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88화>
288. 어쩔 건데?
칠성(七星)은 어째서 자신이 살아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나만?’
그날, 벌어진 일을 떠올리자 몸이 절로 파르르 떨렸다.
두려웠다. 뼛속 깊이 각인된 공포가 살아있는 생물처럼 생생하다.
심장이 거세게 박동하고 식은땀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전부 죽었다. 자신만 제외하고.
천룡검협 천무백.
별안간 나타난 그는 말 그대로 재해였다.
지진이 예고하고 흔들리던가? 홍수를 예측할 수 있던가?
그랬다. 예상할 수도 없는 자연재해였다.
‘인간이 막을 수 없다.’
저 대단한 천마께서도 홍수를 막을 순 없다. 물론 본인이야 유유하게 홍수 속에서도 살아남겠지.
땅이 흔들리는 지진을 막을 수도 없고, 수백 년 된 거목은 물론이고 궁궐 같은 집까지 날려 버리는 거대한 폭풍도 막을 순 없다.
바로 재해다.
칠성이 느낀 감정이 그랬다.
‘그게 재해가 아니고 뭐겠나?’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픽픽 쓰러지는 수하들.
너무 허무해서 오히려 환각을 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몇몇 실력 있는 놈들이 급히 진을 형성해서 막아섰지만, 재해 앞의 인간일 뿐이었다. 터지는 화산 아래에 있는 인간, 홍수에 휩쓸리는 인간, 폭풍에 휘말리는 인간.
천무백은 그저 베었다.
검을 베고, 긋고, 찌르고 휘둘렀다.
변화무쌍한 초식도, 화려한 움직임도, 강렬한 느낌도 없었다.
일련의 모든 과정이 단순했다.
검을 처음 배우는 수련생들이나 할 법한 움직임.
하지만 하나도 막을 수 없었다.
분명 궤적을 봤지만 몸이 굳어 버렸다. 마치 거대한 재해 앞에서 아무것도 못 하고 무기력해지는 인간처럼.
수하들이 죽은 것 따위는 슬프지 않다. 그는 마인이었으니까.
그에게 떠오르는 감정은 오로지 두려움과 혼란이었다.
“왜 나만 살려 줬단 말인가?”
끝내 참지 못하고 목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속으로만 되뇌이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의문.
그리고 의문에 대답해 준 건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다.
“살면 좋은 거지, 뭐가 그리 궁금하더냐?”
“……귀마 어르신!”
칠성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동안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귀마가 멀쩡히 살아서 눈앞에서 나타났다.
그것도 천무백에게 잡힌 지금 여기서.
순간 칠성의 머릿속이 휙휙 돌아갔다.
귀마는 천무백을 잡으러 출정했다가 연락이 끊겼다.
이후에 혈불이 천무백의 손에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으니, 귀마도 죽었으리라는 얘기가 곧 정설이었다. 혈귀곡이 그렇게 유야무야 흩어져 광종의 손아귀에 흡수된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니던가.
순식간에 상황 파악이 끝난 칠성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도를 배신한 것입니까?”
거칠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
만일 내공이 금해져 있지 않았다면, 손발이 묶이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출수해서 머리통을 부쉈을 것 같은 투기가 절절하게 흘렀다.
귀마가 쓴웃음을 흘렀다.
“배신이라니? 나는 마도에서 태어나 마인으로 자란 내가 말이냐?”
“그렇다면 왜 살아 계십니까? 그리고 천룡검협의 곁에서 목숨을 구걸하신 거 아닙니까?”
귀마가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마도를 지키려는 마음이다.”
“어처구니가 없군요. 마도의 대적인 천룡검협 곁에 붙는 것이 마도를 지킨다고요?”
“이대로 가면 마도는 파멸될 테니까.”
“……!”
순간 말문이 막힌 칠성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 대전의 끝은 파멸이다. 분명해.”
“마도가 진다는 얘깁니까?”
“지는 것 따위하고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사십 년 전에도 창천검신에게 패배했지만, 마도는 살아남았지. 하지만 이젠 한 줌 재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질 것이다.”
칠성은 입을 다물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소리란 말인가.
차마 반박할 수 없던 이유는 귀마의 표정 때문이었다.
칠성은 삼십 년 가까이 귀마의 곁을 보좌했지만, 맹세컨대 저런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저 대단한 혈불과 대립각을 세울 때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굳은 눈매, 경직된 얼굴,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
‘마도가 파멸한다고?’
패배한다는 예측 자체도 어불성설이다.
혈귀곡이 힘없이 무너졌지만, 새외마도는 그런 혈귀곡을 그저 하위조직 중 하나로 여길 정도로 강대하며 거대하다.
광종의 미친놈들이 전면에 나서 싸우고 있지만 전부는 아니다.
