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97화>
297. 장하다, 능허야
천무백은 걸레 조각이 된 상의를 북북 찢어 상처에 동여맸다. 피를 제법 흘려서 지혈이 필요했다.
그만큼 천광마와의 싸움은 꽤 치열했다.
“기연이 아니었으면 골치 아팠겠어.”
가볍게 싸움을 복기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전신의 단전화.
이미 세 개 단전의 공존이라는 전무후무한 업적을 세웠지만, 지금 천무백은 어쩌면 역사에 또 한 번 족적을 남겼다.
상고부터 내공이란 하단전이 근본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중단전과 상단전의 개념이 생기고, 개발하는 시도가 시작됐지만, 극소수에 불과했다.
한데 천무백은 세 단전의 공존이라는 위업을 달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신의 단전화라는 개념까지 만들어 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단전이 없는 상태인데.”
단전을 심오하게 생각하지 않고 간단히 정의하면 이렇다.
내공을 담는 그릇.
한데 지금 천무백은 굳이 말하자면 단전이 없다. 외기를 어디에다 축기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천무백이 호흡을 한차례 하면.
“…….”
모든 감각이 일제히 깨어난다. 동시에 생생하게 느껴진다.
피부, 무수한 모공(毛孔)과 땀구멍까지. 주위의 외기가 피부로 스며들었고, 동시에 모든 구멍으로 발출된다.
그랬다. 천무백의 기운들은 전신 곳곳에 퍼져 있었다.
전신의 단전화.
천무백의 신체 자체가 단전으로 변해버렸다.
천무백은 쓴웃음을 지으며 천광마의 시신을 바라봤다.
어쩌면 천광마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겠지.
한참 우위를 점했다가, 천무백이 기연을 얻어 역전한 꼴이니까.
“너무 억울하게 생각하지 마라. 기연이란 건 우연이 아니라 필연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니까.”
어쩌면 천무백이 처음 선기를 몸에 담게 됐을 때부터.
지금의 결말이 정해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건 천무백이 운이 좋아서 기연을 얻어 승리를 거둔 게 아니다.
“내가 강해서 이긴 거다.”
참으로 오만하다 싶지만, 천무백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틀림없는 사실이었고, 불변의 진실이었으니까.
그때 천무백의 귓가에 능허의 불퉁한 목소리가 꽂혔다.
“끄응…… 그렇게 자아도취에 빠져 계시지 말고, 나 좀 살려 주십쇼. 주군.”
고개를 돌려보니 능허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겉으론 큰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악인봉행진에서 내공을 끌어다 쓴 건 치명적이라 몸 하나 가누지 못했다.
“살아 있네?”
“암, 그럼, 나, 능허요. 독안사 능허. 고작 그딴 놈에게 죽게?”
“아까 보니 개 맞듯이 처맞고 있던데.”
“내가 좀 봐준 거요.”
“저승차사가 보인다면서?”
“아까 어렴풋이 보였는데…… 야, 이 새끼야. 순 나쁜 새끼야. 이런 개새끼, 소새끼, 돼지새끼, 말미잘 새끼. 저리 안 꺼져? 반쯤 죽여 놓기 전에 썩 꺼져라.”
능허가 별안간 천무백을 보면서 소리쳤다.
천하의 천무백도 순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멈칫하곤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능허가 태연한 얼굴로 일변하며 말했다.
“방금 주군 옆에 저승차사가 보이길래 내가 쫓아냈습니다. 오해 마십쇼. 주군한테 한 말 아니니까.”
“…….”
천무백은 침묵한 채 능허를 쳐다봤다. 능허가 슬며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설마 죽을 둥 살 둥 싸운 하나밖에 없는 수하를 이대로 내버려 둘 건 아니시죠?”
“고민 중이다.”
“뭘요. 저 치료해 줄지, 그냥 두고 가 버릴지?”
“아니, 그냥 마저 죽여 버릴지 고민 중이야.”
