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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재생-296화 (296/318)

<검신재생 296화>

296. 칼끝에 무엇을 품느냐

내가고수는 단순히 압도적인 내공을 가졌다고 붙여지는 칭호가 아니다.

오히려 내공이 부족함에도 내가고수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내기의 완벽한 수발과 통제, 그리고 운용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고수.

그런 면에서 천무백은 단언컨대 고금제일(古今第一) 내가고수다.

수십, 수백의 전생.

거듭하고 또 거듭하며, 무림의 태동기, 내공심법의 탄생부터 내기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운용하는지 온몸으로 부딪치며 깨닫고 경험으로 쌓아 온 천무백.

아무리 천광마가 강하다고 한들, 그 점만큼은 천무백을 능가할 수도, 범접할 수도 없다.

까가가가가강!

온몸의 감각이 활성화된다. 이건 단순히 예민한 감각이 아니다.

천무백은 흡사 황홀경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마치 세상 전부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기분에 휩싸였다.

세상 만상의 감각이 피부로, 귀로, 코로, 눈으로, 입으로 느껴진다.

전신에 내기가 실린다.

문자 그대로다. 단순히 내기를 사용할 때 온몸에 내기를 싣는다는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전신에 기운이 실렸다.

피부의 작은 숨구멍까지 모조리, 전부 다.

기는 감각을 몇 배는 예민케 하는 힘이 있다. 무림 고수들이 하나같이 뛰어난 감각을 소유한 이유다.

한데 천무백의 전신에 기맥이 흘렀다. 하단전, 중단전, 상단전의 경계를 넘어서 하나의 단전.

천무백의 신체, 그 자체였다.

때문일까.

천광마의 검이 보였다. 그의 움직임이 보였다. 아니, 보인다기 보단.

‘그냥, 그래.’

딱히 뭐라 설명할 방도가 없다. 어쩌면 미래예측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천광마의 움직임, 그의 행동반경, 모든 것이 머릿속에서 저절로 그려졌고 천광마는 그대로 행동했다.

“으으윽.”

천광마의 꽉 앙문 잇새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에 경악이 담겼다.

악인봉행진이 점점 올가미가 되어 천광마의 목을 조였다.

천광마의 내기를 증폭시켜 미증유의 힘을 냈지만, 이젠 천무백의 일월기도 더 거대해지고, 더 강력해졌다.

지금까지 천무백은 최대한 절제하며 내기를 운용했지만, 이젠 아니었다.

그랬던 이유가 뭐겠는가.

세 단전을 각기 통제하니 천하의 천무백이어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그러나 세 개였던 단전이, 세 종류였던 기운이, 이젠 하나가 됐다.

천무백 자체가 단전이 되었고, 천무백이 내쉬는 숨결이 일월기(日月氣)가 됐다.

이 순간, 천무백의 통제력은 극에 달했으며, 아무리 악인봉행진에서 수련을 거듭한 천광마의 통제력조차도 뛰어넘었다.

그러니 답은 뭐겠는가.

어떻게든 바뀌어 가는 상황을 다시 뒤집으려는 천광마의 노력은 계속됐다.

각법, 장법, 조공(爪功), 음공, 지공(指功)…….

그야말로 천광마가 평생을 살아오며 쌓아 온 무학의 정수(精髓)들이 쏟아졌다.

하나 그건 스스로 올가미에 목을 넣는 행위였다. 증폭은 계속되고 있었고 모든 무공을 쏟아부으며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즉, 폭주했다.

그렇게라도 공격이 성공했으면, 그래, 차라리 동귀어진의 한수였으리라.

그러나 천무백은 모조리 파훼하고, 검을 찔렀다. 검끝이 천광마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천광마는 신음을 토하며 뒤로 훌쩍 물러났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천광마가 소리쳤다.

“비광! 당장 여기서 나가! 이곳에서 있던 일 전부를 천마께 모두 전하라!”

그야말로 피를 토하는 절절한 외침.

비광은 그제야 상황을 확인하곤, 입술을 깨물고는 미련 없이 능허와의 싸움을 중단하고 훌쩍 떠났다.

