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282화 (282/318)

<검신재생 282화>

282. 유치한 사내들

술판이 벌어졌다.

안주 하나 없이 그저 술잔만 오가는 자리였지만, 셋 모두 거리낌 없이 술을 들이켰다.

천무백과 유백기.

두 사제 간은 특별한 대화가 필요한 사이가 아니다.

둘 사이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유대감이 형성되어 있다.

어쩌면 그 유대감이, 유백기가 천무백이 창천검신임이 틀림없다고 확신을 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같이해 오며 쌓인 감정이 눈빛에 담겨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서로 대화는 없어도, 술잔을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술자리의 분위기는 한없이 부드러웠고 따뜻했다.

거기에 애당초 능청스럽기 짝이 없는 능허는 둘 사이에 껴서 술을 마시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별안간 능허가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안 되겠수. 이거 내가 너무 불리해.”

“불리해? 뭐가?”

“내가 먼저 취하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주군.”

“이게 지금 술 싸움이냐?”

천무백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했지만, 능허는 고개를 내저었다.

얼굴이 약간 불그스름한 모습이 약간 취기가 오른 게 분명했다.

“솔직히 말해서 두 분 다 내공 없으면 나한테 술로선 안 될 거요. 내 집을 뛰쳐나왔을 때부터 흑도판을 구르면서 마신 술만 해도 하남성을 가득 메울 거요.”

“허.”

그 말에 천무백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풍은 아주 천하제일인이네.”

“솔직히 말하십쇼, 주군. 내공 없으면 안주빨 세우시는 거 아닙니까?”

유치한 격장지계였다.

그저 유백기와 과거를 추억하며 술잔을 기울이려던 천무백은 능허의 도발에…….

“야. 모두 내공 틀어막아.”

……걸려들었다.

늙으면 유치해진다고 했던가.

나이가 들수록 애처럼 변한다는 말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가자 어린 천무백도 전생을 감안하면, 제일 연장자다. 몇 년으로 살았는지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도 없다. 더구나 천무백은 매 삶을 반복할 때부터, 소년부터 노년까지의 다양한 삶을 살아왔으니 때때론 괴팍하다 못해 유치해질 때가 있었다.

“좋습니다. 스승님. 청출어람이 뭔지 보여 드리겠습니다.”

하물며 유백기도 여기선 노인이었고, 오랜만에 만난 스승 앞에서 한없이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흐흐흐. 이런 호사를 언제 누려 보겠소? 이 강호 땅에서 창천검신과 검존을 상대로 술판을 벌여 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애당초 능허는 그냥 유치한 놈이고.

그렇게 술 대결이 벌어졌다.

내공만 금제하면 능허도 자신만만했지만, 결과는 이미 정해진 싸움이다.

들이붓듯이 마시던 능허가 가장 먼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천무백이 혀를 찼다.

“안주빨이라도 세우지 그랬냐.”

“무슨 소릴! 지금 멀쩡합니다.”

“멀쩡한 놈이 술을 가슴에 들이붓냐?”

유백기는 그저 재밌다는 듯이 웃으며 묵묵히 술을 마셨다.

술이 떨어질 때마다 능허가 미리 대기시킨 직원이 술독을 들고 오갔다.

능허가 반쯤 풀린 눈으로 둘을 바라봤다.

“그 정도 경지에 오르려면 술이 세야 합니까?”

“경지에 오르면 술이 세지는 거지.”

천무백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애당초 천무백과 유백기는 만독불침이나 다름없는 신체다.

심후하고 정순한 내공이 스며들어 신체를 그에 맞게 변화시켰으니까.

술독 따위가 어찌 몸을 취하게 하겠는가.

능허도 제법 잘 버텼지만, 전대의 천하제일인과 당대의 천하제일인을 상대로 술 대결에서 이길 리가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한 독 더 들이켜던 능허는 바닥에 쓰러지더니, 네발로 기어서 밖으로 나갔다.

유백기가 술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이젠 일대일 대결이군요.”

“아직 멀었다. 내 몸은 젊거든.”

“사실 반로환동보다 더 믿기 어렵습니다. 삶을 새로 산다더니. 정신은 세월을 거듭하나, 신체는 새로운 인생으로 재생(再生)되는 게 아닙니까.”

“우짜겠냐……이젠 몇 번째인지 세지도 못 하겠다.”

“어째서 스승님에게만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천무백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건 물어봐야지.”

“물어봐요? 누구한테요?”

“반드시 저승에 가서 염라대왕의 멱살을 움켜쥐고 흔들어야지.”

“그전에 그, 달걀귀신부터 어떻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유백기는 유난히 달걀귀신에 흥미를 나타냈다.

직전 전생의 창천검신조차도 베지 못한 유일한 절대자.

사람은 분명 아니지만,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고작 귀신 따위가 창천검신의 검을 막을 수 있다니.

