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81화>
281. 오늘이 제삿날
능허는 혀를 내둘렀다.
“거, 더럽게 빠르네.”
혈불이 등을 돌려 도주하고, 천무백이 추적하자 능허도 급히 따라붙었다.
경공이라면 자신도 어디 가서 부족하다고 욕먹을 정도는 아니니까.
하지만 한순간에 눈앞에 있던 두 명의 신형이 사라지더니, 이제는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다.
“사람이야 뭐야?”
무슨 귀신에게 홀린 듯한 기분이다.
그렇다고 쫓아가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혈불이 함정을 파 놓고 천무백을 유인하는 속셈일지도 모르니까.
물론 함정에 당하리라곤 도저히 생각되진 않는다.
“더구나 그 양반이 당할 함정이면, 내가 가 봤자 죽었다 깨어나도 뚫어내지 못하겠지.”
보통 함정이 아니리라. 하나 어쩌겠는가.
“그 양반 뒈지면 나도 인생 쫑나는 건데.”
한배를 탄 지 오래다.
누가 봐도 천룡검협의 수족이 바로 자신이 아니던가.
만약 천무백이 어디 가서 당하기라도 한다면 능허도 강호 인생 끝나는 거나 다름없다.
“옛날 같았으면 그리 죽어도 뭐 겁날 게 없었다만.”
능허가 씁쓸하게 웃었다.
세상에 한창 반항기 가득하던 흑도 시절엔 죽는 게 두렵지 않았다.
강호에 발을 들었으면, 더럽기로는 진창보다 지저분한 흑도라면 당장 새벽에 자다가 칼 맞는 건 흔한 일이니 무얼 두려워하랴.
“그러니까 오래오래 살아야지. 아주 추하게 늙을 때까지.”
지금은 다르다. 능허는 정말 오랫동안 살고 싶었다. 흑도니, 마도니, 백도니 뭐니.
그냥 다 잊고 살고 싶었다. 당연했다. 가족이 생겼으니까. 천무백의 울타리처럼, 능허도 능허만의 웉타리가 만들어졌다.
“우리 항아 결혼하고 손주 보고 그 손주가 자식 볼 때까지 아주 오래 살아야지.”
그러려면 당연히 강호에도 평화가 와야 한다.
“내가 강호의 평화를 운운하게 될 줄이야.”
능허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툴툴댔다. 새삼 자신이 얼마나 큰일에 휘말렸는지 새삼 느꼈다.
능허는 천무백을 있는 힘껏 도울 생각이다. 비단 천무백을 위해서가 아니다.
능허는 자신을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흑도의 전형이라면, 무엇보다 이기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살아오며 겪어왔다.
천무백을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 본인을 위해 천무백을 이용하는 것이다.
능허는 그리 생각했다. 어떻게든 천무백에게 부족한 힘이나마 보태야 한다.
불과 오늘 하루만 해도 혈귀곡의 우두머리와 이인자를 전부 만났다.
능허는 특유의 눈치로 깨달았다.
“슬슬 진짜 막바지가 다가오는구나.”
꽁꽁 숨어 있던, 혈귀곡의 우두머리가 눈앞에 나타났다.
새외에 있다는 마도의 세력도 슬슬 눈앞에 나타나리라.
보통 전력이 아니다. 혈귀곡은 그저 하위 조직에 불과한 진짜배기일지도 모른다.
강대한 적들을 두고 천무백이 어디 당하기라도 한다면.
능허가 상상할 수 있는 일 중에 그보다 끔찍한 일은 없었다.
천무백이 없는 백도무림이 마도에 대항한다는 건 쉽사리 상상이 되지 않으니까.
능허는 계속해서 혈불과 쫓아간 천무백의 뒤를 따랐다.
이미 눈앞에서 사라졌으니, 남긴 흔적을 보고 쫓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양반. 아주 은밀함이 살수 저리 가라네. 혈불 놈은 급하게 도망쳐서 그런지 흔적이 다 남았는데. 급하게 쫓아가는 중에 흔적이 뭐 거의 없어?”
능허의 눈썰미로도 겨우 혈불의 흔적을 찾아 쫓는 게 전부였다.
흔적이 끊기는 지점까지 도달한 능허는 천무백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허어······.”
그리고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는 혈불의 머리를 보며 혀를 찼다.
주위는 완전히 쑥대밭이었다.
굵기가 성인 남성 여럿이 팔을 벌려도 안을 수 없는 거목(巨木)이 쓰러진 건 예삿일이었고, 바닥 곳곳은 하늘에서 유성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심하게 패여 있었다.
격렬한 전투의 흔적에 능허는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천무백에게 다가갔다.
이만한 싸움이라면 천무백도 몸이 성치 않을 터.
