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80화>
280. 그런 사람 아닌데요
솔직히 심장이 덜컥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겉으로 티 내지는 않았다. 여전히 표정은 태연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얼마나 담담하고 태연자약한지, 확신이 어렸던 유백기의 눈빛이 일순 흐려졌다.
사실 유백기 정도 되는 노인이라면 사람의 얼굴과 기색, 분위기만 봐도 거짓을 말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다.
그런 식견쯤이야 오래 살며 배워 온 일종의 삶의 경험이었다.
더구나 유백기가 누군가. 천하제일인이다. 무인이야말로 사람의 심리를 읽는 데 도가 튼 사람들이다. 싸움에서 표정, 눈빛, 얼굴근육만 보고도 어떤 생각으로 무기를 휘두르는지 알아야 하니까.
그런 무인들에서도 천하제일이 바로 유백기다.
‘거짓 따위는 보이지 않는 표정과 눈빛이다.’
사실 유백기도 완전히 확신은 못 했다.
스승께서 말씀하시길, 반로환동이란 개념 자체가 그저 상상 속의 산물이라고 단언했으니까.
아니 그랬다면 애당초 강호 역사상 수많은 고수가 삶을 연명하기 위해 역천(逆天)을 행해 억지로 수명을 늘렸겠는가.
반로환동은 없다.
하지만 유백기가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명백했다.
“스승님의 검이었······ 소. 스승님의 눈이었소. 낯익다 못해 참으로 익숙한 검이었소. 내가 만들어낸 속임수, 허초 속에 숨긴 살초, 그 모든 것들은 스승님으로부터 배운 거였지. 오로지 나와, 스승님만 알고 있었소. 한데 그걸 모두 파훼하고 막아 냈소.”
천무백은 솔직히 말해 당황스러웠다.
그야 당연한 일 아닌가. 유백기의 속임수도 허초도, 온갖 검의 묘리도 천무백의 눈에는 익숙했던 것들이니.
설마 그걸 파훼하고 대응했다고 하여 자신의 정체를 의심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천무백은 유백기의 눈치를 슬쩍 봤다.
‘얘도 완전히 확신하는 건 아닌 거 같은데.’
우선 말투부터 그렇다. 혹여나 하는 마음에 하대는 아니라 반존대 정도로 변했다.
천무백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당연히 저도 창천검신의 후인입니다. 그분이 이룩해 낸 무학을 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사숙조님 눈에는 익숙하겠죠.”
“손에 귀곡광애의 일부를 씌워서 내 검을 잡지 않았소?”
“그랬습니다.”
“그거 아시오? 스승님께서 귀곡광애를 본격적으로 활용한 건 정마대전부터였소.”
“······.”
천무백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전혀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살짝 빠르게 지나갔지만, 유백기는 절대 놓치지 않았다.
유백기는 가슴이 간질거리는 느낌을 꾹 누르고, 고삐를 더욱 세게 당겼다.
“워낙에 강하신 분이라 세상에 적수가 없었지. 호신강기 따위를 쓰기 전에 적을 다 격살해 버리니까. 하지만 천마 놈이 오죽 강하다 보니, 귀곡광애를 더 발전시키고 연구하셨소. 마치 작은 방패를 덧대듯이 신체의 주요 부분에만 귀곡광애를 만들어 내는 건, 그때 만들어진 활용법이지. 내 사형이 되는 사람은 정마대전 전에 죽었다면서?”
“아직 한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마도와 맞닥뜨리고 싸우게 됐죠. 나보다 강한 이들을 상대로는 공격도 공격이지만, 몸을 보호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귀곡광애를 활용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실전에 사용했다?”
“그렇습니다. 창천검신께서 전하신 공부가 전해진 게 아니라 스스로 궁해서 연구하고 이뤄 낸 것이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럴 듯한 이유다. 천무백이 단순히 기재라고 표현할 수 없는 오성을 타고난 천재.
전해진 창천검신의 무학에 자신의 깨달음을 더한다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하나 유백기는 흔들리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오. 스승의 유지 말이오.”
“후인으로서 전해지는 유지를 어찌 모르겠습니까.”
“스승의 유지는 오직 나만 들었소. 늙은 자신을 그만 부려먹고 천마는 제자보고 죽이란 말은 세상에 딱 두 명만 알고 있소. 나, 그리고 창천검신.”
