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268화 (268/318)

<검신재생 268화>

268. 해 볼 생각 없나?

천무백이 귀마와 함께 북검회의 장원으로 돌아오자, 부상자를 돌봐주던 제갈설아의 입이 쩍 벌어졌다.

“아니…… 대주님, 아니 공자님. 저 사람이랑 어째서?”

천무백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아, 소저. 이쪽은 구면이지? 혈귀곡의 귀마란 놈이오. 정마대전에서도 한가락 했던 마도 쓰레기지. 뭐, 시한부 선고받은 양반이라, 안타까워서 데리고 왔소.”

“…….”

한 번에 예상치 못한 정보가 들어오면 다 당황하기 마련이다.

장내에 있던 이들 모두 뜨악한 얼굴이었다.

간혹 튀어나오는 저 맥락 다 짜른 천무백의 말은 도통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나 제갈설아만큼은 대략적인 맥락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마두를 살려 주신 건가요?”

“맞소, 소저. 아는 거 다 말할 테니 목숨만 살려 달라고 미친 듯이 울면서 구걸을 하더군. 내 신발까지 핥으려 하길래, 차마 안타까워 그래서 아는 거 다 말할 때까진 목숨 줄 붙여 주겠다고 했소.”

“내가 언제 구걸을…… 컥!”

귀마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새파랗게 어린 후배들 앞에서 자신의 무시무시한 악명을 쓰레기통에 처박는 꼴이 아닌가!

울면서 살려 달라 구걸하고, 신발을 핥아? 이 무슨……!

천무백은 곧장 귀마의 멱살을 잡은 채 귀싸대기를 후려갈겼다.

반쯤 정신을 놓고 누워 있던 황보숭과 당수군이 움찔할 정도로 통쾌한 귀싸대기였다.

경쾌한 타격음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저거 남궁진천도 못 버티겠지?’

‘한 방 맞고 바로 염라대왕하고 차 한잔하고 올 거 같은데.’

그야말로 천무백의 진심이 담긴 귀싸대기였다. 얼마나 충격이 컸는지 천하의 귀마도 반쯤 풀린 눈동자로 비틀거렸다.

하지만 흔들릴지언정 굳건히 두 발로 서서 중심을 잡았다.

좌중이 나직이 감탄했다.

‘미친. 저 노인네도 어지간한 괴물이네.’

‘기절은커녕 두 발로 서?’

오히려 자신들이 싸울 때 처참하게 나자빠진 것보다, 저 귀싸대기를 버틴 것이 더 대단해 보였다.

숫제 괴물을 바라보는 것 같은 시선은 천무백에게 번졌다.

여기 모든 이가 절망을 느낀 상대였는데, 귀싸대기를 후려갈겨?

이 무슨…….

“다들 일단 쉬고 있으라고.”

천무백은 주위에 그리 말하며 귀마의 어깨를 잡았다.

“걸으면서 얘기하지.”

귀마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두 눈을 희번덕거렸다.

“참으로 광오한 놈이로구나. 혈도를 짚어 내공도 금제하지 않고. 네놈이 아무리 강해도, 부지불식간에 들어오는 기습을 막을 줄 아느냐?”

“금제하면? 금제하는 것도 어느 정도에서나 통하지. 넌 벗어날 자신이 있잖아?”

“…….”

“어차피 내공 있어도 넌 나 못 죽여.”

“정말 그리 생각하나? 네놈 몸에는 칼이 안 들어가더냐?”

“응. 안 들어가.”

“…….”

“언제 내 피부에 칼이 들어왔는지 기억도 안 나네.”

“…….”

“자신 있으면 한번 해 봐. 다만, 그땐 더 안 봐줘. 정말 죽일 생각이거든.”

천무백은 빙글빙글 웃었다. 웃는 얼굴에 침을 못 뱉는다는 말이 있다. 귀마도 그랬다. 하지만 조금은 다른 의미였다.

‘저 웃는 얼굴에 침 뱉다간 정말 뒈지겠군.’

입은 웃었지만,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살기도, 뭣도 아닌 텅 빈 듯하면서도 깊게 빨려 들어가는 같은 눈빛.

쳐다보고 있으면 온몸이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귀마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라면 웬만한 건 다 알 텐데. 하오문주도 수족으로 다루고, 정의맹의 유력인사니 개방의 정보력도 다루니까.”

“천마는 어떤 놈이지?”

예상치 못한 질문에 귀마는 미간을 좁혔다.

“감히 존귀하신 그분을 그리 가벼이 부리지 말라.”

