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78화>
278. 오로지 검만이 존재했다
유백기가 검을 겨눴다.
검끝이 햇빛에 반짝였다. 당연하게도 유백기의 검은 곧 창천검신의 검이다.
수많은 호사가들이 창천검신의 검을 여러 말로 수식했다.
천하제일, 파천(破天)의 검, 산악같이 무겁고 하늘처럼 높은 검……
하나 천무백은 본인의 검을 딱 한 단어로 일축했다.
“죽이기 위한 검이라…… 비무 아닙니까?”
오로지 죽이기 위한 살의(殺意)만이 담긴 검.
숱한 사람들이 함축된 도(道)가 검에 담겨 있으리라 여겼지만 천무백은 코웃음쳤다.
검은 그저 잘 베고, 잘 찌르면 된다는 것이 유일한 검도(劍道)였으니까.
유백기가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내 검이 그리 보이나? 아니면 스승님의 검이 어떤 것인지 풍문으로 들어봤는가?”
“살기를 그렇게 폴폴 풍기고, 검에도 뜻을 담았는데 당연히 죽이기 위한 건 아니겠습니까.”
“과연, 소문대로군. 검을 보는 눈썰미가 대단해.”
유백기는 짧게 감탄을 표하며 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순간 주위의 기류가 완전히 바뀌었다. 천근보다 무거워지며 숨쉬기조차 힘든 강렬한 압박이 사방에서 짓눌렀다.
“만일 공자가 스승님의 유지를 이었으면 잘 알 텐데. 검을 들고 휘두르는 순간만큼은, 설령 그것이 비무더라도 검의 가장 순수한 본질에 닿아야 한다고.”
묘한 기분이었다. 자신이 유백기의 검을 봐주면서 매번 했던 조언이었으니까.
그 조언을 돌려받을 줄이야.
“그래도 그렇지, 후배를 죽이고자 마음먹으십니까?”
“검은 언제나 가장 근원에 닿아야 하네. 스승께서도, 그리고 나도 검의 근원은 살(殺)에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네.”
상대편 처지에서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내가 저렇게 말하면서 거의 죽기 직전까진 만들었던 거 같은데.’
늘 실전을 중요시했다. 비무를 할 때도 실전처럼 했다. 검에 살의(殺意)를 담고 휘둘렀다.
사실 괴팍하다 못해 난폭했지만, 결과적으로 유백기는 모든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며 크게 성장했다.
죽지 않기 위해 검을 휘둘러야 하니까.
천무백은 유백기의 담담한 표정을 자세히 살폈다.
‘저 녀석 혹시 감정이 있는 건 아니지?’
천무백이 불현듯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검 끝에 맺힌 건 지독한 살기였다
“설마 두려운가? 공자.”
“강호 사람들이 모두 천하제일이라 부르는 검존 아닙니까. 살의를 품으신다면, 세상 죽이지 못할 이가 누가 있겠습니까.”
“스승께선 늘 말씀하셨지. 칼끝의 상대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자세로 맞이해야 한다고.”
거참…… 자승자박도 아니고. 다 본인이 했던 말이라 할 말이 없다.
천무백은 미간을 좁히며 턱을 긁적였다.
“공자가 스승의 유지를 이었다면, 내 검을 받고도 살아남을 것일세. 하지만 단지 사칭하고 강호를 속인 것이라면, 내 검을 버티지 못하고 죽겠지. 간단한 논리네.”
천무백은 혀를 내둘렀다. 은근히 배알이 조금씩 뒤틀리기 시작했다.
솔직히 과거를 떠올리면, 둘의 사제관계는 꽤 파란만장했다.
‘애틋한 스승과 제자라기보단…… 음, 그냥 서로 미운정이 든 거지?’
천무백은 아랑곳없이 비무를 빙자한 구타로 유백기를 가르쳤고, 유백기도 아득바득 검을 휘둘렀다. 유백기가 한창 어릴 땐 그저 자신을 존경만 하진 않았다. 눈은 반항기가 넘쳐났고 젊은 혈기엔 ‘반드시 한 방은 먹여 주겠다’라는 감정이 담겼다는 걸 천무백은 잘 알았다.
시간이 흘러서 기억에 보정이 들어가 애틋했던 사제 관계처럼 느껴지는 거지.
남들이 보기엔 서로 원수처럼 보이던 사제 관계가 아니었던가?
천무백은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렀다. 유백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살기에 실성한 건 아니겠지? 공자.”
“아닙니다. 사숙조님. 아니, 사숙조님께선 제가 동문임을 아직 의심하고 계시지요?”
“그러네. 말 몇 마디로 믿을 수가 없지. 강호는 모든 사람을 의심해야 하는 법이니까.”
“맞습니다. 하면 저 역시 지금 이 순간만큼은 사숙조님을 동문으로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무슨 뜻인가?”
