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93화>
293. 가장 늙었거든, 내가
암천진이 깨진 순간, 천무백은 천광마를 느끼고 있었다.
‘그건 놈도 마찬가지겠지.’
천무백은 평소처럼 자신의 존재감을 죽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최대한 과시했다.
‘숨바꼭질은 귀찮거든.’
놈이나 자신이나.
그만한 실력자가 마음먹고 몸을 숨기면 찾기란 요원하다.
암천진을 파훼했다고 해도 말이다.
그래서 존재감을 아낌없이 드러내며 걸었다.
발자국 한 걸음, 한 걸음에 담긴 기운이 대지를 타고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갔다,
다행히 천광마도 천무백의 생각대로 움직였다.
도망치지 않는다.
오히려 빠르게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거대한 기운. 건조한 황야의 돌풍처럼 한없이 거칠다.
역시 보통이 아니다.
암천진이 깨지면서 주위의 기운이 엉망으로 뒤섞이는 가운데.
천무백이 내뿜는 기세를 읽고 정확히 위치를 파악해 달려오고 있다니.
“능허야.”
“예.”
“준비해라.”
능허의 눈이 동그래졌다.
“제가요?”
왜 내가 준비를 해? 싸움은 자기가 할 거면서?
“한 놈 더 있다. 내가 천광마 잡을 테니 네가 나머지 한 놈 잡아.”
“하. 편하게 가려나 싶었는데.”
“내가 명색이 주군인데, 설마 싸우는 동안 싸움 구경이나 하려 한 건 아니지?”
“설마요.”
능허는 태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째 갈수록 뻔뻔해.
천무백은 고개를 돌려 안력을 돋궜다.
저들의 신형이 어렴풋이 보였다. 아마 저들도 지금 천무백을 보고 있으리라.
천하의 천무백도 겨우 형체만 알아볼 정도로 먼 거리였지만, 서로 대화를 할 정도로 가까워지기까지는 순식간이었다.
맞닥뜨린 천광마는 비교적 평범한 인상이었다.
주위로 넘실거리는 지독한 투기와 살기, 그리고 마기가 아니었다면.
어디 인상 더러운 나무꾼처럼 보일 얼굴이었으니까.
하나 보는 순간 전신을 억누르는 강렬함이 전해졌다. 타오르는 것처럼 보이는 눈빛 속에 담긴 냉혹함, 그리고 숨겨진 광기에서 언뜻 젊은 시절이 보였다.
‘고놈 맞군. 하여간 곱게 늙은 놈이 없단 말이야.’
천무백은 걸음을 멈췄다.
천광마가 천무백을 노려보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너냐?”
맥락 없는 질문.
누구냐도 아닌, 너냐니. 한데 천무백은 그런 화법이 은근히 편했다.
“그래, 나다. 새끼야.”
천광마의 얼굴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어린놈이 예의가 없구나. 백도에선 강호 선배에 대한 예의는 어디 개한테 먹이로 줬더냐?”
천무백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넌 동네에 돌아다니는 광인한테도 허리 숙이면서 인사하냐?”
“허허. 이걸 맹랑하다 해야 하나.”
자신을 그저 동네에 하나쯤 있는 정신 나간 놈 취급을 하다니.
맹랑하다 해야 할지, 배짱이라고 해야 할지. 그도 아니면.
“자신감이겠지.”
저놈에겐 어쩌면 자신은 그저 마도의 미치광이 정도로만 보일지도 모른다.
“혈불이 놈에게 죽었고, 귀마는 회유됐고, 독마도 죽었을지 모르는 놈이다.”
마류칠종 중 무려 세 명.
그 세 명을 홀로 상대하고 무너뜨린 놈이다. 애송이가 전혀 아니다.
그런 사실을 되새기자, 팔을 길게 늘어뜨린 천무백의 모습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너무 여유로웠다.
‘응당 있어야할 반응이 없다.’
지금 천광마는 정제되지 않은 투기와 살기를 모조리 천무백에 집중시켰다.
의념만으로 살인을 할 수 있다는 경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그만한 충격은 줄 수 있다.
한데 자세며 태도며 모든 게 예상 밖이었다.
저런 여유는 단 하나다.
자신의 존재가 단 조금도 위협이 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
‘믿을 구석이 있다는 거지.’
아마도 자신의 실력이리라.
의외긴 하다. 자신은 천무백을 잡으러 왔는데, 낌새를 보아 하니.
“날 잡으러 왔나?”
“그럼 놀러왔겠냐, 병신아.”
“나는 편견 없는 사내다. 이미 귀마랑 친우가 되어서 한편 먹었는데, 나하고도 놀 생각 있을 수도 있지.”
