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72화>
272. 능허? 능허어어? 능허!
하남으로 가는 여정은 무척이나 멀었다.
경공을 쉬지 않고 쓸 수는 없으니, 당연히 말을 타고 가야 할 거리.
천무백은 망설이지 않고 경공을 극한까지 펼쳤다.
파앗!
천무백의 신형이 흐릿한 잔상을 남기며 솟구쳤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빽빽이 솟구친 나무가 출렁였다.
바람이 휙휙 스쳤다. 만일 누군가 천무백의 경공을 보았다면, 사람이 지나갔는지도 분별할 수 없으리라.
눈에 보이지도 않으니까.
그저 나무 꼭대기가 출렁이며 바닥으로 흩날리며 떨어지는 나뭇잎이 천무백이 경공을 펼쳤음을 증명했다.
천무백은 예의 거칠 것 없는 속도로 질주했다.
이리저리 꼬여있는 넓은 관도가 아니라, 지도 상에서 하남까지 일직선으로 내달리는 폭주였다.
괜히 천무백이 제갈설아를 비롯한 척마대를 두고 먼저 움직인 게 아니다.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속도였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아무도 없지는 않았다.
“이 미친놈, 그렇게 경공을 쓰다간 골로 간다! 내공이 아무리 철철 넘친다고 해도 말이다!”
귀마가 황망한 얼굴로 소리치며 따라왔다.
아무리 급한 일이 닥쳐도 천무백은 귀마를 따로 둘 순 없었다.
귀마는 암종의 종주. 음흉하며 계략에 능하다. 언제든 수틀리면 배신할 소지가 다분하다. 천무백은 귀마를 제어할 자신이 충분히 있고, 능력도 있지만, 시야 안에서나 가능하다.
시야 밖에서 따로 내버려 둔다면 그가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
그래서 천무백은 귀마만을 대동하고 하남으로 향했다.
‘혈불과 조우한 산서성의 마인들은 혈귀곡 소속이 아니라 새외마도다. 내가 모르는 녀석들일 가능성이 크고, 지금껏 나오지 않은 마류칠종의 나머지 마인들이겠지. 귀마가 곁에 있는 게 나아.’
비단 귀마를 통제하기 위해서만 대동한 건 아니다.
혈불과 마인을 상대하면서 귀마의 정보력은 아주 유용할 게 틀림없다.
또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나마 귀마 정도 되니까 이렇게 뒤통수를 대고 소리칠 정도로 쫓아올 수 있지.
“이 애송아! 정녕 미쳤느냐! 이대로라면 하남에 가기 전에 내공이 고갈돼서 쓰러질 것이다! 설령 도착해도, 이만큼 소모된 내공을 언제 운기하여 정상으로 만들어? 그 도중에 혈불이 공격하면?”
귀마는 입에서 단내가 훅훅 올라오는 걸 느꼈다.
벌써 감숙을 벗어나 섬서성에 접어들었다.
천무백이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쳤다.
“이대로 하남까지 쭉 간다. 쉬지 않는다. 귀마야. 만약에 지쳐서 쓰러지면, 아주 영원토록 쉬게 땅에 묻어 주겠다.”
“이 미친놈! 이 개자식! 이 정신 나간 놈!”
“귀마야, 입이 멈추지 않는 걸 보니 아직 쌩쌩하구나. 내가 노인 공경만큼은 투철한지라 배려하고 있었는데…….”
파삭!
귀마는 하마터면 달리다가 나무에서 떨어질 뻔했다.
경공은 고도의 내기 운용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호흡 한번 잘못하면 언제든 삐끗할 수 있는 게 경공인 법.
다행히 귀마는 균형을 되찾았지만, 황당함은 감출 수 없었다.
“노인 공경이 투철해? 노인 공경이? 이런 미친 새끼가……. 너한테 노인의 기준이 몇 살인데?”
어떤 노인공경이 반말을 찍찍대면서 손찌검을 해?
“한 팔백 살은 먹어야 내 기준에 노인이지.”
“…….”
귀마는 입을 다물었다. 저 괴상한 논리를 상대하면 피곤한 건 자신뿐이니까. 괜히 저 화법에 휘말리면 나무에서 떨어지는 원숭이처럼, 경공을 펼치다가 넘어지는 귀마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하지만 이미 늦었다.
천무백은 귀마에게 소리치며 경공의 속도를 높였다.
“소리칠 힘이 남아있네. 그럼 속도를 더 높여도 된단 거지? 귀마야. 이 추악한 노괴야. 내 반경에서 멀어지면 반드시 죽인다. 죽인 다음에 다시 또 죽인다. 그러니까 멀어지지 말고 쫓아오거라!”
“…….”
협박 아닌 협박을 들으며, 귀마는 그저 충혈된 눈동자로 간신히 천무백의 뒤를 따라갈 뿐이었다.
* * *
귀마는 결국 입을 쩍 벌렸다. 혼이 쏙 빠진 사람처럼 새하얗게 질려 버린 채 휘청거리며 끝내 바닥에 주저앉았다.
“미친…… 진짜 왔네?”
