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95화>
295. 이 구역의 미친놈
천무백은 천광마의 가슴팍에 칼날 같은 강기를 뿌렸다. 묵빛의 검신을 휘감은 일월기가 일직선으로 공간을 절단했다.
천광마는 있는 힘껏 허공으로 뛰어올라 피했다. 본능적으로 호신강기 따위로 막을 수 없는 공격임을 깨달은 것이다.
동시에 천광마의 반격이 이어졌다.
물 흐르듯이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 피함과 동시에 반격.
당황하지 않고 틈을 발견하자마자 저돌적으로 강기를 쏟아냈다.
그야말로 집요함이 만들어 낸 공격.
하나 천무백의 시야는, 안계(眼界)는 단순히 동공의 범위를 넘어섰다.
악인봉행진.
내기를 증폭시켜 끝내는 폭주하게 하여 주화입마에 빠뜨리는 극악의 봉인진.
만일 폭주만 안 하게끔 제어할 수 있다면?
그런 관점에서 천광마가 악인봉행진을 이용했지만, 엄청난 통제력을 가지고 있는 건 비단 자신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천광마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천무백은 지금 이 순간, 증폭되는 내기를 최대한 제어했다.
이미 혈불을 상대할 때 그 위력이 입증된 일월기다.
그 대단한 혈불을 도주케 한 일월기가, 여기서 증폭됐다.
눈에 담겨진 기운은 그의 시야를 수배, 수십 배로 범위를 넓혔다.
단지 범위만 넓어진 게 아니다.
동체시력(動體視力) 역시 확장됐다. 천광마의 조그마한 움직임, 역동적으로 꿈틀거리는 근육의 작동 과정, 몸이 틀어지는 방향, 내기가 쏠리는 부위까지.
모든 일련의 과정이 천무백의 눈으로 읽혔고, 머릿속에서 분석됐으며, 결론을 내렸다.
결론은 곧장 긴밀하고도 신속한 행동으로 이어졌다.
천무백의 철신고검이 정확하게 천광마의 기습적인 공격을 쳐 냈다.
곧장 천광마의 오른발이 불쑥 솟구치며 가슴을 노렸다.
천무백이 검을 잡지 않은 왼손을 휘둘렀다. 넘실거리는 일월기가 천광마의 발을 그대로 휘감았다.
“……!”
참으로 기묘한 감각에 천광마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 무슨 개같은……!’
처음 느낀 감각은 뜨거움이었다. 마치 용암 속에 살이 닿은 것처럼, 뼛속까지 전부 타다 못해 녹아 버리는 기분이었다.
무엇인지 잘 안다.
저 증오스러운 소림이나, 무당의 말코 놈들이 다룬다는 항마기(降魔氣).
마공에 치명적인 상성.
그래, 여기까지 이해됐다. 이런 항마기니, 지금껏 마도를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둔 것이겠지.
그러나 이어지는 감각에 천광마는 기함했다.
‘냉기?’
지독한 냉기가 천광마의 다리를 꽁꽁 묶었다.
항마기에 이어진 극음지기. 항마기는 마기를 불태운다는 점에서 극한의 양기라고 볼 수도 있다.
음기와 양기가 하나의 기운에 성립하는 괴변에 천광마의 낯빛이 딱딱해졌다.
우두둑.
천광마의 다리에서 섬찟한 소리가 들렸다. 일월기로 꽉 붙잡힌 발을 억지로 빼내며 뼈가 사정없이 부러지는 소리였다.
하나 광천마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검이 한차례 미끄러지는가 싶더니 천무백의 명치를 노렸다
둘의 사이가 워낙 가까웠던 터.
천무백 역시 일월기를 거둬들이며 막았다.
꽈강!
두 검이 요란하게 부딪치는 순간, 천광마의 눈이 번뜩이더니 어마어마한 마기가 들이닥쳤다.
일종의 침투경이었다.
철신고검의 검신을 타고 손목, 팔뚝, 어깨, 가슴, 단전.
파도처럼 밀려오는 기운.
외상이 아닌 내상을 입히겠단 의도. 재빠른 판단, 합리적인 실천이다. 악인봉행진에서 내상을 입는다면 그거야 말로 치명적이니까.
천무백은 내부에 벽을 세웠다.
꽝!
일월기와 마기가 부딪치면서 강렬한 충격파가 터졌다.
천무백은 몸을 훌쩍 뒤로 날려 충격을 최소화했다.
몸을 띄우며 뒤로 피함과 동시에 천광마가 몸을 날리듯이 칼을 휘둘렀다.
천무백 역시 검을 휘둘러 막고, 왼손을 뻗어 장력을 쏟아 냈다.
콰아아아앙!
귀청을 때리는 굉음과 귀가 먹먹해지며 감각이 일부 차단되는 느낌이 전달된다.