능허가 넙죽 엎드렸다. 그야말로 발 빠른 태세전환이었다.
“죄송합니다. 주군. 싸우다가 놈의 마기가 제 뇌에 침투해서 잠깐 돌았나 봅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시고, 저 좀 살려 주십시오. 단전이 찢어질 것 같습니다.”
이제는 태연하다 못해 뻔뻔함을 넘어서는 모습에 천무백은 혀를 찼다.
“안 찢어져 인마, 그거 생각보다 질겨.”
어쨌든 능허는 운이 좋았다. 천무백이 대충 본 비광 역시 만만치 않은 실력자임이 틀림없었다. 천광마 곁에 있는 것부터가 그랬다.
솔직히 말해 의외였다.
“그때 귀마를 몰아붙인 것도 그저 귀마가 지친 상태여서만은 아니었네.”
“흐흐흐. 나 독안사 능허라니까.”
“그래, 너 잘났다.”
천무백은 단숨에 악인봉행진을 깨부쉈다. 전신의 감각을 제어할 수 있게 되면서, 진법을 이루는 포석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운기조식부터 해라.”
“끙.”
능허는 눈을 감고 겨우 가부좌를 틀었다. 이내 그의 정수리에서 열기가 올라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겨우 기운을 다스린 능허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끝난 겁니까?”
“천광마는 잡았지.”
“그럼 뭐 남았습니까.”
“천마와 따까리.”
“천마는 주군이 맡을 테고, 그럼 따까리는 내가 맡아야겠네요.”
“이야. 이제 자청해서 싸우겠다고 하네. 감동적이야, 아주.”
“그래 봤자 따까리들 아닙니까.”
천무백이 순간 멈칫하며 이상한 눈빛으로 능허를 쳐다봤다.
“왜 그러십니까?”
“너 천마 옆에 어떤 놈들이 있는지 모르냐?”
“그야 제법 강한 놈들 있겠죠. 그래도 각 종단의 종주들은 다 주군 손에 박살 났으니, 더한 놈들은 없지 않겠습니까.”
능허는 썩 자신감이 생겼다. 종단의 종주급을 이길 실력은 되지 않지만, 종주를 보좌하는 비광을 상대로 선전했다.
만일 악인봉행진이 아니었다면, 능허는 질 땐 지더라도 동귀어진의 수는 써먹을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천마 곁에 따까리들이 있겠지만, 뭐 종단의 종주급은 없지 않겠나.
“있다.”
“예?”
“천마는 그 위치 전에, 마종의 종주다.”
마류칠종의 근본, 마도의 탄생을 알렸던 순수한 마(魔).
바로 마종이다.
“한마디로 급이 달라.”
“어…… 급이 다르다구요?”
“강자존의 세계가 마교다.”
“예.”
“모든 명분은 그저 강하다는 점 하나로 모든 걸 퉁치는 세상이야. 그런 세상에서 여태껏 천마는 무조건 마종에서만 배출됐다.”
“……!”
그제야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은 능허의 얼굴이 굳어졌다.
철저한 강자존의 세계.
수많은 마인이 천마의 자리에 도전했지만, 마종이란 벽을 넘지 못했다.
당장 천무백의 손아귀에 들어온 혁련천강 같은 비천한 출신의 마인도 엄연히 한 타격대를 이끌고 있을 정도로, 출신 성분 따위보단 ‘실력’을 중시하는 게 바로 마교다.
그런 마교에서 천마가 여태 마종에서만 출현했다는 건, 마종의 영향력이 아니라 순전히 마종 마인들이 강하다는 결론이 도출될 뿐이었다.
“그러니 놈의 수족들이 어디 약하겠냐?”
“어…… 그래도 종주급은 안 되겠지요?”
종주급만 아니면 능허는 제법 자신이 있었다.
상대를 완전히 이기지는 못해도, 거하게 한판 붙을 수 있으리라고.
천무백이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야.”
“예?”
