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277화 (277/318)

<검신재생 277화>

277. 제자와 문답

천무백은 이번 삶에서 언젠가는 유백기를 만나리라 예상했다.

천마를 죽이기 위해 새외에서 마도와 싸우는 유백기.

중원에서 혈귀곡을 추적, 격살하는 천무백은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었다.

만나면 어찌해야할지, 꽤 깊은 고민을 했다.

‘내 전생을 밝혀야 하나?’

유백기에게 어렴풋이 암시했던 적은 있다.

전생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물론 당연히 순수하게 납득하진 않았다. 제아무리 스승의 말이라면 믿어 의심치 않는 유백기도 수긍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니까.

단지 무슨 현묘한 뜻이 담긴 가르침이 아닌가하는 오해를 했다.

그러면 천무백도 굳이 설명하고 이해시키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천무백은 가만히 유백기를 쳐다봤다. 무언가 알 수 없는 자랑스러운 감정이 가슴에 가득 찼다.

‘아무리 늙고 육체가 노쇠해도 자세만큼은 무너지지 않는군.’

무려 자신을 향해 칼끝을 겨누고 있는 상대였건만, 천무백은 흐뭇하기 짝이 없었다.

천무백은 마치 거울을 들여다 본 듯한 느낌이었다.

그야말로 한없이 완벽에 가까운 자세.

검을 겨눈 평범한 기수식이다. 그러나 풍기는 기도는 남달랐다. 자세히 지켜보면 막막함이 느껴질 정도로 단단한 철벽이었다.

동시에 전신에 위기감이 치밀었다. 머리칼부터 솜털 하나까지, 모조리 곤두섰다.

날카로운 칼날과 철벽같은 방패의 기세가 고작 저 하나의 기수식에 담겼다.

‘내 전생의 경지에 거의 근접했구나.’

죽기 전 유언을 남겼었다.

언젠가 자신을 대신해 검극을 엿보라고.

유백기는 유지를 철저히 따라 정진하고 또 정진했음이라.

천무백은 결단을 내렸다.

‘내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유백기를 납득시키는 건 가능한 일이다.

둘만이 아는 비밀과 수많은 이야기가 머릿속에 있으니까.

하지만 천무백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작금에 스승과 제자로 관계를 이어 나간다면, 유백기에게 좋지 않을 것 같았다.

‘미련한 녀석. 그저 죽기 전에 던진 말 한마디에, 역천까지 행하면서 몸을 험히 굴리다니.’

죽기 전, 늙은 스승 부려먹지 말고 천마는 직접 해결하라고 짓궂게 농담처럼 말했었다.

한데 그 말을 스승의 유지로 떠받들며, 역천까지 행하며 제 삶을 이어 가는 녀석이다.

천무백이 여기서 만일 창천검신임을 밝히면?

죽은 줄 알았던 스승이 새로운 삶으로 돌아왔으니, 유백기는 거의 하늘처럼 모시고 따를 것이다.

천무백은 이제 삶의 막바지에 있는 제자에게 더 큰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착.

천무백이 포권을 취하며 허리를 숙였다.

“사질(師姪)이 사숙조(師叔祖)를 뵙습니다.”

깊게 허리를 숙인 천무백의 뒤통수에 유백기의 묘한 시선이 닿았다.

* * *

“만일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칼을 들어 목을 쳤을 것이네.”

“하지만 그러지 않으셨죠.”

천무백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유백기는 여전히 딱딱했다.

“공자의 말을 믿는 게 아니라, 공자의 눈 때문일세.”

“눈 말입니까?”

“스승님의 눈 같더군.”

천무백은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았지만 뜨끔했다.

“괴팍한 듯하면서도 장난기 서린 눈동자에는 늘 진중함이 담겨 있었지. 그 진중함 속에는 세상 무서울 것 없는 패기가 가득했었고. 공자가 악인(惡人)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 검을 휘두르지 않았네.”

“하면 사숙조께선 제가 동문(同門)임을 믿지 않으신다는 것이군요.”

한마디로 천무백의 말이 거짓으로 밝혀지면,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두르겠단 뜻이다.

‘허 참. 제자 놈에게 칼 맞기 싫어서 전전긍긍하게 될 줄이야.’

천무백은 속내로 허탈하게 웃었지만, 여전히 담담한 기색을 유지했다.

유백기의 눈동자에 이채가 잠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마음만큼은 철심(鐵心)을 지닌 청년이로군. 하긴, 이 정도는 되어야 마도와 싸우고, 내 앞에서도 설령 거짓이더라도 당당하게 나와 동문이라고 장담하는 거겠지.’

