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271화 (271/318)

<검신재생 271화>

271. 알면서도 가야하는 길

천무백의 감숙성으로 향하자 정의맹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남궁진천 휘하 척마대, 혈불와의 싸움에서 패배, 도주 중, 즉시 구원 바람.’

서찰을 전해 온 이는 개방도였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내용뿐 아니라 개방도의 얼굴도 다급했다.

하지만 시작에 불과했다.

‘사천 백일문, 양호세가, 격양파 멸문. 생존자 소수, 개방에 의탁.’

‘운남 유일 정의맹 소속 백도문파 청하문 연락 두절, 마도 습격 추정. 조사대와 구원군 파견 필요’

‘광동성 마인 출현, 백도문파 여덟 곳 습격. 피해사항 확인 중’

‘산서성 전투 지속적 발생으로 혼란, 마인 추정’

개방을 통해 연이어 거듭되는 소식에 모두 얼굴이 굳었다.

갑자기 시작된 동시다발적인 공격.

무엇보다 정의맹에 소속된 문파와 무인들의 피해가 심각하게 누적됐다. 어떤 의미인지 모두 알았기에 심각한 표정일 수밖에 없었다.

다만 천무백은 표정을 살짝 찌푸리는 것에 그쳤다.

“운남과 광동, 산서성이라…….”

“조금 이상해요.”

끔찍한 소식에도 천무백이 흔들림이 없자, 제갈설아도 금세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지금껏 마도의 침공 역사를 생각해 보면, 그들의 공격은 서쪽에서부터 시작했어요.”

“그렇소. 당장 40년 전만 해도 가장 먼저 사라진 곳이 곤륜파였소. 서장, 청해, 사천, 감숙이 최전선이 됐지.”

“하지만 이번에는 달라요. 운남, 광동은 남부고요. 산서성은 북쪽이에요. 조금만 올라가면 몽고가 나오니까요.”

“동쪽을 제외하면 사실상 중원 전 방향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공격된 거군.”

“전부 마도의 습격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아니면 혹시 마도의 동맹이 따로 있다거나…….”

천무백은 고개를 돌려 귀마를 바라봤다.

귀마는 시선을 피하며 눈쌀을 찌푸렸다.

“나는 혈귀곡의 간부일 뿐. 중원의 외부에서 마도의 공격이 시작되리란 사실만 알고 있다. 공격 진로나, 계획 모두 알고 있진 않아. 내가 관여하는 건 혈귀곡일 뿐이니까.”

“정말 쓸모없는 늙은이구나. 귀마야. 아는 게 없으면 거 추측이라도 해 볼련? 능허도 하겠다. 이 머저리야.”

“……알 텐데. 혈귀곡은 중원 내부에서 세력을 키운다. 마류칠종의 두 개 종단, 암종과 혈종이 그러하지. 나머지 종단은 새외에서 세력을 기른다. 검종을 제외한 네 개 종단이다.”

순간 제갈설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귀마의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잠깐만요. 새외의 마도 세력이 네 개 종단이 꾸리고 있는 것이라고요?”

귀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천무백의 물음에만 대답할 뿐, 나머지 이들하곤 말조차 섞지 않았다.

하나 대답하지 않아도 표정에서 나오는 분위기가 있는 법.

제갈설아는 거짓이 아님을 느끼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맙소사. 혈귀곡만 해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머리가 아픈 적이었는데…….”

새외에 마도세력이 있음을 막연히 알고 있던 정의맹이었지만, 혈귀곡의 이인자인 귀마에게 직접 들으니 충격은 더 했다.

“그 혈귀곡 하나에 정의맹이 만들어졌잖아요. 소림이 다시 한번 무너질 뻔했고, 무당도 큰일 날 뻔했어요. 정말 무시무시했는데, 이 혈귀곡이 고작 두 개 종단이고. 새외의 마도 세력은 단순한 계산만으로도 두 배라는 얘기잖아요?”

“단순 두 배도 아니오. 혈귀곡의 우두머리는 혈불이지만, 새외 마도의 우두머리는 천마일 테니까.”

그제야 주위는 이해가 간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면 지금 사방에서 시작된 공격은 새외 마도의 공격임이 분명했다.

동시에 중원 내부에선 혈귀곡이 움직이는 것이고.

귀마가 천무백을 공격한 사실, 혈불이 남궁진천을 치고 남궁세가를 직격하려는 일도 모두 설명이 된다.

천무백은 이미 짐작했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한 단어가 주위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정마대전…….”

부정 할 수 없는 전쟁이 시작된 것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 * *

감숙성에 접어들 무렵, 다시 개방의 연락이 전해졌다.

소식을 받은 천무백의 얼굴이 묘해졌다.

