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287화 (287/318)

<검신재생 287화>

287. 당대의 거인

싸움은 정말로 허무하게 끝났다.

창검문주를 비롯한 무인들은 좀처럼 믿기 힘든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발에 치이는 수많은 시체.

창검문은 애당초 규모가 크지 않다. 소수 정예를 지향하니, 총 인원은 백여 명 안팎이다.

한데 지금 문파 장원에 널린 시체의 숫자만 해도 백 구는 훨씬 넘는다.

하나 같이 검은 무복을 입은 사내들의 시신.

시신을 자세히 살펴보던 창검문주는 저도 모르게 섬뜩함을 느꼈다. 잔뜩 경직된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자신의 의지로도 어찌할 수 없는 근원적인 무언가에서부터 느껴지는 두려움이자 경외였다.

아니, 창검문주는 두려움과 경외감을 구분할 수 없었다.

‘깔끔하다. 더없이 깔끔하다. 이것이 검흔이란 말인가? 애당초 목이 잘린 채 태어난 듯 매끈하지 않은가.’

언젠가 본 적이 있다.

평생을 소를 도축한 푸줏간의 사내가 소의 목을 칠 때 이렇다.

하루에 수십, 수백 번을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다 보니 그 대도의 휘두름만큼은 일대 절기나 다름없다, 소의 목에서 피가 솟구치지 않는 게 증거였다.

너무 깔끔하게 잘려서 피조차 솟구치지 않고 그냥 송골송골 단면에 맺힌 것이다.

지금의 시신이 그랬다.

“어찌 이럴 수가…….”

창검문주로선 도저히 짐작조차 되지 않는 아득한 경지.

두 눈 부릅뜨고 똑똑히 봤다. 천무백의 검이 번쩍일 때마다 우수수 바닥에 쓰러지던 마인들의 모습을.

그건 숫제 재해(災害)였다.

마도에게 들이닥친 재해. 재해가 끝내 모든 걸 집어삼켜 조용해지자 전각 안으로 도망쳤던 식솔들이 쭈뼛쭈뼛 걸어나왔다.

무를 익히지 않은 장원의 하인들, 무인들의 식솔들, 그중엔 창검문주의 나이든 노모도 있었다.

심약한 노모가 보기엔 끔찍한 광경이라 창검문주가 급히 무사에게 눈짓했다.

노모는 별안간 다짜고짜 넙죽 엎드렸다.

“아이고, 부처님…….”

“…….”

부서진 벽 너머로 본 것일까.

하긴 못 볼 수는 없으리라. 어둠 속에서 붉은 눈을 빛내며 괴성을 내지르며 광소를 터뜨리던 마인들.

그들의 칼날에 무력하게 죽어 나가며 절망했다.

평소 근방의 암자를 매번 찾아 아들의 안녕을 빌던 노모는, 당연히 미친 듯이 부처를 찾으며 빌고 또 빌었다.

그런 여념이 닿았던 것일까.

순백의 후광과 함께 구원이 찾아왔다.

절박한 상황에서의 상상도 못했던 도움.

진짜 부처가 왔다.

저 무지막지한 마귀를 그저 빛으로 감싸 모조리 무너뜨린 여래가.

비단 부처뿐만이 아니다.

털썩, 털썩.

하인들, 무인들의 식솔들이 하나둘씩 무릎을 꿇거나 넙죽 엎드렸다.

몇몇은 부처를 찾았고, 몇몇은 서장에서 들어왔다는 천주를 찾았고, 몇은 관우와 같은 과거의 신을 찾았다.

그랬다.

이들에겐 천무백은 그런 존재로 다가왔다.

비단 무공을 모르는 평범한 이들에게만 그럴까. 잔뜩 붉게 상기된 무인들의 낯빛은 흠모를 넘어 한없는 경외감의 발출이었다.

창검문주는 비틀거리며 천무백에게 다가갔다.

새하얀 후광 너머로 보이는 담담한 얼굴은 언뜻 보면, 오연하기 짝이 없었다.

‘참으로 영웅의 기세가 아닌가?’

한데 그것이 오히려 너무 어울리다 못해, 자연스러웠다.

오연함.

가장 높은 곳에서 가만히 지켜보는 듯한 오연함 아래 드러난 건 강렬한 의지였다.

어디에서 오는 의지인가.

‘단호함.’

의지에 깃든 눈빛은 단호함이었다.

그 단호함이 이내 어디로 향하는 지 깨달았다. 모조리 시체가 되어 버린 마도들.

그런 시체 사이에서 별안간 천무백을 향해 검은 손이 쭉 뻗어왔다.

죽은 척을 하고 천무백이 가까이 다가오자 부지불식간에 기습한 것이다.

단순한 죽은 척이 아니다.

‘귀식대법(龜息大法)!’

