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90화>
290. 미친놈 잡으러
“이래도 내버려 두라고?”
천광마의 비아냥거림에 비광은 입술을 깨물었다.
유구무언(有口無言).
딱히 항변할 말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네놈이 천룡검협, 그 애송이는 내버려 두라면서?”
“그야…… 그렇죠.”
“왜?”
“혈불하고 귀마가 죽었습니다. 독마도 죽었습니다. 독마는 검후가 죽였다는 소문이 있지만, 그 자리에 천룡검협이 있었단 얘기도 있습니다. 어쩌면 검후가 아니라 천룡검협이 죽였을지도 모릅니다.”
천광마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야. 고놈이 마류칠종 중 세 개 종단의 머리를 베었다. 그래서 위험한 놈이다. 이거야?”
“명백합니다. 지극히 위험한 놈입니다.”
비광은 천광마가 천무백을 잡으러 가겠다고 했을 때, 곰곰이 생각하다가 일단은 만류했다.
천광마가 직접 나서 천무백의 실력을 가늠하는 방향도 나쁘지 않지만.
‘만약에, 정말 만약에 놈이 말도 안 되게 강해서 종주님도 못 당할 정도라면?’
당시 생각으론 여차하면 몸을 빼내 도망치면 그만이다.
아무리 천무백이 강해도 천광마가 도주도 못 할 정도는 아니리라.
문제는 천광마가 순순히 도주하겠냐는 것이다.
‘절대로, 음.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도주할 것 같진 않아.’
차라리 어떤 미친 짓을 해서 계속 싸움을 이어 가겠지. 뭐 선천지기를 터뜨리던가, 동귀어진을 펼친다던가. 그러면 뭐가 되겠는가.
‘결국엔 돌이킬 수 없지. 우리 광종이 마종(魔宗)에 버금가는 위세를 얻고 있는데. 종주님이 사라지면?’
봐라. 저 혈종과 암종을.
혈불과 귀마가 죽자 단숨에 힘을 잃었다. 혈귀곡의 잔당들은 광종의 손아귀에 여기저기 찢겨서 흡수됐다. 마도에서 우두머리의 존재는 그만큼 중요했다.
그래서 일단은 만류했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으니까.
“정의맹이 단단히 방어를 꾸린 핵심 거점들을 공략해야 한다고 말이지.”
“그렇습니다. 천무백이 아무리 명성 높고 강하다 해도, 결국 백도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로 대변되니까요.”
“그것뿐이냐?”
천광마의 눈이 가늘어졌다.
비광은 흠칫 떨며 말을 멈췄다. 늘 눈빛에 귀기(鬼氣)가 섞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독히도 차가운 시선이 비광을 뚫어질 듯이 응시했다.
마치 마음속을 헤집어 보는 듯한 시선에 비광은 새삼 눈앞의 사내가 광종의 종주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정말 그것뿐이냐고 물었다.”
“종주님. 대체 무슨…….”
“내가 혈불이나 귀마처럼 놈에게 죽을까 봐 그런 거 아니냐?”
“……!”
“비광아. 비광아. 너 스스로 미친놈이 아니라지만, 너도 미친놈이 맞구나.”
천광마가 별안간 실실 웃었다.
“감히 본좌가 죽는다는 말도 안 되는 가정을 하다니. 그게 네가 말하는 이성적인 판단이냐? 아니, 미친놈의 그릇된 생각이다!”
천광마의 눈이 흉흉하게 번뜩였다.
“비광아. 내 곁을 몇 년을 지켰는데 아직도 날 모르느냐.”
“…….”
“난 미친놈이다. 정신 나간 놈이지. 그런데 말이다. 미친놈 주제에 왜 오랫동안 이렇게 살아 있는지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미친놈은 요절하기 딱 좋지. 병신처럼 나대다가 죽거든. 그런데 오래 산 미친놈은 진짜로 위험한 미친놈이다. 아무리 미친 짓을 자행해도 죽지 않고 오래 살아남았단 뜻이거든. 아무도 내 목숨을 범할 수 없단 얘기다!”
천광마가 순간적으로 기세를 터뜨렸다.
유형화된 검은 마기가 넘실거리며 주위를 완전히 장악했다.
“……!”
비광의 눈동자가 거세게 진동했다.
이건…… 자신이 알고 있는 경지를 넘어서는 무언가.
비광은 저도 모르게 포권을 취했다.
“깨달음을 얻으셨군요. 감축드립니다!”
“됐다. 됐어. 봐라. 이래도 내가 질 것 같냐? 그 애송이한테?”
“……아닙니다.”
“됐다. 그럼 난 놈을 잡으러 간다.”
비광의 얼굴이 복잡해졌다. 방금 보여 준 순간의 기세. 그건 분명 천광마가 이전의 경지를 뛰어넘었음을 보여 주는 단면이었다. 분명 더 강해졌다. 그러나 어디 혈불이고 귀마고, 독마가 약해서 죽었던가.