과연 광종의 종주 자리는 어디 내기로 따는 게 아닌 듯했다.
천무백의 거친 반응에 노하지도, 그렇다고 당황해하지도 않고 오히려 이쪽이 귀마와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을 지그시 밝히며 압박한다.
동시에 입은 웃고 있지만 날카로운 시선이 천무백의 손동작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따라붙는다.
반응을 살펴보려는 속셈이겠지.
천무백은 피식 웃었다.
“야. 너 친구 없지.”
“…….”
천광마의 광대가 꿈틀거렸다.
“단념해. 귀마가 무슨 내 친구인 줄 아나. 설령 걔가 내 친구여도, 넌 내 친구로 안 삼아.”
“……날 회유할 생각은 없나 보지?”
천무백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천광마는 속이 더 불편해졌다. 누가 봐도 놀란 표정이 아니라, 일부러 과장해 지어내는 표정이었으니까.
퍽 열받는 얼굴이었다.
“널 회유한다고? 내가 왜?”
“귀마를 이용해서 마도를 무너뜨리고, 네놈 입맛에 맞는 놈을 천마로 세우려는 속셈 아니더냐?”
솔직히 말해 천무백은 뜨끔했다. 천광마의 지적은 정확했으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귀마가 네놈 밑에 기어들어갔으니까. 놈은 멍청하진 않거든. 욕심이 많은 놈이야. 이용당할 걸 알면서도 굴복했다는 건, 그만한 대가가 따른다는 보장이 있겠지. 그리고 그 보장은 천마가 아니겠나? 어차피 싸움 끝엔 네놈의 목적은 분명 천마를 시해할 테니까 말이야.”
천무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언은 긍정이었다. 천광마가 재밌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그러면 차라리 날 회유하는 게 어때?”
“……!”
“종주님!”
옆에 조용히 시립해 있던 비광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아무리 미쳤다, 미쳤다 했지.
설마 여기서 저런 말을 한단 말인가?
천광마는 비광을 쳐다도 보지 않고 소리치듯 말했다.
“나는 광종의 종주! 현재 마도의 절반을 움켜쥔 세력의 주인이며, 천마 아래 나보다 강한 마도는 없다. 귀마 같은 얼치기보단 차라리 내가 낫지 않겠나?”
천무백이 단호하게 말했다.
“싫어. 안 해.”
“네놈은 마도를 감히 손아귀에 쥐려는 속셈인 것이야. 마도의 뜻이 무엇이고, 마도가 가진 이념이 무엇이고, 마도가 원하는 천하가 무엇인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그저 마도를 제 손아귀에 올려놓기 위한 간악한 속셈을 부릴 뿐이다!”
천광마의 목소리가 칼날이 되어 천무백을 찔렀다.
음공(音功)의 일종이었다. 비명과도 같은 고함을 내질러 공간을 격하고 타격하는 공격.
그러나 천무백은 손을 살짝 휘젓는 것만으로도 음파의 축을 쪼개버렸다. 천광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천무백이 귀를 후비면서 간단하게 대답했다.
“무슨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 붙여? 이유는 간단해. 난 미친놈이 싫어.”
“…….”
“미친놈을 곁에 두는 게 얼마나 세상 귀찮은데. 어휴. 됐다.”
천광마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비광을 바라봤다.
“감히 천마를 자기 맘대로 고르고, 마도를 제 손아귀에 놓고 갖고 놀겠다는 놈이 미친놈인거냐, 아니면 내가 미친놈인거냐?”
“…….”
그거, 둘 다 미친놈 같은데요.
비광은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말을 꾹 참았다.
그리고 표정을 굳히며 작게 속삭였다.
“준비 다 됐습니다.”
웅웅웅.
그 말을 끝으로 아주 미세한 진동이 발끝에서부터 전해졌다.
아주 미세한 진동이지만, 무인이라면 그 감각을 못 느낄 리가 없었다.
뒤에 조용히 있던 능허도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펄떡 뛰었다.
“시바! 이거 뭐야! 느낌 쎄한데요. 주군! 함정 같은데?”
천무백이 천광마를 가만히 바라봤다. 천광마는 어깨를 으쓱였다.
“왜 그러느냐? 무인들의 싸움에 비겁한 함정을 팠다고 뭐라 하려고?”
“…….”
“아해야. 이 어린 나이에 광증이 온 미친 아해야. 세상엔 위험한 놈이 어떤 놈들인 줄 아느냐? 강한 놈? 아니다. 위선적인 놈? 아니다. 냉혈한에 감정조차 못 느끼는 괴이한 놈? 아니다. 바초 미친놈이다. 앞뒤 보지도 않고 미치광이처럼 날뛰는 게 가장 무서운 법이지. 그런데 말이다.”
