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286화 (286/318)

<검신재생 286화>

286. 가장 강력한 패

청성표국을 떠나 본격적으로 대전에 뛰어들기 전.

천무백은 능허를 나지막이 불렀다.

“능허야.”

“왜요.”

퉁명스런 대답에 천무백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 말투는 대체 언제 고쳐지냐?”

“폭력으로도 굴복하지 않는 기개란 게 있는 법입니다.”

“말투 싸가지 없는 게 기개냐."

“여하튼 왜 그러십니까?”

천무백은 도통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내가 참 많이 살아 봤는데, 아직도 세상을 잘 모르겠단 생각이 불쑥 들었다.”

“또 맥락 없는 말입니까? 그것도 제 항아를 품에 안고서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합니까.”

능허가 짐짓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흘깃흘깃 바라봤다.

부드러운 포에 혹여 감기라도 걸릴까 꽁꽁 감싼 아기가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조그마한 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천무백이 나직이 탄식을 토했다.

“어찌 애가 이렇게 어미의 외모만 편향적으로 물려받을 수 있을까. 세상 참 모르겠다니까. 실로 천우신조 아미냐. 엄마만 닮아서 다행이야 정말로.”

능허의 얼굴이 대번에 찌푸려졌지만, 그도 내심 공감한다는 듯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항아라고 불리는 이 작은 아기는 능허의 늦둥이 딸이었다.

왜 능허가 매번 입에 담으며 자랑을 늘어놓는가 싶더니, 과연 그럴 만했다.

한때 연화루 제일기녀었던 설영의 외모만 물려받은 아이는 미래의 모습이 천무백의 눈앞에 절로 그려질 정도였다.

“끙. 우리 항아 못 볼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아립니다.”

능허의 우는 말에 천무백이 대수롭지 않게 툭 내뱉었다.

“여기 남아 있던가.”

“에이, 내가 눈치가 없나. 이게 웬 떡이냐 하고 덜컥 남겠다고 말하면, 얼마나 패려고 그러십니까?”

“아니, 진심이다. 남고 싶으면 남아.”

“……?”

그저 농담이라 여기던 능허는 천무백의 진지한 목소리에 표정을 바로 했다.

천무백 역시 평소와 달리 진지한 낯빛이었다.

‘뭐야, 저 양반. 왜 이리 무게 잡아?’

어디 천무백이 싸움을 앞두고 긴장한 적이 있던가.

물론 저 얼굴엔 긴장감이라곤 느껴지진 않았다. 하지만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심기일전.

몸과 마음을 제대로 바로하며 싸움에 앞서 철저하게 준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껏 천무백이 여러 싸움에 나섰고, 능허 역시 따랐지만 이렇게까지 심기일전하는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다.

‘매번 여유로웠지.’

지금까지 싸움들이 어디 보통 싸움이었나?

‘그런 상황에서도 매번 웃었던 양반이…….’

저토록 마음을 다잡는 모습이라니.

그렇다면 자신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 분명했다.

굳이 천무백이 떠나기 전, 아이 얼굴 한번 보겠다고 한 것부터 말이다.

천무백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굳이 전장에 나설 필요도 없다. 나를 따라 최전선에서 싸우는 것이야 말로 네 울타리를 지키는 건 아니다.”

“…….”

“강호란 거대한 울타리는 내가 지킨다. 너 같은 흑도가 아니라. 너같이 옹졸하고 속 좁은 흑도 나부랭이는 그냥 너만의 울타리, 너의 가족만 지켜라. 그것이 너와 나의 그릇이다.”

“……그거 절 챙겨 주는 말입니까, 아니면 저 욕하는 말입니까.”

“둘 다.”

능허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자신을 챙겨주는 의도는 분명한데, 어째 표현은 온통 제욕이 아닌가.

하지만 의도만큼은 명확했고, 의도 속에 숨겨진 천무백의 감정 역시 능허는 충분히 느꼈다.

