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292화 (292/318)

<검신재생 292화>

292. 그래, 나다

스스스스―

스산한 바람이 한줄기 불어왔다.

웅웅웅.

나직한 진동과 함께 천무백을 중심으로 파동이 퍼져나갔다.

대기가 일렁였다. 천무백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여기다.”

“······어디 말입니까?”

능허가 휙휙 고개를 돌렸다. 꽤나 험준한 산악. 사람이 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악산이라 자연 그대로였다. 과연 천무백이 찾아온 곳은 비교적 둔감한 능허가 보기에도 자연기가 풍부하게 느껴지는 천혜의 장소였다.

하나 이 넓은 산맥에서 정확히 어디인지는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더구나 천무백의 시선은 애매해서 어느 지점을 딱 지칭해서 말하는 지 알 길이 없었다.

능허가 고개를 저었다.

“내 눈에는 뭐 특이한 건 없어 보이는데.”

“네 눈이니까 그렇지, 인마.”

“어딘데요? 저기 봉우리? 아니면 저기 계곡? 아니면 쩌어기 협곡? 쓰읍. 저기 협곡이 그럴 듯한데?”

“호.”

천무백의 입에서 나직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능허가 대충 아무 곳이나 되는대로 가리키는 듯했지만, 실상은 아니다. 하나같이 자연기가 풍부한, 기맥(氣脈)을 제대로 짚었다.

“너도 쓸데없이 나이만 먹은 건 아니구나. 점점 쓸모가 있어지는 것 같아 아주 감동적이야.”

“어디 제가 찍은 데 중 하나인가 보죠?”

“뭐, 틀린 말은 아니지.”

“크으. 역시. 능허, 아직 안 죽었지 말입니다.”

“맞은 것도 아니다.”

“예?”

천무백이 슬쩍 손을 휘저었다. 손끝에서 수십 줄기로 내기가 흘러나와 곳곳으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대기가 일렁이면서 미묘하게 나뉘었다. 색을 덧칠한 듯한 이질적인 느낌. 마치 투명한 막이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능허는 그 투명한 막이 곧 암천진으로 숨겨져 있는 형상임을 눈치챘다.

그리고 투명막의 크기를 가늠하던 능허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미친······.”

봉우리, 계곡, 협곡, 어렴풋이 보이는 동굴.

능허가 지목했던 장소 모두 투명한 막으로 덧씌워져 있었다. 아니, 그 전부를 포함해서 여기 전체를.

“······이 산 전체가 진법에 숨겨져 있다고?”

상상도 못할 규모에 능허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제갈세가의 진법도 봤고, 약선이 펼쳐대는 진법도 봐왔다. 하나같이 대단했지만, 지금 암천진은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거대했다.

“쯧. 이거 골치 아프군.”

대충 모습을 드러낸 규모를 확인한 천무백이 혀를 찼다.

“놈들이 멍청하진 않아. 하긴, 사십 년 전 그대로라고 생각하진 않았다만. 내 생각보다 더 교묘해졌어.”

시간이 꽤 흘렀다. 마교는 세력을 길러내며 호시탐탐 강호를 노렸다.

당연히 암천진 역시 사십 년 전보다 더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천무백도 그 점을 고려했지만, 눈앞에 드러난 건 예상보다 더했다.

“그렇다고 못할 것도 없지만.”

그냥 좀, 귀찮게 됐을 뿐이다.

천무백은 주위의 돌과 나뭇가지를 이용해 진법을 쭉쭉 그려 나갔다.

거침없이 진법을 만들어 나가는 모습에 능허는 혀를 내둘렀다.

제갈설아나 약선이 진법을 그렸을 땐, 모든 환경과 상황을 고려하면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만들었던 기억이 있다.

하루는 물론이고, 꼬박 사나흘 밤새 만드는 건 예삿일이지 않았나.

천무백은 달랐다. 호쾌하다는 말이 절로 튀어나올 만큼 거침없이 긋고 찍고, 바닥을 파고, 부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진법의 규모는 확실히 컸다. 그러나 산 전체를 뒤덮은 투명한 막, 암천진에 비하면 손색이 있어보였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 되겠지.”

만족스럽진 않지만, 지금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천무백이 진법의 중심에 서서 내기를 흘려보내자 진법이 마치 타오르듯이 은은하게 빛을 발했다.

순간 투명한 막이 미약하게 출렁였다.

동시에 진법이 좀 더 뚜렷한 빛으로 타올랐다. 능허의 눈이 동그래졌다.

투명한 막이 조금씩 희뿌여시더니, 진법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모양새였다.

