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85화>
285. 쫄리면 빠지시던가
이제 움직일 때가 왔다.
혈불의 공격을 막아 낸 후 하남을 노리는 공격은 없었다.
검종의 마인들을 통해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혈귀곡은 그야말로 혼란에 빠진 상태였다.
혈불과 귀마의 실종.
그러나 실종이 아니라 곧 사망이란 점 역시 짐작하고 있으리라.
다음 서열인 삼성(三星), 사성(四星)은 분명 강력한 마인이지만, 혈불과 귀마 같은 지휘력은 없었다.
혈불과 귀마.
둘이 사실상 전력의 칠 할이었다.
삼성과 사성은 혈귀곡을 추스리기도 바빠서 감히 하남을 건들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아마 이대로라면 혈귀곡은 새외마도의 하위조직으로 전락하겠지.’
혈불과 귀마는 마교의 대장로이자, 혈종과 암종의 주인.
이 둘이 없는 혈귀곡은 마도 전체로 보면 발언권이 약할 수밖에 없을 터.
‘그러니 혈귀곡의 공격은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혈귀곡 독단으로 하남을 공격하기는 어렵다.
바로 붙어 있는 섬서성엔 구파일방의 두 축인 화산과 종남이 단단히 무사들을 준비하고 있다.
하물며 하남에는 소림이 굳건하다.
‘과거의 명성을 되찾은 소림이라.’
천무백이 청성표국에 돌아왔단 소식을 들은 소림이 찾아와 만났다.
나한각주를 비롯한 소림의 무인들의 면면을 살핀 천무백은 내심 흡족했다.
그간 잊혀졌던 소림 절기를 제대로 익힌 그들의 눈빛은 형형했으며, 기도는 진중했다.
비와, 벼락, 눈과 우박으로부터 강호를 지키는 강호의 지붕.
과거의 성세를 되찾은 소림의 모습에 천무백은 퍽 든든했다.
이들이 하남을 공격 받으면 절대로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그들의 터전이 하남이었고, 그동안 소림과 청성표국의 관계는 그야말로 끈끈해졌다.
천무백이 마도와 싸우겠다고 자리를 비워도, 청성표국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게끔 소림은 분명 표국을 지켜 주리라.
‘청성표국의 도움, 아니 정확히는 내 도움을 받았으니까 은혜는 갚겠지.’
물론 정확히 따지면, 객원표사인 약선이 큰 도움을 준 거지만.
‘그게 뭐 내가 도와준 거지.’
실제로 소림은 천무백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고 여겼다.
비단 소림의 고위 인사뿐 아니라, 소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젊은 승려들은 천무백을 열렬하게 지지했다.
아니, 그건 사실 ‘지지’라고 표현하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분명 자리에는 유백기도 같이 함께했는데,
천무백이 등장하자 단순한 지지가 아니라 무언가 거대한 하늘을 우러러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스승님의 몸에 부처가 깃들었나 봅니다.”
오죽하면 유백기가 그런 말을 할 정도였을까.
천무백도 짐짓 당황스러웠다. 자신이 소림을 구해 주고, 약선을 통해 과거 성세를 되찾을 동안 지켜 주게 했다지만.
저 젊은 승려들이 그 은혜를 저렇게 뼛속 깊이 간직한다고?
궁금해진 천무백이 은근슬쩍 물어봤는데, 이어진 답변에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소승은 분명 그날, 무애광명을 보았습니다.”
“어둠을 불사르고 핍박받는 양민들을 구원하는 빛. 그것이 무애광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대협, 방장님께서 대협의 마음에는 부처가 깃들었다 했으니, 소승들이 대협을 무애광여래(無礙光如來)라고 여기는 것도 부처님의 안배입니다.”
아니, 무애광명이라니. 그거 그냥 귀곡광애인데. 그냥 좀 특이한 호신강기인데.
천무백은 눈을 반짝이는 젊은 승려들을 보며 난감한 표정을 숨기기 어려웠다.
차라리 불가에서 말하는 신장(神將)이라면 모를까.
실제로 천룡검협의 별호도 팔부신장에서 나온 단어가 아닌가.
신장이라는 불가해한 존재와 비견하는 것도 꽤 부담스러운 일이건만.
젊은 승려들은 과거 천무백이 귀곡광애의 후광을 내뿜으며 마인들을 깨부순 걸 똑똑히 기억하며, 무애광여래, 즉 아미타불(阿彌陀佛). 부처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살다살다 내가 활불(活佛)이 다 되어 보는구나.”
“좋은 게 좋은 것이지요. 과거의 성세를 되찾아가는 소림의 열렬한 지지라면, 우리는 사십 년 전 그때처럼 승기를 확실히 두 손에 쥘 수 있을 겁니다.”
