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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재생-273화 (273/318)

<검신재생 273화>

273. 야, 다시 떠

천무백은 감정의 기복이 거의 없다.

아무리 충격적인 일이 눈앞에서 벌어져도,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비단 천무백이 철혈간담의 사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여간해서 놀랄 일이 없지.’

웬만해선 다 겪어 본 일이다.

무수한 전생.

하물며 모든 삶을 강호에서 보냈다. 강호가 태동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남들이라면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한 괴변(怪變)을 수도 없이 목격했다.

그런 천무백이 여태껏 보기 드문 감정 변화를 표정으로 드러냈다.

씰룩.

천무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쭈?”

그리곤 입에서 적잖은 감탄이 터져 나왔다.

까가가가강! 까가강!

“나참, 혈귀곡 이인자 뭐 별거 없네. 주군, 이 노인장이 이인자 맞수? 그냥 치매 걸린 늙은 무인 아니오?”

“이이익!”

까가강!

세찬 불꽃이 마구 튀기며 도와 뾰족한 검이 미친 듯이 얽혔다.

천무백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저도 모르게 새삼스런 눈길로 능허를 쳐다봤다.

“능허야. 너 놀고만 있진 않았구나?”

“으하하하. 나 능허요, 능허. 독안사 능허라고. 이까짓 치매 걸린 노인네쯤이야!”

다름 아닌 능허가 귀마를 상대로 비등한 싸움을 보여 주고 있었다.

둘의 실력 차이는 명백하다.

귀마는 곡지흠과 황보숭, 당수군, 소항, 제갈설아를 홀로 몰아붙인 노괴다.

가진 바 실력은 물론이고, 평생 쌓아 온 어마어마한 내공의 총량은 아득하기까지 하다.

한낱 흑도 출신인 능허가 어찌해 볼 수 없는 상대임은 당연하다.

한데 눈앞에 전개되는 싸움 형태는 전혀 예상 밖이었다.

까강!

“크읏!”

귀마가 신음을 흘리며 두 발짝 물러섰다.

동시에 쌍방의 얼굴에 놀람이 떠올랐다.

“내가 밀렸다고?”

귀마는 자신이 공방 도중 뒷걸음질 쳤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고.

“와. 뭐지? 알고 보니 내가 힘을 숨긴 뭐 그런 거였나?”

능허 역시 자신이 만들어 낸 광경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하나 지켜보던 천무백은 왜 이렇게 전개가 되는지 이해했다.

‘어지간히 지쳤군. 어지간히.’

귀마의 몸 상태가 무척 심각하다는 게 문제였다.

여기 하남까지 쉬지 않고 달려오면서 내공이란 내공은 다 소진했을 터.

비단 내공뿐만 아니라 정신력까지 고갈된 상태였다.

오히려 그런 상태에서 그래도 한가락 한다는 능허를 상대로 저만큼 버틴다는 게 용할 지경이다.

한데 능허는 그것도 모르고 잔뜩 신이 나서 웃었다.

“으핫핫핫. 보시오, 노인장. 아니, 이 괴팍한 치매 걸린 마두야. 이게 능허좌검이란 거다. 능허좌검. 절세무공에다가 사용자도 수준이 남다르지 않수? 가서 마도 잡놈들에게 전하시오. 능허좌검이 어떤지!”

“이익!”

퍽 웃기기 짝이 없는 광경이다. 능허는 자신이 귀마를 몰아붙인다는 사실에 우쭐해 했고, 귀마는 본인의 몸 상태를 잘 알아서 분기를 참지 못하면서도 섣불리 공격을 시도하지 못했다.

능허의 도발 아닌 도발에 걸려들어 싸움을 시작했지만, 싸우다 보니 알게 된 것이다. 제 몸이 비정상이란 걸.

그렇다고 여기서 도를 거두기에는 자존심이 상한다.

능허는 눈치 하나는 빠른 놈이다. 특히 싸움에 있어서 눈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비열함만큼은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능허다.

귀마가 머뭇거리는 기색을 곧장 간파하곤 웃음을 흘리며 더 거세게 몰아붙였다.

“으흐흐. 주군, 이 기회에 내 명성 한번 날리리다. 혈귀곡의 대마두를 잡았다고.”

검을 쓰면서도 연신 쉬지 않는 입에 귀마의 눈이 새하얗게 뒤집혔다. 저러다가 동귀어진이라도 하겠다 싶은 천무백은 혀를 차며 끼어들었다.

“됐다. 그만해라. 네가 이겼다. 능허야.”

“이익!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게냐!”

“더 싸워 보려고? 더 싸운다면 말릴 생각은 없다만, 그럼 싸우기 전에 알고 있는 거 다 뱉고 싸워. 죽으면 말짱 꽝이니까.”

“······.”

