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79화>
279. 참으로 낯익은 검.
유백기는 과거, 스승에게 질문한 적이 있었다.
무를 익히는 데 가장 찬란한 재능이 무엇이냐고.
창천검신은 오히려 되물었다. 너는 무엇이 무인의 재능이라고 생각하냐고.
유백기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천신지체를 갖춘 자, 자연의 모든 기의 흐름을 느끼는 감각의 소유자······.
당시 아직 젊고, 본격적으로 무공을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점이었기에 유백기는 당당하게 말했다.
자신이 내놓은 답이 정답이라 여기며.
하나 스승은 생각지 못한 답을 내놓았다.
‘도둑놈이 가장 뛰어난 무인이 될 확률이 높다.’
그게 무슨 말인지 처음엔 이해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무슨 말인지 깨달았다.
‘남의 것을 보고, 분석하고, 파헤치고, 따라 하고 빼앗아라.’
그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강호에서 싸움은 언제든지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남의 무공을 보고 분석하려면 싸워야 한다. 파헤치고, 따라하고 빼앗으려면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한다.
바로 생사결이다.
‘생사를 넘나드는 싸움을 통해, 상대의 수법을 익히고 빠르게 배우는 자야말로 진정한 무인의 재능이란 거지.’
무인에게 자신의 무공에 가진 자부심은 곧 목숨과도 같다.
강하면 강할수록 독선적이며 오만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강한 상대를 만나 죽이더라도, 그의 무공을 훔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보물을 탐하는 도둑처럼, 모든 무공을 보고 배우고 종국에는 훔치는 것이야 말로 무인의 재능.
쉽지 않은 일이다. 그 누가 자부심을 던지고 남의 무공을 배운단 말인가.
하나 시간이 흐르며 유백기는 스승의 말에 틀린 게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강호엔 대막의 모래알만큼 기상천외한 무공이 있고, 각각의 무공을 극한까지 익힌 고수들이 즐비하다.
유백기는 깨달았다.
창천검신이 곧 검신이 된 이유가, 천하제일을 넘어 고금제일에 근접했던 이유가 바로 세상 모든 무공에 대한 해박한 지식에서 온다는 사시을.
격렬한 비무 도중에 유백기가 불현 듯 과거 스승의 가르침을 떠올린 건 당연했다.
‘저 눈······ 내 모든 걸 보고 있다.’
무서우리만큼 집중된 눈동자.
자신의 움직임, 호흡, 습관까지.
모조리 눈에 담겠다는 듯 맹렬한 안광을 토해 내는 눈빛.
‘스승님······.’
스승의 눈이었다.
‘도를 이룬 대가 같지 않은, 어쩌면 속세에 찌든 거 같아 참으로 당황스러웠던 눈빛.’
자신을 상대할 때도, 천마를 상대할 때도, 한낱 시장의 건달들과 싸울 때도.
눈빛에 담긴 건 끝을 알 수 없는 욕망이었다. 모든 것을 다 훔치겠다는.
유백기도 묘하게 가슴이 뛰는 걸 느꼈다.
수십 년이 넘는 엄청난 배분의 후배에게서, 강렬한 호승심이 타올랐다.
‘비무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닫고 있다. 고작 약관이 넘은 사내가.’
비무는 단순히 무예를 겨루는 게 아니다.
상대가 평생을 갈고 닦아 온 무예의 정수를 직접 겪으며 훔치고, 배우고 내 것으로 배울 수 있는 기회.
그것이 비무다.
대다수 무인은 비무를 그저 이기려고 한다. 이기기 위해 싸운다. 수많은 고수에게 도전해 이긴다면, 강호에 내로라하는 명성을 얻으니까.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승리하여 명성을 얻을지언정, 무학의 오의(奧義)를 깨달을 수는 없는 법.’
하나 지금 천무백은 이기기 위해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게 아니다.
매섭게 휘둘러지는 검격 하나, 하나는 그야말로 천무백이 익힌 모든 무학의 깨달음이 절절히 녹아 있었다.
승리만을 갈구하는 눈빛이 아니다. 승패 따위는 단 일말도 섞이지 않았다.
‘오로지 검만 보고 있다.’
유백기의 몸에 일순 전율이 흘렀다.
오직 검만 보고 있었다.
자신의 검과, 유백기의 검.
서로 교차하고 어지러이 얽히며 불똥을 마구 일으키는 검만을 바라보는 눈빛.
순간 유백기는 가슴이 거세게 뛰었다.
‘아…….’
언제였던가.
대체 이런 흥분이 들었던 때가.
스승님이 떠나신 이후, 마도를 쫓으며 숱한 싸움을 거듭했지만.
이렇게 순수하게 가슴이 뛴 적은 없었다.