난감해하는 천무백을 보며 유백기가 짐짓 쾌활하게 웃었다.
천무백이 그 얄미운 얼굴을 흘겨봤다.
소림 앞에서는 진중한 강호 명숙의 모습을 보이더니. 자기 앞에서는 어째 점점 옛날처럼 철딱서니가 없어졌다.
“여하튼 이제 슬슬 움직여야겠다. 가족들의 안전도 걱정할 거 없고.”
소림의 비호뿐 아니라, 약선 역시 청성표국에 남는다.
권유나 부탁이 아니라, 일방적인 통보를 받은 약선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나이 먹고 아주 코가 단단히 꿰였구나. 팔자에도 없는 소림사 경비 노릇을 하더니, 이제는 표국의 총표두라니…….”
한탄하는 약선을 보며 천무백이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승진이오. 객원표사에서 정식으로 표사계약 맺자마자 총표두로 고속승진이라니. 세상에 이런 승진이 어디 있습니까?”
“허허…… 허허허. 검존. 자네 동문은 원래 그런가? 원래 싸가지가…….”
“누구의 검을 이었는지 잘 알지 않은가?”
“하여간, 창천검신 그 괴팍한 노인네는 아주 죽어서도 귀신이 되어서 날 괴롭히는구나.”
“스승이라면 귀신이 아니라 살아서 괴롭히고 있을걸세.”
“그것도 끔찍하군. 창천검신 그 미친놈이 살아 있었으면 난 강호를 떠났을 거야.”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뒷담화에 천무백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약선이야 그렇다쳐도, 유백기 쟤는…… 언제는 스승을 한없이 존경한다더니.
슬슬 익숙해지니 과거의 모습이 언뜻 비치는 게 영락없는 내 제자다 싶었다.
“여하튼 잘 부탁드립니다. 약선 어르신.”
“에휴. 걱정하지 말게. 마도놈들은 표국 안에 발도 못 들일 거세. 여기에 설치된 진법이 썩 훌륭하더만. 내가 손 좀 봤네.”
제갈설아와 제갈세가의 진법가들이 설치한 약식 수가기문도는 약선의 솜씨가 더해졌다.
이제는 제갈세가의 수가기문도라고 볼 수 없는, 아주 독창적인 형태의 진법으로 나아갔다.
그 속을 들여다본 천무백도 혀를 내둘렀다.
“아마 귀마나 혈불 같은 괴물이 와도 못 뚫을 겁니다.”
그 정체불명의 천마가 아닌 이상 말이지.
“천광마라면, 글쎄요.”
“천광마가 혈불보다 강해?”
천무백은 고개를 갸웃했다.
천광마는 천무백도 익히 알았다. 사십 년 전에도 제법 중견 장로로 활약했으니까.
오히려 혈불의 위세가 더 대단했다.
천무백도 경계했던 잠재력이었으니까.
하물며 유백기의 추적을 받으면서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천무백에게 그렇게 크게 밀리지 않을 정도였지 않았는가.
반면 사십 년 전 천광마는 그렇게 천무백의 눈에 들어오는 인사는 아니었다.
“단순히 무력이 혈불보다 강하다기보단, 정신력이라 해야 할까요?”
“정신력?”
“그러니까 혈불은 이 괴팍한 수가기문도에 들어서면, 위험을 감지하고 판단하고 아니다 싶으면 발을 뺄 겁니다.”
“그렇지. 제법 영악한 놈이니까.”
“그런데 천광마는 안 그럽디다.”
“멍청한 놈이라고?”
“아니요. 똑똑해요. 어디 마류칠종의 종주가 강하다고만 됩니까. 머리도 좋아야죠. 똑똑합니다. 상황 판단 능력 같은 것도 비상해요. 그런데 혈불처럼 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웃으면서 수가기문도에 들어올 놈이에요.”
“응?”
“그냥 미친놈처럼 무지막지하게 파고들 겁니다. 모든 상황과 변수를 온몸으로 부딪치면서, 시시각각으로 새로운 상황을 판단하고 분석하고 나아갈 길을 만들죠.”
“그런 놈이란 말이지?”
“예. 영락없이 미친놈입니다. 아마도 놈은 지옥불이라도 웃으면서 일단 부딪칠 놈일 겁니다.”
“골치 아픈 놈이군.”
무력으론 혈불에게 부족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성정은 까다롭기 짝이 없다.
미친놈처럼 들이박으면서도, 그건 절대로 미련하지가 않다.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변수를 긴밀하게 대응하고 방안을 내놓을 정도로 영악하며 천재적이다.
천광마.
천무백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래서 미친놈이 싫어.”
동류라서 싫어하는 건가?
유백기는 속에 있는 말을 감히 입 밖으로 내뱉는 걸 절실한 인내로 참아내며 말을 돌렸다.