“동문으로서 비무를 하는 게 아니라, 훌륭한 강호 선배를 만나 진정으로 가르침을 받겠다는 뜻입니다.”
“호…….”
말뜻을 알아들은 유백기가 짧게 감탄을 터뜨렸다.
“같은 동문이 아니라 그저 다른 강호인으로서 대하겠다는 뜻이군.”
“제가 마음이 여려서 말입니다. 어찌 동문의 선배인 사숙조님께 살의를 품고 검을 휘두르겠습니까. 그렇다고 몸을 사릴 수도 없고.”
유백기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 맹랑한 친구 같으니라고.’
사숙조를 죽이고자 검을 휘두를 순 없으니, 아예 사숙조라고 생각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닌가.
배짱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사숙조가 아니라면, 자신도 살의를 품고 죽일 수도 있다고 단언하는 모양새니, 그 패기(覇氣)에 감탄이 터져 나올 정도였다.
언제 저런 맹랑한 후기지수를 봤었는가.
불현듯 유백기의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이 스쳤다.
‘혹시 스승님께서 젊은 시절 후손을 보신 건 아니겠지?’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건 유백기도 잘 알았다.
강호에 나선 이후 유백기는 평생 창천검신의 곁을 지켰다.
그에게 가족은, 참으로 괴팍하고 살벌한 사제지간이었던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런데도 이런 생각을 떠올리는 이유는 간단했다.
‘성정이 매우 비슷한 것 같군.’
단지 검을 이어서 성정이 비슷해진다?
그건 유백기만 봐도 아니다. 유백기도 스승을 닮아 간혹 괴팍한 부분이 있긴 하나, 그건 검을 휘두를 때나 그렇지 평소엔 고지식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눈앞의 천무백은 다르다.
뭔가……
‘분위기도 그렇고, 무엇보다 눈…….’
상대에게 예의를 갖춘 것 같으나, 패기가 담겨 있는 눈빛엔 오히려 여유가 가득했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쇼. 내 노인공경은 할 줄 아니까 말입니다.”
“허허허…… 맹랑하군, 공자.”
“사실 저도 성격이 조금 많이 모나서 말입니다. 상대가 검을 겨누고 살기를 담는데, 웃으면서 받아칠 수는 없지요.”
“그래서 내 스승님께서 참 적이 많으셨지.”
“…….”
“공자는 모르겠지. 강호인들이 하나의 신화처럼 찬양하고, 이제는 정마대전을 구한 유일한 영웅으로 신격화되니까 말일세. 하지만 당시 스승님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어.”
“크흠.”
천무백이 헛기침을 했다. 유백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는 듯 시선이 먼 곳을 향했다.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 없었다니까. 한참 후배들끼리 모여서 밥이라도 먹고 있다가 스승님이 헛기침하면서 나타나면, 다들 배부르다고 자리에서 분분히 일어나고…….”
“흠…… 흠.”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괴팍한 양반이셨지. 가르침을 청하겠다고 비무를 요청하면, 그게 비무인지 구타인지 모르겠더군. 곽용, 그 친구도 수도 없이 맞아서 스승님이 머리 긁으려고 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켜서 거품을 물 정도였으니 오죽하겠는가.”
“…….”
“앞에서는 그저 존경의 빛을 보였던 이들도, 뒤에는 제법 험담 좀 하고 다녔다네.”
천무백의 표정이 괴이하게 일그러진 걸 본 유백기가 웃음을 터뜨렸다.
만일 정말 동문이라면, 무한한 존경을 품었을 게 틀림없는 창천검신을 모욕한 꼴이니.
저런 표정을 짓는 것도 이상한 게 아니리라.
“나름 인간적인 분이었네. 간혹 휙휙 튀어나오는 괴팍한 면모는 내 감당하기 힘들었지. 스승님껜 굳이 티를 내지 않았지만, 그분을 모시느라 참 힘들었단 말이지.”
“……검신을 미워하셨습니까?”
“존경했네. 그리고 미워할 때도 있었지. 그분에게 검을 배우면서 오죽 맞았나. 차라리 천마랑 싸우는 게 낫겠다 싶었으니까.”
“…….”
“한없이 존경스럽기도 하고, 한없이 대단해 보이기도 하고, 때론 간혹 밉기도 하고, 제자에게 큰 짐을 안겨 주고 그리 가셨나 원망스럽기도 하고…….”
잠시 먼 산을 쳐다보던 유백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딱 하나의 감정은 확실하군.”
“뭡니까?”
“청출어람(靑出於藍).”
“…….”
“그것이 내 검도의 목적이자, 스승님에게 반드시 보여 주고 싶어 했던 거였네.”
“이루셨습니까?”
“애석하게 됐지. 그 전에 귀천(歸天)하셨으니, 확인할 수가 없네. 살아 계셨더라면, 내가 그간 이룬 성과를 보여 드렸을 터인데.”
그렇게 말하는 유백기의 눈동자는 무덤덤했다.