귀마는 입을 다물며 도를 거둬들였다. 하지만 불만이 가득한 눈빛은 흉흉한 빛을 담은 채 능허를 쏘아보았다. 입술이 뒤틀리며 험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독안사 능허. 지금은 본좌의 몸이 정상이 아닌지라, 작금의 승부는 패배로 인정하겠다. 하지만 몸을 회복한 이후엔 이 수모를 갚아 주마.”

“노인네가 치매가 왔나. 지면 진 거지, 말은 더럽게 많아요. 흑도도 안 그러는데. 아. 마도는 그런가?”

“……!”

천무백은 능허에게 된통 시달리는 귀마의 모습이 퍽 웃겨서 더 지켜보고 싶었지만, 그만 멈춰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 자식. 진짜 지가 귀마보다 세진 줄 알고 있네?’

귀마가 지쳐서 제대로 된 상황이 아니라는 걸 모르는 건지, 온전히 자신의 실력이 늘었다고 착각하는 듯했다.

저러다 어디 가서 칼침 맞기 딱 좋지 않은가.

“능허야, 칼 거둬라. 실력자랑은 나중에 하고.”

“흐흐. 주군, 제 실력 확실히 늘지 않았습니까.”

“그래, 늘었다. 늘었어. 됐냐.”

귀찮아진 천무백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어허, 말투가 왜 그렇수?”

“……허?”

묘하게 말이 짧아진 능허의 어조에 천무백은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이것 봐라?

“말이 짧다?”

“거, 말이 무슨 짧고 긴 게 어딨다고.”

“……내가 너무 자리를 비웠었나 보다. 그도 아니면 능허 네가 고작 안 맞았다고 그걸 금세 다 잊어버릴 정도로 멍청한 놈이란 걸 모르고 있었어.”

“주군, 딱 한판 붙어 봅시다.”

“…….”

사람이 너무 놀라면 말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던가.

천무백은 그 기이한 현상을 겪었다.

“와. 살다 살다 이렇게 당황스러운 건 처음이네. 네가 단단히 미쳤구나?”

“미치긴, 그냥 한번 시험해 보고 싶어서 그렇수. 주군하고 비무한답시고 매번 얻어맞기만 했는데, 그래도 지금은 전보다 나을 거 같지 않소? 이긴다는 생각은 없지만 말이오.”

능허의 표정은 퍽 진지했다.

천무백은 혀를 차며 검을 꺼내 들었다. 하긴, 능허도 확실히 실력이 늘었다. 천무백의 눈에도 보일 정도니까. 더구나 본인도 귀마를 몰아붙이며 자신감이 붙은 터.

아무래도 확인하고 싶은 것이리라.

“그래. 한수 봐주마.”

천무백은 아량을 베풀었다.

능허가 실실 웃었다.

“흐흐흐. 애당초 이긴다고 생각은 안 하지만, 그래도 한 방은 먹여 주리다. 어디다 먹여 줄까…….”

천무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아량은 접어 둬야 할 것 같았다.

* * *

“······.”

귀마는 묘한 눈빛으로 능허를 멀뚱히 쳐다봤다.

웅묘(熊猫:팬더)마냥 양쪽 눈이 시꺼멓게 멍든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헛웃음이 나왔다.

‘멍청한 놈.’

천무백에게 한판 붙자고 덤비다니. 팔다리가 부러지지 않고 달린 게 용할 정도다.

‘확실히 실력은 나쁘지 않은데.’

그러니까 자신이 그렇게 밀렸지. 아무리 내공과 정신력이 고갈됐다고 해도 말이다.

‘그래도 덤빌 상대를 보고 덤벼야지.’

몸 상태만 회복하면 아주 제대로 혼쭐을 내줄 생각이다.

그렇게 귀마가 여러 생각을 하며 쳐다보고 있자, 능허가 툭 한마디 던졌다.

“뭘 보쇼. 이 약해 빠진 노인네야.”

“······뭐?”

“뭘 황당해 해? 내가 주군한테 졌지. 거 당신한테 졌나? 어디서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봐? 나한테 쳐 발린 주제에. 확 눈깔을 조셔벌라.”

“······!”

귀마가 뒷목을 잡곤 부들부들 떨며 벌떡 일어났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가 튀어나올 것마냥 두드러졌다.

지금까지 천무백에게 갈굼 받으면서 얼마나 비교당했던가. 능허보다 못난 놈, 능허보나 못생긴 놈, 능허보다 답답한놈…….

그리고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당한 패배인데도, 어찌 저리도 사람에게 모멸감을 줄 수 있단 말인가?

마도도 무인이다.

패배한 무인을 조롱하진 않는다.

어? 저건 마도도 안 하는 짓을 하네?

능허가 천무백과 비무를 빙자한 구타를 당하는 동안 귀마는 최소한의 운기조식을 마쳤다.

완벽한 상태는 아니지만, 이전보단 나았다. 이 정도만 돼도 저 능허의 얼굴을 박살 낼 수 있으리라.

“감히 같잖은 실력 하나 믿고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애송이가!”

“너 더럽게 약하잖아.”

“야, 다시 떠!”

