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74화>
274. 팔 하나만으로 충분해
겉으로 보기엔 전혀 특별한 게 없었다.
둘은 걸으면서 대화를 나눴다. 천무백도, 능허도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흡사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면, 평범하게 마실이라도 나온 모습처럼 비치리라.
능허는 조용히 기감을 날카롭게 세웠지만,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렇다고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다. 천무백은 자신이 모르는 것까지 알아채는 신기에 가까운 오감을 타고 났으니,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하리라.
“검에 욕심이 담겼더군.”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능허는 자연스럽게 응수했다.
“욕심 말입니까? 내 검에?”
천무백은 능허의 실력이 늘어났음을 확인했다.
물론 한계도 보였다.
“찌르기에 특화된 검법이잖냐.”
“능허좌검입니다.”
“……그래. 능허좌검. 썅. 이름 한번 입에 안 달라붙네.”
“짝짝 달라붙는데…….”
“여하튼, 찌르기만 잘해도 대성하는 검법이야. 그런데 넌 욕심을 부리고 있어.”
“욕심이요?”
“찌르기뿐 아니라, 베고, 휘두르는 것까지 탐내고 있단 얘기다. 그게 왜 필요한데?”
천무백은 귀마와 능허의 대결, 그리고 자신이 직접 능허를 손봐 주면서 느낀 점을 지적했다.
“어쩔 수 없잖습니까? 어떻게 상대가 휘두르는 검을 찌르기로 막습니까? 옆으로 눕혀서 베듯이 막아야 하고. 또 정면으로 찌르기만 한다면 상대가 막기 쉽지. 변칙적으로 좌우에서 베고 휘둘러야죠.”
능허도 바보는 아니다. 적어도 검을 다룰 주 아는 무인이다. 천무백에게 배운 것뿐만 아니라, 본인이 스스로 깨달은 바도 뚜렷했다.
“생각해봐라. 넌 상대의 목숨을 빼앗을 때 마지막 공격을 뭐로 하냐? 베기? 찌르기?”
“그거야…… 찌르기죠.”
“목을 찌르고 이마를 찌르고 심장을 찌르고 명치를 찌르고, 하복부를 찌르고. 단번에 적의 숨통을 끊지. 하지만 베기는?”
“목을 베고, 가슴을 베고, 어…….”
생각해 보니 그리 쉬운 게 아니다. 가슴이 베여도 상대는 죽지 않고 움직인다. 목을 베어도 단번에 자르지 못하면 피분수를 내뿜으면서도 마구잡이로 칼을 휘두르며 발악한다.
“목뼈는 생각보다 단단해. 옆에서 베면 쉽게 안 베여. 근육을 단련하고 호신강기를 일으킨 상대라면 더욱이. 못할 건 없지만, 단번에 못 베면 상대가 발악하면서 검을 휘두르지.”
“그거야, 그렇습니다.”
“심장을 베는 것도 마찬가지. 갈비뼈를 베어도 근육이 넓은 검면을 물어서 쉽게 놔주질 않거든. 반면 찌르기는 다르다. 갈비뼈 사이의 근육을 뚫고 폐와 심장을 단숨에 찌르면 끝이다.”
천무백은 인체의 구조에도 해박했다. 능허 역시 여러 사람을 베어 본 적이 있으니, 천무백의 말에 공감했다.
“확실하고 단순하게 적의 숨통을 끊어 낼 수 있는 공격은 찌르기다. 더구나 넌 외팔이지. 베기의 위력이 극대화되려면 양손으로 검의 균형을 잡고 힘을 실어야 해. 너에게 적합한 건 빠르고 단순하게 한점을 찌르는 것이다. 네가 베고, 휘두르는 것까지 변칙적으로 사용하려는 건 욕심이야.”
“거, 사람이 욕심이 있어야 성장하는 법 아닙니까?”
“본인의 수준을 생각하지 않은 욕심은 독이다.”
“독…….”
“찌르기로 대성을 이루지도 못한 놈이, 무슨 베기와 휘두르기를 논해?”