가슴 한쪽에 불안함이 여전히 존재했지만, 이어지는 천광마의 말에 비광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봐라. 지금 놈이 하는 행동을.”
“…….”
“정의맹이 핵심거점에 틀어박혀 방어에만 힘쓰는 사이 네놈은 나머지 백도를 무너뜨리자고 했지?”
“예.”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제외한 백도 문파를 싸그리 치워 버리면, 버티다 못한 정의맹 놈들이 튀어나오니 그때 힘을 결집해서 단 한 번에 끝내 버리자는 게 네놈의 계획이었다.”
“맞습니다.”
“근데 말이다. 천무백, 이 자식이 네놈 계획을 다 뒤엎어 버렸다. 판을 엎어 버렸다고.”
“…….”
“아니, 정의맹도 사실상 천무백이 설립한 거라고 했지? 그래, 애당초 이건 놈의 판에 우리가 놀아난 꼴이야!”
비광은 고개를 숙인 채 묵묵부답이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천광마의 말에 틀린 게 없다.
“정의맹이 핵심거점에 틀어박혀서 방어에만 힘쓰는 사이, 천무백은 소외된 세력을 결집하고 있다. 우리가 보낸 마인들을 하나씩 격퇴하면서!”
“맞습니다.”
“산서의 창검문을 비롯해서, 천무백에게 구함을 받은 일곱 문파가 자발적으로 천무백 곁에 모여서 결집하고 있다. 뿐이랴? 이 소식을 들은 강호 전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천광마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판세 분석 같은 건 비광의 몫이었지만, 천광마 역시 광종의 종주이자 이 전쟁의 선봉장.
그의 관록과 판세를 읽는 눈 역시 범상치 않았다.
“지금까지 놈은 계속 한결같았다. 혈귀곡에 대항하는 기치를 내세웠고, 그렇게 행동해 왔어. 그가 설령 어떤 생각을 하고 있든, 백도는 놈이 마도에 대항하는 구심점이란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단 말이다.”
상황이 참 공교롭게 됐다. 정의맹이 핵심거점을 지키며 방어를 착실히 하며 마도의 공격을 막아 내는 사이.
천무백은 소외된 백도 세력을 결집하고 있었다. 더구나 정의맹이 사실상 천무백의 손아귀에 있다는 점을 떠올리면…….
부르르!
비광이 한차례 몸을 떨었다.
그랬다. 천광마 말대로 자신은 천무백이 깔아놓은 판에서 그저 재롱이나 피우고 있다.
그러나 비광은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내며 반론을 펼쳤다.
“놈의 곁에 검존이 있단 소식이 있습니다. 검존이요. 검존. 새외에서 우리를 지독히고 괴롭혔던 검존과 천룡검협이 함께 있습니다. 감당하실 수 있으십니까?”
어찌 보면 참으로 당돌하다 못해 건방지기 짝이 없는 발언이었지만, 천하의 천광마도 흠칫했다.
검존이 같이 있다는 건 그로서도 패기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 천광마는 이내 피식 웃었다.
“그래. 그게 문제란 말이지?”
“예?”
“걱정 마라. 검존은 대막으로 갔다.”
“대막이요?”
“그래. 무슨 지가 관우인 줄 아나. 오관돌파도 아닌 수십 개의 우리 관문을 뚫고 대막으로 떠났다. 이게 뭐겠느냐? 도주한 게 아니겠느냐?”
대막이라니. 저 험한 십만대산보다 저 지독한 대막(大漠)이라니. 검존이 별안간 왜 서쪽 끝으로 갔단 말인가?
비광의 얼굴이 복잡해질 때. 천광마가 통보하듯이 말했다.
“검존도 없다. 그가 없는 사이 최대한 빨리 천무백을 잡는다.”
“……알겠습니다.”
비광은 고개를 숙였다. 검존이 없는 천무백 홀로라면.
그래, 어쩌면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천무백을 처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일지도.
하지만 마음속에서 싹트는 불길함이 그의 머릿속을 여전히 울렸다.
* * *
“그 검존 선배는 무사하시겠죠?”
“넌 백기가 걱정되냐? 그 천하의 검존인데?”
능허의 물음에 천무백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유백기를 걱정하는 놈이 있다니. 곁에서 봐놓고 말이야.
능허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야 대막에 대한 소문이 워낙 흉흉하지 않습니까.”
“흉흉해?”
“중원오재 말입니다. 더구나 중간에 십만대산이 떡하니 있어서 대막 쪽 소식은 중원에서 듣기 어렵잖아요.”
“뭐…… 괜히 중원오재라고 불리는 건 아니긴 하지.”
중원오재.