“이 무슨······.”

“저 암천진은 풍부한 자연기로 유지된다. 그럼 답은 간단하지. 유지를 위한 자연기가 더 많이 필요한 진법을 옆에 만들어서 활성시키면 되거든.”

암천진을 이루는 투명한 막이 미약하게나마 계속해서 출렁였다.

천무백이 만든 이름 모를 진법이 주위의 기운을 빨아들이다 못해, 암천진을 유지하고 있는 기운까지 조금씩 빼앗기 시작한 것이다.

보통 진법을 깨는 방법은 포석을 부숴 버리는 것이다.

어떤 진법이든 진을 이루는 포석이 있기 마련. 그걸 부수고 치워 버리면 진은 말 그대로 허무하게 찢겨 버린다.

암천진은 이 산 하나를 덮칠 정도로 규모가 컸기에, 포석을 찾기란 어렵다. 가능해도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천무백이 선택한 방법이 바로 이것이다. 유지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리는 것.

“무슨 진법을 이따위로 파훼를 해······?”

그러나 그게 쉬운 방법이었다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으리라.

이유는 분명했다. 암천진의 기운을 빼앗기 시작하자 천무백이 만든 진법이 과열되는 양상을 보인 것이다.

너무 많은 기운이 담기다 보니, 진법의 그릇에 넘치다 못해 감당 못 하고 저절로 부서질 낌새가 보였다.

하지만 그것 역시 천무백은 간단하게 해결했다

“만상은 곧 순환하는 법.”

천무백이 손을 쭉 뻗었다.

그러자 터질 것처럼 넘쳐나던 진법의 기운이 천무백에게 빨려 들어갔다.

암천진의 거대한 기의 흐름이 천무백이 만든 진법에서 한차례 걸러진 뒤에 천무백에게 흡수됐다.

그럴수록 투명했던 막은 점점 희뿌연 빛으로 변했다.

그 거대한 기의 흐름에 능허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피부로 전해지는 느낌만으로도 천무백의 몸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운의 흐름이 보통이 아님을 체감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 사람의 몸에 저만한 기운이 빨려 들어가지?’

축기(畜旗)는 아니다. 암천진의 기운이 진법을 통해 한차례 여과된 뒤에, 천무백의 몸을 순환하고 나서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흐름이었다.

능허가 놀란 점은, 축기가 아니더라도 저만한 기운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버텨 내며 흘려보낸다는 점이었다.

‘그야말로 산 전체를 품은 자연기다. 그걸 진법으로 한차례 걸러냈다고 해도, 몸으로 버틴다고?’

말 그대로 이해 못할 현상.

시간이 지날수록 천무백의 몸으로 들어오는 기의 흐름은 점점 맹렬해졌다.

암천진이 크게 출렁이면서 색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점전 진해지고 이내 새까맣게 변했다.

콰콰콰콰!

“이 무슨!”

능허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이 커졌다. 암천진이 크게 출렁이다 못해 막이 뒤틀렸다. 그 모습이 흡사 살아 있는 생물이 발악하는 것처럼 보였다.

암천진은 그저 모습을 숨기는 용도로만 사용되는 진법이 아니다.

정마대전에서 암천진에 숨어 있는 마인들을 찾아내려는 노력은 계속됐다.

당연히 암천진 역시 뛰어난 감각의 소유자들에게 여러 번 발각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진법이 깨질 때까지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암천진은 단순히 은신(隱身)을 벗어나 공격적인 방어 진법이기도 했다.

천무백을 향해 파도처럼 들이닥치는 기운은 살기를 머금었다.

지금까지 빨아들이던 수준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막대한 기운.

하물며 살기를 머금은 엄연히 강기에 가까운 거친 공격임이 틀림없다.

콰콰콰콰콰!

천무백이 만든 진법이 와장창 부셔나갔다. 뒤집히고 찢겼다. 칼날같은 기세가 비명을 내지르듯이 천무백을 향해 쏟아졌다.

천무백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마지막 발악이군.’

암천진이 깨질 상황에 놓인다면, 일종의 자폭이나 다름없는 공격이 이뤄지는 것쯤이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천무백은 만족스러웠다. 암천진이 사실상 깨졌다는 증거니까.

“주, 주군!”

그 거대한 기운 앞에서 여유롭게 웃고 있는 천무백을 보고 능허가 황망한 소리로 외쳤다.

그때였다. 칼날 같던 암천진의 기운이 그대로 쭉 천무백의 손끝으로 빨려 들어갔다.

“……!”