“끄응……. 그러면 상대의 공격은 어떻게 막습니까?”
“피해야지. 더 빠르고 경쾌한 움직임으로.”
“그보다 더 빠른 상대를 만나면?”
“찔러서 상대의 공격을 파훼해라.”
“그게 됩니까?”
“대성을 이루면 무엇인들 못 하랴.”
능허는 입을 다물었다. 처음에는 괜히 이상한 길로 빠지는 걸 겉으로 내색하지 않기 위해, 자연스럽게 천무백의 대화에 응했다.
하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답했던 대화는 능허에게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겼다.
찌르기 하나만으로 적의 무공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이라 여겼다.
그래서 베고, 휘두르고 본인이 싸워 오며 깨달은 무학을 조금씩 담았다.
어느 정도 성과는 보였다. 좀 더 변칙적으로, 다채로운 방식으로 싸울 수 있게 됐으니까.
하지만 천무백은 그 모든 것들이 욕심이라 말했다.
‘찌르기 하나만 대성한다면 된단 말인가.’
솔직히 말해 능허는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 어떤 무공이 찌르기 하나만 있는가. 실초 사이에 허초가 있는 법이고, 변초가 있는 법. 응당 모든 무공이 그렇다.
하지만 능허가 능허좌검이라 붙인 검법은 지독하게도 찌르기 일변도였다. 분명 매섭고 위력적이나 한계도 뚜렷했다.
‘썅. 찌르기 하나만으로 어떻게 절대 고수가 돼?’
마음은 그리 말했지만…….
‘그래도 저 양반이 한 말 중에 틀린 거 없으니. 그냥 죽어라 찌르기만 파 봐야겠다.’
능허는 무학에서 천무백의 말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하지만 보지 않고 머릿속만으로 그림을 그려 내는 건 능허에게 쉽지 않은 일이다.
천무백이 짐작한다는 듯이 희미하게 웃었다.
“보여 주마. 찌르기 하나만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말이다.”
“아니, 방금 실컷 두드려 패 놓고, 또 구타하시겠다는 겁니까?”
“구타는 무슨, 아까 그건 비무였고.”
“비무나 구타나.”
“그리고 널 상대로 보여 주는 게 아니다.”
“네?”
“찌르기의 극한을 너에게 사용하면, 네 몸에 구멍이 수백 개는 나는데. 어떻게 해?”
“……?”
그 순간, 능허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홱 돌렸다.
천무백과의 대화에 얼마나 집중하면서 걸어왔는지, 수풀 너머로 양손을 합장하듯 모은 노승(老僧)이 바라보고 있었다.
“……어, 소림사의 땡중처럼 보이진 않는데.”
거의 본능적으로 상대의 위험성을 깨달을 수 있는 능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제야 이해가 됐다.
천무백이 일부러 이쪽 길로 왔구나. 주위에 민가도, 인적도 없는 곳으로.
“어서 와. 땡중.”
천무백이 대수롭지 않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노승은 소림의 법력 높은 대사처럼 자애로운 웃음을 보이며 합장했다.
“공자가 천룡검협이시지요?”
“알면서 찾아와 놓고 뭘 굳이 또 물어봐.”
노승이 허허 웃었다.
“나보다 먼저 도착했을 줄은 몰랐소. 덕택에 오면서 세운 계획이 엉망이 되었소이다.”
“계획이라면 뭐, 내 가족들을 인질로 잡아서 함정이라도 파려했나?”
“허허, 과연 두뇌도 비상하시구려.”
노승은 미약한 한숨을 내쉬었다. 계획이 어긋난 점에서 오는 당황스러움이었다.
“이렇게 정면으로 상대할 생각은 없었는데…….”
“마도답게 비열한 방법으로 승부를 보려 했나?”
“비열한 방법이라기 보단 확실한 방법이지요.”
“남자는 자고로 한판 승부지. 안 그래? 혈불.”
혈불이 어색하게 웃으며 합장했다.
“서로 소개하는 자리는 굳이 할 필요가 없겠구려. 나도 당신을 알고, 당신도 나를 아니까.”