둘 사이의 시작은 분명 악연(惡緣)이었지만, 어찌 사람의 인연이 늘 똑같을 수가 있겠는가.

계절의 변화보다 더 천변만화(千變萬化)가 사람 관계니, 지금에 있어 능허는 진심으로 천무백의 수족을 자처했다.

능허가 사뭇 정색하며 앞에 부복했다.

“주군.”

“어우. 야. 목소리 깔지 마라. 징그럽다.”

“저 안 남고 싸우러 따라갑니다.”

“네 목숨 못 지켜 준다. 전쟁이란 그런 거야.”

“제 목숨은 제가 지키죠. 제가 세 살배기 애도 아니고. 물론 주군 나이 생각하면 그보다 더 어리게 느껴지긴 하겠지만.”

“지금까지 싸움하곤 달라. 혈귀곡의 혈불이나 귀마보다도 더한 놈이 천마다. 혈불엔 못 미쳐도 그만한 괴물이 몇이나 있을지도 몰라.”

“뭐, 우짜겠습니까. 저도 여까지 왔는데. 인제 와서 빠지라고요?”

“미친놈. 천마하고 싸워야 하는데?”

“에이. 천마랑 싸우는 건 주군이죠. 저는 그냥 밑에서 그저 그런 놈 몇 놈 잡으면 됩니다.”

“아주 날로 먹겠다는 말로 들리는데.”

“그래야 나중에 우리 항아가 컸을 때, 어? 아비도 정마대전에서 으이? 천룡검협 옆에서 싸우면서 천마한테 칼 한방 먹여 줬다 말이야. 이렇게 으스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말 기억하마.”

“뭘요.”

“천마한테 칼 한방 먹이겠다는 거.”

“말이 그렇다는 거죠.”

“칼 한방 못 먹이면, 나한테 주먹 한방 먹을 테니 잘 생각해. 어떤 게 더 나을지.”

능허가 멈칫했다가 울상을 지었다.

“……그냥 연화루에 남아 있으면 안 될까요?”

“가자.”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냥 남아 있을……”

이미 늦었어 인마.

“자, 나랑 같이 천마 잡으러 가자.”

천무백, 일어서다.

* * *

곳곳에서 싸움을 걸어오는 마도에 대항하는 정의맹의 대응은 한 문구로 표현할 수 있었다.

선택과 집중.

현재 판세는 분명 마도에 밀리는 모양새였다.

거의 새외나 다름없는 청해성이나 서장은 시작과 동시에 중원의 백도와 모든 연락이 끊겼다.

화들짝 놀라 부랴부랴 대응하기도 전에 이어지는 공격에 감숙과 운남, 광서와 광동이 차례대로 무너졌다.

비단 서쪽에서뿐만 아니라 북쪽과 남쪽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전투에 정의맹이 어떻게 손을 쓰기도 전에 무너진 셈이다.

지금까지 역사에 남은 정마대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늘 서쪽에서 시작했던 싸움이, 이번에는 북, 서, 남쪽에서 동시에 벌어졌다.

정말 문제는 마도의 전력이다.

새외에서 세력을 기른 마도가 전력을 분산하는 선택을 했음에도 그 위력이 전혀 줄지 않은 것이다.

이러다보니 정의맹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극히 좁아졌다.

“전력을 분산해서 곳곳을 틀어막으면?”

“중원은 넓고, 저들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파악도 되지 않는데 흩어져서 막게 한다고 다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설령 막는다고 해도, 전력분산으로 오히려 각개격파 당할 수도 있다!”

실제로 정의맹에서 파견한 무사들이 곳곳에서 궤멸된 사건이 벌어지자, 이 같은 우려는 더 심해졌다.

그 와중에 백도 무림에 공포로 새겨지는 이름이 떠올랐다.

“천광마라는 놈을 강호 공적으로 선포해야 하오!”

“그놈에게 죽어 나간 백도 무인들만 벌써 세 자릿수란 말이오!”