호흡을 멈추고 심장 박동마저 멈추는 대법. 거기에 체온까지 낮춰 영락없이 죽은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희대의 공부.

그제야 귀식대법을 사용한 자가 습격 최선두에서 마인들을 이끌던 지휘관 격임을 알아본 창검문주는 기함했다.

제아무리 천무백이라도 저런 기습이라면……!

서걱-!

그러나 우려는 쓸모없었다.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천무백이 검이 한차례 번쩍이더니 놈의 팔이 바닥을 뒹굴었다.

천무백이 나직이 말했다.

“찾았다. 너 칠성(七星) 맞지? 이래서 마도 놈들은. 하여간 비열하기가 능허 저리가라예요.”

자세한 사정은 몰랐지만, 그제야 창검문주는 천무백의 단호한 의지가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마도 척살.

만일 저 칠성이란 자가 귀식대법으로 무사히 살아나갔다면?

천무백이 홀연히 떠난 뒤에 칠성이 귀식대법을 풀었다면?

과연 자신과 무사들은 저놈에게서 식솔들을 지킬 수 있었을까?

마도는 단 한 놈도 남기지 않고 확인 사살하겠다는 강렬한 의지.

창검문주는 그저 길게 장탄식을 토했다.

천무백은 칠성의 팔을 단숨에 자른 뒤, 곧장 혈도를 짚었다.

단 두 번.

눈으로 쫓기 힘들 정도로 혈도를 짚으니, 빳빳하게 경직됐다.

“능허야.”

“예.”

“얘 챙겨라.”

“안 죽입니까?”

“적당히 쓸 만한 놈이다. 귀마가 혈귀곡 흡수하려면 이런 놈도 필요해.”

“제가 들고 갑니까?”

“너 지금까지 놀았잖냐. 나 싸울 때.”

“응원했죠.”

“뒤질래?”

“사실 아까부터 등에 업고 싶어서 엉덩이가 들썩들썩했지요.”

능허가 칠성을 업자, 천무백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뒤늦게 깊은 생각에서 깨어난 창검문주가 황급히 천무백을 불렀다.

“천룡검협!”

“……?”

“어찌, 어찌 바로 가시렵니까. 우리 창검문을 구해 주신 은인이신데, 적어도 보답한 기회는 주셔야지요.”

목숨을 구원받았다. 문파의 안녕마저 구원받았다. 아니, 가족들, 아끼는 수하들의 운명까지 구한 사내다.

이렇게 가버린다고?

세상 사람이 욕하리라. 아무 대접도 하지 않고 보낸다면 말이다.

하지만 천무백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어디 강호에 창검문만 있겠소?”

“……예?”

“지금 이 순간에도 마도 놈들에게 죽어 나가는 이들이 한 둘이 아니니, 내 여유롭게 웃고 떠들며 쉴 시간이 없소. 은혜는, 강호에서 마도가 사라지면 갚으시오.”

“……!”

그리고 천무백은 정말 미련도 없다는 듯이 몸을 훽 돌렸다.

옆에 있던 능허가 ‘거 술 한잔 하곤 갑시다.’하고 툴툴대는게 들렸지만…….

멀어져가는 천무백의 등을 바라보던 창검문주는 별안간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렸다.

그리곤 곧장 몸을 돌려 노모에게 넙죽 절을 했다.

“어머니, 부디 몸 보중하십시오. 꼭 돌아오겠습니다.”

“…….”

노모는 주름진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언제였던가.

군문에 들어 전장에 나설 때도 저런 얼굴이었지. 비록 무공이며, 무인이며, 무림이라곤 단 조금도 아는 바가 없지만.

노모는 긴 경험에서 오는 지혜로 알았다.

“조심하거라…… 부처께서 돌봐 주실 거다.”

창검문주가 일어나자, 살아남은 무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닿았다.

“너희들은 남아서 창검문을 지켜라.”

“문주님, 그럼 문주님은 어디로……?”

“40년 전, 정마대전 때 창천검신의 뒤를 따랐던 선배들은 영웅이 되어 강호를 지켜 냈다. 그중에는 내 조부님도 계셨다.”

“……!”

“나는 갈 것이다. 천룡검협을 따라 마도와 싸우러.”

“……저희도 가겠습니다.”

“아니, 모두가 갈 필요는 없다.”

창검문주가 일일이 무인들과 눈을 마주하며 똑똑히 말했다.

“너희 중에 강호를 지키고자 마음먹은 자, 내 식솔을 지키고자 결의한 자, 칼을 잡고 휘두르는 데 있어 망설임이 없는 자, 그리고……”

창검문주의 시선이 천무백의 등에 닿았다.

자신의 아들뻘 정도 되는 어린 나이.

한데 그 등이 한없이 넓어 보였다. 마치 대해를 보는 듯이.

창검주의 마음속에서 젊은 시절, 의기 하나만으로 칼을 잡고 전장에 나섰던 뜨거움이 별안간 솟구쳤다.