그동안 그저 묵묵히 할 일을 마친다는 일념으로 검을 휘둘렀을 뿐이다.
아무리 강한 마인들이 튀어나와도, 싸움은 흥분되지 않았다.
그만큼 유백기가 노회하고 완숙해진 바도 있지만, 솔직히 말해 나이가 먹어 그런 건 아니었다.
‘스승님…….’
스승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상대도, 어떤 마인도, 어떤 고수도 스승님을 대신할 수 없었다.
‘배울 수 있는 상대는 오로지 스승님 뿐이셨으니까.’
오로지 딱 한 명.
창천검신 뿐이다.
‘한데 저 검은 대체 뭐란 말인가.’
유백기는 절대로 검에 힘을 빼지 않았다. 전력을 다하며 싸우라던 맹랑한 말.
처음엔 후배의 패기에 그저 귀엽게만 여겼다. 하지만 몇 번 검을 부딪쳐보니 낙관할 수 없었다.
‘후배가 아니라 나와 동등한 세대의 무인으로 봐야 한다.’
최소한 그 정도다.
단순히 내공이 놀라우리만큼 정순해서만은 아니다.
‘경험이 녹아들어 있다.’
유백기의 검이 순간 아래로 향하는가 싶더니, 위로 불쑥 솟구쳤다.
하단에서 중단을 찔러 올리는 일격.
답은 두 개다. 피하거나 쳐 내거나.
유백기는 여기서 쳐 내기를 바랐다. 아니, 그렇게 유도했다. 피하기엔 공간이 좁았다. 쳐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쳐 내는 즉시 반탄력을 이용해 어깨를 횡으로 긋는다.
하지만 이어지는 천무백의 선택은 예상외였다.
콰직!
“……!”
천무백의 왼손이 불쑥 검을 붙잡았다.
천하의 그 누가 맨손으로 검존의 검을 붙잡는가.
정확히 말하면 맨손은 아니다.
순백보다 더 하얗고 투명한 후광.
‘귀곡광애……!’
어찌 모를 수 있단 말인가. 스승의 독문무공이자 자신의 절기인 귀곡광애.
그걸 왼손에 주입하여 검을 붙잡아 버린 것이다.
유백기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단순히 흉내낸 수준이 아니다.
‘완전한 귀곡광애다. 단 조금의 틀린 점도 없는, 귀곡광애야.’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빙공!’
숨결마저 얼릴 극악의 냉기가 유백기의 검신에 스며들었다.
동시에 천무백의 오른손이 뱀처럼 흐물거렸다.
흐물거렸지만 느리진 않았다. 오히려 섬전보다 빨랐다. 유백기는 억지로 붙잡힌 검을 빼내며 뒤로 훌쩍 물러섰다.
‘완숙해. 너무도 완숙해.’
젊은 패기와 혈기는 응당 젊은 무인이라면 가지고 있기 마련.
하지만 노회한 완숙함만큼은 갖지 못한다. 제일의 후기지수라고 해도 말이다. 바로 경험이 쌓여야 나오는 노회함이, 천무백의 검끝엔 실려 있었다.
유백기는 잠시 천무백을 주시하다, 다시금 달려들었다.
천무백 역시 싸움이 쉽지만은 않았다.
단 한 번에 부딪침에 무수한 공방이 오갔다. 천무백은 머릿속에 공방을 되새겼다. 죽기 전, 유백기의 검을 떠올려 복기했다. 그리고 지금과 비교했다.
결론은 나왔다.
‘창천검신의 제자가 아니라 검존이 되었구나.’
천무백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자신이 죽기 전에는 누가 봐도 창천검신의 제자였다.
창천검신의 무공을 사용했고, 창천검신의 검을 휘둘렀으며, 창천검신의 초식으로 무장했었다.
그만의 독창성은 다소 부족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천무백이 창천검신 시절 쌓아 온 무공은 일평생 쌓은 무학이 아니다.
수십, 수백의 삶을 거듭하며 모든 깨달음을 녹여 낸 무학이다.
그것만으로도 천하의 기재인 유백기도 버거웠으리라. 뒤따르는 것에만 급급했으리라.
지금은 아니다.
‘자신만의 검을 세웠다.’
청출어람이 목표라고 했던가.
천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창천검신을 넘어섰다. 지금의 유백기는.
하나도 아쉽지 않다. 제자가 성장해서 기쁘냐고?
또 그런 건 아니다.
‘그때 이룬 경지 너머, 또 다른 경지가 내 눈앞에 있다.’
이번 삶의 천무백의 목표는 검극이다.
검의 끝을 보아 윤회의 굴레를 끊어 버리는 것.