“저승차사가 아닐는지요. 대다수 사람들이 죽음을 원치 않지만, 결국 다 죽어서 저승으로 갑니다. 저승차사가 다 데리고 가는 거 아닙니까.”

“그렇겠지.”

“하물며 죽어가는 사람 중엔 세대마다 늘 천하제일 고수가 있고, 그 천하제일을 저승으로 데려간 이는 강할 수밖에 없겠죠.”

천하의 창천검신의 검도 무력화 할 정도라면, 엄청나게 강해야 한다.

유백기의 추론은 그럴듯했다. 죽기 싫어하는 천하제일고수가 어디 한 둘이었나. 그런 강자들을 억지로 저승으로 끌고 가는 능력을 갖춘 저승차사라면, 강하다고 표현하기도 부족하리라.

하지만 맹점이 있었다.

“저승차사가 죽은 영을 저승으로 데려가는 게 본분일 터인데, 왜 그놈은 날 이승으로 다시 돌려보내려고 애를 쓰는 것이냐. 더구나 쌩쌩한 젊은 몸을 주면서 말이다.”

“……하긴, 그것도 이상하군요.”

유백기는 쓰게 웃었다. 자신이 해 본 추측도 천무백이 하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까.

“다 늙은 육신에 영을 돌려보내는 것이라면 억지로라도 이해하겠다. 그런데 매번 짱짱하고 젊은 육에 넣는단 말이지?”

“음…….”

“마치 기회를 주는 것처럼 말이다.”

과연 그 기회란 무엇일까.

스승이 지나가듯이 말하던 ‘검극(劍極)’일까.

천무백이 입술을 슥 닦으며 화제를 돌렸다. 지금까지 천무백의 과거 얘기는 충분히 했다. 천무백은 유백기의 그간 사정이 궁금했다.

“강호를 떠나 새외에서 마도를 때려잡고 있단 얘기는 풍문으로도 들었다. 중원 내부에서도 혈귀곡이란 이름으로 마도가 자라고 있는데, 새외로 간 이유는 천마 때문이더냐?”

“맞습니다. 천마는 곧 마도의 중심이자 상징. 또 스승님의 유지가 있지 않았습니까?”

“유지는 무슨. 죽기 전에 그냥 대충 던져 놓은 말인데, 그 말이 뭐라고…….”

천무백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냥 편하게 살지 그러더냐. 강호의 어른으로 대접 좀 받고, 장가도 들고, 자식이나 키우면서…….”

“저도 그러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닙니다만, 얼마 지나고 보니 스승님의 유지가 괜히 농담이 아니란 걸 깨달아서 말입니다.”

천무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사실 그건 생전에 남긴 유지라고 볼 수도 없는, 농담에 가까운 말이었단 건 유백기도 잘 알 것이다.

처음엔 단지 유백기가 고지식해서 영양가 없는 말을 유지랍시고 떠받드는 것으로 생각했다.

한데 지금 말의 분위기가 달랐다.

“농담이 아니다?”

“선견지명이었죠. 스승님이 돌아가시고 채 한 달도 지나기 전에 군천악이 찾아왔습니다.”

“…….”

군천악. 정마대전을 이끌었던 천마이자 마도제일인.

“천문을 읽어 큰 별이 졌다는 걸 알고 왔더군요.”

“그래서?”

“한판 붙으려고 했습니다만, 스승님의 무덤 앞에서 절을 하고 술만 올린 뒤 떠나더군요.”

천무백의 얼굴에 어처구니없는 기색이 떠올랐다.

“그 지독한 잡놈이?”

“철천지원수였지만, 그 역시 무인이긴 하더군요. 진심으로 애석해하는데, 문상객을 상대로 제가 칼을 뽑는 것도 예가 아니니까요.”

“그거 애석해하는 게 아니라, 제 손으로 날 못 죽인 것이 애통해서 그런 거다.”

“그럴 수도 있겠죠. 어쨌든 군천악은 문상만 하고 떠났습니다. 다만, 떠나기 전에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습니다. 곧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요.”

“거, 전쟁을 벌일 거면 은밀히 공격해야지. 그렇게 대놓고 말하는 놈이 우두머리니까 마도가 전쟁에서 진 거다. 쯧쯧, 멍청한 놈.”

유백기가 쓰게 웃었다. 천하의 군천악을 하류 잡배처럼 표현하는 사람은 세상에 스승밖에 없으리라. 새삼 자신의 스승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 유백기가 말을 이었다.

“정마대전이 다시 일어나리란 건 자명한 사실. 군천악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저 역시 그저 강호나 유람하며 살 수는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스승님이 천마는 저보고 죽이라고 했던 말, 선견지명이 분명해 보였으니까요.”

“한데 군천악이 당장 그 상황에서 널 죽이지 않고 떠난 이유도 있을 텐데?”

