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275화 (275/318)

<검신재생 275화>

275. 미친 듯이 해 봤어?

“……정녕 본좌를 우롱하는 게구나.”

생사가 오가는 싸움에서 팔 하나를 쓰지 않겠다고?

혈불은 절대 부처 같은 얼굴을 유지할 수 없었다.

모든 걸 떨쳐 낸 혈불의 얼굴은 흉신악살이 따로 없었다. 그야말로 악귀같은 얼굴이 거칠게 일그러지며 뜨거운 호흡을 내뱉었다.

천무백이 차갑게 웃었다.

“우롱은 지랄. 수준에 맞게 상대해 주겠다는 거지. 강호 경험 하루 이틀이야? 하수 상대로 양보해 주는 건 강호의 미덕인 법이란다. 이 노괴야.”

“젊은 놈이 광증(狂症)이 있군. 독마나 귀마를 잡았다고 기세등등하여, 눈앞이 멀어 버렸나?”

“어이고. 독마나 귀마나 걔들이 네 선배 아니냐?”

“마도는 강자존의 세상! 오직 서열만이 존재한다.”

“이래서 내가 마도를 싫어해요. 하여간 애새끼들이 예의를 아주 삶아 드셨어. 능허야. 네가 나중에 얘들 데리고 유학 좀 가르쳐라. 장유유서부터 천천히.”

“…….”

혈불은 말문이 턱 막혔다.

장유유서라니…… 손자가 있으면 그것보다 어릴 게 틀림없는 놈이 쌍욕을 지껄이고 있는데…….

“하여간 이래서 못 배운 채 늙기만 한 놈들 때문에 강호 전체가 욕먹지. 이게 강호 무인 평균인 줄 아니까. 쯧쯧. 에라이. 너 같은 늙은 새끼 때문에 어? 내가 쪽팔려서 어디 가서 강호인이라고 말을 못 해요.”

후웅!

혈불이 벼락처럼 달려들었다.

활짝 펴진 쌍장이 앞으로 내세워지면서 둥글게 말았다. 주먹으로 꽉 쥐여지는 순간, 대기가 거칠게 일렁였다.

꽈앙!

엄청난 충격파가 대기를 격하게 찢어 버리며 단숨에 천무백을 직격했다.

무슨 공격인지 알아본 천무백의 눈동자가 꿈틀거렸다.

“거, 오래 살다 보니 별 같잖은 일이 다 있네. 백보신권 쓰는 마두라니.”

충격파는 단순한 강기로 이뤄진 기파가 아니다. 대기를 찢어발기며 강철도, 바위도 부순다는 백보신권의 권경(拳勁)이었다. 정통으로 맞으면 상반신은 그대로 날려버릴 가공할 파괴력이 피부로 전해졌다.

하나 천무백은 아랑곳하지 않고 한손은 뒷짐을 진 자세를 유지했다.

“능허야! 잘 봐라! 이게 찌르기다!”

“아니, 무슨 권경을 찌르기로 막으려고?”

지켜보던 능허가 대경실색했다. 저런 넓은 충격파로 전해지는 권경을 상대하는 건 피하는 게 최선이다. 차선은 호신강기로 막는 것.

한데 천무백의 선택은 둘 다 아니었다.

오른손은 뒷짐을 진 채, 왼발은 앞으로 내밀고, 오른발은 강하게 땅에 디뎠다.

“……!”

백보신권을 내지른 혈불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화살 같도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를 보는 듯했다.

그리고 혈불의 권경이 작렬하는 순간.

천무백의 굽혀졌던 몸이 일시에 팽팽하게 퍼졌다.

활시위의 화살이 맹렬하게 시위를 떠나는 것처럼, 천무백의 몸이 섬전처럼 앞으로 내뻗었다.

‘점……?’

능허는 그 순간, 천무백의 신형 전체가 하나의 점처럼 보였다.