“그러면 어디부터 움직일 겁니까?”
“혈귀곡의 잔당들부터.”
“새외마도에 흡수되지 않게끔 하려는 의도시군요.”
과연 유백기는 천무백의 의도를 재빨리 알아차렸다.
“맞아. 귀마는 지금 끈 떨어진 신세야. 나한테 인질로 잡혔으니 권위는 떨어졌고, 그를 따르는 직속 수하들은 모조리 사라졌으니까.”
그러니 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세력은 단순히 귀마의 것이 되어선 안 된다.
혈귀곡의 나머지 잔당.
그 안에는 천무백이 이때를 노리고 잠입해놓은 세력이 있다.
“귀마는 그저 얼굴마담이다. 실재는 검종이야.”
“검종이라…….”
“내가 만들 마도는 기존의 마도와 궤를 달리해야 해. 오로지 무와 검만을 숭상하는 검종은, 그들의 종교의 색채도 없지.”
“귀마는 그러면…….”
“마도 내에 영향력이 거의 전무한 검종을 내세워서 마도 세력을 일굴 수는 없어.”
“귀마로 혈귀곡의 잔당을 흡수해서 세력을 공고히 하겠다는 뜻이군요.”
“그래. 혈귀곡이 새외마도의 하위 조직으로 전락하기 전에 내가 먹어야지. 내 음식을 누가 먹게 내버려둘 수야 없지.”
어떻게 혈귀곡이 천무백의 음식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유백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귀마는 단순한 미끼다. 혈귀곡의 잔당을 흡수할.
“그렇게 혈귀곡 잔당부터 꼬리를 잡고 쭉 올라가실 생각이군요.”
“그래.”
“천광마는 스승님이 잡으실 겁니까?”
“저번에도 말했듯이 변함은 없다.”
“그렇다면 천마는 제가 잡겠습니다.”
천무백은 일순 멈칫했다.
천마.
유백기의 말과 그간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놈은 전대 천마인 군천악보다 강하다.
인외지경.
그들이 말하는 창천검신이라는 인간을 벗어난 ‘무언가’의 경지.
지금 천마의 경지를 그렇게 표현했다.
천무백은 가만히 유백기를 바라봤다.
분명 깨달음과 경기의 깊이는 창천검신에 버금간다.
아니, 일정 부분에서는 자신만의 검을 개척하며 뛰어넘은 부분도 분명 존재한다.
그런 사실이 퍽 자랑스럽지만, 천무백은 우려를 금할 수 없었다.
“역천의 몸으로 말이더냐?”
천무백의 목소리가 더없이 딱딱해졌다. 그 딱딱함 속에 언뜻 안타까움이 스며든 걸 깨달은 유백기가 희미하게 웃었다.
“저의 역천은 시대의 사명이었을 뿐입니다. 마도를 눈앞에 두고, 하늘이 제 목숨을 거둬가는 걸 그저 지켜볼 수 없었을 뿐입니다.”
“네놈 몸 상태를 내가 모를까 봐? 지금 상태론 넌 죽는다.”
“이미 역천을 행하며 죽었어야 할 몸입니다.”
“백기야.”
“스승님.”
유백기는 확고한 의지가 담은 눈빛으로 천무백을 쳐다봤다.
“이 천하에서 천마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접니다.”
반론의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듯이 단호한 어조였다.
하긴, 맞는 말이다.
새외에서 가장 많이 부딪치면서 끊임없이 싸워 왔던 녀석이니까.
중원에 있던 백도 무림은 당대 천마가 아직도 군천악인 줄 알지 않았던가.
그건 천무백도 마찬가지였고.
“그러니 제가 잡습니다. 스승님의 유지도 못 받드는 못난 제자로 만드실 생각입니까?”
“아, 그거 유지 아니라니까.”
“유지가 아니더라도, 다 늙은 스승을 부려먹을 수야 없지요.”
천무백은 쓴웃음이 뒤섞인 실소를 흘렀다.
“……거, 고집은 참.”
“스승님 고집만 하겠습니까.”
“그럼 이렇게 하자.”
“예?”
“먼저 맞닥뜨리는 사람이 놈을 치는 거다.”
“무슨 천마를 상대로 내기를 하자고…….”
“쫄리면 빠지시던가.”
“……하시죠.”
천무백이 피식 웃었다.
천마를 두고 누가 잡겠다는 내기라니. 누군가 이 광경을 봤다면 오히려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으리라.
하지만 천마가 이 내기를 지켜봤다면 모골이 송연해졌을 것이 틀림없다.
고금제일인이자 전세대의 천하제일인 창천검신과.
당대의 천하제일인 검존.
가장 강한 두 사람이 본인을 두고 내기를 한 상황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