백도무림에서 비명 같은 고함이 연신 튀어나왔다.

천광마는 호위무사 한 명만 대동하고 움직였는데, 사실상 단신으로 움직이다 보니 그 움직임이 종잡을 수 없을뿐더러 기민하기 짝이 없었다.

정의맹에서 곳곳으로 무사를 조직해 파견해도, 귀신같이 나타나 각개 격파하는 데 도가 텄다.

이렇다 보니 정의맹은 결정을 내렸다.

“핵심 거점을 지키며 대응한다!”

선택과 집중이 대두됐다.

핵심 거점을 선택하여 정의맹의 정예무사들을 집중하여 최대한 지키며 기민하게 대응한다.

결국 마도의 칼끝은 구파일방으로 대변되는 백도의 거대 문파에 향할 테니까.

이러한 결정을 내리며 제갈여강은 그나마 혈귀곡이 잠잠해진 사실에 크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설아의 말을 들으면, 귀마를 잡은 것도 천무백이고 이어 들려온 소식에 혈불을 죽인 것도 천무백이니…….”

“혈귀곡이 정상적이었다면 큰일이 날 뻔했소.”

제갈여강과 곽용은 이제야 마도의 노림수가 뭐였는지 깨달았다.

새외마도가 동시다발적으로 밖에서부터 침투해 오면,

안에서 세력을 기른 혈귀곡이 준동하며 구파일방의 핵심을 공격하는 것.

그리된다면 백도무림이 공동으로 대응하기도 전에 세력이 크게 약화되리라.

그 같은 노림수를 깨닫자, 역설적으로 천무백의 위세는 더욱 높아졌다.

혈귀곡의 낌새가 나타나기 전부터.

섬서와 하남에서 퍼지던 역병부터 추적해서 끝내 혈귀곡을 홀로 무너뜨린 장본인.

백도 무림 곳곳에서 그런 천무백을 두고 여러 말이 튀어나왔다.

“그 소문 들어보셨소? 군사.”

“무슨 소문 말씀입니까? 맹주님.”

“우화등선한 창천검신 어르신께서, 속세를 벗어난 후에도 강호를 지키고자 천룡검협을 내려 보냈단 소문 말이오.”

“허…….”

“틀린 말은 아니지. 천룡검협도 검신 어르신의 후인이니까.”

비교적 천무백에게 냉정한 자세를 견지하는 제갈여강도 헛웃음을 터뜨렸지만, 차마 부정하지 못했다.

본격적으로 정마대전이 시작되면서 나날이 하얀 머리칼이 늘어나는 이때.

‘그놈이 없었으면 참…….’

과연 제정신으로 버티고 있을 수 있을까. 백도 무림에 도는 저 소문이 참이기를 절실히 바랐다.

덕택에 제갈여강의 결정은 효과적이었다.

핵심거점에 정의맹이 정예들이 단단히 결집하자, 어쭙잖게 공격해 오는 마도의 세력은 단숨에 전멸했다.

만일 제대로 공격하고자 마음 먹는다면, 마도 역시 전력을 분산할게 아니라 결집시켜서 단번에 결전을 노려야 하리라.

그러나 이런 전략이 완전히 백도무림에 승세를 가져다준 건 아니다.

마도에 급격히 기울여지던 판세를 비교적 원래대로 돌려놨을 뿐.

하물며 부작용도 무척 심했다.

선택과 집중은 필연적으로 ‘선택받지 못하는 영역’이 존재하기 마련.

피부로 다가오는 마도의 위협에 정의맹에 가입했던 중소문파들이 어디 한둘이었던가.

핵심거점이라는 선택에서 멀리 벗어난 중소문파는 마도라는 자연재해를 고스란히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다.

산서성 고현(古縣).

창검문(槍劍門).

시초를 따지자면 전쟁에서 끊임없이 싸운 노련한 병사들의 창(槍)과 검(劍)에서 세워진 문파가 바로 창검문이었다.