“창천검신께서 귀천하시기 한참 전부터, 그러니까 정마대전이 정리될 무렵부터 여러 번 제 스승님께 그 말을 서찰로 전하셨습니다.”
솔직히 틀린 말은 없었다. 아무리 제자로서 곁을 지켰다고 해도, 스승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 수는 없다. 감시자도 아니고 말이다.
또 다른 제자가 길러 낸 후인, 사손(師孫)을 챙기며 서찰을 보내는 일이야 충분히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유백기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니지. 스승님이 누군가를 따뜻하게 챙기면서 서찰까지 보내는 건 내 머리로는 도저히 그려지지 않소.”
“아니 무슨······.”
“그 양반, 아니 흠흠. 스승님께선 인간적인 면모가 많으셨지만 따뜻한 분은 아니셨지.”
“······.”
“사손을 서찰로 챙겨? 에이, 그럴 리가. 두들겨 안 팼으면 다행이지.”
“······.”
천무백은 애써 참았다.
‘이 새끼. 격장지계 쓰는 거지?’
여기서 자신이 발끈하면 영락없이 자백하는 꼴이 아닌가.
천무백은 머릿속이 점점 뜨거워졌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뻔뻔함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무기였다.
매번 삶을 거듭하다 보니 웬만한 일에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뻔뻔하게 거짓을 늘어놓는 건 어렵지 않았다.
“모릅니다. 당장 제 스승의 거처엔 창천검신께서 보내신 서찰이 수두룩했습니다.”
“보여 줄 수 있소?”
“스승님이 돌아가실 때 다 태웠습니다.”
“…….”
천무백은 거리낌 없이 거짓과 날조를 쏟아 냈다.
‘지가 어떻게 알 건데?’
아무리 반평생을 넘게 함께한 사제지간이라도, 완벽히 알 수는 없는 법이다.
어떻게 확인할 수도 없는 내용이었기에 천무백은 망설임 없이 마구 지껄였다.
그런데도 유백기가 못내 의심스러운 눈빛을 지우지 않았다.
천무백은 선안으로 유백기의 감정을 들여다보며 짐짓 조급해졌다.
‘확신으로 가득 차 있어.’
약간은 흔들릴지언정 색이 흐려지지 않는 선명한 색채가 영롱하게 빛났다.
천무백은 자신이 허술했음을 인정했다. 비무에 너무 취해 생각지도 못하고 싸운 탓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일은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됐는데.
천무백은 짐짓 억울하단 얼굴로 말했다.
“사숙조님께선 이 사질을 그렇게 동문으로 인정하기가 싫으신 겁니까?”
“…….”
“생각해 보십시오. 창천검신의 장례는 사숙조님께서 직접 챙기셨겠죠.”
그러자 유백기는 말이 궁해졌다.
“그야…… 내 손으로 묻어 드리긴 했지만.”
그 시신을 직접 손으로 정성스레 묻은 사람이 누구였던가.
바로 자신이 아니던가.
직접 숨이 끊어졌음을 확인했다. 하물며 평소 스승의 괴팍한 성정을 감안해서, 혹여 거짓으로 죽음을 꾸민 건 아닌지 의심하여 시신의 곁을 지키지 않았던가.
하지만 확실했다.
스승님은 죽었다. 직접 확인했다.
그러면 반로환동을 했다는 의심은 당연히 말도 안 된다.
‘하지만…….’
유백기는 가만히 천무백의 눈을 들여다봤다.
사실 오래 살다 보면, 때론 눈에 보이는 증거보다 심증이 더 믿음직스러울 때가 있다.
적어도 유백기 정도 되는 관록과 감각의 소유자라면, 오히려 심증이 더 정확할 때가 많다.
유백기도 본인의 감각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할 말이 궁해진 것도 사실.
천무백은 내심 의기양양한 얼굴로 유백기를 바라봤다.
‘내가 환생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나. 반로환동은 애당초 아닌데.’
의심은 할 수 있을진 몰라도, 아니라고 죽어라 잡아떼면 자기가 어떻게할건데?
천무백은 혼란스러워하는 유백기를 보며 짐짓 입안이 씁쓸해졌다.
‘이래서 삶에서 인연을 만들기가 쉽진 않지.’
하나의 삶이 끝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면, 전생의 인연과 엮이는 건 그리 좋은 일이 아니다.
심마에 빠지기 너무도 쉬운 위협이니까.