“서로 죽이려는 사이인데 친하게 인사하는 것도 그렇지.”
“굳이 서로를 죽여야겠소? 공자.”
“땡중. 이 늙은 마두야. 너도 나 죽이려고 온 거잖아?”
“아니, 회유하려고 왔소.”
“회유?”
“이대로 자연으로 돌아가기엔 아까운 목숨과 재능 아니겠소. 마도로 귀의하시는 게 어떻겠소?”
인재 초빙이라. 천무백은 어깨를 으쓱였다. 일전에도 한번 이랬던 적이 있던 거 같은데.
“사람이 많이 부족한가 봐? 독마도 나를 초빙하려고 하던데.”
“……독마?”
자애롭기 짝이 없던 혈불의 얼굴에 일순 균열이 일었다.
천무백이 빙글빙글 웃었다.
“그 노인데도 죽기 전에 발악하더라고. 마도로 오면 다 해 줄 수 있다고.”
“…….”
“아, 몰랐어? 내 손에 독마가 뒈진 거?”
“검후가 죽인 게 아니었나?”
혈불의 목소리는 딱딱해졌다. 말은 더없이 짧아졌고 차가웠다.
무서우리만큼 극적인 변화에 뒤에 있던 능허가 딸꾹질을 할 정도였다.
자애로운 표정이 깨져나가면서 드러난 건 흉신악살이었다.
천무백은 재밌다는 듯이 팔짱을 끼며 웃었다.
“아. 검후가 죽인 줄 알았어? 이거 어떡하나. 독마도 내 손에 죽었고. 귀마도…….”
“죽었나?”
“날 죽이려고 온 놈인데, 나는 이렇게 멀쩡하지. 뻔한 답 아니겠어? 그래도 날 마도로 초빙할 셈인가?”
혈귀곡의 모든 세력을 깡그리 몰살시킨 게 바로 자신이다.
단순한 하급 마인들뿐 아니라 오성이며 육성, 그리고 독마 같은 최고위 간부들 역시 천무백의 손에 무참히 죽어 나갔다.
마도가 대적(大敵)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혈불은 대범하게 웃었다.
“더더욱 마도로 그대를 끌어들이고 싶군. 천하제일이 될 사내. 마도의 품에 귀의한다면, 그대가 언젠가 새로운 천마가 될지도 모르지.”
“썅. 그거 시켜 줘도 안 해. 했으면 진작 했지.”
검마일 때 하기 싫어서 마도를 뛰쳐나갔는데, 그런 자리로 유혹해?
천무백은 진저리를 치며 외쳤다.
“혈불아. 혈불아. 부처 흉내 내는 병신 머저리야. 부처가 되고 싶으면 가서 불경이나 외울 것이지. 손에 피를 묻혀?”
“마도에도 부처가 있고, 불도가 있는 법. 마도는 모든 걸 용납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나 같은 한낱 승려뿐 아니라 창천검신의 후예인 그대도.”
“애석하지만 사마외도 품에 귀의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거기 들어가 봤자 좋은 꼴은 못 보거든.”
더는 설득이 되지 않겠다고 여겼는지 혈불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깝군. 그대 같은 인걸(人傑)을 죽여야 한다니.”
“무슨, 수전노야? 별것이 다 아깝네. 네 목숨은 안 아깝나?”
“이미 마도에 투신한 몸, 목숨이 아까웠으면 당초 강호에 발을 들이지도 않지 않겠는가.”
“지랄. 목숨에 초연한 새끼가 이 세상에 어딨다고.”
“…….”
“널 죽이면 혈귀곡은 끝이야. 귀마도 죽고 혈불도 죽었으니까. 나머지 잡놈들? 걔들은 뭣도 아니고. 새외마도가 침공하고, 혈귀곡이 중원 내부에서 뒤흔든다는 계획도 끝난 거겠지. 이 머저리야. 이 늙고 미친 중놈아. 넌 아무것도 못 한 거다. 다 날려먹은 거야.”
“…….”
“마도천하는 적어도 내가 시퍼렇게 두 눈뜨고 있을 땐 없다.”