이해가 되지 않는 광경이었다.

어찌 사람이 하나의 점처럼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콰가가가강!

이어지는 광경은 놀라웠다.

무형의 권경이 천무백의 검 끝에 닿는 순간 일그러지더니, 마치 유리처럼 깨졌다.

“……!”

혈불은 놀랄 틈도 없었다. 천무백의 맹렬한 찌르기가 부지불식간에 공간을 파고들었다.

퐁! 퐁! 퐁! 퐁!

찌르기가 공간을 꿰뚫을때마다, 압축된 대기가 찢어지면서 묘한 소리를 내뱉었다. 어쩌면 우스워보이는 소리였지만, 결과만큼은 전혀 웃을 수 없었다.

혈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연격(連擊)은 하나, 하나가 목숨을 단숨에 끊어낼 정도로 강맹했으며 살기를 가득 품었다.

혈불은 이를 악물고 쌍장을 내지르며 찌르기를 피하거나 맞받아쳤다.

그의 쌍장(雙掌)은 범상치 않다. 본래 가진 지고한 경지에 소림의 갖은 비급을 탈취한 혈불은 소림의 정수까지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화했다.

하나 혈불의 안색은 점점 창백해졌다.

‘이 무슨 괴사란 말인가…….’

혈불의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

고작 하나의 작은 점이, 혈불이 쏟아 내는 쌍장을 모두 찢어발기고 있었다.

강대한 위력이 담긴 권경은 유리처럼 와장창 깨져 나가며 흩어졌다.

파괴력이라면 무쇠로 만든 방패도 종잇장처럼 찢어 버리는 권경이 허무하게 허공으로 흩어졌다.

혈불은 눈에 불을 켜고 집중했다.

‘틈이 없다.’

빈틈이 없었다. 한 손을 쓰지 않고, 한 손으로만 검을 찌르는데 철벽과도 같았다.

혈불은 마도에서 제일의 기재라고 평가받았다.

어린 나이에 정마대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공을 세울 정도로 위명을 떨쳤다.

전대 천마인 군천악이 자신과 동시대에 태어났으면 천마 자리를 두고 쟁투를 벌였으리라 칭찬했던 유일한 사내였다.

무학의 천재.

바로 혈불이다.

혈불의 머리가 팽팽팽 돌아갔다. 보고, 듣고, 느낀다. 상대가 수를 쓰지 못하게 맹렬하게 퍼부으면서, 오감으로 들어오는 모든 정보를 머릿속에서 파훼하고 분석한다.

그 순간, 혈불은 머리를 둔기로 맞은 듯한 둔중한 충격에 눈을 크게 떴다.

‘점, 그래. 점이다. 저 작은 점이, 지금 천룡검협의 모든 것이다!’

아주 작은 점.

보통 강호에서 강대한 적을 상대할 때 느끼는 감정은 일반적이다.

마치 태산을 눈앞에 둔 듯한 느낌. 거대하고, 높고, 험준한 기세가 장내를 가득 메우기 마련이다. 그런 상대가 바로 고수다.

작금의 천무백은 아니다. 태산도, 높지도, 험준하지도 않다.

혈불은 깨달았다.

‘점이니까 공격할 공간 따위는 없다.’

태산이라면 어디든 공격할 수 있다. 햇빛이 비치지 않는 그늘 따위야 수도 없이 많다. 그곳을 공략하면 태산이라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천무백은 점이다.

‘아주 작은 점. 공간도, 빈틈도, 도저히 내가 어딜 공격해야 하는지 보이지 않아.’

지금 혈불의 공격이 좀처럼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하는 이유였다.

그러면 어째서 상대가 점으로 보인단 말인가?

‘압축이다. 수도 없이 압축되어, 모든 것들이 점처럼 보이는 것이야!’

압축의 묘(妙).

압축되고 또 압축한다. 모든 공력과 무학의 정수가 수도 없이 압축되어 마치 하나의 점이 된다.