“지랄하지 말고. 존귀고 나발이고 그건 너희 마도 잡놈에게나 그렇고.”

사실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다. 혈귀곡의 본진은 어디에 있고, 세력의 숫자는 얼마큼 되고, 마인들이 익힌 무공은 무엇인지. 또 다음 계획은 무엇이고, 누굴 노릴 것인지.

같은 기밀이 아니다.

그런 민감한 질문을 예상하고, 최대한 그럴듯한 거짓 정보를 생각해 놨다.

한데 천마에 관해 물어보다니. 무언가 속셈이 있었다. 귀마는 잠시 고민했다.

‘내 별호도 알고, 내 무공도 알고, 내 독문무기도 알고, 내 싸움방식까지 아는 놈이다. 의외로 마도의 유력인물들에 대한 정보통이 있는 거야. 그렇다면 교주님에 어느 정도 알고 있겠지. 그런데도 물어본다는 건…….’

귀마의 눈이 번뜩였다.

‘날 시험해 볼 셈이군. 정확한 정보를 내놓는지 말이야.’

그러니 귀마는 여기선 순순히 정보를 넘겨 신뢰를 얻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천무백이 자신을 떠본다고 생각했으니까.

천무백에게는 아주 기분 좋은 오해였다.

정말로 천마에 대해 궁금했으니까.

“교주께선 인간이 아니시다.”

“또, 또 지랄한다. 인간이 아니면 개새끼냐. 하긴, 그렇게 생각하니 틀린 말은 아니네.”

“……이미 인외의 경지에 오르신 분이다.”

“인외(人外)?”

천무백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의 눈이 새하얗게 변하며 귀마의 감정을 엿보았다. 거짓인지, 참인지 확인하려는 속셈이다.

하나 감정에는 흔들림이 없다. 오히려 두려움이 물씬 풍겨났다. 천하의 귀마 정도 되는 이가 두려움을 머금은 것이다.

“군천악을 죽여서 그런가?”

“……전대 교주님을 제압하실 때도 강하셨지. 하지만 지금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분은 인외지경에 오르셨다고.”

“저기. 내가 강호 식견이 짧아서 그런데. 인외지경이란 경지가 있었나?”

“애송아. 이 백도의 애송아. 너희의 창천검신이 그 인외였지 않았느냐.”

“…….”

천무백은 입을 다물었다. 인외지경이란 경지는 없다.

입신지경과 그 위를 벗어난 절대지경. 강호에서 말하는 경지는 여기서 끝이었고, 이상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저 막연히 우화등선의 길만이 열려 있다고 생각할 뿐.

한데 귀마는 말했다.

창천검신이 인외지경의 경지라고.

천무백은 볼을 긁적였다.

“너희들이 마음대로 붙인 거냐?”

“전대 교주께서도 절대지경에 올라 아득히 경지를 넘으신 분이었다. 그분이 상처 하나 입히지 못할 정도였으니, 그걸 어찌 같은 경지에 두겠느냐. 창천검신은 진정 두려운 적이었으나, 나도 무를 익힌 무인으로서 그를 깊이 존경하고 숭앙한다. 그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을 벗어난 인외지경의 고수다. 오로지 창천검신이 만들어 낸 새로운 경지다.”

한치의 거짓도 느껴지지 않았다.

천무백은 묘한 감정을 느꼈다. 한편으로는 호승심이 솟구쳤다.

‘실제로 정마대전을 겪은 이가, 작금의 천마를 똑같은 인외지경이라 평했다고?’

하면 지금의 천마는, 과거 창천검신의 무위와 비슷하다고 보는 것이다.

천무백은 흥미로웠다.

‘이거야 원. 그 정도는 되니까 40년 만에 마도가 부활해서 결집하는 건가.’

그때 귀마가 말했다.

“마도에는 창천검신을 두려워하는 만큼, 그를 깊이 숭앙하는 자들이 가득하다. 창천검신의 후인인 그대가 온다면, 모두가 격하게 반길 것이다.”

“어쭈. 지금 입교 제의하는 거야?”

“천마신교의 교리를 믿을 필요도, 따를 필요도 없다. 백도에서 그대가 이루고자 하는 대의가 무엇이더냐. 평화? 정의? 그딴 가소로운 이유뿐이 아니냐.”

“마교에 들어가면?”

“강호의 지긋지긋한 싸움은 끝난다.”

“싸움이 끝나?”