평범한 기운도 아니고, 강기나 다름없는 걸 흡수한다고?

단순한 내상이 아니라 그대로 몸이 도륙 날지도 모르는데?

그 광경을 지켜보던 능허는 이내 벌어지는 현상에 입이 쩍 벌어졌다.

거대한 암천진의 기운을 천무백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낸 것이다.

상단전, 중단전, 하단전.

세 개의 단전을 관통해 가며 기경팔맥을 가로지르는 기운은, 천무백의 몸에 들어오자 놀라울 정도로 순해졌다.

천무백은 오히려 강대한 기운을 끊임없이 몸 안에서 순환시켰다.

이미 타통된 기경팔맥이었지만, 그 기운이 몇 차례 질주하기를 반복했다.

“대주천?”

설마 저 암천진의 기운으로 대주천(大周天)을 한다고?

미친 듯이 발악하며 공격하던 암천진이 주춤거렸다.

기세 좋게 발동된 암천진의 공격을 너무나 여유롭게 받아들이다 못해 그 기운으로 대주천을 이뤄내기까지 하다니.

오히려 천무백의 기운을 살려 주는 셈이 아닌가.

쩌저저저적!

암천진을 형성하던 막이 깨져 나갔다. 몇 번이고 재생됐지만, 규모는 점점 작아졌다.

산 전체를 아우르던 규모에서 붙잡을 수조차 없이 쪼그라들었다.

진법을 깨기 위해 검을 휘두른 것도 아니다.

초식 하나도 펼쳐내지 않았다.

그러나 암천진은 천무백에게 상처 하나 내지 못하고 무참하게 깨졌다.

능허가 경악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이게 진법 파훼하는 방법입니까?”

“어때, 쉽지? 참. 사람들 요란스럽게 진법 파훼하더라고.”

“…….”

“가자. 미친놈 잡으러.”

천무백은 그렇게 말하곤 성큼 걸어갔다. 능허는 그저 멍하니 뒷모습을 바라보다 나직이 중얼거렸다.

“대체 누가 미친놈인건지…….”

* * *

천광마는 헛웃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놈도 만만치 않게 미친놈이구나. 차라리 칼질해서 진을 깨버리는 게 낫지.”

주위 기의 흐름이 심상치 않았다. 암천진이 크게 출렁이는 걸 온몸으로 느꼈다.

한데 공격당하는 게 아니었다. 촉각을 곤두세운 천광마는 암천진을 유지하는 기운을 빼앗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비광아, 놈이 혹시 광종 출신이더냐?”

“그건 아닐 겁니다.”

“잘 봐 둬라. 우리 광종에 아주 걸맞은 인재일지도 모르겠구나.”

미친놈이라는 말을 돌려서 말하는 천광마의 말에 비광은 내심 동의했다.

암천진을 부수는 것도 아니고, 기운을 빼앗아 무너지게 한다고?

오죽하면 이 거대한 산에 진법을 펼쳤겠나. 그것도 산서성에서 가장 기맥이 집중되어 있는 이 장소에.

그만큼 엄청난 기를 필요로 하는데, 그걸 어떻게 뺏어?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런 시도를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천광마는 내심 감탄했다.

“배포 하나는 미친놈이군.”

솔직히 마음에 들었다. 다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내가 죽여 주고 싶은데, 혼자 주화입마 걸려 뒈질 거 같아 아쉽구나.”

하나 천광마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암천진의 흔들림이 요동치다 못해 마치 비명을 내지르는 듯한 기의 흐름을 느꼈을 땐,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암천진이 엄연히 무너지고 있는 현상.

“비광아.”

“예.”

“암천진 파훼를 고작 반각도 안 되는 시간 동안 해낼 수 있더냐?”

“그건…… 제갈세가라면.”

“제갈세가라면? 아니다. 제갈세가 전체가 와도 하루는 걸릴 거다.”

“…….”

천광마는 비광과 함께 빠르게 움직였다. 암천진의 비명은 점점 심해지더니, 종국에는 거의 분쇄되고 있었다.

정말 암천진이 부서졌다.

천광마는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멈춰 섰다.

거대한 기운.

그 기운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천광마 주위로 지독한 투기가 넘실거렸다.

그러나 그 투기도, 저 산등성이 아래도 모습을 드러내는 인영에겐 단 조금의 위협도 되지 않았다.

여유롭기 짝이 없는 얼굴을 보는 순간, 천광마는 말했다.

“너냐?”

맥락 없는 질문. 그러나 답은 간단했다.

“그래, 나다. 새끼야.”

천무백이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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