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89화>
289. 마도가 아니라 무도(武道)
낯설지 않은 광경이다.
다만 눈에 익숙하다고 한들, 무덤덤해지는 건 아니다.
혁련천강은 눈앞에 벌어지는 만행, 아니 참상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비명과 신음. 코끝을 찌르는 혈향과 불에 타는 전각.
대지를 가득 메운 시체.
그 위를 낄낄거리고 시신의 목에 칼을 박으며 확인 사살하는 수하들.
여러번 보는 광경이다.
‘벌써 몇 번째지.’
산서성에서 전투를 벌인 것만 벌써 열두 번.
그 말은 곧 열두 개의 문파를 무너뜨렸단 얘기다.
어마어마한 숫자다.
문파라는 집단은 그렇게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신의 명성을 내세워 혈족으로 이뤄진 세가와는 다르다.
혈족이 아닌 오로지 무공의 동질성으로 뭉친 단체인 만큼 문파는 설립 자체가 쉽지 않다.
강호에 널리고 널린 게 문파요, 어디 시골구석을 가도 문파 하나쯤은 있다는 게 강호라지만.
문파란 수년, 수십 년을 오로지 사람을 죽이는 기술만 갈고 닦고, 거기에 내공까지 쌓는 족속들이 모인 집단이다.
그런 문파를 열두 개나 멸문시켰다.
멸문(滅門).
말 그대로 없애버렸다.
사실 그건 혁련천강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않는다.
눈앞의 시체? 혈향?
‘마도천하를 위해선 당연한 일.’
당연하고도 마땅한 일. 동정심도, 안타까움도 들지 않는다.
저들은 백도요, 강호를 차지한 대적이다.
자신은 마도요, 강호에서 쫓겨나 변두리에서 풍요로운 중원을 바라만 봐 왔다.
무사로서 적을 베고 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다만 그의 심경을 툭툭 건드리는 광경이 여지없이 눈앞에 펼쳐졌다.
“까아아악!”
“사, 살려 주시오!”
“이 개같은 마도 잡놈들아! 어찌 무공도 익히지 않은 아녀자들을······!”
전리품이라 해야 할까. 전투 후 늘 따라오는 약탈은 익숙하다.
문파에서 일하는 하녀들, 무사들의 식솔들 전부가 약탈대상이었다.
이리저리 농락당하며 시체 밭에서 겁탈당하는 모습은 목불인견의 참상이었다.
혁련천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겁탈 때문에 심정이 불편해지는 건 아니다. 그게 뭐가 문제겠는가.
마도에는 엄연히 흡정공이 존재한다.
그러나.
“무공을 익히지 않는 자들이다. 뭣들 하느냐!”
저들은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 내공 한 줌 느껴지지 않는다.
흡정공 자체도 상대를 겁탈하든 해서 내공을 흡입하는 것에 목적을 둔다.
내공도 없는 양민들을 겁탈하는 게 흡정공이겠는가?
마도의 적은 백도다. 백도는 무인이다. 저들은 무인이 아니다. 적이 아니란 뜻이다.
정마대전은 오롯이 무인과 무인들의 대결에서 끝나야 한다.
그것이 혁련천강의 지론이었다.
하나 그의 말은 소귀에 경 읽기처럼 무시당했다.
아니, 오히려 멸시 가득한 어조로 낄낄대는 중얼거림이 들렸다.
작게 말했지만, 들리지 않으리라고 생각할 수가 없을 정도로 또렷한 목소리였다.
“어디 듣도 보도 못한 종단 출신 주제에 대장이 됐다고 위세는······.”
혁련천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새삼 저들과의 신분 차가 절실하게 체감됐다.
서열이 아닌 신분 말이다.
마류칠종.
그중에서 새외에서 엄청난 활약을 한 광종(狂宗) 마인들의 위세는 보통이 아니다.
마도의 근본이자 근원인 마종(魔宗)이야 격이 다른 마인들이니 논외로 친다 하고.
현 마도에서 광종에 범접할 마인들은 없다. 혈불의 혈종이 가장 위세가 강했으나, 종주 본인이 죽고 무너졌다. 암종이야 머리를 잘 쓰는 거로 마도에서 유명했지만, 무력의 척도를 따지면 부족하다. 하물며 귀마 역시 실종. 곧 죽지 않았겠는가.
화종(火宗)이야 사십 년 전 정마대전에서 피해가 커서 새로운 종주조차 탄생시키지 못하고 지리멸렬하고 있고.
독종(毒宗)이야 애당초 패권을 노리는 작자들이 아니니까.
최근 검종(劍宗)의 소수가 혈귀곡에 투신한 이후 마도 여기저기로 흩어졌지만, 바닷물에 물 한 동이 붓는 것만도 못하다.
그러니 이 전쟁에서 광종 마인들 위세는 어마어마했다.