천무백은 잠시간 그 눈을 보았다.
그리고 검을 들어 올렸다.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그래야지.”
“사숙조께서도 전력을 다하십시오.”
“당연히 그럴걸세.”
“아니, 진심으로요.”
“…….”
유백기가 멈칫했다. 천무백은 담담하게 말했다.
“검의 각도가 안쪽으로 휘어져 있습니다. 전력을 다하겠다고, 검에 살의를 담았다고 해도, 진심으로 절 죽이고자 검을 든 건 아니란 뜻이지요.”
유백기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어떻게……?’
산전수전 다 겪은 노강호인 유백기의 표정이 이렇게 다채롭게 변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하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검을 든 자세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천무백이 알아차렸다.
‘내 검의 자세를 어찌 알고?’
초면이다. 자신의 명성이 강호에 진동을 한다고 해도, 들은 것만으로 어떻게 검을 잡고 자세를 취하는지 알 수는 없다. 직접 보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설령 스승님의 후인이라 나와 같은 검을 익혔다고 해도 모른다.’
아무리 똑같은 무공을 익혔다하더라도, 같은 문파의 무인들의 무공은 제각기 다르다.
무공을 익히고 사용해 오며 습관과 경험이 녹아들기 때문이다.
유백기는 천무백이 저리 말하는 순간, 잠깐이나마 몸이 긴장으로 빳빳해지는 걸 느꼈다.
제 속마음을 들여다본 것 같았으니까.
유백기는 이해하기 어려운 눈으로 천무백을 쳐다보다가, 이내 검을 살짝 내렸다.
“…….”
범접할 수 없는 강렬한 살기가 주위를 가득 메웠다.
굳은 얼굴의 유백기가 입을 열었다.
“전력을 다하지. 스승님이 가르쳐 주신 검으로.”
천무백이 웃었다.
그간 이룬 성과.
‘내 한번 전력을 다해 봐주마.’
천무백도 진심이었다.
* * *
비무에서 후배에게 선배가 몇 수를 양보해 주는 건 관행이나 다름없다.
몇 수는 아니더라도, 선공은 양보하는 게 보통이다.
하물며 천무백과 유백기의 배분을 생각하면, 적어도 천무백은 다섯 합은 양보를 받아야 정상이었다.
하나 애석하게도 유백기에겐 관행 따위는 없었다.
유백기의 공세가 거칠게 시작됐다.
그 속도가 얼마나 쾌속한지, 천무백의 반응이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이미 손목이 잘렸을 정도였다.
머릿속이 순간적으로 싸늘해졌다.
천무백의 머릿속이 비상하게 돌아갔다.
‘수비를 강요하는 공세다.’
공격할 틈도 주지 않고, 오로지 수비만을 강요하는 매서운 연격.
검이 부딪치면서 팔꿈치와 어깨에 둔중한 충격이 차곡차곡 쌓였다.
더 공세를 받아 내면 근육이 파열될 정도의 강맹한 기운이 신체 곳곳에 파고들었다.
짧은 찰나 아홉 번의 공격을 모두 받아 낸 천무백은, 순간적으로 틈을 봤다.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일부러 만들어낸 빈틈이라 해도, 천무백은 함정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내다.
아홉 번의 공격을 막고, 네 번의 공격을 퍼부었다.
천무백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것이 둘의 실력차이를 명백하게 보여 주는 상황이었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더 공격을 퍼부을 수 있었다.
그러나 천무백이 갈고닦은 신체와 기경팔맥으로 뻗어가 있는 내공이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근육이 찢어지고 뼈가 비틀려지는 느낌이 전신의 감각에 잡혔다.
항마기, 선기, 극음지기로 신체를 보호하려 해도, 유백기의 공력은 거침없이 파고들어 위협했다.
결국, 천무백이 버티면서 공격을 퍼부을 수 있는 건 딱 네 번.
조금은 무리해서 한 번 더 찌르려 했건만, 그 사이를 비집고 검이 번뜩였다.
검끝에서 불쑥 솟구치는 한 치 길이의 검기.
천무백은 본능적으로 왼손에 장력을 담아 받아쳤다.
꽈앙!
둘 다 만만치 않게 공력을 담은 공격이 정면으로 부딪치자, 둘은 서로에게서 살짝 물러났다.
“…….”
독마를 상대할 때도, 살왕을 잡을 때도, 귀마를 인질로 잡을 상황에서도.
그리고 혈불을 죽여야만 하는 상황에서도 천무백은 오른손으로만 검을 잡았다.
검이 가볍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으로 충분했으니까.’
지금 천무백은 검을 끌어당겨 양손으로 붙잡았다.
머릿속에 오가는 수많은 무공과 경험.
그 모든 걸 지웠다. 모두 잊었다. 백지가 되었다.
그리고 오로지 눈앞에 검선을 주시했다.
이 순간, 천무백의 감각엔 오로지 검만이 존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