유백기는 이 젊은 청년이 썩 마음에 들었다.

같은 마도를 상대로 싸우는 백도의 인물이란 건 차치하고서도, 가진 바 실력과 재능에 선배로서 호감이 드는 건 당연했다.

곁에 두고 대화를 나누는 것도 즐거울 터.

‘이런 거짓만 말하지 않았다면 말이지.’

유백기는 믿지 않았다. 스승의 검을 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내가 사숙조라면, 내가 모르는 사형이 나에게 있었고, 그 사형이 제자를 길렀으며, 그 제자가 또 공자를 길렀다는 뜻이겠지.”

“그렇습니다.”

“공자. 애석하게도 스승님께선 나를 제외한 제자를 기르지 않으셨네.”

진실이다. 천무백은 유백기만 제자로 맞이했다.

저 대단한 투신 곽용이 그토록 질투했지만,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처럼. 함부로 제자를 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천무백은 뻔뻔했다.

“어찌 확신하십니까?”

“내 일평생을 스승과 함께했네. 그분이 떠나는 길까지.”

“창천검신께서 강호에 나선 건 서른 이후입니다. 그 이전에는 사숙조께선 아직 연이 닿지 않으셨지요.”

“……날 만나기 전에 제자를 길렀다는 뜻인가?”

유백기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천무백이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유백기를 만나기 전에 어떻게 지냈는지는 알려 준 적도 없으니까.

“믿기 어렵군. 스승님은 나에게 사형이 있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고, 그러면 정마대전 때 사형은 대체 어디 있었단 말인가?”

“그전에 돌아가셨습니다.”

“…….”

“마도의 칼날에 죽었고, 그런 이유로 창천검신께선 마도와의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제 스승은 일찍이 요절하신 사조의 아들이었습니다.”

천무백은 굳이 길게 얘기하지 않았다. 세세하게 설명하면 문답이 길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면 예상치 못한 데에서 빈틈이 나올 수도 있겠지.

천무백은 철저히 유백기가 애당초 알 수 없는 내용만 꾸며서 얘기했다.

당연히 다 거짓말이다.

그렇지만 유백기가 당장 그 내용이 진실인지 확인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 과거를 알 만한 사람들은 지금쯤이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까.

유백기의 묘한 시선이 천무백에게 향했다.

“인생의 황혼에 이르러서야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면, 쉬이 믿을 수 없는 법이지. 공자, 서로에 대해 한 가지씩 문답을 나누시는 건 어떻겠나.”

“서로 문답을 하자는 것입니까?”

“그렇다네.”

천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도 유백기가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지 궁금했으니까.

천무백이 먼저 물었다.

“새외에서 마도를 추격하고 있었습니까?”

유백기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쫓기고 있었지.”

순간, 천무백은 말문이 막혔다. 생각하지 못한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더 캐묻고 싶었지만, 이번엔 유백기의 차례였다.

“듣기론 공자는 검과는 인연이 없는 한량이었다고 들었소. 그러면 대체 언제 스승에게 무공을 배운 것인가?”

“스승님께선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기 싫어하셨습니다. 제 오성을 우연히 알아보시고, 조용히 저에게 무공을 전수했습니다.”

유백기는 묘한 눈빛으로 천무백을 쳐다보며 지나가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스승께서 단순히 창천검신의 후인일 뿐 아니라, 빙공의 고수이자 도학(道學)을 깊이 익히신 도인이셨나 보군.”

질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천무백은 내심 헛웃음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천무백의 무공을 보지도 않고, 하단전의 극음지기와 중단전의 선기를 파악한 것이다.

‘늙더니 눈썰미는 더 날카로워졌구나. 음흉한 면도 생겼고.’

천무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문답의 차례는 제 순서였으니까.

“마도에게 쫓겼다고 했는데, 창천검신의 유지를 받들어 마도를 추적하러 간 것이 아닙니까?”

이번에는 담담했던 유백기의 얼굴에 희미하게 놀람이 번졌다.

스승의 유지.

“스승님의 유지가 무엇인지 아는가?”

“제 질문에 답하지 않으셨습니다만, 그것이 질문이시라면 먼저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창천검신께서 이르시길, 늙은 자신에게 의지하지 말고, 마도를 쫓아 멸하고 천마를 죽이라는 유지였습니다.”

