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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재생-291화 (291/318)

<검신재생 291화>

291. 암천진

전쟁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요소가 뭐가 있을까.

“음. 뭐 여러 가지 있지 않겠습니까?”

워낙 광범위한 질문이라 능허는 쉽사리 답을 내놓지 못했다.

정확히는 천무백이 생각하는 답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러다가 이내 하나를 떠올리곤 조심스럽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 뒤 까딱거렸다.

“요거? 대가리 먼저?”

천무백이 제법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요인암살은 빼놓을 수가 없었지.”

“그래서 지금 천광마를 잡으러 가겠다는 뜻이죠?”

“응.”

“그럼 저치들은 어떡합니까?”

능허가 짐짓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다.

다름 아닌 천무백을 따라 뭉친 백도 무인 수백여 명과 그 반대편에 이질적인 존재로 자리 잡아 있는 마인들이었다.

“백도인들이야 주군이 자리를 비워도 큰 문제는 없겠습니다만, 저 마인들은…… 귀마를 믿어도 되겠습니까?”

“믿기는. 저놈하고 우리 사이에 무슨 신뢰관계가 있다고.”

천무백의 목소리는 냉막했다. 애당초 천무백은 웬만해선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

설령 믿는다고 했을 때도, 그만한 근거가 마련되어야 한다.

지금 귀마는 신뢰할 수 있는 동료가 아니다.

암종의 종주이고 야심만만한 음흉한 노인네다.

“주군이 하나둘씩 모은 마인들 숫자가 꽤 많지 않습니까. 혁련천강을 비롯한 놈들이 팔십여 명입니다. 하나 같이 실력 하나는 좋은 놈들이고요.”

“그렇지. 그게 귀마가 꼼짝도 못 할 이유다.”

“예?”

“저들 모두 살리고 거둬 준 사람이 누구냐.”

“……!”

“뭐, 마인들이 살려 줬다고 감복 받아서 충성을 바칠 놈들은 아니다만. 쟤들은 그래도 본래 마인들하곤 다른 놈들이잖아?”

잠시 저들을 살피던 능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주군이 말한 대로 마도가 아니라 무도에 가까운 놈들이니까.”

“너는 이해 못 하겠지만, 진짜 무도가란 놈들은 다른 의미로 머리 한쪽이 헤까닥 돈 놈들이거든. 일반적인 상식으론 같은 마인인 귀마의 뜻에 따라야 정상이지만, 저놈들은 아니란 말이지. 내가 저들을 굴복시킬 때 어디 윽박질러서 굴복시켰겠냐?”

“두들겨 패서 굴복시켰죠.”

“너도 오늘 굴복 당해 볼래?”

“아휴. 말이 헛나왔습니다. 요놈의 입이 아주 지멋대로 움직이네. 다 주군의 검에 반했고, 주군이 보여 준 경지를 마음 깊이 흠모하게 된 거 아닙니까?”

“그래. 그런 놈들만 내가 살려 준 거다.”

마도라는 종교에 심취하지 않은, 오로지 무학을 깊게 파고드는 놈들.

혁련천강 같은 놈들로만 천무백이 살려줬다.

그러다보니 천무백도 생각지 못한 이점이 있었다.

“또 하나 같이 마류칠종 출신이 아니야. 검종마저 엄청난 핍박을 받고 대우도 못 받았는데, 나머지는 뻔하지. 자기네들끼리 비천한 출신이라고 자조적으로 말할 정도잖아?”

자고로 본래부터 마도의 구성과 사회에 불만을 느끼고 있는 인사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강자존의 세상이라 마류칠종이 아니어도 출세는 할 수 있지만, 사람 사는 곳이 다 똑같다고. 어찌 좋은 대접받고 살았겠는가.

그런 이들에게 천무백이 제시한 바는 목마른 자에게 우물이나 다름없었다.

마도를 완전히 뒤바꾸는 것이니까. 더구나 저들이 천마를 따르는 이유도 천마가 가진 어마어마한 무위에 있었지, 종교에 심취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천무백이 보여 준 무력과 한없이 높은 경지에 반해 따르는 일도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즉.

“저들은 귀마가 아니라 나를 따를 거다.”

“……!”

“귀마가 그걸 모를까?”

천무백이 희미하게 웃자 능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긴. 제 편이라고 볼 수 있는 애도 칠성밖에 없으니까요.”

“칠성 걔도 눈치는 빠르던데? 돌아가는 판세 보고 장노에게 붙었다.”

천무백은 얼마 전에 장노를 이곳에 불렀다.

장노를 비롯한 검종 마인들은 혈귀곡에 잠입했다가, 이제는 여기저기 흩어져 마도에 암약한 상태다.

장노도 그러던 도중에 천무백의 부름에 곧장 달려왔다.

