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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재생-276화 (276/318)

<검신재생 276화>

276. 야, 이거 패륜인데

혈불이 쏟아 낸 강기는 평범한 마기가 아니다. 검붉은 빛이 용암처럼 타오르는 염화(炎火)였다.

반면 천무백의 오른손에 맺힌 눈처럼 새하얀 건 극음지기였다.

불과 얼음의 기운이 부딪친다.

파스스스슷!

왼손에 들린 철신고검은 혈불의 오른손이 붙잡았다.

천무백의 오른손과 혈불의 왼손은 손바닥을 편 채 서로 장력을 교환했다.

그 사이로 새하얀 김이 뭉게뭉게 솟구쳤다. 장내를 가득 메워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았다.

염화와 냉기가 서로 잡아먹으려고 이를 드러내며 마구 얽혔다. 서로를 깨물고, 뜯고, 짓이기고. 하나의 생명체처럼 미친 듯이 싸웠다.

‘감히 나에게 내공으로 승부를 걸어?’

혈불의 안광이 시퍼런 빛을 토했다.

무림일절이나 다름없는 천무백의 찌르기에 너무 감탄했을까.

그가 한손만 쓰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자각하지 못했다. 외팔이지만 너무나도 위력적이었기에, 본래 양손을 자유자재로 쓰는 검객임을 잊었다.

하물며 격돌의 순간에 쏟아지는 게 어마어마한 냉기라니!

그래도 혈불은 자신 있었다.

서로 극과 극인, 그야말로 상극(相剋)의 두 기운이다.

자연의 법칙, 세상의 이치에 따르면 염화와 냉기는 양립할 수 없다.

결국엔 둘 중 하나가 잡아 먹혀야 끝난다.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다. 당연한 이치다.

‘현 마도에서 내가고수라면 본좌밖에 없다.’

혈불은 내공에 더 힘을 썼다. 더 깊고 중후한 막대한 내공으로 적을 깔아뭉개는 것.

혈불이 가장 즐기는 싸움 방식이다.

단순한 내력 차이도 아니다. 설령 상대의 내력이 비슷하더라도, 이런 싸움에서 혈불은 이기는 방법을 알았다.

오히려 자신에게 정면승부를 시도하는 천무백이 가소로웠다.

“그대의 검은 분명 무림일절이며 찬탄을 보내지만, 내력 싸움에서 본좌를 이길 수 있으리라 여겼는가?”

파스스스스스!

염화에 휩싸여 얼음의 기운이 사그라들었다.

혈불의 눈동자에 희열이 떠올랐다.

‘이겼다.’

상대는 이제 볼품없이 날아가거나. 그대로 잡아먹힐 뿐이다.

버티면 단전의 모든 내력이 소진되어 목내이처럼 말라 버릴 것이고, 떨쳐 낸다면 도저히 이겨 낼 수 없는 치명적인 내상을 입게 되리라!

“……!”

자신만만하던 천무백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자 했던 혈불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무서우리만큼 정적(靜的)인 동공.

단 일말의 감정도 없는, 무심함만이 눈동자에 떠올랐다.

혈불은 순간 이해할 수 없는 불길함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뭐지?’

대체 뭘 믿고 있는 거지? 어째서 저리도 무신경할 수 있지?

당장 본인이 죽게 생긴 상황인데?

그때, 천무백의 입가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입술이 열린 채, 흘러나온 말 한마디가 혈불의 심장을 차갑게 얼렸다.

“새끼. 뭔 깡으로 내상 입은 상태에서 덤볐냐?”

“……!”

혈불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어떻게?’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막대한 내력으로 자그마한 내상쯤이야 감쪽같이 덮어 버릴 수 있다. 또 아주 미약한 내상인지라 내력을 최대한 이끌어 사용하는데 혈불은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한데 천무백은 자신이 내상을 입은 걸 확신했다.

마치 제 몸을 들여다본 것처럼.

순간 천무백의 전신에서 무수한 공력이 휘몰아쳤다.

핑핑핑핑핑!

“……!”

혈불의 얼굴이 균열로 일그러졌다.

경쳔혼공이 극한까지 운용되며 쏟아 내는 항마기와, 사그라들던 극음지기도 다시금 되살아나며 기세를 일으켰다.

항마기는 불처럼 뜨거웠고, 극음지기는 차가웠다.

천무백의 양손이 점점 혈불을 밀어냈다. 검끝을 막았던 혈불의 오른손은 밀리다 못해 손바닥에 검이 파고들었고, 왼손 역시 서서히 뒤로 밀려났다.

천무백은 지금 이 순간 간장과 막야 같은 장인이 되었다.

장인처럼 심혈을 기울여 두 가지 기운을 동시에 운용했다.

중단전의 선기가 흐름을 이끌었다. 혈불의 입이 쩍 벌어졌다.