“……어떻게 그 유지가 공자의 귀에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천마를 죽이러 새외로 갔으나, 중과부적이었네. 홀로 수십 년을 싸웠지만 결국 밀리기 시작했고, 종국에는 마도와 서로 쫓고 쫓기는 싸움을 계속 했네. 때론 쫓기고, 때론 내가 쫓고.”

유백기는 계속해서 정중한 어조를 유지했다. 둘의 배분을 생각하면 천무백의 주장만 생각해도 무려 3대가 차이가 난다.

‘하긴, 이런 고지식한 점이 마음에 들었지.’

천무백은 나이가 들어도 변하지 않은 자세를 보며 내심 흐뭇하게 웃었다.

유백기가 손을 내밀었다.

“조금 전 내가 물어본 질문에 답했으니, 다시 공자의 차례요. 질문하시오.”

천무백은 잠깐 고민했다. 이 문답은 단순한 궁금증을 푸는 것이 아니다.

‘대결이지.’

서로가 원하는 정보에 대한 답을 얻을 때까지.

칼은 없으나 말 속에는 또 다른 칼이 있는 살벌한 문답이다.

천무백은 최대한 자신이 주장하는 거짓 정체를 납득시켜야 했다. 반면 유백기는 이미 천무백의 주장이 거짓이라고 생각하며, 역으로 정체를 캐내려는 속셈이다.

‘쉽지 않군.’

그러니 질문 하나에 생각을 깊게 해야 한다.

“어째서 지금까지 천마를 죽이지 못했습니까?”

이번엔 유백기의 눈꼬리가 살짝 떨렸다.

“어려운 질문이지만, 간단히 답하겠네. 내가 죽이기 전에 새로운 천마가 군천악을 죽였지. 그리고 그 새로운 천마는 더 강해.”

“사숙조께서 이기지 못할 만큼 말입니까?”

“그거 다음 질문까지 미리 쓴 것으로 생각하겠네.”

천무백은 자연스럽게 추임새를 넣듯이 물어봤지만, 유백기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적어도 스승님이 돌아오셔야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일세. 난 아직 그분의 경지에 오르지 못했으니까.”

천무백은 혀를 내둘렀다. 유백기는 객관적으로 자신의 실력을 판단할 줄 알았다. 그런 사람이 새로운 천마를 상대하기 어렵다는 건, 진실이란 얘기다.

이번엔 유백기가 질문했다.

“공자 역시 마도와 싸우니, 마지막 목표는 천마를 죽이는 것일 터. 솔직히 말해 공자의 실력은 놀랍고 찬탄을 표하지만, 저 마도와 천마를 죽이기에는 부족하네. 이길 수 있는 방도를 생각해 놓으셨는가?”

이번엔 대답하기 어렵지 않은 질문이었다.

“이길 수 있는 방도는 간단합니다. 지독한 살의를 품고 흔들림 없이 검을 휘두르면 됩니다.”

“그것이 공자의 검도(劍道)인가?”

“검도가 별거 있습니까. 적의 목을 베고, 찌르는 것. 살의(殺意)가 곧 검에 담기면 그것이 검도죠.”

그 말을 곱씹는 듯 유백기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 말을 다른 백도 무인들이 들었다면 기겁을 했을걸세. 흡사 사파의 논리 같으니까. 어쩌면 마도와 비슷하지 않은가.”

“그래서 마도가 강호가 태동한 이래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오는 것이죠.”

유백기는 묘한 눈길로 천무백을 쳐다봤다.

“이상하군. 스승님의 후인이이 맞다고 해도, 어째서 그분의 성정과 뜻이 비슷할 수가…….”

천무백은 뜨끔했지만, 여전히 담담한 기색을 유지했다.

유백기는 한숨을 내쉬며 천무백의 허리춤을 바라봤다.

“그건 철신고검인가?”

“맞습니다.”

“스승님께서 그 검을 쥐고 정마대전을 호령하셨지. 고검이 그쪽에 이어졌을 줄이야. 어찌 구했나?”

“제갈세가의 태상가주 어르신께서 주셨습니다.”

“……그 친구가 자네를 스승님의 후인임을 인정했다는 것이군.”

“그렇습니다.”

유백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별안간 일어섰다.

“검을 뽑으시게.”

“…….”

“자고로 검객이라면, 검으로서 얘기하는 법. 그것이 가장 확실하겠지. 자네가 스승님의 독문무공을 제대로 익혔다면 말이야.”

천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 강호의 천하제일인 유백기.

지금까지 천무백이 이룩해 낸 성과를 겨뤄 볼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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