“그리고…… 역사의 뒤를 따를 사람은, 나와 함께 천룡검협의 뒤를 따른다.”

40년 전, 창천검신을 따라 마도와 싸우던 선배들처럼.

창검문주가 가장 앞에 섰고, 그 뒤를 한 명, 두 명씩 일어나 따랐다.

마치 귀신에 홀린 것처럼.

아니, 귀신이 아니었다.

천무백이라는, 명백히 당대의 거인이 눈앞에 있었다.

* * *

비광(非狂).

그의 이름은 참으로 미묘했다.

마도에서도 알아주는 태생부터 미친놈들인 광종.

거기서도 광종의 종주인 천광마의 최측근.

그런 자가 미치지 않았다는 의미로 비광이란 이름을 쓰다니.

참으로 어불성설이지만, 비광은 내심 이 이름이야 말로 자신의 정체성을 그대로 보여 준다고 생각했다.

“난 미치지 않았거든.”

비광은 당당했다.

본인은 미치지 않았다.

하긴, 광종의 다른 마인들을 보면 이게 사람 새끼인지, 짐승 새끼인지 분간이 안 갈 때가 있다.

간혹 자신의 직속상관인 천광마도 그렇고.

그래서일까.

천광마가 그를 유난히 아끼는 이유이리라. 비교적 이성적인 판단으로 전체 판세를 읽을 줄 아니까. 거기에 두둑한 배짱에 담대함도 갖췄고, 일신의 무력 역시 광종에서도 단연 한손에 꼽을 정도.

천광마가 폭주할 때마다 옆에서 적절히 제어하고 조언을 건넬 줄 위인은 광종에 그밖에 없었다.

그래서 비광은 천광마를 착실히 따라 여러 작전을 수행했는데, 별안간 그의 심기를 건드는 사건이 보였다.

“혈귀곡의 칠성(七星)이 이끄는 타격대가 창검문을 공격 중에 궤멸?”

혈불과 귀마가 사실상 사망처리가 된 상황에서 혈귀곡은 머리를 잃었다.

다음 서열인 삼성, 사성은 혈귀곡을 이끌고 새외마도와 따로 활동할 정도의 권위도, 무력도 부족했다.

그러니 혈귀곡은 잘게 쪼개져서 새외마도 곳곳으로 전력이 흩어졌고, 비광은 그중 칠성의 능력을 유의 깊게 보고, 그를 발탁해 광종의 마인으로 포섭했다.

귀마의 수족 중 하나였는데, 귀마가 죽고 차후 마도에서 끈 떨어진 신세였으니, 광종의 포섭에 당연히 허리를 넙죽 숙일 수밖에.

그래서 칠성에게 병력을 주고 중원을 쑥대밭으로 만들라고 보내 줬는데.

“궤멸이라니…… 창검문 따위에게? 정의맹의 정예나 구파일방도 아니고?”

이어 들려오는 보고에 칠성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천룡검협…….”

그자의 소행이다. 그 이름을 본 순간, 비광은 결심했다. 이 보고는 천광마에게 하지 않기로.

‘했다간 당장 놈을 잡으러 가자고 날뛰겠지.’

비광은 다시 생각했다.

자신은 절대 미친놈이 아니라고.

‘침착하게 그 능력을 가늠하고 승부를 걸어봐야 할 놈이야. 다짜고짜 미친놈처럼 찾아갔다간 일을 그르친다.’

여기서 천무백을 잡겠다고 다짜고짜 찾아가는 건 미친놈이나 그렇다.

비광은 미치지 않았다.

그러나.

대체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천광마가 웃으며 방방 뛰었다.

“천룡검협이 모습을 나타냈다고? 어디냐? 어서 가자꾸자. 네 고놈을 애완동물로 만들어서 천마께 바쳐야 하니까!”

천광마는 미친놈이었다.

비광은 한숨을 내쉬었다.

천광마가 이렇게 나선 순간, 비광은 어쩔 수 없이 계획을 다시 잡았다.

솔직히 말해, 그는 한번쯤 천광마와 천무백이 부딪쳐봐야 정확한 무위가 가늠이 되리라고 여겼다.

‘뭐, 종주께서 패배할 수도 있지만 단번에 죽진 않겠지. 죽을 거 같으면 내가 적당한 시점에 개입해서 몸만 휙 빼내는 거야. 내 두 눈으로 놈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래서 비광은 천광마를 말리지 않았다.

천무백과 한번 부딪치는 것. 그리고 여차하면 몸을 빼는 것.

그로서는 합리적인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만일 능허가 이 광경을 지켜봤다면 배를 잡고 웃었을 것이다.

‘천무백을 상대로 여차하면 도망치겠다고? 저 새끼도 미친놈 맞네!’

비광 역시 미친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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