천무백은 빠르게 몸 상태를 점검하고 확인했다. 다행히도 천광마의 침투경은 큰 피해를 주지 못했다. 다만 충격을 최소화했다 하더라도, 완전히 무위로 되돌릴 수는 없었다. 어깨에서부터 손목까지 피부가 곳곳이 찢어졌다. 어깨부터 손끝까지 피가 흥건했다.
천광마가 혀를 내둘렀다.
“이거, 악인봉행진 없이 싸웠으면 영락없이 내가 뒈졌겠군. 인정하지. 너 강하다.”
“마치 악인봉행진이 있어서 네가 이길 것처럼 말한다?”
“너도 알 텐데. 지금 기운 다스리느라 아주 죽겠지? 평소 수련의 성과다. 그러니 왜 그리 수련을 게을리 했누. 어린놈이. 잉, 쯧쯧.”
“난 악인봉행진서 수련하는 미친놈이 아니라서.”
천무백이 슬쩍 뒤를 돌아봤다. 비광을 상대하는 능허는 고전하다 못해 위기에 몰리고 있었다. 내공을 최대한 사용하려 하지 않으려 해도, 싸움이란 게 어쩔 수 없는 법.
만일 악인봉행진이 아니었다면 비등한 싸움이었으리라.
천무백이 말했다.
“능허야. 얼마나 버틸 수 있냐?”
“어, 글쎄요. 저 눈앞에 저승차사가 아른거리는데, 한번 물어볼까요?”
“입은 살아 있는 걸 보니 좀 더 버티겠네. 걱정 마라, 곧 끝내마.”
끝내마, 라고 말을 끝내는 순간 이미 천광마의 검이 얼굴을 찌르고 있었다.
“싸움 중에 한눈을 파나?”
“눈이 두 갠데 한눈은 팔아도 돼지, 병신아.”
천무백이 칼을 수직으로 세워 막으며 이죽였다.
그러나 밖으로 드러나는 현상은 명백했다.
까가강!
천무백은 조금도 놓치지 않고 천광마의 검격을 쳐 냈다.
하나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 있다면 눈치챘으리라.
천무백이 퉁겨 내는 속도가 점점 미세하게 느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 내공이 증폭되니 그야말로 미증유네. 미증유야.’
솔직히 말해 지금 천광마가 쏟아 내는 내공은 인간의 것으로 볼 수가 없었다.
반면 천무백은 최대한 세 기운을 동시에 통제하다보니 천광마만큼의 위력을 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경악하는 건 천무백이 아니라 천광마였다.
‘이거 악인봉행진이란 도박수가 아니었다면 내 목은 진즉에 잘렸을 것이다.’
증폭된 내공, 자유로운 운용으로 밀어붙였지만, 검법으로서, 그리고 무학의 깊이로서 상대를 압도하지 못함을 깨달았다.
‘그렇다 해도, 이건 결과가 자명한 싸움.’
이대로 싸움이 이어진다면 천무백은 결국 주화입마에 빠질 것이다.
자신은?
‘나도 모르지. 설마 이렇게까지 놈이 강할 줄은 몰랐지만.’
원래 계획이었다면 진즉 천무백을 압도적으로 박살을 내고 몸을 다스렸으리라.
하나 이대로라면 자신 역시 성치 않으리라.
때문에 천광마는 더욱 더 굳게 마음먹으며 눈을 번뜩였다.
‘반드시 여기서 놈을 잡는다! 놈이 검존하고 손 맞춰서 협공해 온다면 누가 막으랴!’
천무백 역시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을 거듭했다.
슬쩍 시선을 돌리니 능허가 제법 괜찮은 공격을 한두 번 먹였지만, 거의 빈사 상태에 빠져 쉽지 않아보였다. 그러나 거기에 신경 쓸 상황이 아니다.
‘솔직히 예상 밖이긴 했어.’
상대의 수준이 절대 낮지 않다는 점이 문제였다.
당장 이 싸움을 끝낼 묘책이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놈에게 약점은 보이지 않았고, 시간이 흐를수록 천무백에게 유리할 건 없어지니까.
천무백은 방어에 집중하며 생각하고 또 고민했다.
심리전? 미친놈에게 심리전을 걸어 봤자지.
머릿속 여러 무공이 오갔다.
문득, 천무백은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설마 이 나이 먹고, 그러니까 이렇게 전생을 거듭하고 주화입마에 걸릴 위험에 처할 줄은 몰랐지만…….
일단 어떻게든 타개하려면 통제를 하려고 노력해야겠지.
고민하고 거듭 고민한다. 타개책을 찾아, 묘수를 찾아, 방법을 찾아.
그러다 문득, 천무백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일전에 자신의 몸에 변화가 있었다.