‘남궁진천을 비롯한 척마대 섬서성에서 혈불 격퇴, 소림과 화산파 장로들 합류, 남궁세가 검성 합류. 혈불 도주.’

생각지 못한 희소식에 제갈설아는 환한 표정을 지었다.

섬서성에서 혈불을 격퇴했다니!

하나 천무백은 고개를 갸웃했다.

‘화산과 소림이 합류했으면 버틸 수는 있다. 거기에 검성이 합류하면…… 이길 수도 있지. 하지만 혈불이 그렇게 쉽게 도주를 해?’

천무백은 슬쩍 귀마를 바라봤다.

시선을 느낀 귀마의 얼굴이 다소 일그러졌다.

“무슨 내가 묻기만 하면 다 말하는 사람으로 보이나……”

새삼 대마두에서 쿡 찌르면 정보 뱉어내는 인질이 된 것 같았다.

천무백의 뻔뻔한 얼굴은 그리 말하고 있는 듯했다.

쿡 찌르면 정보가 훅 튀어나오는 건 맞잖아?

“닥치고 말해. 혈불이 도주하고 있다는데, 어떻게 생각해?”

“개소리다.”

“개소리라고? 섬서의 화산과 소림, 그리고 검성이 합류했는데?”

귀마가 이상한 놈 본다는 듯이 천무백을 쳐다봤다.

"이상한 점이 분명히 보여서 내 의견을 물어보는 거지?"

다 알면서 굳이 캐묻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피해 사항이 적혀 있지 않잖나. 기껏해야 척마대 젖내나는 애송이 몇이 죽었다고 되어 있을 뿐. 혈불이 도주를 할 정도로 큰 싸움이 벌어졌는데, 백도에서 피해가 거의 없다고? 불가하다.”

“검성과 소림, 화산이 힘을 합치면 그럴 수밖에 없잖아?”

“이봐, 천룡검협. 날 그만 떠봐. 혈불에 대해서 너도 잘 알 텐데? 그들에게 협공을 당하면 혈불도 질 수밖에 없지.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적어도 소림이며 화산이며 장로들이란 장로들은 절반 이상은 죽어 나갔을 것이다. 그만한 충격적 소식이라면 강호가 진동하고 있겠지?”

천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짐작하고 있는 내용과 일치했다. 하나 천무백은 주도면밀했다.

“곡지흠, 확인해 봐.”

이럴 땐 하오문의 소식이 더 빠르리라.

얼마 지나지 않아 곡지흠은 다소 굳은 표정으로 정보를 가지고 왔다.

“저 마두놈의 말이 맞소. 소림과 화산의 피해는 다소 미미해. 오히려 정의맹의 연락이 전해지는 와중에 와전된 게 있소.”

“와전?”

“소림과 화산, 검성은 싸움이 끝난 후에 합류했소.”

“그럼 혈불은? 남궁 놈이 실력이 늘기야 했지만 혈불을 물리칠 정도는 아닌데.”

“다른 이가 격퇴했다는군.”

“누구요?”

“그게…… 확실한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소. 나도 하오문을 통한 정보인지라, 목격한 자가 남궁진천과 척마대뿐인데. 애석하게도 그런 중요한 정보는 하오문이 알 수는 없지.”

하오문은 천무백의 수족처럼 움직일 뿐, 엄연히 정사지간의 문파라는 사실은 여전했다. 개방이 정의맹에 속해서 정보단체로 활약하는 상황과는 달리 하오문은 그저 천무백의 지시에만 움직이고 있으니 자세한 정보를 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천무백은 잠시 생각했다.

‘혈불을 격퇴할 고수라…….’

당장 떠오르는 이는 없다. 그런 자가 있다면, 사실상 현 강호의 천하제일인이 아닌가.

“그럼 일단 혈불이 도주하고 있다는 건 확실하군.”

천무백은 턱을 쓰다듬었다.

다행히도 남궁진천은 무사하다. 천무백이 감숙으로 향했던 이유가 애당초 남궁진천을 구하고 혈불을 잡기 위함이 아니던가.

남궁진천은 무사했으니, 이제 다음 목표만 노리면 된다.

“혈불을 잡는다.”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 마치 먹이를 눈앞에 둔 맹수같은 안광이 타올랐다.

* * *

천무백은 동원할 수 있는 정보망은 총동원했다.

중원 전토의 하오문도들이 긴밀하게 움직였다. 정의맹을 통해 곳곳에 있는 개방을 이용했다. 거기에 귀마가 알고 있는 정보를 샅샅이 캐냈다.

그 결과 혈불의 도주 방향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하남이라…….”

천무백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일전에 산서성에서 지속적으로 전투가 발생하고 있다는 소식이 있었다.