당장 지금도 천무백은 정체를 밝힐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했다. 단순한 고민이 아니다. 이후에 벌어질 상황도 모조리 감안해야 하고, 상대가 어찌 반응하고 어떻게 행동할지도 고민해 봐야 한다.
또 그것이 나와 상대에게도 과연 이로운지도 판별해야 한다.
절대로 쉬운 고민이 아니다.
이런 고민을 매 삶, 전생의 인연과 맞닥뜨리는 순간 하게 된다면 심마에 빠지기 쉽다.
고작 한두 번의 삶이 아니다.
횟수로만 수백이 달하는 삶을 반복했고, 시간으로 따지면 무림의 태동부터였다.
그 삶의 모든 인연이 삶을 반복할 때마다 맞닥뜨릴 때는 분명 존재했고, 그때마다 심각한 심마에 빠졌다.
이제는 하도 삶을 반복하다 보니, 전생의 인연을 만나도 그리 흔들리지 않고 가볍게 넘기는 방법을 알게 됐다.
‘최대한 과거의 나를 배제하는 법.’
그래서 지금껏 만난 과거의 인연을 모두 그리 대했다.
곽용이며, 소림이며, 화산이며, 제갈세가이며.
그저 천무백은 창천검신의 후인으로만 본인을 소개했을 뿐이다.
가장 좋은 방법임을 아니까.
하지만 이번엔 쉽진 않았다.
그저 사제지간으로 딱 잘라 말할 수 없다.
이제껏 천무백이 제자를 길러 낸 건 한 손에 꼽으니까.
그만큼 정을 줬다.
사실상 가족처럼 지낸 관계가 아니던가.
이런 인연을 만나면, 천무백도 심히 고민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야 원…….’
괜히 입안이 썼다.
천하의 천무백이라고 인간 같지도 않은 철심(鐵心)의 사내는 아니다.
천무백도 전생에서 단순한 인연을 넘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본 적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삶이 끝나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순간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곤 했다.
‘별수 없어. 서로 모르는 게 나아.’
천무백은 그리 생각하며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유백기를 바라봤다.
하나 미처 천무백이 유백기에 대해 생각지 못한 점이 있었다.
비록 가족은 아니고, 성격은 완전히 달랐지만 반평생을 넘게 함께한 제자란 점이다.
그렇게 오래 같이 살았으면, 필연적으로 닮을 수밖에 없었다.
유백기가 천무백과 닮아진 점은 딱 하나였다.
“……스승님. 이제 장난질 그만합시다.”
바로 고집이었다. 아니, 천무백 특유의 뻔뻔함까지 합쳐진 고집이었다.
“스승님, 반로환동이든 뭐든, 아무튼 내가 아는 스승님은 무슨 기발한 방법을 써서라도 눈앞에 서 있을 수 있는 분이 맞소. 스승님, 그만 말 편하게 하시죠.”
“아니, 아닙니다…….”
“허허, 스승님. 이 불초제자가 아무리 밉다 한들, 수십 년 동안 그리도 인연을 끊을 수가 있습니까.”
“아니…… 아니라니까요.”
“스승님. 그간 대체 어떻게 지내신 겁니까?”
마치 귀를 막고 자기가 할 말만 하는 그 태도에 천무백은 질려 버리고 말았다.
숫제 자신이 하는 행동처럼 보이지 않는가.
“아니, 이 양반이 노망이라도 났나…….”
“노망이라. 허허. 그 말투, 역시 스승님이 맞습니다.”
“그런 사람 아닌데요.”
“맞잖습니까, 스승님.”
“아니라니까요.”
“스승님.”
“왜 이러십니까, 대체.”
“스승님. 저야말로 왜 이러시냐고 묻고 싶습니다.”
“…….”
천무백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쯤 되니 어떻게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저리도 고집을 꺾지 않고 행동하는 걸 보면.
‘의심의 여지가 없이 내 정체를 믿고 있구나.’
말이 궁색해졌다. 천무백이 침묵하자, 유백기의 얼굴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쳤다.
아련함이 떠올랐고 이어지는 건 반가움이었고, 그리고 여전히 남아 있는 건 일말의 의심이었다.
하지만 의심보단, 지금은 확신이 더 컸다.
끝내 유백기는 검끝을 떨어뜨렸다.
“왜 이제야 나타나셨습니까. 이제야……왜 이제야…….”
천무백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술이라도 한잔하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