한번 몸을 일으키면 중원에 재앙이 도래한다는 이들.
“워낙 소문이 흉흉해야지. 검존 선배 나이도 나이고, 더구나 대막까지 가려면 마도 놈들을 다 뚫고 가야 하는데.”
“그러니까 보낸 거다.”
“네?”
“널 보내려다가 말이다.”
“어떻게 그렇게 자살하라는 명령을 내리실 생각을 하셨습니까?”
능허가 정색했다. 그냥 대막에 가는 것만 해도 위험한데.
켜켜이 막고 있는 마도의 벽을 뚫고 가야 한다.
이 얼마나 위험한 임무란 말인가.
“원래라면 내가 가야 하지만. 뭐 어쩔 수 없지. 백기도 내 제자라는 건 자자하니까. 크게 문제는 안 될 거다.”
“대체 대막에 가서 가져올 게 뭐 있다고.”
“능허야.”
“예.”
“그만 툴툴대라. 그렇게 궁금하면 너도 대막으로 보내 주랴?”
능허가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애당초 저는 호기심 따위는 없는 사내입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것도 접고 흑도 짓이나 하고 있습죠.”
“자기객관화가 아주 잘되어 있는 거 칭찬하마.”
“감사합니다.”
“여하튼 신경 쓰지 마라. 우린 우리가 할 거 하면 된다.”
“이렇게 계속 말입니까?”
능허가 조금은 불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천무백이 쓰게 웃었다.
슬쩍 주위를 둘러보자, 어마어마한 숫자의 무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자세히 보면 똑같은 무복을 입은 무인들끼리 나뉘어져 있었다.
창검문을 비롯해서 여러 문파에서 자발적으로 따라 나선 이들이었다.
“우짜겠냐. 싸우겠다고 따라오는데.”
“뭐, 이것도 주군이 의도하신 거지요?”
천무백은 대답 대신 쓰게 웃었다.
그러자 능허가 ‘그럼 그렇지’하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백도 결집.
정의맹이 핵심거점만 지키며 나머지 백도문파는 자연시 소외되고 오히려 이 전쟁에서 빠지겠다는 식으로 이탈현상이 발생하는 가운데.
천무백이 나서자 무서울 정도로 결집하고 있었다.
‘그럼 정의맹이 저렇게 움직인 것도 주군의 입김이 닿은 거겠네.’
새삼 정의맹의 행동이 이해된다. 정의맹은 마도에 대항할 시간을 벌고, 동시에 천무백은 나머지 백도를 결집하고.
이 얼마나 깊은 심계란 말인가. 천무백에게 아무리 불손한 능허라도 지금만큼은 감탄의 시선으로 천무백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사실 천무백은 그런 건 의도하지 않았다. 그냥…….
‘새로운 마도 만들려고 그런 건데.’
혈귀곡 잔당들 다 쳐 내면서 옥석 고르기를 하는 것이다.
근데 어쩌랴. 마도 놈들 잡아서 괜찮은 놈 건져 내려면 마도를 찾아가야 하고.
마도 놈들이 어딨겠는가. 백도문파나 공격하고 있겠지. 그래서 천무백이 나선 것뿐이다.
더구나 천무백은 이렇게 자신을 졸졸 따라오는 무사들을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무슨 거지떼들도 아니고……누가 보면 개방 애들 데리고 다니는 줄 알겠네.’
창검문을 비롯해 천무백을 따라나선 백도 무인만 무려 삼백여명.
이들은 천무백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고 있다. 사실상 천무백 직속 무사대나 다름없었다. 덕택에 천무백은 계획을 바꿔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저기 혁련천강 같은 놈들 좀 더 모으려고 했는데. 이렇게 큰 덩어리가 움직이면 저들도 가만히 있진 않겠어.’
이만한 규모가 움직이면서 마도 놈들을 쥐잡듯 잡고 있으니, 반응이 올 수밖에 없다.
‘뭐, 그럼 별 수 없지. 걔들도 다 치고 괜찮은 놈들 골라내야지.’
그럼 과연 누가 올까.
‘아니, 누가 올 걸 기다릴 필요도 없다.’
천무백은 피식 웃었다.
저들이 천무백의 동태를 살피는 것처럼, 천무백도 저들의 동태를 살피고 있다.
하오문과 개방의 정보력은 물론.
마도에 잠입한 검종 소속 마인들로부터.
“능허야.”
“예.”
“너는 사냥꾼이 맹수를 잡을 때 어떻게 하는지 아냐?”
“어떻게 합니까?”
“덫을 놓고 맹수가 오길 기다리거나. 아니면 맹수를 잡으러 보금자리로 직접 뛰어들거나.”
“……주군은 어떤 유형인데요?”
“가자.”
“아니, 또 어딜 가요.”
“미친놈 잡으러”
“미친놈은 여기에 있는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