“천광마나, 독마나, 혈불이나 귀마나. 얘들이 왜 땀 뻘뻘 흘리면서 맨 앞에서 싸우다가 나한테 다 깨진 거 같냐? 본래 가장 강한 놈은 뒤에서 거드름 피우고, 애매하게 강한 놈들이 앞에서 싸우지 않냐?”
“…….”
“잘 기억 안 나나 본데. 저 종주들의 또 다른 직함은 마교 장로야. 장로. 근데 장로들이 종주들 일곱이 전부일 거 같아? 이 거대한 세력을 이끄는데? 내가 왜 천광마가 마지막에 제안한 거에 콧방귀 낀 줄 알아?”
천광마의 마지막 제안.
자신을 택하면 마도의 절반을 이끌고 내분을 일으킬 수 있다고.
천무백은 그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소리인지 잘 알았다.
“아무리 잘 쳐 봤자 2할이라도 자기 세력으로 만들면 다행인 거다.”
“그럼, 뭐 어떡합니까?”
“백기 고놈이 돌아오면 어느 정도는 될 거다. 내가 천마를 잡는 사이, 백기가 나머지 맡아 주면 되거든.”
검존이 있으니 퍽 든든했다. 적어도 천무백이 확실히 믿을만한 실력자이자 수제자였고, 더구나 당대의 천하제일인 아닌가.
“그럼 저는요?”
“넌…… 음. 대충 상대 알아서 잘 잡아. 괜히 죽지 말고. 죽었다간 설영이가 날 어떻게 볼지 엄두가 안 난다.”
“거참. 이래 봐도 제가 한 쓸모 합니다. 저 무시하지 마십쇼.”
능허가 그리 말하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투명한 가루가 툭툭 떨어졌다. 손바닥에 묻어 있는 가루를 본 천무백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야, 너 그거?”
“흐흐. 놈이 도망칠 때 묻혔습니다. 이제 어딜 가도 쫓아갈 수 있습니다. 만리추종향이니까요.”
“그건 어떻게 구했어?”
“주군네 표국 저력 무시하지 마십쇼. 이젠 중원의 온갖 물산이 통하는 곳입니다. 싸움에 나서기 전에 부국주님께 말씀드리고 갖고 왔지요.”
천무백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만리추종향.
자신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물건을, 능허가 챙겼다는 사실에 불쑥 감탄이 들었다. 아니, 단순히 챙긴 것도 챙긴 거지만, 몸 하나 가누기도 힘들어 당장 빈사 상태에 빠질 위기에서 비광에게 추종향을 뿌려 두다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싶지만, 천무백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놈이 어디로 가는지 알자마자 뿌렸구나?”
“흐흐. 천광마 놈이 천마를 찾아가서 소식을 전하라고 할 때, 머리가 번쩍했죠.”
비광은 천마에게 간다. 그리고 추종향은 비광에게 뿌려졌다.
그러니.
“천마의 위치를 알았다, 이겁니다. 주군.”
천무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능허의 어깨를 두들겼다.
“장하다. 능허야.”
“으하하하, 감사합니다.”
진심이 느껴지는 칭찬에 능허는 저도 모르게 대소를 터뜨리며 허리를 숙였다.
그러다가 문득 묘한 기분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세 살배기 어린애도 아니고. 저 양반한테 칭찬 한마디 들었다고…….’
새삼 자신의 처지에 묘한 감정이 들었다.
“수고했다. 놈이 어디 있는지 아니까. 이젠 내가 유리하다.”
“예?”
“백기는 대막에 가 있으니까, 내가 그전에 천마를 잡아버리면 그만 아니겠어? 백기 고놈이 벌벌 뛰겠지만 별수 있나.”
그리 말하며 천무백은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먼저 잡는 놈이 임자지.”
탐스러운 먹이를 내줄 수야 없지.
* * *
유백기는 난처함을 감추기 어려웠다.
