동조차 못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라거나.”

듣고만 있던 황보숭이 설마하는 표정을 지었다.

천광마.

짧은 시간 동안 그의 악명은 자자했다. 벌써 그의 손아귀에 무너진 문파와 절대고수들이 몇이던가. 하물며 도저히 참지 못한 무당의 장로 셋이 추적하다가, 목만 돌아온 적도 있었다.

“그런 천광마가 죽었다고? 부대주께선 어찌 그렇게 확신을 하오?”

“……천 공자님, 아니 대주님이 그랬을 거예요.”

“대주님께서?”

“최근에 개방을 통해 천광마의 움직임을 조회했다는 얘기가 있으니까요.”

정의맹의 총군사가 무려 제갈설아의 아버지, 제갈여강이다.

제갈설아는 정의맹의 핵심 정보에 접근하기 쉬웠고, 당연히 천무백이 개방을 통해 천광마의 움직임을 알아봤다는 사실 역시 입수했다.

그 소식이 전해진 후, 거짓말처럼 마인들의 움직임이 변했다.

제갈설아가 천광마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추론을, 거의 확신하게 된 이유였다.

“맙소사. 설마 천광마도 잡았다고?”

“혈불과 귀마를 잡아 혈귀곡을 무너뜨리고, 이젠 천광마까지?”

“대체…….”

좌중이 경악에 빠졌다.

황보숭은 헛웃음처럼 말했다.

“어째, 혼자 마도랑 싸우는 거 같네.”

황보숭의 중얼거림에 모두 은연중에 고개를 끄덕였다.

독마를 죽인 게 천무백이란 소문도 돌았다. 지금까지 검후가 격살했다는 것이 중론이었지만, 최근 정의맹에 합류한 검후가 자신이 죽이지 않았음을 은근히 피력했었으니까.

그러니 사실상 천무백 홀로 네 개 종단의 종주를 격살한 것이다.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제갈설아가 손뼉을 쳐서 모두를 깨웠다.

“우선 정의맹으로 복귀해요. 아무래도,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갈 것 같으니까요.”

천광마가 죽었다면, 마도는 어떻게 나올 것인가?

아버지와 머리를 맞대고 상의해 볼 필요가 있었다.

* * *

천광마가 죽은 건 기회였다.

천무백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능허가 정양을 위해 휴식을 취해야만 하는 것과는 달리, 더 격한 싸움을 벌인 천무백은 멀쩡하게, 오히려 정력적으로 움직였다.

“하여튼, 괴물같은 양반이라니까.”

천무백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맹렬했다.

천광마의 죽음과 비광이 자리를 피했다.

이건 곧 선봉대로서 중원을 뒤집던 마도의 공격체계가 단번에 흔들린다는 뜻.

천무백은 이 빈틈을 노렸다.

“장노, 광종 소속의 광증 도진 놈들은 웬만해선 격살하시오. 새로운 마도엔 검종과 같은 검에 미친 검귀들만의 세상이 되어야 하니까.”

머리 없이 어수선한 분위기의 마도를 멸살하고, 그 사이에서 새로운 마도에 포섭할 만한 인물을 골라내는 절호의 기회였다.

천무백은 이리저리 직접 움직였다. 혼자가 아니었다. 장노가 천무백과 인연이 깊음을 간파한 귀마는 다급해졌다.

‘천하의 천광마도 잡은 양반이다! 어쩌면, 정말로 그의 계획대로 될지도 몰라!’

새로운 마도.

비록 중원을 정복해 마도천하를 꿈꾸는 거대 단일 세력은 아니더라도, 엄연히 새외문파로서 엄청난 맹위를 떨칠 건 당연한 일.

그런 신(新) 마교의 천마가 되기 위해선 귀마는 천무백의 조력이 필수적이란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물론 그 자리가 자신의 것이란 건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신만 한 실력자가 없고, 천무백과 말이 통하는 인사도 없으며, 권위와 명성을 가진 자도 없으니까.

다만 장노를 끌어들인 건.

‘아마 나와 경쟁을 시킬 속셈이겠지. 날 길들이기 위해서.’

다만 그것뿐이리라. 귀마는 신 마교의 천마 자리는 자신의 것이라 틀림없이 믿었다.

‘그래, 원한다면 기고, 구르마. 철저하게 길들여진 개새끼처럼 굴겠다. 내 욕심을 이루기 위해선.’

귀마가 눈에 불을 켜고 움직이자, 천무백의 움직임은 탄력을 받았다.

단숨에 천무백이 포섭한 마인의 숫자만 사백 명.

전체 마도의 규모를 감안하면 적은 숫자지만.

“양보다 질이지.”

하나 같이 천무백이 고른 놈들이다.

광증 따위는 없고, 광신적인 면모도 없다. 오로지 맹목적이다 싶을 정도로 검과 무도에만 취한 마인들.

강자존의 매력에 빠져 마도에 살아온 자들이다.

이들이라면 새로운 검종의 세력으로 흡수할 수 있을 터.

그렇게 천무백이 빠르게 일 처리를 하면서 점점 정상궤도에 올라오자, 모든 일을 장노와 귀마에게 적절히 맡겼다.

둘의 경쟁을 유도하는 건 귀마의 추론이 맞았지만, 이미 천무백의 마음은 결정되어 있었다.