“그럼 그 눈을 감겨 주면 되겠지.”
“두 눈 감은 후에도 없어.”
“……?”
“다시 뜰 거거든. 사십 년 전에 감았지만, 지금도 다시 떴잖아.”
이해 못 하는 말이 계속 이어지자, 혈불은 더는 듣지 않고 장법을 내질렀다.
“어쭈? 진짜 소림 무공이네?”
천무백이 허탈한 소리를 내뱉으며 기운을 끌어올렸다.
새하얀 후광이 들불처럼 전신을 휘감았다.
꽈가가가가강!
내공으로 급히 고막을 보호해야 할 정도로 압도적인 충격파가 주위를 흔들었다.
서로 적잖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건 귀곡광애로구나! 창천검신의 독문무공…… 과연!”
“거, 더럽게 쎄지긴 했네. 땡중 새끼.”
귀곡광애에 회심의 일격이 막힌 혈불도 놀랐고, 적잖은 충격을 받은 천무백 역시 놀랐다.
“땡중아. 대체 언제 소림 무공을 배웠냐? 정마대전 땐 이런 건 쓰지도 못했던 것 같은데?”
혈불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느냐는 것처럼.
입을 열려는 찰나, 천무백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 알겠다. 이 도둑놈 새끼! 이 비열한 새끼! 소림이 무너질 때 훔쳤구나! 에라이, 추잡한 새끼. 무공을 훔쳐?”
절대 흔들릴 것 같지 않던 부처 같은 혈불의 얼굴이 계속해서 일그러졌다.
지켜보던 능허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말로 인격을 공격한다는 게 저런 거구나.’
아직 자신은 멀었다. 암, 아직 한참 멀었어. 무공뿐만 아니라 저 언어폭력도 말이야.
혈불은 참지 못하고 거칠게 천무백에게 달려들었다.
“회유는 도저히 안 되겠구나. 널 마도로 데려오면, 천마께서도 못 참고 널 두들겨 팰 거다!”
“거, 땡중 새끼. 데려가지도 못할 거면서 말은 더럽게 많네. 너도 천마한테 많이 맞았지? 말 많다고 닥치라고 두들겨 팼을 거 같은데.”
혈불이 쌍장을 내질렀다.
꽈가가강!
천무백은 두어 번은 피했지만, 혈불의 공격은 교묘해서 전부 피할 수는 없었다. 피할 방위를 점하고 노려오는 동시다발적 공격. 짧은 찰나 공간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동선을 파악하는 솜씨에 천무백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천무백에겐 귀곡광애란 철벽의 방어가 있었으니, 혈불은 그리 큰 성과를 보지 못했다.
천무백이 별안간 능허를 불렀다.
“능허야!”
“왜요! 저보고 싸우라고 하는 거면 전 안 됩니다! 저거 못 잡아요!”
“귀마도 이긴 놈이 무슨 겁이 이렇게 많아!”
“귀마를 이겨? 네가 죽인 게 아니라, 저 중늙은이가 죽였단 말이냐?”
미친 듯이 천무백을 공격하던 혈불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능허가 당황한 채 손을 마구 내저었다.
“아니, 무슨! 내가 어떻게 귀마를 죽여! 멀쩡히 살아 있는 놈을!”
“감히 너희들이 본좌를 우롱하는 것이냐!”
“뭐라는 거야, 이 땡중은 지 혼자 오해하고 지 혼자 화내고, 아주 혼자 잘 놀아요. 너 왕따냐?”
“……!”
천무백은 그리 외치며 능허에게 말했다.
“능허야. 똑바로 봐라. 좌수검법…… 아니, 어 그래 능허좌검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말이다.”
“싸우다 말고 웬 이상한 소립니까?”
능허가 황당하게 반문하는 찰나, 천무백이 별안간 왼손으로 검을 쥐고, 오른손을 뒷짐을 쥐었다.
“……!”
달려들던 혈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누가 봐도 한 손을 쓰지 않는 자세.
천무백이 빙긋이 웃었다.
“넌 팔 하나만으로 충분해. 이 땡중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