비교적 규모는 작지만, 그래도 산서성에서 나름 입지를 갖춘 견실한 중견문파였다.

하나 그런 창검문이 지금 불타고 있었다.

“빌어먹을 마도의 잡놈들이 기어코……!”

부지불식간에 이뤄진 마도의 습격은 깊은 밤을 완전히 태워 버렸다.

창검문의 무인들이 부랴부랴 반격에 나섰지만, 마인들은 실로 강했다.

“커헉!”

“문주님을 지켜라!”

여기저기서 창검문의 무인들이 죽어 나갔다.

그러면서도 무인들은 결연한 얼굴로 창검을 빼들고 문주를 중심으로 결집했다.

항복? 그런 게 무슨 소용이 있나.

마인에게 어찌 항복한단 말인가. 설령 항복한다 해도 저들이 받아 주겠는가?

그저 피를 탐하는 귀신들처럼 닥치는대로 살육을 범하는 저들은 무인이든, 하인들이든 상관없었다.

그저 창검문이란 이름을 깡그리 지워 버릴 것처럼 맹렬하게 칼을 휘둘렀다.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이렇게 버티다 보면, 어디선가 지원군이 오리라는 희망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그런 희망 따위도 없지 않은가.

창검문주가 끝내 울분을 터뜨렸다.

“정의맹이여! 도대체 무슨 정의더냐! 백도무림을 위한 정의? 그저 자기네 구파일방만 대변하고 지키는 작자들이 우리에게 강호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무사들을 요청했던가!”

그야말로 피를 토하는 절절한 절규였다.

아니, 실제로 문주는 피를 토했다.

핵심거점에서 벗어난 창검문은 백도무림의 연합체인 정의맹의 지원범위를 벗어나 있었다.

설령 지원을 요청한다고 해도, 언제 저들이 구원을 보내준단 말인가?

“아아, 전대 문주들께서 일군 창검문의 누각이 내 대에서 무너지는가……!”

죽어 나가는 무인들을 보며, 문주는 그저 울분을 토할 뿐이었다.

눈에 떠오르는 건 깊어가는 절망이었다.

정마대전의 틈바구니에서 그들을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치가 떨리도록 몸이 떨렸다.

그때였다.

별안간 전장의 기류가 묘하게 바뀌었다.

'냄새.'

냄새가 난다. 아주 익숙한.

창검문주는 문파의 근본을 잊지 않았다. 군문에 들어 전쟁에 참전하는 것이야 말로 창검문 무사들의 필수과정.

그 역시 군문에 들어 여러 변방의 전쟁을 겪었다.

그때의 혈향이다. 정확히는…….

"공포의 냄새."

담장을 타고 거침없이 들어오던 마인들 사이로 비명이 울려 퍼졌다.

한번 울린 비명은 끔찍하다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계속해서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미친 듯이 몰아붙이던 마인들의 얼굴에 다급함이 떠오른 걸 본 창검문주의 눈이 동그래졌다.

“지원인가? 대체 누가? 근방에 있는 백도문파라고 해도 거리가 하루아침에 도달할 수준이 아닐 터인데!”

이윽고 창검문주는 지원의 정체를 보고 몸을 잘게 떨었다.

어둠이 잠식한 사이에서 퍼져나가는 마인들의 비명소리.

이어 번져오는 새하얀 빛.

흡사 하늘의 신장이 검을 들고 내려서는 것처럼.

온몸에 순백의 후광을 두른 채 마인들을 너무도 손쉽게 베어 넘기는 자.

창검문주, 아니 장내의 모든 무인들의 눈동자가 거세게 진동했다.

새하얀 빛…… 마인들의 비명……

한때 들었었다. 수년 전에 소림이 마인들의 습격으로 무너질 뻔할 때.

어둠을 잠식하는 빛이 소림을 구원했다고.

그리고 그 빛의 이름이 곧.

“천룡검협…….”

백도무림이 내세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패.

아니, 판을 뒤집을 유일한 패.

천무백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