“그러니 내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마인들을 잘 이끌어 주시오, 장노.”

“걱정하지 마십시오, 도련님.”

장노는 여전히 천무백을 도련님이라 불렀다. 천무백 역시 그 호칭이 썩 나쁘지 않았기에 그저 웃었다.

잊혀진 패천검마의 정수를 그대로 전했기 때문일까.

장노는 아직 귀마에는 닿을 수 없지만, 이젠 엄연히 한 종단의 종주다운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장노를 처음 본 혁련천강이 도전했다가 패배하고 그 후에 곧장 무릎을 꿇고 검종에 들어가겠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뭐,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소.”

천무백은 장담했다.

“놈은 산서성에 있으니까.”

바로 지척에 있었다.

* * *

“산서성에 소수의 마인들이 들어온 걸 확인했습니다만, 이후 종적이 끊겼습니다.”

개방의 보고를 받은 천무백은 확신했다.

소수의 마인이 천광마가 틀림없다고.

“에이. 설마. 선봉대장이나 다름없는 놈이 주군 잡겠다고 산서성으로 온답니까?”

“놈은 미친놈이니까.”

“…….”

“그리고 원래 그게 놈이 하던 일이다. 중원 곳곳에서 마도가 밀린다 싶은 장소에 귀신처럼 나타나 상황을 역전시키는 거.”

천무백은 개방과 하오문의 정보력을 최대한 동원하여 마도에 대한 조사도 성실히 했다. 뿐이랴. 마도에 잠입한 검종 마인들로부터 시시각각으로 정보를 받았다.

거기에 귀마를 비롯해 이쪽으로 포섭한 마인들에게서 얻어 낸 소득도 있다.

그것들을 종합해 파헤치고 단어 하나까지 분석했다.

“오히려 늦은 감이 있어. 놈은 아마 내가 나타났단 소식을 듣고 당장 달려오려고 했을 거야.”

“오히려 늦었다면, 누군가 말렸다는 것이겠네요?”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 옆을 보좌하고 있나 보지.”

천무백은 단숨에 맹점을 파악했다.

“그래서 산서성에 들어온 이후에 종적이 끊긴 거다.”

다각적으로 분석해 본 결과.

천광마는 임기응변이 강한 유형이다.

일단 부딪치는 저돌성이 강하고,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이 우수했다. 그만한 실력을 갖췄을 뿐더러 감각 역시 범상치 않단 얘기다.

그런 놈이 산서성까지 와 놓고 갑자기 종적이 묘연해졌다.

천무백이 지척에 있는데도.

“모습을 숨긴 채 주군을 어찌 칠지 계획을 짜고,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란 얘깁니까?”

“놈에게 썩 머리가 돌아가는 보좌가 붙었으면 말이지.”

“대놓고 몸을 숨겼는데 어떻게 찾습니까?”

산서성의 영역으로 국한되었다고 한들, 어디 중원 땅이 좁던가.

산서성만 해도 수많은 인구가 살아가는 지역일뿐더러 마음먹고 숨으면 쫓기 힘든 게 바로 강호다.

개방과 하오문이 두 손 다 들었는데 천무백이라고 어찌 찾을까.

“능허야.”

“예.”

“내가 맨 처음 말했었지? 전쟁에서 가장 빠질 수 없는 요소가 요인암살이라고.”

“예.”

“그런데 저번 정마대전에서 마도의 고위 인사들이 암살당했단 기록이 왜 별로 없는지 아느냐?”

“어, 위치를 못 찾아서?”

“맞아. 그럼 왜 위치를 못 찾았을까. 놈들이 숨는 것에 달인이라서? 중원에 촘촘한 인적 정보망을 장악한 백도가 그거 하나 못 쫓을까?”

“음…….”

“놈들에게 숨는 방법이 있다는 거다.”

“방법이요?”

“그래. 사실 내 전투방식 알잖아?”

“그야 대가리 먼저 치는 거죠.”

“초반에 그거에 많이 당했거든 놈들이.”

천무백이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그랬다. 창천검신으로, 정마대전 초창기 때 천무백은 굳이 전장에 나서 마도를 대거 때려잡지 않았다.

귀찮게 뭣 하러 마도 잡졸을 때려잡겠나. 그들을 이끄는 우두머리만 찾아서 처치해 버리면 간단한 일인데.

그렇게 초반에 마교 장로들 수십의 목이 천무백의 칼날에 우수수 떨어졌다.

“그래서 놈들이 위기감을 느낀 거지. 언제 어디서든 목이 날아갈까 우려한 거야.”

“그래서 대비책을 준비했다?”

“바로 암천진(暗天陳)이다. 놈들이 제 모습을 감추기 위해 마도의 두뇌들이 모여 만든 진법이지.”

“그 안에 숨어 있단 겁니까?”