“솔직히 말해서, 당시 군천악은 저보다 강합니다.”

“맞다.”

천무백은 냉정하게 대답했다. 당시 군천악은 천무백의 유일한 호적수였다. 물론 호적수라고 표현하기는 조금 어폐가 있지만, 유일하게 창천검신을 상대로 제법 위협적인 공격을 전개할 수 있는 강자였다.

때문에 문상 당시, 군천악은 분명 유백기를 죽일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저 문상만 드리고 떠났단 얘기는…….

“당시 마도 내부에도 갈등이 심각했던 겁니다.”

“군천악이 멀쩡한데?”

“멀쩡하지는 않았습니다. 스승님께 당한 상처를 완전히 회복한 상태도 아니었고, 정마대전에서의 연이은 패배에 그의 위신 역시 하락했으니까요.”

“쯧. 절대 권력을 누리던 놈이, 몇 번 졌다고 위신이 추락해?”

“몇 번이 아니지 않습니까…… 스승님이 나타날 때마다 도망쳤는데요. 위신이고 자존심이고 어딨겠습니까.”

“흠흠.”

“하여튼 그로 인해 군천악에 도전하는 마도 세력이 있던 것 같습니다.”

“그걸 용케도 알아냈군.”

“스승님의 이름값은 강호 어느 문파에서도 통했으니까요. 그리고 백도 무림에서도 마도를 경계하면서 감시 중이기도 했고요.”

천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마대전이 얼마 끝나지 않은 데다 백도의 수호신이었던 창천검신마저 세상을 뜬 상황이다.

백도 무림에서 전력을 다해 마도를 경계하고 감시하는 것은 당연했다.

백도가 전력을 다했다면, 마도의 내부 사정도 능히 알 터이다. 양측은 서로 간자를 수도 없이 침투시켰으니까.

“그래서 새외로 간 것이냐?”

“기회였으니까요.”

“기회?”

“마도가 서로 갈려서 저희끼리 치고받고 싸울 때가, 군천악을 죽일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너무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에 천무백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이들이 보면 어처구니가 없으리라.

군천악은 예의를 갖춰 문상만 하고 떠났는데, 정작 유백기는 군천악이 공교로운 상황에 빠진 걸 이용하려 했다니.

하나 천무백은 그런 유백기의 행동을 나무라지 않았다.

“전쟁에 있어 예의를 따지는 것만큼 미련한 놈은 없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준비를 마친 뒤에 새외로 갔습니다. 그게 벌써 30년이 훨씬 넘는군요.”

“…….”

유백기의 눈에 회한이 차올랐다. 천무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마대전이 시작될 때쯤에 제자로 받은 아이다.

저 아이는 평생을 전장에서 보냈다. 정마대전이 끝나고도 외로이 새외에서 홀로 싸워 왔다. 사실상 인생의 전부를 말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뤄 낸 건 없습니다. 새외의 마도 세력을 쫓았지만, 핵심에 닿진 못했습니다. 그런 도중에 마도가 결집하더니 힘을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군천악이 죽고 새로운 천마가 권력을 잡은 건가?”

유백기는 잠시 멈칫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 이후로 마도는 무서우리만큼 결집했습니다. 정마대전 때 군천악을 중심으로 뭉쳤던 장면이 떠오를 정도로요.”

“지난한 싸움이었겠군.”

“긴 싸움이었습니다.”

천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죽은 이후, 지금까지 근 40년 가까이.

유백기는 홀로 고독한 싸움을 계속한 것이다.

천무백은 알았다.

유백기가 새외에서 마도를 쫓고 막지 않았다면, 두 번째 정마대전이 진즉 일어났으리라는 사실을.

만일 그때 마도가 힘을 결집해 침략했다면?

소림은 아직도 봉문 중이었을뿐더러, 지금 정의맹 같은 결집한 백도 세력도 없었다.

더구나 창천검신도 없었고, 검존도 없었다.

백이면 백, 백도가 무너졌으리라.

유백기가 진정 큰일을 해낸 것이다.

“고생 많았다. 이젠 전면전이니, 힘껏 싸워야겠다.”

이미 중원에 마도의 침투가 시작된 건 자명한 일.

다행인 건 혈귀곡이 사실상 무력화됐다는 점.

외부에서의 공격에만 신경 쓰면 된다는 사실이다.

천무백은 유백기를 바라봤다. 강호가 평화를 누리던 40년 가까이 홀로 마도와 싸우던 유백기다.

지금 천무백은 그런 유백기의 경험이 중요했다.

“어찌 싸워야 하겠느냐?”

“스승님의 방식대로 가야죠,”

“내 방식?”

유백기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대가리를 쳐야죠. 천마를 잡으러 갑시다.”

그 말에 천무백이 자랑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역시, 넌 내 제자가 맞구나.”

영락없는, 자신의 제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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