세 가지 기운을 외부에서 합쳐 일월기로 다루다보니, 단전에도 그 희미한 흔적이 남아 있던 것.
‘그랬지. 상단전의 항마기가 하단전에 극소량이나마 침투해 있고, 극음지기도 상단전에 아주 극소량이 머무르고.’
천무백도 보지 못한 기이한 현상. 당연히 기운이 충돌해서 단전 내부가 뒤집히며 주화입마에 걸려야 하건만. 각기 다른 단전에서 다른 기운이 조금이나마 공존하고 있는 지금의 몸 상태.
천무백의 머리가 번쩍였다.
천광마는 미친놈이다
그리고 미친놈을 상대하려면.
‘더 미친놈이 되어야 한다.’
판단은 정확하게, 결단은 신속하게.
천무백은 이를 악물었다.
웅웅웅웅웅!
천무백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정신을 또렷이 집중했다.
상단전의 문이 열리고, 중단전이 열리고, 하단전이 차례대로 열린다.
세 단전이 찢어질 듯이 완전한 개방(開放).
단언컨대 천무백도 해 본 적 없다. 수련에서 해 보지 않고, 곧장 실전에 적용하는 건 무엇이든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나, 때론 도박수를 던져야 한다. 천광마가 악인봉행진이라는 도박수를 던진 것처럼.
‘이거 참, 오랜만에 심장 쫄깃해지네.’
미친놈을 상대로 이기려면 더 미친 짓을 한다. 그것이 골자였다.
웅, 웅, 웅.
경천혼공이 진동하고, 극음지기가 진동하고, 심장이 박동하며 선기를 쥐어짜 낸다.
천하의 천무백의 통제력으로도 천광마에게 밀리는 이유?
세 단전의 기운을 각지 통제하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 기운을 아예 단전에서 하나로 합쳐 통제한다면?’
지극히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불가능’이다.
그러나 천무백은 일전에 하단전에 항마기가, 상단전에 극음지기가 극소량이나마 공존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실낱같은 가능성을 붙잡았다.
고도의 집중력이 동반되어서 그럴까.
정수리가 타올랐다. 아니, 온몸이 타오르듯이 뜨거워졌다.
세 기운이 각기 다른 단전으로 침투한다. 섞이고 또 합쳐지면서.
오히려 너무 원활했다. 분명 태생부터가 다른 단전에, 다른 심법에 다른 기운이건만.
마치 헤어진 가족이라도 만난 것처럼 기운들은 기세 좋게 섞여들었다.
여태껏 천무백이 일부러 막은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게 가능한 이유. 바로 암천진의 기운이었다. 천혜의 자연기가 모두 집중된 기맥으로 유지하던 암천진의 기운으로 제 몸의 기경팔맥을 깨끗이 씻어 내 대주천을 수번, 수십 번 해내지 않았던가.
그래, 그것이 사전 청소나 다름없었다. 길을 확장하고, 튼튼하게 두들기고, 매끄럽게 닦은 것이다.
말 그대로 거듭된 기연.
천무백의 몸 상태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흐름을 읽은 것일까.
천광마의 낯빛이 일순 새하얘졌다.
그의 검이 현란하게 춤을 추며 쏟아졌다.
천무백 역시 맞받아쳤다.
“……!”
천광마의 동공이 거세게 진동했다. 찰나에 서로 오간 공방은 무려 이십 합.
이십 합이 오가면서 천광마가 느낀 건 격렬한 위기감이었다.
수비일변도였던 천무백의 검이 점점 버거워지고, 빨라졌다. 압박을 퍼붓던 천광마는 어느새 오히려 자신이 뒤로 밀려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역설적으로 천광마는 천무백을 도와줬다.
외부의 적이 나타나면, 내부는 단합하는 법.
세 단전의 세 기운들은 외부에서 격렬한 충격이 전해지자, 더 빠르게, 더 격렬하게, 그리고 더 확실하게 뒤섞였다.
여태껏 천무백은 세 기운을 각기 통제하며, 외부에서 합쳐 일월기로 만들어 냈다.
그러나 이제는.
우우우우.
천무백의 주위로 일월기가 넘실거리며 흘러나왔다.
상단전, 중단전, 하단전.
항마기, 선기, 극음지기.
그 모든 것들이 하나가 되었다. 천무백의 내부에서.
아니, 단전이란 게 의미가 있을까.
천무백, 그의 모든 것 자체가 단전일진데.
손가락에도, 발가락에도, 머리칼에도, 복부에도, 가슴에도.
모든 곳에 기맥이 모인다.
천무백은 희미하게 웃었다.
껍질을 깨고 탈피(脫皮)하려면.
때론 미쳐야 하는 법.
천무백이 낯빛이 하얗게 질린 천광마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이 구역의 미친놈은 나야. 이 새끼야.”
누구 앞에서 주름을 잡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