한데 다른 종단 출신도 아닌, 말 그대로 ‘비천한’ 출신의 혁련천강이 이 마인들을 이끈다는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다.
“이봐, 유참.”
“왜 부르셨소?”
유참이라 불린 마인이 귀찮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답은 했으나 눈빛은 살기로 번들거렸다.
아무리 봐도 상관의 부름에 답하는 수하의 태도가 아니었다.
마인이라서 그렇다고?
아니, 마인이니까 더욱 엄격한 것이 마도다. 철저한 강자존의 세계.
그만큼 위계질서는 뚜렷하다.
한마디로 유참은 혁련천강을 무시한 것이다. 간담이 커서?
“광종 놈들이 하나같이 광증(狂症)이 도진 놈들이지만, 규율은 미친놈을 비켜가지 않는다.”
“······규율?”
유참의 얼굴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희번득해진 눈동자를 보면, 말 그대로 악귀였다. 싸한 긴장감이 주위를 둘러쌌다.
수하 중 절대다수는 광종 출신.
아무리 광증이 도진 미친놈들이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 거야 당연한 이치. 유참의 뒤에 마인들이 주르륵 늘어섰다. 반면 혁련천강의 뒤에는 고작 다섯. 모두 마류칠종 중 그 어디도 아닌 비천한 출신이다.
한데도 혁련천강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명령불복종에 대한 처벌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
“내가 그걸 알아서 뭐 하오?”
“상관으로서 규율을 주지시키는 것도 당연한 일.”
유참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실력 하나 있다고 지는 다른 척 위선 떠는 모습이. 똑같은 마인 주제에.
유참의 머릿속에 단어 하나가 떠올랐다. 그간 불만이 쌓인 같은 광종의 마인들이 자신들의 뒤로 몰리는 걸 확인했다.
하극상.
의외로 마도에서 하극상은 흔한 일이다. 우두머리가 약해지면 그 자리를 노리는 일이야 늘 일어났다. 강자존의 세상이니까.
유참이 그런 마음을 드러내려는 순간.
서걱.
“······!”
유참의 머리가 바닥을 데구루루 굴렀다.
주위가 질식할 것 같은 침묵에 빠졌다. 그 사이로 혁련천강의 나직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즉참이다. 어디, 규율이 합당한지 한번 따져 볼 놈들 더 있나?”
“······.”
광증이 도진 미친놈들이지만, 적어도 목숨 앞에서는 제정신을 차리기 마련.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목을 베어 버리는 살 떨리는 냉혹함과 눈으로 쫓기 힘들었던 검격에 마인들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긴장감은 여전히 유지됐다. 누구 한 명이 반발하면 대대적인 하극상이라도 벌어질 듯한 찰나.
척후를 나갔던 수하로부터 보고가 들어왔다.
“창검문을 치러 갔던 녀석들이 다 죽었다고?”
깜짝 놀랄 소식에 혁련천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리고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바로 움직인다. 내공 갈무리하고 정신 똑바로 차리도록!”
창검문을 치러 간 작자는 혈귀곡의 칠성이라 불리던 암종의 무인.
실력 하나만큼은 혁련천강이 흠모할 정도였다. 그런데 죽었다.
동료라고 생각하면 참으로 슬픈 소식이지만, 애석하게도 마인은 슬픔을 모른다.
오히려 들뜬 표정이 떠올랐다.
‘더 강한 무인······ 누구지. 구파일방의 절대고수인가?’
드디어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난다는 기쁨이었다.
* * *
“커헉!”
여지없이 귀를 찌르는 비명과 함께 시체가 늘어난다.
그러나 일전과 다른 점은, 늘어난 시신이 적들이 아니라 아군이라는 사실이다.
혁련천강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척후가 말한 적들을 만났다.
숫자는 대략 육십여 명.
반면 마인들은 백 명이 넘는다. 숫자로도 이쪽이 압도적이다. 더구나 혁련천강은 숫자만 밀고 몰아붙이는 미련한 자가 아니다.
적들의 수준이 그렇게 뛰어나지 않음을 진즉에 깨달았다.
다만 저들 사이로 팔짱을 낀 채 여유로운 얼굴로 쳐다보던 젊은 사내가 께름칙할 뿐이었다. 나머지는 마인들의 출현에 긴장한 표정으로 칼을 꺼냈지만, 젊은 사내만큼은 여유를 잃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께름칙하다고 고작 한 명 때문에 뒤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칫하면 하극상이 벌어졌을지도 모를 정도로 수하들의 불만이 팽배했다.
여기서 꼬리를 말고 물러난다? 혁련천강은 절대로 미련하지 않았다. 그래서 싸웠다.
그리고 결과였다.
“끄아악!”
벌써 바닥에 스무 명이 넘는 마인이 쓰러졌다.
기세 좋게 광기 어린 웃음을 내뱉으며 달려들던 놈들이 가장 먼저 죽었다.
적들하고 대대적으로 부딪쳐서?