천무백은 팔짱을 낀 채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어디 계속 말해보라는 뜻이었다.
“미친놈 중에도 급이 있어. 미치광이 중에서 가장 위험한 부류가 무엇인지 아느냐?”
“뭔, 미친놈 가지고 책을 써대고 있어. 뭔데?”
천광마가 단언하듯이 말했다.
“가장 오래 산 미친놈이 무엇보다 위험하다.”
“…….”
“미치광이 짓을 하면서도 오래 살아남았다는 건, 아무도 못 건들만큼 강하다는 거지.”
“그러니까 다 늙은 미치광이가 가장 위험하다는 거네?”
“핵심을 제대로 짚었도다.”
천무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무심한 눈동자로 천광마를 쳐다볼 뿐이었다.
천광마는 그런 천무백의 시선을 바라보면서,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진동, 암천진을 파훼한 천무백이니 무엇인지 모를 리가 없다. 주위에 요동치는 파동만 해도, 천광마가 본 천무백은 능히 알아차리고도 남았다.
‘그런데 감정의 요동이 없어?’
웅웅웅웅웅!
그들 중심으로 얇은 기막이 쭈욱 펼쳐졌다. 마치……나가지 못하는 창살 없는 감옥마냥.
천무백은 피식 웃었다.
“악인봉행진을 마도 놈들이 준비할 줄은 몰랐지만, 발동하는데 한참 걸리는구나. 마도에 그럴듯한 진법가들은 다 뒈졌나보지?”
악인봉행진.
백도가 마인들을 진법에 가둬 내기를 폭주시켜 주화입마에 빠지게 만들던 진법이었다.
일전에 제갈설아가 무당파에서 악인봉행진을 활용해 천무백이 비다라 치유에 도움을 준 적이 있다.
한데 지금 천광마가 준비한 것이 바로 악인봉행진이었다.
“그래. 제대로 붙으려면, 서로 잠재능력까지 모두 폭주시키면서 싸워야 재미있지 않겠느냐?”
천광마가 실실 웃었다. 옆에 있던 능허가 경악해서 중얼거렸다.
“미친놈이군, 정말 미친놈이야. 지 몸에 있는 내기도 폭주하면서 날뛸 텐데. 그런 상황으로 유도해 놓고 한판 붙자는 얘기니.”
“자신 있다는 거겠지. 폭주하는 기를 제어할 수 있다는 생각일 거다.”
천무백이 그리 대답했다. 당연한 일이다. 오래 살아남은 미치광이가 가장 위험하다는 얘기. 맞는 말이다. 천무백도 고개를 끄덕일 얘기였으니까.
미친놈이되, 머리를 굴릴 줄 아는 미친놈이다.
아마도 폭주하는 기를 제어하는 방법을 천광마는 알고 있으리라. 아니, 어쩌면 그런 무공을 갖췄을지도 모르지. 그러니 천광마는 지금 자신이 유리한 판을 깔아놓은 것이다.
어쩌면 자신에게 위험이 될 수도 있는 도박수를 던진 거지만.
그만큼 미친놈이란 얘기다.
천무백은 솔직히 조금 감탄했다.
이런 앞만 보는 상대는 얼마만인지.
더구나 천무백은 천광마가 말한 이론에 극히 공감했다. 그러니까 생각이 비슷한 놈이란 거다. 원래 공감대가 형성되면 조금 친밀도가 높아지는 게 사람 관계가 아닌가.
천무백이 피식 웃었다
오래 산 미친놈이 가장 위험하다.
즉, 늙은 미치광이가 무섭다는 말 아닌가.
천광마는 본인을 지칭한 것이겠지. 그의 나이 무려 칠순을 넘으면서 미친놈으로 살아오며 패권을 차지했으니까.
그러나.
스르르릉-.
천무백의 철신고검이 매끄럽게 뽑혀 나왔다.
칠흑같은 묵색.
눈이 따가울 정도로 내리쬐는 햇빛조차 반사되지 않고, 그대로 흡수되는 것 같은 검신이 서늘한 기운을 품었다.
척.
천무백의 칼끝이 천광마를 향했다.
“가장 오래 산 미친놈이 위험하면, 넌 위험도로 따지면 내 발끝도 못 따라와.”
천무백이 웃었다.
이 천하에서 가장 오래 삶을 산 미치광이 사내.
“바로 나야.”
가장 늙은 미치광이, 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