“태…… 극!”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혈불을 중심으로 두 기운이 염화를 잡아먹으며 큰 원을 형성했다.

태극이다.

저도 모르게 태극의 중심에 서게 된 혈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깨달은 그는 이를 악물었다.

“땡중아. 삼도천을 건널 준비하거라.”

천무백이 웃었다.

항마기와 극음지기, 그리고 선기로 만들어 낸 태극은 어둠을 잡아먹은 태양의 양기와, 달의 음기로 이뤄졌으니, 곧 일월기(日月氣)였다.

천무백의 일월이 혈불을 집어삼켰다.

* * *

혈불은 노강호다. 수많은 싸움을 겪어 왔으며, 투쟁 끝에 혈귀곡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마도의 실세가 됐다.

그의 본능이 저절로 근육을 작동하고 기운을 끌어냈다.

이대로 장력을 거두지 않으면, 그대로 천무백의 일월에 집어 삼켜져 흔적도 없어지리라는 걸, 그간의 경험과 본능이 확신했다.

양손을 떼고 모든 기운을 거둬들였다.

목숨은 건졌다. 하지만, 단전에 큰 구멍이 뚫렸다.

구멍 사이로 막대한 양의 내공이 줄줄 흘렀다.

“어, 어찌…….”

혈불은 이해할 수 없었다. 공력의 차이는 명백했다. 단순히 기책으로 뛰어넘을 수 없는 압도적인 힘이다. 한데 천무백은 그걸 깨부쉈다. 자신이 완전하게 밀렸다.

“내상 입고 덤빈 네놈이 병신인거지.”

“미약한 내상이었다!”

“어쨌든 내상이다. 기의 흐름에 불균형이 생기는 것, 그게 곧 약점이지. 그 나이 처먹고 뭘 배웠냐?”

“……!”

혈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래, 그건 자신의 실수다.

하지만 본인조차도 크게 자각하지 못할 미세한 내상이었다. 한데 그걸 어떻게 알아차리고, 그 불균형을 노려서 부순단 말인가.

두려웠다.

내가 미친 듯이 무공을 갈고 닦으면, 저런 짓을 할 수 있을까?

아니, 못할 것 같다.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순간, 인정할 수 없었다. 막연한 두려움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내상은 누가 입혔냐? 미약하긴 하지만, 내력만큼은 천하제일인 놈에게 내상을 입힐 정도면…….”

천무백의 머리가 맹렬하게 돌아갔다.

아무리 자신이 빨리 달려왔다고 한들, 혈불보다 늦게 도착하리라 여겼다.

그래서 내심 혈불이 만들어 놓은 함정에 몸을 던질 각오까지 했었다.

한데 혈불은 자신보다 한 발짝 늦게 도착했을뿐더러, 아주 미약하나 내상을 입은 상태다.

더구나.

‘산서성의 마인들과 합류했을 텐데 말이지.’

혈불 외에 다른 마인은 없었다.

여기서 천무백은 한 가지 추론을 끌어냈다.

‘쫓기고 있는 건가?’

그래서 산서성에 있던 마인들로 추적자를 막게 한 다음에, 날 제압하고 떠날 속셈이었나?

추적을 피하다 보니 본래 계획보다 늦어진 것이고?

천하의 혈불을 도주케 할 수 있는 자.

천무백은 남궁진천을 도와 혈불을 격퇴했다는 정체불명의 고수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하나 혈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단전에 난 구멍에 거침없이 기운을 밀어 넣었다.

프아아아아아-!

혈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눈동자는 터질 것처럼 충혈됐다.

천무백이 혀를 내둘렀다. 단전에 생긴 구멍을 자신의 염화로 불태워 지져 버린 것이다.

“내가 백도의 저력을 너무 얕잡아봤군. 그대의 실력도 예상을 월등히 웃돌며, 새외의 그가 일찌감치 중원으로 돌아왔을 줄이야……!”

“그?”

혈불은 대답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도주였다.

설마 갑자기 몸을 돌려 도망을 칠 줄은 몰랐지만, 천무백은 금세 경공을 써 쫓았다.

그러나 혈불은 혈불. 앞서 쫓았던 살왕이나 귀마와는 수준이 다른 경신공을 선보였다. 천무백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거 쫓아가기엔……’

끝까지 쫓아가면 못 잡을 것도 없다.

하지만 불확실한 변수가 존재했다.

‘산서성의 마인들……!’

만일 혈불이 천무백을 하남 밖으로 끌어내고, 그사이 산서성의 마인들이 천무백의 본거지를 습격할 요량이라면?

하나 이내 천무백은 고민 따위는 할 필요가 없게 됐다.

앞서 달리던 혈불의 몸이 일순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

서걱!

마치 실 떨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너무나 힘없이 허물어지는 모습에 쫓아가던 천무백도 우뚝 멈춰섰다.