장노가 새로운 천마가 될 것이고, 귀마는 언젠간 죽을 것이다.

“그럼 나는 이만 가 보겠소. 장노, 잘 부탁하오.”

“알겠습니다. 저, 도련님.”

“……?”

“부디 보중하십시오. 제가 마인들과 부대끼며 느낀 건, 지금의 천마는 예사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무언가 주군을 걱정하기보단, 옛날 어린 천무백을 걱정하는 노인의 눈빛 같아 천무백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걱정 마시오. 장노, 지금 걱정이 많은 건 내가 아니라, 우리가 언제 쳐들어올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을 천마일 테니까.”

천무백의 눈에 확신이 어렸다.

* * *

비광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천광마는 죽었을 것이다. 마음 같아선 곁을 지키고 싶었지만 그는 멍청하지 않았다. 천광마가 잠깐이라도 붙잡아 주는 사이, 천마에게 소식을 전달해야만 했다.

천룡검협 천무백.

놈이 예상보다 더 강력한 놈이라는 점을.

보고 느낀 점을 상세히 전달해야 한다.

때문일까.

“이, 이건.”

“쯧쯧.”

혀 차는 소리를 들은 비광은 심장이 쿵 떨어지는 심정이었다.

눈앞의 사내가 누구인가.

대장로 염왕(閻王) 군괴.

비록 한 종단의 종주는 아니지만, 마종에서도 한손에 꼽히는 절대강자.

그리고 천마를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자.

“허접스러운 수에 당했구나.”

“모, 몰랐습니다.”

“천광마는 죽었겠지. 수하만 이렇게 황망한 정신으로 살려 보낼 정도면. 그래도 그렇지, 선봉에서 싸운 놈이 몸에 추종향이 묻은 것도 몰라?”

비광은 침묵했다. 대답이 궁색해졌으니까. 자신이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깨달았다.

여기는 무려 천마가 있는 신성한 장소.

그곳의 위치가 천무백에게 발각된 것이다.

그러나 염왕 군괴는 그리 심각한 표정은 아니었다. 혀를 차며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이거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다.

어차피 놈은 찾아온다. 복마전인 여기에. 마교의 전부에.

놈은 미친놈이다. 얘기를 들어보면 확실하다. 천마를 잡겠다고 쳐들어올 놈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때, 염왕의 뜻과 통했는지 어둠 속에서 쇠를 긁는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놈을 잡아야겠다.”

듣기만 해도 온몸이 얼어붙을 것 같은 섬찟한 목소리. 비광은 저도 모르게 벌벌 떨며 부복했다. 군괴 역시 고개를 조아렸다.

“준비하겠습니다. 놈이 들어오는 즉시, 잡아 낼 수 있도록. 방심하지 않고 만반의 준비를 하겠습니다. 교주님.”

“아니, 아니. 그럴 거 없다.”

“……?”

“전장으로 간다.”

군괴의 표정이 묘해졌다. 전장으로 간다? 전장에서 천무백을 맞이하겠다는 뜻인가?

“참으로 황망한 말입니다만, 목숨을 걸고 충언을 올리겠습니다. 놈을 만만히 봤다가 덤벼든 종주들이 싹 다 죽었습니다. 전장에서 놈을 잡는 건, 이곳에서 놈을 기다리는 것보다 위험하고 더 골치 아픈 일입니다.”

“안다.”

“하면 어째서……?”

“놈은 창천검신을 떠올리게 한다.”

“……!”

“상징이자 희망이다. 그런 놈이 살아 있으면, 백도는 무너지지 않아. 하지만, 단 한 번의 결전에서, 모든 백도가 보는 앞에서 놈이 천마의 손에 죽으면.”

“……!”

그제야 무슨 의도인지 깨달은 군괴의 눈이 번쩍 뜨였다.

“단 하나의 희망이, 새로운 창천검신이, 정마대전을 승리로 만들어 낼 수 있으리라 믿었던 사람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처참하게 죽는다면.”

그렇다면.

“백도는 끝난다.”

그리고 전쟁은 끝난다.

군괴는 더는 반론하지 않고 허리를 숙였다.

“준비하겠습니다.”

단 한 번의 결전.

모든 백도와 모든 마도가 보는 앞에서 천마가 천룡검협을 잡는다.

그 대담한 계획에 군괴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마라면. 평생을 모셔 온 군천악을 무너뜨리고 저 지고한 자리에 앉은 지금의 천마라면. 충분히 가능하리라.

저번 정마대전과는 달리 말이다.

그러나 문득, 이해할 수 없는 의문이 떠올랐다.

사십 년 전, 지금의 교주는 정마대전에 없었다.

당시 교주는 군천악이었고, 그 사람을 몰아내고 자리를 차지한 게 현재의 천마.

군괴는 정마대전에서도 활약한 사람으로서 분명히 알았다.

지금 천마는 정마대전 때 없었고, 전쟁이 끝날 때쯤에 태어난 사람이란 걸.

한데.

‘어떻게 창천검신을 떠올리는 거지? 전장에서 창천검신을 본 적도 없는 사람이?’

하나 깊은 의문은 조심해야 한다.

아니, 의문 따위는 필요 없다.

‘마도 천하가 눈앞에 왔다.’

천마가 직접 나선다.

그것만으로도 사십 년 전에도 보지 못한 마도천하가 눈앞에 떠오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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