천무백은 그를 쫓지 않았다. 새삼 천무백의 몸 상태도 썩 좋은 편은 아니었으니까. 곳곳에 여러 충격으로 찢어진 상처가 그득했고, 핏물이 짙게 배어 나와 전신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더구나 천광마는 아직 살아 있고, 증폭되어 폭주까지 할 기운마저 다스려야 하니까.

대신 천무백은 천광마를 바라봤다. 천광마는 다소 회한(悔恨)이 섞인 시선으로 천무백을 노려봤다.

“…….”

자신이 이길 수 없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그의 얼굴엔 회한, 분노, 두려움, 안타까움, 반발심, 온갖 감정이 휘몰아쳤다.

굳이 선안으로 감정의 색채를 보지 않아도, 보였다.

천무백이 말했다.

“항복해도 살려 주진 않아.”

“애석하군. 천무백. 내가 다시 제안하마.”

“…….”

“귀마 대신 나를 택하라.”

천무백은 짧게 웃었다.

이거, 끝까지 미친놈일세.

“항복해도 안 살려 준다니까?”

“항복이 아니다. 협력제안이다. 나와 손을 잡자.”

“…….”

“나는 너에게 패배했다. 너의 뜻에 천마가 되더라도,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나서면 현재 마도의 절반이 나를 따를 것이다. 네가 원하는 마도의 내분이 발생한다는 이 말이다.”

“그거 꽤 솔깃한 말이군.”

말은 그리했지만, 천무백은 별 감흥 없는 표정이었다.

“그러면 이 정마대전도 무위로 돌아간다. 내전이 발생할 테니까, 백도와 싸울 수는 없지. 우리는 그럼 중원을 떠나 다시 새외로 갈 것이다. 거기서 우리끼리 싸우겠지.”

천광마의 눈이 희번득 번뜩였다.

천무백이 피식 웃었다.

“지랄.”

“…….”

“네가 나서면 마도의 절반이 너를 따른다고? 어디서 구라를 까. 네가 배반했다고 하면 네 직속 수하도 절반 이상이 널 죽이려고 달려들지 않겠냐?”

“…….”

“너보다 더 무서운 놈이 천마고, 천마가 멀쩡히 살아 있는데. 네가 뭐 수하들에게 인망이라도 있어? 미친놈 주제에”

“…….”

“왜 살려 달라는 말을 그리 뱅뱅 돌려서 말해? 사내 자식이 말이야.”

참으로 처절하다 느껴질 정도로 지독한 조롱에 천광마는 허탈하게 웃었다. 얼마나 하늘을 올려다봤을까. 별안간 고개를 내리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살려다오!”

“응, 싫어.”

천무백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천광마는 귀마와는 다른 놈이다.

통제할 수 없고,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도 없다. 미치광이는, 미치광이일 뿐이다.

“역시 그런 건가.”

천광마 역시 기대는 없었는지 그저 웃음을 터뜨렸다.

“아쉽군. 좀 일찍 만났다면, 내 더 미치기 전에 무(武)를 논할 수 있었을 텐데. 이봐, 천무백. 내 죽기 전에 하나 물어봐도 되나?”

“말해. 그게 유언이라면.”

“너는 왜 그렇게 강하지?”

“…….”

“나는 미친놈이지만, 그래도 무인이야. 솔직히 짜증도 나는군. 평생 수련했는데, 검존 하나 못 따라간다고 자책했던 게 나야. 그런데 넌 검존보다 더 해. 도대체 뭐야. 영약? 나보다 많이 먹었을까? 절세신공? 내 무공 역시 강호를 통틀어 최강이다. 그런데 어떻게, 너는 왜 이리도 강하단 말이냐!”

천무백의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스쳤다.

뭘 말해 줘야 할까.

그러다 문득, 지금까지 공방을 나눴던 천광마의 검이 불쑥 떠올랐다.

‘…….’

미치광이의 검.

그리고……

“네 검은 특색이 없더군.”

“……!”

천광마의 신형이 일순 흔들렸다. 별안간 그는 입에서 시커먼 핏물을 왈칵 토했다.

천무백과 공방으로 입은 내상과 악인봉행진으로 증폭을 거듭하다 폭주한 내기가 끝내는 지금 주화입마에 도달한 것이다.

하나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천무백의 지적이 예상치 못한 충격이었던 탓이다.

“내 검에 특색이 없다고……?”