아니다.
상대편에선 오로지 한 명만이 우뚝 걸어 나왔을 뿐이다.
바로 혁련천강이 께름칙함을 느꼈던 젊은 청년에게서.
그제야 혁련천강은 사내가 누군지 깨달았다.
“천룡검협!”
마도에서도 그 이름은 유명했다. 다른 구파일방의 장문인이나 절대 고수보다도 더.
어쨌거나 다른 백도 인물들과는 달리 혈귀곡을 무너뜨리는 둥, 가장 어마어마한 피해를 준 존재였으니까.
천무백의 검이 한차례 궤적을 그을 때마다 허공에 붉은 실선이 그어졌다.
“…….”
마치 그림 같았다. 한 폭의 그림. 핏빛의 물감으로 허공에 그려지는 광경.
혁련천강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렸다.
눈으로 쫓기도 힘들 빠른 궤적이다. 그야말로 쾌검 중의 쾌검이었다.
한데 지금 그 궤적이 보였다. 핏줄기가 검의 궤적대로 허공에 새겨졌으니까.
궤적을 본 혁련천강은 가슴이 뛰었다.
‘어찌 저런 궤적으로 검이 움직일 수 있지?’
마도에 있으나 그 역시 하나의 무인.
때문에 저 핏빛 궤적이 얼마나 이해하기조차 어려운 경지인지 깨달았다.
혁련천강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직였다. 저 궤적을 조금만이라도 흉내 낼 수만 있다면. 아주 약간만이라도 깨달음을 얻어 저만한 경지를 바라볼 수만 있다면.
혁련천강은 천무백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마도를 상대하는 천무백의 계획은 간단했다.
“싹 다 죽여. 다만 헤까닥 돈 놈들로만.”
헤까닥 돈 놈들의 기준은 역시 단순했다.
“적어도 무도(武道)가 무엇인지 아는 놈들만 빼고 죽이란 거야.”
당연히 능허로선 모를 얘기였다.
무도가 무엇인지 아는 마인과, 아닌 마인을 어찌 구별한단 말인가?
“그냥 다 죽이면 안 됩니까?”
“장노에게 힘 실어 주려면 소수지만 확실한 실력이 있는 놈들이 필요해.”
“실력 있는 놈들이면 마도에서 다 한자리 차지하겠죠. 걔들이 뭐 미쳤다고 주군 계획에 동참해서 장노 밑에 들어갑니까?”
“능허야.”
“예.”
“이 검이란 게 말이다. 정말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사술 같은 게 걸려 있단다.”
“무슨 소립니까.”
“자신이 평생 간직해 온 가치관과 사고방식마저 바꿀 수 있을 정도로, 때론 검에 미친놈들이 나오거든. 매 시대, 어느 곳에서나.”
“……그건 주군이죠.”
“그래, 나 같은 놈 말이다.”
천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검종의 출현 자체가 바로 그랬다.
천무백은 마도에 있었지만 오로지 검 하나만을 믿고 질주했고, 그런 천무백에게 반해 하나둘 모여드는 검에 미친 귀신들이 세력을 형성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검종.
천무백은 검종의 세력을 크게 키워, 앞으로의 마도를 대체하게 할 속셈이었다.
새외문파로서 오로지 검도(劍道)에만 뜻을 두는 문파.
그러려면 장노를 비롯한 검종을 키워 줘야 한다.
지금의 검종은 천무백이 패천검마로서 활약하던 때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쪼그라들었고, 귀마를 비롯한 훗날 전쟁에서 살아남은 마도의 끄나풀들을 상대하기엔 모자라니까.
하나 천무백의 기준에 들어맞는 마인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때문에 천무백은 자비를 베풀기로 했다.
바닥에 무릎 꿇은 채 넋을 놓은 혁련천강.
눈을 본 천무백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데. 눈빛이나 검을 휘두르는 데 담기는 감정이나. 다만 수하들이 죽어 나가는데 감정 없는 게 께름칙하지만, 그거야 마인이니 별수 있나.’
이 정도만 돼도 천무백의 기준에 부합한다. 마인이라는 걸 감안하면 말이지.
천무백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너 이제부터 검종해.”
“······뭐라?”
“쓰는 검 보니까 마류칠종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출신인 거 같은데. 왜, 그래도 검종은 싫어? 작아도 마류칠종이야. 인마.”
“당신이 어찌…….”
백도의 인물이 어찌 저런 말을 한단 말인가. 혁련천강의 얼굴에 이해하기 어려운 빛이 떠올랐지만, 천무백은 신경 쓰지 않고 자기 할 말만 쏟아 냈다.
“마도(魔道)가 아니라 무도(武道)를 걸어라. 그것이 무인으로서 사는 삶이다.”
혁련천강의 눈이 부릅떠졌다.
“나를 따라라. 마인(魔人)이 아닌 무인(武人)으로 만들어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