마인으로 출현되는 이들이 대거 등장해 곳곳에서 싸움이 벌어진다고. 산서성은 아래로 섬서성과 하남성을 접하고 있다.

혈불은 섬서성에서 패퇴하여 도주 중이었으니, 그의 선택은 당연히 산서라 생각했다. 실제로 천무백도 정보를 수집하면서 계속 움직였는데, 방향을 산서성으로 잡았으니까.

그러나 마지막 행적이 하남으로 향하고, 산서성의 마인들 일부도 하남으로 움직였단 소식이 전해지자 천무백은 그림이 보였다.

비단 천무백의 눈에만 보이는 게 아니었다. 제갈설아도 당황해했다.

“하남이라면…… 공자님?”

천룡검협을 잡기 위해 귀마가 직접 나설 정도로, 혈귀곡은 천무백을 주목하고 있다.

아마 저들 사이에도 정보망이 있을 테니, 귀마가 실패했단 소식 정도는 들어갔으리라.

그러면 목표로 했던 남궁세가를 멸하지 못한 혈불의 다음 선택은 어떻게 될까?

남궁세가 멸문이라는 엄청난 목적과 비견되는 차선은 무엇일까?

“하남으로 가 봐야겠군.”

“함정일 거예요.”

“함정이라…….”

“혈불의 입장에서 청성표국을 공격하는 건 사실 그렇게 대단한 성과가 아니에요. 남궁세가를 노렸던 걸 생각하면 말이죠. 그런데 도주 하면서 청성표국을 노린다는 건, 공자님을 끌어들이기 위한 함정일 수밖에 없어요.”

제갈설아는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천무백은 가만히 제갈설아를 쳐다봤다. 제갈설아는 천무백의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를 보고 흠칫했다.

“……알고 계시는군요?”

“능히 짐작하지. 청성표국이 커졌다고 한들, 그저 표국이오. 연화루가 크다고 한들, 그저 기루요. 흑심방이 제법 견실한 흑도문파라고 한들, 그저 흑도요. 혈불이 노릴만한 목표가 아니지. 그런데도 산서성의 마인들과 합류해서 하남으로 향했소. 차선의 목표가 하남에 있다는 얘기지.”

“…….”

“그게 나일 거란 건 짐작하고 있소. 생각해 보면 도주 중인 혈불의 움직임이 하남으로 향했다는 명확한 정보가 들어왔소.”

그러자 옆에 있던 곡지흠이 눈을 크게 떴다. 마지막 혈불의 움직임을 포착한 건 하오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의도된 행동이란 말이오? 그럴 리가……”

“마음만 먹으면 강호에서 몸을 숨길 수 있는 고수의 도주 경로가 완전하게 드러난다는 건 어불성설이지. 자신이 하남으로 향했다는 걸 내게 보여 주기 위함이오.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내가 어찌 행동하겠소?”

“그야…….”

“내가 내 가족들을 중요시 여긴다는 건 저들도 알 터. 혈불이 내 가족을 노리고 있다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하겠지. 그러면 나는 당연히 황망해서 하남으로 급하게 향할 테고.”

제갈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남과 거리는 머니 공자님께선 아무래도 홀로 움직이실 거고요.”

천무백이 쓰게 웃었다.

하남이라면 아직 거리가 멀다. 섬서성을 넘어야 하니까.

하면 천무백은 지금 제갈설아와 곡지흠, 나머지를 이끌고 갈 순 없다. 더구나 대다수가 월야방 살수들과의 싸움에 이어 귀마에게 된통 당해 몸상태가 정상이 아니다.

정말 전력을 다해 경공을 펼쳐야 하니, 이들과 속도를 맞출 수는 없다.

필연적으로 천무백 홀로 갈 수밖에 없고, 이것이 혈불이 의도하는 바일 것이다.

‘참으로 주도면밀한 놈이군. 자만하지도 않고. 그만한 실력자라면 혼자서 날 잡을 자신도 있을 텐데, 산서성의 마인들과 합류한 것도 만약을 대비한 것이겠지.’

천무백은 혈불의 모든 계산을 눈치챘다. 제갈설아는 거침없이 추론해 낸 천무백의 모습에 다소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적어도 모르면 모를까. 천무백이 이렇게 예측을 했다면, 응당 그에 대비하는 계획도 세우리라. 적어도 제갈설아가 봐 온 천무백은 그런 면에서 부족함이 없는 사내였다.

하지만.

“방법은 없소. 알면서도 가야 하는 길이오.”

“설마……?”

천무백의 말에 제갈설아의 눈이 크게 떠졌다.

“나 먼저 가겠소. 혈불의 목을 제사상에 올린 채 기다리고 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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