산전수전 다 겪으며 살아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참으로 괴팍한 스승의 곁을 지켰으니 어떤 일이 닥쳐도 유백기는 흔들리지 않았다.
홀로 새외에서 마도와 쫓고 쫓기는 싸움을 벌일 때도, 굳건했다.
그런 유백기가 지금은 다소 난감함을 느꼈다.
“불가하다. 그분이 아닌 이상, 우리는 나서지 않는다.”
어색한 중원 말이지만 알아듣기 어렵지는 않았다. 상대는 중원인이 아니니, 말이 통하지 않으리라 생각한 것에 비하면 다행이었다.
다만 대화 내용은 긍정적이지 않았다.
“내 스승은 창천검신이오. 나는 그분의 직전제자이며, 그분의 명에 따라 그대들을 청하러 왔소. 스승께서 말씀하시길, 태초의 맹약을 따르라고 하셨소.”
“안다. 마지막 텡그리의 제자인 건 안다. 하지만 마지막 텡그리께선 다시 하늘 위로 가신지 오래다. 새로운 텡그리가 알을 깨고, 불멸의 육체로 돌아오셨 소식은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유백기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텡그리.
저들의 신앙이자, 하늘이고, 곧 천신(天神)이다.
“불멸하며, 영원하며, 매번 탈피하여 새로운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시는 텡그리가 우릴 찾는다면, 우리는 당연히 달려간다. 그곳이 세상의 끝이라 하더라도. 하지만, 그대가 새로운 텡그리의 명을 따라 우리를 찾아왔다는 건 믿기 어렵다.”
“말했잖소. 난 그분의 제자고, 그분이 그대들을 강렬하게 원한다는 것을. 그분이 전하는 증표도 보여 줬잖소?”
“…….”
그제야 터번을 둘러싼 사내는 침묵했다.
만일 천무백이 전해 준 증표가 아니었다면 애당초 이렇게 마주 앉아 대화조차 못 했으리라.
상대는 대막의 사람이었고, 중원 무림이 아니라 대막에 저들만의 하늘 아래 살아가는 존재였으니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렇다면 가장 위대한 전사들을 데리고 그대를 따라가겠다.”
“정말이오?”
“다만, 그대에게 명령을 내린 이가 새로운 텡그리가 맞는지 우리가 직접 확인할 것이다. 만일 텡그리가 아니라면…….”
순간 주위의 공기가 짓눌리듯 무거워졌다. 유백기는 감탄과 답답함을 느꼈다.
약간의 파란 빛이 감도는 사내의 깊은 눈동자가 유백기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대와 그대에게 명령을 내린 텡그리를 사칭한 자는 우리 손에 반드시 죽는다.”
“…….”
“초원과 대막을 오가는 텡그리의 수호자, 늑대로서 말말하는 바다.
“……알겠소.”
유백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들을 데리고 중원으로 돌아간다. 천무백의 명령이었지만 속이 편치 않았다.
중원오재(中原五災).
등장만 하면 곧 중원에 재앙을 일으키는 무시무시한 존재들.
눈앞의 평범한 이방인이 바로 그중 하나다.
‘대막의 늑대들을 데리고 중원으로 돌아가야 한다니. 이거 참.’
물론 저들이 말한 텡그리가 스승인 천무백이 맞으면.
저들은 중원의 재해가 아니라, 마도의 재해가 될 것이다.
유백기는 시선을 동쪽으로 돌렸다.
‘스승님. 과거의 유산까지 동원하셔서 정말 이 싸움을 끝내실 생각이시군요.’
과거의 유산까지 동원하는바.
유백기는 침을 꿀꺽 삼켰다. 사십 년 전, 정마대전에서도 천무백은 대막의 늑대들을 부르지 않았다. 아니, 지금에서야 처음 알았다.
대막의 늑대들과 천무백과의 관계를.
지금 대막의 늑대들까지 부르고 있다.
그야말로 전력(全力).
결전이 다가오고 있음을, 유백기는 온몸으로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