떨리는 목소리. 그 짧은 사이에 더 늙기라도 한 걸까. 푸석푸석해진 회색빛 머리칼 사이로 천광마의 눈동자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평생 쌓아 온 무학에 자부심은, 설령 그가 미치광이라도 당연히 갖고 있던 터.

상대가 그걸 부정한다. 아니, 차라리 부정이 낫지 이건 숫제 조롱이다. 하나 천무백은 천광마의 초라한 모습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기억에 남지 않아. 어마어마하게 증폭된 내공의 힘으로 몰아붙이고, 경험이 쌓여 완숙한 검이었지만 그뿐이다. 기억에 남지 않는 검. 그게 네가 평생 쌓아 온 무학이다.”

“우웨엑!”

천광마는 다시 한번 파리해진 낯빛으로 피를 왈칵 토했다.

주화입마에 빠진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나, 날 모욕하지 마라. 내 인생을, 내 강호를…….”

“모욕? 말해 봐. 네놈 칼끝엔 무엇을 담았지?”

“……!”

천광마는 불쑥 혐오스러운 감정이 들었다. 죽기 직전 자신의 인생을 모욕하는 천무백에 대한 증오? 아니다.

저 질문에, 어찌 보면 참으로 간단한 질문에 답이 떠오르지 않는 자신의 모습으로부터 지독한 혐오감이 들었다.

내 칼끝에 무엇을 담았냐고?

무엇을 품었냐고?

“그야……그야…….”

답이 나오지 않는다. 천무백이 냉혹하게 말했다.

“아무것도 없다. 살기만 탐하는 병기. 딱 그뿐이다. 물론 그것이 검의 본질이라지만. 네가 쌓은 무학이란 것이, 너의 강호란 것이 단지 그것뿐이라는 것이다.”

“…….”

“강호엔 수많은 고수가 존재했지만, 시간이 지나 그 이름을 기억하는 절대고수는 그리 많지 않다. 심지어 이름이 내려오는 절대고수를 이긴 더 강한 고수들조차, 이젠 잊혀진 이도 너무나 많다. 그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냐?”

“…….”

천광마는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천무백을 쳐다봤다. 자신이 생각하는 답이 아니길 바라며.

“칼끝에 아무것도 담지 못하고, 뭣도 품지 못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강했지만, 역사는 기억 못하지. 그것이 네가 쌓은 무학이고, 네가 살아온 강호다. 단지 넌 미치광이일 뿐이야.”

심장을 이토록 잔혹하게 칼로 후빌 수 있을까.

천광마는 비틀거리다가 이내 허리를 뒤로 젖히며 광소를 터뜨렸다.

“하하……, 으하하하!”

얼마나 웃었을까. 웃음이 멎은 천광마의 붉게 충혈된 눈이 천무백을 노려봤다.

“그래서, 그래서 넌 칼끝에 무엇을 품었느냐. 무엇을 담았기에 감히 그딴 말을 본좌에게 해? 본좌의 강호를 모욕해?”

“쯧. 꼭 말로 하면 못 알아듣는 것들이 자존심은 더럽게 쎄요.”

천무백은 혀를 쯧쯧 차며 검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검끝에 일월기가 바람처럼 스며든다.

천무백이 표정을 굳히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봐라. 볼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리고 휘둘렀다.

순간, 천광마는 세상이 시커멓게 보였다. 온 세상이 어둠에 잠기고, 천무백의 검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지독하 어둠 속에서, 빛 한 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천무백의 검이 유일하게 빛났다.

스스로 빛을 내는 게 아니다.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해가 떠 있는 동안에도 달은 떠 있다고. 다만 보이지 않을 뿐이라고.

역시 마찬가지, 달이 떠 있는 동안 세상 어딘가에는 해가 떠 있다고.

해와 달은 서로 양립하는 게 아니다.

공존한다.

천무백의 검이 그랬다.

어둠 속에서 태양처럼 번쩍였다. 달이 지배하는 어둠에서 공존했다.

“아……아.”

보였다. 저 칼끝에 무엇이 담겼는지.

일월(日月).

해와 달.

이 세상의 전부.

천광마의 눈빛에 희열이 차올랐다.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삶의 마지막, 강호의 끝에서 그는 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칼끝에 천하를 품었구나.”

이것이, 강호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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