하남성.
천무백의 미친 듯한 질주에 결국 열흘도 되지 않아 하남성에 도착하는 쾌거를 달성했다.
귀마는 머리가 핑 돌았다. 눈앞이 빙빙 돌았고, 손가락 하나 까닥할 기력도 없었다. 폐는 쥐어짜는 것처럼 고통스러웠고, 목구멍에선 격렬한 갈증이 느껴졌다.
귀마는 새삼 자신의 상태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경공을 펼치다가 선천지기까지 끌어다 쓸 줄이야…….”
덕택에 수년은 더 늙은 기분이었다.
“미친 짓이지.”
귀마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알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용케 잘 쫓아왔군. 멀어지면 죽여 버리려고 했는데.”
“진심 같아서 더 무섭군.”
“나는 거짓말 따위는 하지 않는 사내다.”
“…….”
천무백의 협박에 차마 쉬고 가자는 말 한마디를 할 수 없었다.
자신의 강호 인생 중에 손가락에 꼽을 만한 업적을 세운 귀마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괴물 같은 놈.”
자신은 선천지기의 일부마저 끌어썼건만, 천무백은 새삼 지친 기색은 뚜렷했지만, 멀쩡해 보였다.
이상한 일이다.
‘나보다 내공이 많다고?’
그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인데…….
하지만 천무백도 새삼 자신이 벌인 역사적인 업적에 감탄했다.
‘아직 확실치는 않다만, 내공의 수발이 너무나 자유로워졌다.’
내공의 총량이 늘어난 건 아니지만, 세 단전의 항마기, 극음지기의 흐름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워졌다. 그렇지 않아도 경천혼공으로 만들어 낸 내기의 정순도는 세상에서 제일이고, 빙정을 삼켜 가장 순도 높은 극음지기가 아닌가. 하물며 선기도 마찬가지.
같은 양이어도 발휘하는 힘이 남다른 법이다.
‘그런데 지금은 세 단전의 연결이 더 매끄러워진 것 같단 말이지.’
천무백은 며칠 동안 연구하고 싶은 마음에 휩싸였다. 그러나 지금은 급한 게 아니니, 차차 연구하면 될 터.
“자. 다 왔으니, 숨 좀 골라. 내 집에 왔으니, 인사시킬 사람도 있고.”
“집이 기루인가?”
“집부터 가려고 했는데, 여기에 반가운 기척이 있어서. 그놈이 은근 고약한 냄새를 풍기거든.”
“……?”
천무백이 멈춰 선 곳은 연화루였다. 그리고 천무백을 알아본 연화루 문지기들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더니, 이내 안에서 누군가 튀어나왔다.
“아이고오! 주군!”
다름 아닌 능허였다.
천무백도 퍽 반가웠다.
“소개하지. 저 친구가 능허야. 능허.”
그 말에 순간 귀마의 눈이 시퍼런 안광을 토했다.
흡사 용암이 담긴 듯 타오르는 불길에 천무백마저 뜨끔할 정도였다.
“능허? 능허어어? 능허!”
“……뭐요? 이 노인네는. 언제 봤다고 이름을 불러대?”
“이노옴!”
그간의 설움이 복받친 것일까. 울분이 터져 나오며 귀마의 도가 별안간 번갯불처럼 능허를 찔렀다.
그야말로 쾌속한 섬격.
하나 능허 역시 만만치 않았다. 옷깃이 잘렸지만, 아슬아슬 공격을 피한 것이다.
“피해?”
귀마가 눈이 뒤집힌 채로 연격을 쏟아냈다.
아니, 펼치려고 했다.
하나 저러다가 능허가 죽겠다 싶은 천무백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까강!
“어허. 귀마야. 어디서 내 앞에서 칼질해?”
“…….”
귀마는 씩씩거리며 이를 악물었다.
천무백이 혀를 찼다.
“처음 만난 사람한테 칼질부터 하면 쓰나. 귀마야. 사과하거라. 친하게 지내라고 데리고 왔더만…….”
그러자 능허가 끼어들었다.
“아아 됐소. 내가 이래 봐도 유학자 집안 출신이라. 노인은 보아하니 책 하나 안 읽어본 것 같은데. 거 뭐시냐. 장유유서가 있단 말이오. 장유유서. 나는 그래서 아주 노인공경이 출중한 사람이오. 그러니 내 어찌 노인장이 허릴 굽히며 사과하는 꼴을 보겠소?”
“……!”
“거참, 눈은 또 왜 뒤집는대. 주군. 왜 어디서 이상한 거렁뱅이를 주워왔소? 이건 뭔, 개방 거지야? 안면가로보면 개방 방주 할애비, 아니 증조할애비는 되겠는데.”
“으으으!”
천무백은 내심 웃음이 튀어나왔다. 저 흉악한 괴마가 한마디도 못 한 채 신음만 내며 부들부들 떠는 꼴이 퍽 웃겼다.
차마 말문이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는, 그러나 분노는 솟구쳐서 표현할 수 있는 건 허옇게 뒤집힌 동공뿐.