하지만 솔직히 말해 천무백은 검극이란 개념 자체가 존재하는지 의문이었다.
창천검신으로서 이뤄 낸 무위 너머, 새로운 경지가 있을 수 있을까?
이번 삶을 살아오면서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의문 따위는 할 필요조차 없었다.
아주 미약하나, 창천검신의 경지를 따라 자신만의 경지를 새로 세운 유백기가 눈앞에 있다.
물론 단순히 창천검신의 무위보다 더 강하다. 라는 사실은 아니다.
‘창천검신과는 다른 무위다.’
단순히 강함의 우열을 나눌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어차피 정점 중의 정점인 건 매한가지. 단지 정점의 성격이 다르다.
그것만으로도 천무백은 진정 기뻤다.
일전에 유백기에게 건넨 조언 중 하나는, 천무백이 전생을 거듭하면서도 잃지 않는 하나의 신조다.
‘훔쳐라. 무공에 있어서는 지독할 정도로 도둑놈이 되어라.’
각각의 숱한 고수들이 평생을 갈고 닦아 온 무학.
그것을 보고, 배우고,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야 말로 무인의 길.
천무백은 눈앞에 있는 유백기가 개척해 낸 경지를 보며 진정으로 즐거웠다.
‘이건 훔치는 게 아니지.’
암.
‘제자의 것은 내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천무백은 신중하게, 그리고 집중력 있게 검을 휘둘렀다.
자신이 가진 모든 걸 쏟아부어서라도, 유백기가 꽁꽁 숨겨 놓은 무학의 오의를 꺼낼 수밖에 없게끔.
그리고 그걸 자신의 것으로 소화할 생각이다.
무(武)에 대한 탐욕이 거칠게 요동쳤다.
솔직히 말해 내공의 총량으론 유백기를 이기지 못하며, 정순도로 봐도 유백기의 내공 역시 정순하기 이를 데 없어 큰 차이가 없다.
이 순간, 천무백은 감각으로 싸웠다.
켜켜이 쌓여 온 경험이란 무기로, 짐승의 그것보다 더 매섭고 예민한 본능으로.
맞싸우고, 대응하고 반격하며 공방을 이었다.
점점 유백기의 얼굴이 어둡게 굳어졌다. 공방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하나 그렇다고 유백기가 밀리는 싸움은 아니다. 오히려 약우세였다. 무서우리만치 천무백의 모든 공격을 막고 피하고 파훼하며 역공을 취했다.
중검(重劍), 쾌검(快劍), 패검(覇劍)…… 온갖 검의 묘리란 묘리가 오갔다. 온갖 수법이 잔뜩 섞였다.
허초 속에 실초가 숨겨 있었고, 실초 속에 살초가 번뜩였다.
침묵 사이로 삼십여 번이나 검이 부딪치고 공력이 오고갔다.
어느 순간 유백기의 입에서 무거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유백기가 쏟아 낸 모든 속임수와 허초가 파훼되는 게 반복되니 나올 수밖에 없는 탄식이었다.
천무백은 유백기의 검을 맞대응하면서 묘한 기분을 느꼈다.
유백기의 검의 골자는 창천검신에게서 배운 묘리다.
자신의 경험과 깨달음을 녹여 냈다고 해도, 바탕은 변하지 않는다.
그 바탕과 검을 맞대면서 천무백은 마치 자신의 분신과 싸우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천무백인가, 창천검신인가?’
매 삶을 달리할 때마다 빠지는 괴리감.
전생의 경험과 현생의 육신이 다르다는 부분에서 오는 괴리.
하지만 지금 그 괴리가 아주 조금씩 옅어져 갔다.
그랬다. 창천검신의 무학을 익힌 유백기와 겨루며, 천무백은 역설적으로 창천검신 시절의 무학과 이번 현생에서 이룩해 낸 무학이 서로 합쳐지고 있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오로지 천무백만이 인지한 느낌.
그랬기 때문일까.
우세적으로 천무백을 몰아붙이던 유백기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우세에서 약우세에서, 이제는 서서히 비등할 정도까지.
그때, 유백기가 공력을 있는 힘껏 발출했다.
어마어마한 검풍(劍風)에 천무백은 이를 악물며 맞서 공력으로 퉁겨 냈다.
그러나 그 충격은 무시할 수 없었던지라, 둘은 훌쩍 거리를 벌린 채 물러났다.
일순, 정적이 맴돌았다.
그 지독한 정적 속에 유백기의 혼란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참으로 낯익은 검이로구나.”
형언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이 유백기의 얼굴에 떠올랐다.
정면을 향했던 검끝이 조금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유백기의 입이 열리는 순간, 천무백은 입을 다물었다.
“반로환동이라도 하시고 숨어 계셨소? 스승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