“괜찮수? 주군······ 어?”
하나 천무백에게 다가가던 능허는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천무백의 앞에 무릎을 꿇은 백발의 노인이 보였다.
척 봐도 비범한 외모의 노인은 나이를 감히 가늠하기 어려웠다. 백발과 깊은 눈을 보면 분명 상당한 고령이 분명한데, 피부는 마치 아기처럼 광택이 맴돌았다. 하여 도저히 몇살인지 짐작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능허가 멈칫한 이유는 노인의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니, 이건 또 뭔 상황이야······.”
노인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올리며 처연하게 울고 있었다.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노인이 마치 어린애처럼 엉엉 우는 모습은, 보는 이에게 심한 불편을 안겨 주는 장면이었다.
천하의 능허도 불편해질 상황이었건만, 정작 노인의 앞에 서 있는 천무백은 혀를 차고 있었다.
“나이가 몇 갠데 아직도 애새끼처럼 질질 짜냐? 어?”
“······.”
“하. 이 자식아, 그거 아니라면 아니라고 좀 그냥 넘어가 주지. 어? 그렇게까지 고집을 피우냐?”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흐르는 노인에게 혀를 차며 타박하는 천무백.
장유유서라곤 진창에 처박은 듯한 모습에 능허는 어쩐지 마음이 불편해졌다.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유학(儒學)이 꿈틀거렸다.
그때 천무백이 고개를 돌렸다.
“능허야.”
“네.”
“인사해라.”
“누굽니까?”
“내 제자다.”
“······.”
능허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 * *
천무백이 향한 곳은 당연하게도 연화루이었다.
지금쯤이면 천무백이 도착했단 소식이 청성표국에도 전해졌겠지만, 집을 찾아가는 일은 잠시 미뤘다.
지금 더 중한 일이 눈앞에 닥쳤으니까.
연화루로 향하는 동안 유백기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온갖 감정이 휘몰아치는 눈빛으로 천무백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연화루는 능허의 소유였지만, 크게 보면 천무백의 소유였다.
“오늘 장사는 접어라.”
그러니 개업도 천무백 마음대로였다.
능허는 입이 댓발이나 튀어나왔지만 차마 불평을 늘어놓을 순 없었다.
너무 서글프게 울던 불쌍한 노인이라고 여겼던 유백기가 검존임을 뒤늦게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강호에 명성을 떨치는 검존을 눈앞에 두고도 함부로 말할 간담은 능허에게도 없었다.
“그런 놈이 나한테는 개겨?”
“개기다니요. 핍박받는 수하의 정당한 반박입니다.”
“죽을 때까지 핍박받아볼래?”
능허가 능청스럽게 말을 돌렸다.
“뭘 준비할까요.”
“술이나 데워 와.”
“안주도요?”
“안주 없이 깡으로 술만 먹으랴?”
“안주빨 세우시려고요?”
천무백이 혀를 내둘렀다.
“와. 이 새끼. 안 본 지 정말 오래되긴 했나 보다.”
“친근함의 표시이니 노여워하지 마십쇼.”
“닥치고 갔다 와.”
“예이예이.”
천무백은 능허가 나가서 직원들을 닦달하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유백기를 바라봤다.
맞은편에 앉은 유백기는 여전히 말없이 천무백의 얼굴만 뜯어보고 있었다.
문득 유백기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스승님이 정녕 맞으시군요.”
“왜.”
“마치 제가 한참 철딱서니 없던 시절, 스승님과 제 모습을 보는 듯했습니다.”
천무백이 뻘쭘한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오해 마라. 쟤 내 제자 아니다.”
“걷는 자세와 언제든 검을 뽑을 수 있게 움직이는 팔의 범위까지. 다 스승님의 가르침이 스며들어 있어 보이는데 말입니다.”
“몇 가지 가르침을 줬을 뿐이다.”
천무백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유백기는 희미하게 웃었다.
어쩐지 몹시도 부끄러워지는 듯한 웃음이었다.
“늙었더니 몸에 부처라도 깃들었느냐. 웃음 한번 고약하구나.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웃음이라니.”
“절 제자로 받으실 때도, 그저 몇 가지 가르침을 준다고만 하셨지요.”
“그때야 그랬지. 제자를 기를 마음 따위는 하나도 없으니까. 하지만 백기, 너야 재능이 타고 넘쳤고 오성이 하늘을 찌르니 나도 욕심이 생겨 모든 걸 가르친 것이다. 능허 쟤는, 입만 번지르르하지 재능 따위는 없는 얼간이다. 제자가 아니라 그냥 수하다.”
“예. 그렇군요.”
“······그냥 진짜 수하라니까?”
“네. 맞습니다.”
“거참······.”