“응 안 해.”

“······!”

귀마가 게거품을 문 채 비틀거렸다. 능허는 얄밉게 웃었다.

‘미쳤나? 내가 다시 싸우게?’

정말 자신의 실력이 월등하게 성장한 줄 알았다.

혈귀곡의 이인자라면, 여태껏 만난 강자 중에 제일이 아니던가.

하물며 천무백이 상대해 온 여러 고수보다 더 강한 축이다.

그런 상대로 자신이 판정승을 거뒀으니, 스스로 실력이 늘었다고 생각하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천무백에게 덤볐다.

이기리라는 생각? 꿈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태껏 맞기만 했지만, 한 방 정도는 제대로 먹여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싸움에 임했다. 죽기 직전까지 처맞아도, 딱 한 대. 한 대만 때리면 그간 쌓인 설움이 다 풀릴 것 같았으니까.

‘어림도 없지. 영약으로 국 끓여 드시나. 뭐 강해지는 게 애들 쑥쑥 크는 것보다 더 빨라?’

한 대는커녕, 전보다 더 사정없이 두들겨 맞았다.

그제야 느꼈다.

자신의 실력이 늘긴 늘었지만, 귀마를 몰아붙인 건 착각이었다고.

짧게나마 운기조식을 마친 귀마의 지금 기세는 이전과 확연히 달랐다.

압도당하는 기도가 절절하게 느껴졌다.

능허는 알았다. 지금 붙으면 백이면 백 진다고.

그래서 일부러 귀마를 완전히 무시했다. 물론 귀마는 화가 나 날뛰었지만, 어쩌겠는가. 억울하면 지지 말든가.

“그런데 갑자기 연락도 없이 왜 돌아오신 겁니까?”

“별일 없었냐? 수상한 놈들 기웃거리는 일 없었고?”

“딱히 그런 건 없었는데요?”

“그럼 아직 안 온 건가.”

“누가 하남을 노리고 있답니까?”

“혈불.”

“……그 살벌한 별호는 또 누굽니까?”

“혈귀곡 대가리.”

능허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간 싸워 온 혈귀곡의 우두머리라니.

더구나 그자가 하남성을 노리고 있다니.

새삼 능허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서 주군이 오신 거군요.”

다행이다. 천무백이 오지 않았다면, 혈귀곡 우두머리에게 꼼짝없이 당할 뻔하지 않았던가.

물론 수가기문도가 설치된 청성표국에 박혀 있으면 안전이야 하겠지만, 그간 표국과 연화루가 쌓아 온 모든 기반은 부서지겠지.

천무백이 피식 웃었다.

“왜? 네가 상대하지.”

“제가 상대하라고요?”

“귀마를 이겼으니, 이제 서열 1위도 해 볼 만하지 않겠어?”

능허가 정색했다.

“제가 미쳤습니까?”

“그래도 정신이 완전히 나가진 않았구나.”

“주군한테 몇 대 맞으니 나갔던 정신이 돌아왔습죠.”

“내가 괜히 하남신의가 아니지. 정신병도 고쳐 주고.”

“고맙다고 해야 합니까?”

“아직 덜 고쳐진 것 같다?”

“완치했습니다.”

한가하게 말장난을 주고받는 둘을 귀마가 넋을 놓고 쳐다봤다.

아니, 저렇게 한심한 얘기나 할 거면, 뭣 하려고 미친 듯이 여기까지 달려왔나?

그 시선을 느낀 천무백이 고개를 돌렸다.

“귀마야. 들어가서 몸 좀 축이고 있어라. 그 상태면 혈불은커녕, 혈불 밑의 잡놈들한테도 뒈지겠다.”

“날 무시하지마라!”

“응, 능허한테 패배한 놈.”

“이익!”

귀마는 붉어진 얼굴로 씩씩대며 연화루로 들어갔다. 능허가 혀를 찼다. 성격 더러운 늙은이라고 중얼거렸다.

“저 인간 내버려 둬도 됩니까?”

“왜?”

“마두 아닙니까, 마두.”

“욕심이 득실득실한 놈이지.”

“욕심 많은 마두라, 이거 위험한데.”

“욕심 많은 놈이 대하기 쉽다. 그 욕심을 채워 주면 되거든.”

“뭐, 주군이 알아서 하시겠죠.”

“표국까지 좀 걷자.”

천무백은 그러면서 걸었다. 뒤따라가던 능허의 눈동자가 묘해졌다.

‘이 길이 아닌데?’

이쪽은 청성표국으로 가는 방향이 아니었다.

청성표국, 그리고 연화루로부터 바깥으로 멀어지는 길이였다.

상가를 벗어나고, 민가도 벗어나 점점 인적이 드문 길로 접어들었다.

능허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도 드러내지 않았다. 천무백 역시 전혀 겉으로 이상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아까 검을 쓸 때 말이다.”

오히려 평범한 대화를 시작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묘한 긴장감이 주위에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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