마도의 가장 근원이자 근본.
가장 먼저 마도라는 이름을 피워 내고, 계속해서 천마를 독점하며 배출해 낸 하나의 종단.
마종(魔宗)의 핵심들은 아직 본격적으로 나서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이미 감숙, 광동, 광서, 운남을 차지했고 이제 산서성도 코앞이다.
이런 상황에서 패배를 예측하고, 심지어 패배가 곧 멸망이라는 얘기가 말이나 되는가.
하나 칠성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귀마는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그걸 막기 위해서 움직이는 것뿐이다. 새로운 마도가 만들어지지 않는 이상, 마(魔)라는 이름은 강호에서, 천하에서 지워질 것이 분명하니까!”
귀마의 눈동자가 희번득하게 번뜩였다.
본래 처음엔 그저 야망이었다. 탐욕이었다. 천마가 되고 싶다는 욕심. 마도의 정점이 되고자 하는 마음. 그래서 천무백과 협력했다. 천무백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지켜볼수록, 천무백을 바라볼수록 귀마는 공포로 전율했다.
“놈은 진정으로 마도를 없앨 수 있는 유일한 자다. 가공할 실력을 갖췄고, 이해 못 할 심계가 번뜩이며, 무엇보다 천하의 그 누구보다 단단한 철심(鐵心)과 지독한 독심(毒心)을 갖췄다!”
칠성은 침묵했다. 귀마의 목소리는 사정없이 떨렸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 잘 알았다.
십 년 전이었던가.
봤다. 귀마가 저리도 두려워하는 모습을. 천하의 귀마가 숨조차 쉬지 못하고 광증이 도진 것처럼 미쳐 가는 모습을.
단 한 사람 앞에서.
‘천마…….’
마도의 지고한 존재, 천마 앞에 부복하며 저런 감정을 보였었다.
칠성은 침을 꼴깍 삼켰다.
‘천룡검협에게 같은 두려움을 느낀단 말인가?’
그것도 천하의 귀마가?
귀마의 어조는 점점 뜨거워졌다.
“놈에게 협력하지 않으면, 정말로 마도의 모든 걸 뿌리부터 뽑아 불태울 것이다. 그런 놈이야. 그래, 차라리 그것뿐이라면 낫다. 하지만 봐라! 저 모습들을!”
귀마는 손을 뻗었다.
가리킨 곳에는 옹기종기 모여서 검을 닦고 있는 일단의 무사들이 보였다.
누군지 잘 알았다.
바로 칠성 본인이 습격했던 창검문의 무사들이 아닌가.
“뭉치고 있어. 놈 하나에게로. 투신 곽용이 만들어 낸 정의맹은 과거의 무림맹을 답습할 뿐이다. 거대문파를 대변하고 그들만의 이권을 수호하는 연맹체로 바뀔 게 분명하다. 하지만 저자는 달라!”
“…….”
“모든 이들을 끌어모으는 힘을 갖고 있다. 과거 창천검신이 그랬듯이. 보라. 저 무사들의 표정을. 보고도 드는 생각이 없더냐?”
칠성은 가만히 무사들의 표정을 바라봤다. 저 멀리 천무백이 팔짱을 껸 채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런 천무백을 흘깃흘깃 바라보는 무사들의 모습.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칠성은 귀마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아…….”
단순한 호감이 아니라, 저 구름 위를 존재를 바라보는 듯한 경외감.
강렬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어디서 본 듯한 표정들이다.
“천마…….”
천마 앞에서 마인들이 보이는 표정이다. 감정이다.
귀마가 씁쓸하게 웃었다.
“천마는 우리에겐 신의 대리자이자 화신이다. 그분이 하는 말씀이라면 반박하지 못하고 따를 뿐이다. 그런 존재시다. 한데 저자를 봐라. 백도무림에게, 어떤 존재로 보이는가?”
“…….”
백도의 천마.
그 사실을 깨닫자 칠성은 저도 모르게 침음성을 내뱉었다.
마도를 멸하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를 가진 자가 백도 무림 전체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권위와 존경, 힘이 있다면?
“뿐이랴! 정의맹도 저놈이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 구파일방으로 대변되는 백도의 거대문파들이, 저놈의 손아귀에 있단 뜻이다!”
“……!”
그제야 칠성은 귀마와 같은 표정이 되었다.
“저런 놈이, 마도를 멸하고자 한다. 거기에 무려 검존까지 합세하여 아예 세상에서 지워 버리려고 한다! 못할 것 같더냐?”
“…….”
귀마가 쓴웃음을 내뱉으며 말했다. 미친 듯이 높아가던 목소리의 어조가 갑자기 차분해졌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마도를 살리겠다고. 그것이 저놈이 원하는, 그저 새외문파에 불과하더라도 마도라는 이름은 살리겠다고.”