“뭐야? 어디 간질이라도 오셨소? 아님 중풍이 왔나? 하긴, 그 안면가에 걸어 다니는 것만 봐도 근래 보기 드문 참 건강한 노인장이구먼. 좀 들어가 쉬시오. 내가 사실 연화루 루주거든? 연화루가 어떤 곳이냐. 아름다운 기녀들의…… 어허. 우리 노인장, 아직 팔팔하시나?”
천무백은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자신도 불끈 화가 솟구치는데, 귀마가 느끼는 감정은 오죽하겠는가.
천무백은 귀마에게 혀를 찼다.
“봐봐. 능허가 이런 애야.”
“이야. 주군. 저 없을 때 제 칭찬했습니까?”
“응. 아주 많이.”
“크으. 보십쇼. 저 없으니까 제 가치가 진정 제대로 느껴지신 거군요.”
어쩐지, 근래 안 맞았다고 아주 기가 살아난 것 같은데.
“여하튼. 저 노인네 대체 뭡니까. 제갈소저는 어디가고……. 웬 보잘것없는 다 죽은 송장을?”
귀마는 이젠 거의 거품까지 물며 부들부들 떨었다. 천무백도 처연한 마음이 들 정도로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귀마다.”
“귀마? 귀마? 뭔 그런 병신같은 별호가 있답니까.”
“……커흑!”
“귀마라. 마라는 글자가 붙은 거 보니, 그거 상종 못할 마도 쓰레기 같은데. 포로입니까? 다 죽어 가는 노인이 뭐라고. 그냥 죽여 버리시지.”
“그래도 쓸모가 있다. 제법 아는 게 많거든.”
“에이, 딱 봐도 글자도 모르는 무지렁이 같은데.”
“…….”
순간 귀마의 떨림이 뚝 멈췄다. 하얗게 뒤집힌 눈동자가 능허를 향했다. 무언가 마음을 먹은 듯, 그 살벌한 기세에 능허는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저, 주군?”
“응.”
“별호가 귀마고, 뭐 제가 더 알아야 할 신상 명세는 없습니까?”
“혈귀곡 소속.”
“……그리고요?”
“거기 이인자.”
“…….”
능허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처연한 한숨을 내쉬었다.
“하. 시발. 인생 또 지랄이네.”
천무백이 혀를 차며 맞장구쳤다.
“우짜겠냐. 내가 소개하기도 전에 네가 입 털었는데. 알아서 해라. 서로 죽이진 말고.”
“아니, 주군. 거, 참. 내가 아무리. 어? 설마 저랑 혈귀곡 이인자랑 둘이 내버려 둘 겁니까? 설마?”
“응.”
“저 딸도 생겼습니다? 저 지금 죽으면 딸은 제 아비 얼굴도 기억 못 합니다?”
“걱정마라. 내가 후견인이 되어주마.”
“하 썅.”
능허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귀마가 도를 꺼내 들었기 때문이다. 그 기세는 능허가 감당하기 어려운 종류였다.
능허가 떨떠름하게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거, 노인장? 우리 집에 가서 식사나 한번 같이할까?”
“닥쳐라. 능허. 내 인생에서 가장 저주스러운 이름이다.”
“아니 왜? 가장 저주스러운데?”
“네가 능허니까.”
“그러니까 능허가 왜?”
마치 가족의 원수를 만난 듯한 적개심에 능허는 적잖이 당황했다.
“내가 아까 조롱한 것 때문에 그래? 그건 노인장이 먼저 공격해서 그런 거잖아? 아니, 그럼 피차일반이지. 응? 그쪽은 칼질했고 나는 입으로 조금 건드린 건데.”
“닥쳐라. 능허. 이름만 들어도 열불이 솟구치는구나. 이 더러운 이름…….”
“거, 우리 아버지가 지어 준 이름인데.”
“닥쳐라. 칼을 들어라. 네놈이 나보다 나은지 봐야겠다.”
“화해합시다. 응?”
천무백은 둘을 바라보며 손뼉을 쳤다.
“자고로 사내끼리는 싸우면서 친해지는 법이지. 내가 심판 봐줄 테니까, 어디 실컷 싸워 봐.”
“염병. 말리기는커녕 싸움을 붙입니까?”
“자고로 싸움 구경은 도시락 싸 들고 와서 보는 법이니까.”
“…….”
능허는 한숨을 내쉬며 검을 뽑았다.
“거, 그 말 잊지 마쇼.”
“말?”
“나 어떻게 잘못되면 내 딸아이 후견인 돼주겠다는 거.”
“걱정하지 마, 안 죽어. 귀마야. 죽이지는 마라.”
“아니, 지금 이 자리 말고도. 앞으로 일어날 싸움에서 말이오.”
“…….”
천무백은 잠시 능허를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 안 죽어. 죽는다면 딱 두 가지다. 나이 먹고 노환으로 뒈지거나, 아니면 주제 모르고 나대다가 내 주먹 맞고 뒈지거나.”
“그거 퍽 안심되는 말이요.”
“내 생각엔 아무래도 후자일 확률이 높다.”
확률로 따지면, 한 구 할 구 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