다 안다는 듯이 웃는 유백기의 얼굴에 천무백은 그저 입맛을 다시며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야 이해가 갑니다. 스승님께서 왜 그리도 제자를 기르려고 하지 않았던 이유를요.”
“이제야 스승의 마음을 헤아리는 법을 배운 게냐.”
”깊은 인연을 맺으시는 걸 꺼리신 것이었군요. 새로운 삶이 반복될 때마다, 전생의 인연은 머릿속에 계속 남아 있을 테니까요.”
“네 말이 맞다. 전생의 깊은 인연을 잊지 못할수록, 다음 삶에선 더 지독한 심마가 날 괴롭혔어. 최선은 인연을 맺지 않는 것이었지.”
유백기의 눈에 언뜻 안타까움이 떠올랐다. 천무백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유백기로선 감히 상상도 되지 않았다.
의절(義絶)은 절대 쉬운 게 아니다. 깊은 교분을 나눴던 수많은 인연을 삶이 끝날 때마다 강제로 끊어야 한다니.
죽어서 과거의 인연이 잊힌다면 모를까. 머릿속엔 생생하지 않은가.
천무백은 망각을 모른다. 유백기도 기억이 가물가물한 과거의 일을 천무백은 단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줄줄 머릿속에서 꺼낼 수 있다.
어쩌면 그건 축복이라고 볼 수 있지만, 유백기의 눈에는 지독한 저주로 보였다.
가족, 친우, 사형제…… 매 삶마다 끈끈한 인연이 있을텐데, 그 모든 연을 잊지 못하고 재생하는 삶이라니.
상상조차 되지 않는 엄청난 무게에 유백기는 참담한 심정이었다.
어쩐지 분위기가 한없이 무거워지려는 찰나. 능허가 쟁반에 술과 술잔을 들고 왔다.
천무백이 뚱한 얼굴로 능허를 쏘아봤다.
“안주는?”
“자고로 술은 안주 없이 즐기는 겁니다.”
“네가 내 앞에서 주도(酒道)를 가르치냐? 솔직히 말해. 지금 준비된 거 없지?”
“사실 숙수가 아직 출근을 안 해서······.”
유백기가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스승님. 스승님과 저와 단둘이 봉우리에 올라 그저 검만 휘두를 땐, 그저 주향(酒香)만으로도 즐겁지 않았습니까.”
그러면서 유백기는 천무백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 모습이 퍽 정중하기 짝이 없어 능허는 가운데 껴서 어색한 표정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조손지간도 아니라, 증조부와 증손주로 보이는 사이가 아니던가.
한데 정작 노인이 새파랗게 젊은 천무백에게 정중하게 술을 올리는 모습이라니.
천무백의 본래 정체를 일부나마 알고 있고, 유백기가 검존이란 사실도 알았지만.
도저히 익숙해질 수가 없는 광경이었다.
하물며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술잔을 받는 천무백의 뻔뻔한 얼굴에 능허는 저도 모르게 한마디가 툭 튀어나왔다.
“이야. 그러면 이게 제삿술이네! 주군, 제삿술을 살아서 받는 기분은 어떻습니까?”
“······.”
천무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능허는 아차 싶었다. 수많은 경험으로 판단하건대, 저 눈이 자신을 뒈지기 패기 직전의 눈빛임을 간파한 능허가 급히 뒤로 몸을 빼려는 찰나.
별안간 유백기가 웃음을 터뜨렸다.
“제삿술이라…… 하하하! 그거 틀린 말은 아닙니다그려.”
천무백이 묘한 눈빛으로 유백기를 바라봤다.
“그거 아십니까?”
“뭐가 말이냐.”
“아무리 스승님과 똑같은 눈과 똑같은 검이라고 해도, 제가 스승님이라고 쉬이 생각하지 못할 겁니다. 세상에 그런 게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진 않으니까요.”
“…….”
“그런데 스승님이라고 확신하게 된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무엇이더냐.”
천무백은 살짝 궁금해졌다. 아무리 익숙한 검과 눈빛이 닮았다고 한들. 또 여러 가지 사정이 천무백이 창천검신 본임임을 가리킨다고 해도.
그 누가 천무백을 보고 과거의 창천검신 본인이 맞냐고 확신을 하겠는가.
제아무리 제자라고 해도 말이다.
한데 확신을 하게 된 이유가 있다니.
“그야 오늘이 스승님께서 귀천하신 날입니다. 저로썬 기일을 맞아 스승님이 찾아오셨다고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
“매번 조촐하게나마 제사상에 술을 올렸지요. 스승님. 불초 제자, 검존 유백기가 술을 올립니다.”
천무백이 한참 유백기를 바라보더니 술을 받았다.
“그렇군. 오늘이 제삿날이군.”
어쩐지, 술에 취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