“그래. 전장에서도 놈들은 진법 안에서 모습을 감추곤 했지. 그래서 그때부터 요인암살이 쉽지 않았고, 내가 나섰음에도 전쟁이 쉽게 안 끝나고 길게 이어진 것이다.”

그야말로 광오한 말이었지만, 능허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기 산서성에서 천무백의 활약을 보라!

혼자서도 성 하나를 공격한 마인들을 모조리 무너뜨릴 정도로 호쾌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절대 자만도, 거만함도 아니다.

천무백은 홀로 전쟁을 끝낼 힘을 지닌 사내였다.

“마도 최고의 두뇌들이 만든 만큼 암천진은 발견하기도, 그걸 파훼하기도 쉽지 않았다. 설령 파훼하려고 해도, 금세 마인들이 몰려와 공격했으니 시간도 부족했고.”

하지만 천무백의 목소리는 퍽 자신감이 넘쳤다. 능허는 본능적으로 파악했다.

“암천진을 파훼하는 방법을 알고 계시는군요?”

“당시 전쟁이 끝나갈 쯤이면 분석이 다 끝나고 파훼법이 나오기 마련이지.”

그러나 맹점이 있었다.

“한데 어디에 암천진을 설치하고 숨어 있는지, 그건 어떻게 압니까?”

“이 암천진은 주위의 공간과 지형을 다른 이들에게 완전히 뒤틀려 인식하게 만들어. 어때. 얘기만 들어도 어마어마한 기운이 뒷받침 되어야 할 것 같지 않냐?”

“아……! 그렇다면, 진법이 유지되려면 또 어마어마한 기운이 필요하겠네요.”

“그래. 자연기가 주위보다 풍부한 곳. 놈들은 그곳에 있을 거다.”

천무백은 이미 산서성의 지형을 완전히 파악했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어느 곳의 자연기가 풍부한지. 그야말로 면벽수련을 하기 위한 최적지가 어디인지 머릿속에 샅샅이 들어가 있었다.

“그건 또 언제 파악했답니까?”

천무백이 피식 웃었다.

“강호에서 수십 수백 번을 살다보면 중원 전체의 뒷골목도 머릿속에 외울 정도다.”

천무백은 이미 천광마가 어디에 숨었는지 다 보였다.

* * *

“그러니까 귀마가 살아 있고, 놈 밑으로 마인들이 모여들고 있다. 이거지?”

“예.”

“허.”

천광마는 산서성에 와서 도망친 마인들의 보고에 헛웃음이 나왔다.

귀마가 살아서 흩어진 마인들을 규합했단 사실을 처음 들었을 땐 오히려 기꺼웠다.

어찌됐든 아군이 늘어나는 것이니까.

그런데.

“왜 천무백 옆에 있는 건데?”

“…….”

“설마 천하의 그 귀마가 변절했단 것이냐?”

비광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모든 정황이 그걸 가리켰다.

하지만 어찌 믿을 수 있으랴.

무려 마류칠종이다. 마류칠종의 종주가 백도에게 넘어갔다. 이게 말이 되는가.

그래서 비광은 당장이라도 천무백을 치려고 산서성에 왔던 천광마를 일단 눌러 앉혔다.

아무래도 상황이 더 심각했다.

귀마를 포섭하고 수족처럼 다룬다고?

도대체 무슨 방법을 썼길래?

가슴 저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던 불길함이 점점 더 커지는 느낌이었다.

천광마는 이를 으득으득 갈았다.

“뻔하다. 어디 백도하고 힘 합쳐서 우리 마도를 무너뜨리고, 지가 천마라도 될 속셈이겠지.”

“…… 귀마가 미치지 않고서야.”

“비광아. 어디 나만 미친놈 같더냐? 마인이란 놈들은 말이다. 이 마기가 뇌에 침투한 순간, 미친놈이 되는 법이야.”

천광마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확신했다.

“천무백도 죽이고, 귀마도 죽인다. 놈에게 넘어간 마인들 역시 모조리 목을 베어야겠다.”

“종주님, 일단 고정하시지요. 병력을 아무래도 불러 모아야할 것 같습니다.”

“음.”

천하의 천광마도 침음을 삼켰다. 소수만 이끌고 왔지만, 막상 귀마가 저쪽에 넘어간 걸 확인했으니 그도 섣부르게 움직여선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쿠르르르르.

“……!”

순간 요동치는 공간.

천광마와 비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누군가 암천진을 깨려고 하고 있군.”

천광마의 목소리가 스산하게 퍼졌다.

비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산서성. 암천진을 발견할 수 있을 만한 감각의 소유자. 그렇다면…….

“비광아.”

“예.”

“오늘 큰 거 하나 잡자꾸자.”

천광마의 얼굴에 귀기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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