단순한 점이 아니다. 반발하는 힘을 끊임없이 억누르며 압축하여, 언제든 주위를 휩쓸어 버릴 폭발력을 잠재하고 있다.

지금 천무백의 찌르기가 그러했다.

단 하나의 찌르기라는 일련의 과정에 모든 무학의 정수와 공력이 압축된 것이다.

검을 찌를 때 검 끝에 모든 것들이.

‘맙소사…… 고작 찌르기 하나에 무학의 정수를 담았단 말인가?’

혈불은 전율했다.

단순한 찌르기가 아니다. 혈불 자신이 평생 쌓아온 무공이 천무백의 터럭 하나 건들지 못하고 깨져 나가고 있다.

모든 무학의 정수가 압축된 찌르기.

그것이 가능할까?

평생 찌르기만 수천, 수만, 수십만을 수련했다면 모를까.

천무백의 나이를 생각해 보라!

‘저토록 젊은 나이에, 무학의 도(道)를 깨달았단 말인가!’

전율하고 또 전율했다.

자신은 검객은 아니지만, 만류귀종이라. 검도(劍道)에도 눈이 있으니, 천무백이 만들어 낸 하나의 찌르기가 어느 정도인지 절절하게 느꼈다.

‘저토록 젊은 나이에 이미 대가가 되었다. 대종사란 말이다.’

입신지경 같은 경지 따위보다, 혈불은 무공을 파훼하고 분석하고 창안해내는 대종사(大宗師)를 진정으로 크게 생각했다.

그런 자가 무학의 대가라 할 수 있으니, 눈앞에 있는 천무백이다.

혈불은 끝내 참지 못하고 거세게 쌍장을 내지르며 거리를 벌리며 소리쳤다.

“대체 그 나이에 어찌 그런 경지에 오를 수 있는가?”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마도(魔道)를 걷지만 동시에 무도를 걷는 무도인으로서 질문이었다.

천무백은 검을 거둬들이며 자세를 바로 했다.

“미친 듯이 검을 다뤄 보면 다 이렇게 된다.”

천무백의 말에 혈불이 고개를 내저었다.

“무학의 정진에 있어 치열한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 하지만 그 찌르기 하나만큼은, 그것 하나만으로도 강호에서 손꼽히는 무림일절(一絶)이로다. 그건 절대 노력만으로 불가하다.”

“지랄. 해 봤어?”

“……!”

천무백의 목소리가 절로 퉁명스러워졌다.

“해 봤냐고. 일생 내내 검을 곁에 끼고 찌르고 또 찔러 봤냐고.”

“…….”

“그런 일생(一生)을 수도 없이 반복하면서 찔러 봤냐고. 내가 말하는 ‘미친 듯이’란 뜻은 그런 거야. 어디서 해 보지도 않고 노력 운운해?”

혈불은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현묘한 뜻이 담긴 것 같았지만, 이해되지 않았다. 한평생 경주하란 뜻인가? 아니면 자신에게 그 비결을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인가?

아무래도 후자로 보였다. 엄연히 적이니까.

하지만 천무백은 진심이었다.

그의 발언은 혈불에게 향한 게 아니었다. 싸움을 넋 놓고 지켜보고 있는 능허에게 하는 말이다.

천무백은 흘끔 능허를 바라봤다.

‘뭐, 평생 노력해도 이 정도에 오를 수 없지만.’

능허는 외팔이다.

필연적으로 검객으로서 치명적인 장애를 안고 있다. 결국, 그건 천무백이 안겨 준 장애였으니, 천무백은 나름 능허가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길 바랐다.

선의(善意)까진 아니다. 그래도 서로 동고동락하면서 험한 꼴 봤는데,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물론 능허라면 알아차렸을 거다.