주름살이 그득하던 민머리가 바닥을 데구루루 굴렀다.

자신에게 칼이 떨어지는 걸 미처 보지도, 느끼지도 못한 채 목이 잘렸다.

천무백도 위기감을 느낄 정도로 깔끔하고도 쾌속한 검격.

목이 잘린 단면을 보면 피조차 솟구치지도 않고, 그저 핏방울이 맺혀 있을 뿐이다.

타고난 검객의 솜씨다.

저벅.

바닥에 놓인 혈불의 시체로 다가오는 발걸음.

노인이었다.

새하얀 백발, 새하얀 의복, 눈썹에도 새하얀 서리가 내렸고, 허리까지 오는 수염도 하얗게 세었으니, 흡사 선풍도골이었다.

하지만 한손에는 검을 들고 있었으니, 자애로워 보이는 얼굴 너머로 굳건한 백호가 있었다.

걷는 발걸음은 거인의 발자국이었고, 내쉬는 호흡은 돌풍보다 무거웠으며, 깊게 가라앉은 눈빛은 칼날보다 날카로웠다.

천무백은 웃었다.

“거, 참 많이 늙었구나.”

검존, 유백기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 * *

검존(劍尊).

칼로써 가장 존귀한 자리에 오른 이에게 붙여지는 별호.

창천검신이 우화등선한 이래, 뭇 강호인들은 그에게 검신의 별호를 잇기를 권했다.

하나 유백기는 감히 검신의 별호를 잇지 않았다.

그만큼 스승을 존경하다 못해 숭앙했다.

아무리 경지를 더 높이더라도, 그분의 발끝도 못 따라가리라고 자주 말하곤 했다.

유백기의 무력을 아는 이들은, 설마 그 정도겠냐고 고개를 갸웃했지만 유백기는 정색하며 말했다.

창천검신은 유일한 태양이자 하늘이라고.

세상에서 창천검신의 곁을 따르며 그분의 마지막까지 지키던 유일한 인물이기에, 창천검신을 평하는 유백기의 말은 강호에 널리 회자했다.

그만큼 창천검신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유백기였다.

한데 유백기는 몇 년 전부터 새외까지 퍼진 이상한 소문을 들었다.

창천검신의 후인이 나타났다고.

그가 평생을 쫓고 또 쫓는 새외의 마인들로부터 흘러나온 소문이었다.

중원에서 창천검신의 후인이 나타나 중원에 있던 마인들을 멸하고 있다고.

유백기는 당연히 코웃음쳤다. 창천검신의 후인은 자신이 유일했으니까.

하나 상황은 심상치 않았다.

결정적으로 전 무당파 장문인이 새외로 왔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창천검신의 후인이 무당을 구했다고.

유백기는 당연히 완전히 믿진 않았고, 의심을 더 했다.

하지만 유백기는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 새외마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새외마도가 중원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그간 유백기가 파악한 모든 세력이 뿔뿔이 흩어져서 동시다발적으로.

유백기는 불가피하게 중원으로 쫓아 들어왔다.

와중에 혈불을 발견했다.

유백기도 혈불을 아주 잘 알았다. 40년 전, 스승이 앞으로 저놈을 조심하라는 소리를 들었으니까.

하여 그를 쫓았다. 베고 또 베었다. 하지만 혈불은 도주했고, 여기까지 쫓아왔다.

결국엔 지금 자신의 검으로 베었다. 하지만 오롯이 자신의 공이 아니다.

이미 도망치는 상황부터, 몸이 반쯤 무너진 상황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유백기의 검이어도, 혈불은 막거나 피해 냈으리라.

유백기는 조용히 눈앞의 사내를 바라봤다.

혈불을 이리도 도망치게 만든 젊은 무인이라면…….

“천룡검협 천무백. 공자의 이름이 맞는가?”

“…….”

천무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백기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쩐지 자신을 바라보는 천무백의 눈빛이 따스했기 때문이다.

유백기는 다시 물었다.

“공자가 창천검신의 후인이라는 소문을 들었소. 묻겠소, 공자는 어찌하여 스승의 유지로 속이고 모욕하는가. 만일 나를 이해시킬 수 없다면, 스승의 검을 이은 검객으로서, 내 검이 공자를 용서치 않으리라.”

그리 말하며 유백기는 검을 들어 올렸다.

단지 검을 들어 올리는 행동 하나만으로, 주위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마치 둘이 서 있는 장소만 전혀 다른 세상인 것처럼 기후 자체가 바뀐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천무백의 얼굴에 떠오른 건 두려움도 아니었다. 유백기는 순수하게 감탄을 내뱉었다. 자신의 기세를 정면으로 받고도 흔들림 하나 없는 태도라니. 저만한 기재가 강호에 나타나다니, 참으로 홍복이 아닌가.

하나 천무백의 표정은 조금 떨떠름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약간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야, 이건 패륜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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