“어르신…….”
“난 마도를 지킬 것이다.”
칠성이 복잡한 눈빛으로 귀마를 바라봤다.
* * *
“아주 웅변을 하고 있는데요?”
능허의 말에 천무백이 상념에서 깨어나 고개를 돌렸다.
천무백이 피식 웃었다.
“내버려 둬. 살려고 발악하는 거니까.”
“저 노인네도 짠하네요.”
“짠하긴. 노욕이 그득그득한 양반인데.”
“다 주군이 의도하신 거 아닙니까. 일부러 혈귀곡 잔당 중에 귀마의 입김이 강하게 닿은 놈들은 다 제거하고 있잖아요.”
그야 당연한 일이다. 귀마는 그저 얼굴마담일 뿐이다. 표면적으로 새로 탄생하게 될 혈귀곡의 우두머리.
새롭게 만들어질 마도의 핵심은 검종이 차지할 것이다.
오로지 검과 무도만을 추구하는 새로운 형태의 마인들로 이뤄진 마도.
천무백이 생각하는 새외문파인 마도다.
하니 귀마의 입김이 강하게 닿은 마인들을 끌어모으게 내버려 둘 수 있는가?
천무백은 적절하게 처리하면서 검종에 흡수될 수 있는 마인들만 살려 두고 있었다.
“그럼 칠성 저놈은 왜 살려 줬습니까?”
“귀마가 눈치는 빠르잖냐. 어쩔 수 없이 자신도 검종을 가까이 두지만, 검종이 어디 제 말 듣는 애들이더냐. 그러니 자기만의 친위세력을 만들려고 하는 거지.”
“그러니까 왜 그렇게 내버려 뒀습니까? 주군 계획대로라면 귀마는 철저하게 팔다리 잘려야 하지 않습니까?”
“철저하게?”
천무백은 피식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너무 태연한 반응에 능허가 당황했다.
“뭣 하러?”
“예?”
“뭣 하러 그렇게 철저하게 해?”
“그야…….”
“뭐 혹시 귀마 저놈이 마음이 확 변해서 반기라도 들까봐?”
“그럴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저놈 혈귀곡에서 이인자였고, 그 뭐시냐. 암종이 원래 약삭빠르다면서요?”
“하라고 하지 뭐.”
“……?”
“하면 제깟 놈이 어쩔 건데?”
능허는 순간 입을 쩍 벌렸다.
천무백은 정말 신경도 쓰지 않는 모양새였다. 귀마가 반기를 들어봤자, 하등 상관없다는 태도. 그야말로 단숨에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뚜렷이 드러났다.
‘아니지. 그게 아니야.’
능허는 눈치가 빨랐다. 천무백의 입가에 떠오른 희미한 미소를 보고 가정 하나가 벼락처럼 머릿속에 떠올랐다.
‘혹시 일부러……?’
귀마는 그저 얼굴마담이고, 새로운 마도의 핵심은 천무백의 말이라면 절대복종하는 검종이 될 것은 앞서 말한 일이다.
하지만 얼굴마담이라고 무시할 수는 없다.
귀마니까. 혈귀곡의 이인자였고 암종의 종주니까.
그렇다고 그냥 확 제거하기엔 확실히 문제가 있다.
어쨌거나 귀마의 얼굴을 보고 모여드는 마인들이 아닌가.
귀마가 제거된다면, 천무백은 곧 그들의 적이 된다.
‘그래서 일부러 제거할 명목을 주는 건가?’
오히려 반기를 들라고 부추기게끔?
저토록 욕심이 많은 자라면, 자신의 친위세력이 강성해진다면 다른 생각이 들 것도 자명하다.
마도나 백도나 흑도나 한 가지 법칙은 동일하다.
나에게 먼저 칼을 들이민 자는 적이라는 것.
그리고 그런 적을 베는 것 역시 당연한 섭리라는 사실.
하면 천무백은 거기까지 유도하는 게 아닐까?
“……!”
부르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능허는 몸을 떨었다.
“왜 떨어?”
“아…… 아닙니다.”
“싱겁긴.”
천무백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렸지만, 능허는 식은땀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도대체 어디까지 보고, 어디까지 생각하고, 어디까지 움직이는 것이야.’
솔직히 말해 능허는 천무백의 전생을 완전하게 신뢰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부정하진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저 젊은 나이에 이만한 귀계와 심계를 갖출 수는 없으니까.’
어쩌면 합당한 이유였다.
그때, 천무백이 팔짱을 풀었다.
“이제 슬슬 반응이 오나 본데.”
“예?”
능허의 고개가 천무백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