천무백이 보여 준 외팔의 찌르기와 말의 의미를. 천무백의 전생을 거듭하는 비밀을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천무백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는, 평생 미친 듯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찌르기 하나만으로도 닿을 수 있는 지고한 경지가 있다는 걸 보여 준 것이다.

괜히 다른 것에 신경 쓰지 말고, 목표를 세워 닿을 수 있는 데까지 하나에만 집중하라는 의미.

‘뭐, 깨달음을 얻고 휘두르는 건 제 운이지.’

그리 생각한 천무백은 다시 혈불에게 시선을 돌렸다.

‘예상외다.’

혈불이 천무백을 분석한 것처럼, 천무백도 혈불을 분석했다.

‘약해.’

솔직히 말해 천무백은 찌르기 하나만으로 혈불을 완벽하게 상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전생을 거듭하며 무수한 세월을 연마한 찌르기라지만, 혈불 역시 무학의 천재요, 마도의 대단한 고수다. 어찌 ‘능허좌검’ 하나만으로 상대한단 말인가.

단지 능허에게 보여 주기 위함이었지만, 천무백은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혈불이 예상보다 약했기 때문이다.

‘약한 것인가, 아니면 무언갈 숨기고 있나?’

천무백의 날카로운 감각은 전자라고 속삭였다.

‘정확히는 내공의 흐름이 어색해.’

천무백이 혈불만의 백보신권을 간단하게 파훼할 수 있던 이유다.

기의 흐름에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예민한 천무백은, 가장 약한 고리를 파고들며 깨뜨렸다.

‘그래도 귀마보다는 강하지만…… 이 정도는 귀마가 욕심내서 한번 승부를 내 볼 만한 정돈데?’

천무백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귀마의 권력욕이라면, 혈불을 제칠 시도 정도는 할 텐데.

그 순간, 혈불의 주위로 흐름이 묘하게 바뀌었다.

천무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몰아치는 기운의 흐름이 보통이 아니었다.

“역시 늙은이들은 이래서 싫어. 꼭 한 번에 다 드러내지 않는단 말이야.”

아무래도 혈불이 본격적으로 싸움에 임하려는 듯했다.

실제로 이전과는 다른 기세에 능허는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초록빛을 영롱하게 빛내던 주위의 수풀이 일순 창백하게 질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대가 보통이 아님을 알았으니, 본좌 역시 최선을 다할 수밖에.”

“그게 전부야? 최선을 다하는 게?”

천무백의 비웃음에도 혈불은 흔들리지 않았다. 흔한 격장지계니까.

하지만 천무백은 격장지계가 아니었다. 진심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분명 강대하긴 하지만, 기의 흐름에 여전히 어색한 점이 느껴졌으니까.

약하다기보단…….

‘내상(內傷)?’

그랬다. 무언가 툭툭 끊기는, 전형적인 내상의 느낌이 강했다.

하나 묻기도 전에, 혈불의 강맹한 공격이 쏟아졌다.

파지지지직!

빛을 내뿜으며 타오르는 염화가 양손에 휘감긴 채 천무백을 향해 쏟아졌다. 천무백은 반사적으로 검을 내질렀다. 기의 흐름에서 약한 고리를 찌르는 같은 수법.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혈불은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내공을 쏟아부어, 천무백의 찌르기를 힘으로 억눌렀다. 천무백의 정순한 내력을 오로지 힘으로만 밀어내는 신기였다.

콰지지지직!

용암과 같은 염화가 천무백의 검을 휘감고, 더 거세게 타오르며 전신을 강타했다.

혈불의 눈에 희열이 떠올랐다.

하나 그 순간.

별안간 혈불의 좌측에서 세상 전부를 얼음으로 만들 듯한 냉기가 쏟아졌다. 지독한 염화마저 얼려 버릴 거 같은 극음지기.

혈불의 얼굴에 당황이 번지는 순간, 천무백이 경쾌하게 웃었다.

“원래 나 양손 다 써. 멍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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