“끊임없이 이어지는 은원은 사라질 것이다. 백도처럼 온갖 문파들이 난립해 서로 싸우고, 죽이고 경쟁하는 세상은 사라진다. 오로지 마도라는 이름 아래 모두가 뭉친다. 모두가 하나가 된다. 그러면 뭐가 문제겠냐. 싸울 일도, 서로 경쟁할 일도 없다.”

“거, 참신한 개소리를 장황하게도 늘어놓는군. 은원이 왜 사라져? 너희가 죽이는 무인들의 가족, 그들의 제자, 사문이 모두 원한을 가지는데.”

“원한을 가질 이들 모두 죽이면 된다.”

“…….”

“마도만이 가능한 일이다. 모든 원한을 지닐 사람을 죽여 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면 은원은 사라진다.”

그리 말하는 귀마의 눈동자에는 광기마저 번들거렸다.

천무백은 혀를 찼다.

마도가 지배하는 강호가 된다면, 세상이 바뀔까.

전혀.

마류칠종을 대표로하는 집단들이 제각기 서로 칼을 겨누며 또 피를 흘릴 것이다.

천무백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수십, 수백의 전생 동안 절실히 느낀 바다.

“그대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안다. 필연적으로 독재는 폭주한다. 적절한 견제책이 있어야 한다.”

“내가 천마의 견제책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천무백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무리 들어봐도 개소리다. 그래서 머릿속에서 다 지워버렸다.

딱 하나, 새로운 천마가 인외지경이라는 경지라는 점만 머릿속에 입력했다.

‘어째 군천악 시절보다 더 미친놈들이 된 거 같아. 그 천마란 놈 면상 한번 보고 싶군.’

어쩐지 더 강대한 적이 생겼단 생각에 천무백 역시 진지해졌다.

“거절하지.”

“교주를 죽일 셈인가?”

“물론.”

“죽일 수 있나?”

“못 죽일 것도 없지. 인외라고 한들 칼 들어가는 인간인데.”

“참으로 광오하군. 경고하나 하지. 일찍 날 죽이는 게 나을 거야. 괜히 정보 몇 개 더 얻겠다고 날 내버려 뒀다간, 난 기회를 엿봐서 널 언제든지 죽이고 도망칠 테니까.”

“지랄한다. 그럴 거면 아까 싸우다 뒈졌지. 목숨 아까워서 어떻게든 상황 모면하려고 협상한 놈이 무슨 깡으로? 잘도 그러겠다.”

차마 반박할 말이 없었던지라 귀마는 입을 다물었다.

천무백은 귀마를 데리고 북검회 내부의 누각에 앉았다.

제법 탁 트인 정경이 펼쳐진 누각이었다.

“차라도 한잔하면 좋겠군.”

“비위도 좋군. 근방에 살수들 시체가 드글드글한데.”

“마도 놈이 시체 있다고 차를 못 마셔? 이거 순 맹탕이네?”

천무백은 그리 말하며 털썩 주저앉았다.

귀마는 묘한 얼굴로 맞은편에 앉았다.

천무백이 문득 말했다.

“네놈이 마도천하를 원하는 이유가 뭐야? 그 대단한 마교의 교리 때문이냐?”

“……무인으로 태어나 패권을 추구하는 게 뭐가 문젠가?”

“그 패권이 니 패권이냐? 천마의 패권이지. 너 그냥 천마의 칼일 뿐이잖아.”

“…….”

“천마가 패권을 달성하면, 네가 이룩한 거 같아? 웃기는 소리. 아니지. 아니야. 암. 그냥 잘 쓴 도구지.”

“…….”

“사내로 태어나 고작 도구로 사용되다가 그리 갈래?”

“……무슨 말을 하려는 게야.”

“나는 말이야. 마도를 없애려는 사람이 아니야.”

“교주를 죽인다면서?”

“교주를 죽이면 뭐 하나. 마도는 다시 태어날 텐데.”

“…….”

“세상사 그런 법이더라. 다른 문파처럼 마도는 멸문될 수가 없어. 세상에 남긴 게 너무 많거든. 솔직히 인정해야지. 마도는 쓰레기지만, 그것도 분명한 도(道). 그것이 옳고 틀리고를 떠나 많은 이들을 끌어들이는 힘은 있다. 정신적인 힘을 가진 거야. 사라질 수는 없어. 마도라는 이름의 거대한 도는.”

“그러면?”

“천마는 죽인다. 고위 간부도 죽인다. 죽이고 또 죽인다. 그러나 마도는 살려 놓을 것이다.”

귀마의 얼굴이 묘해졌다. 천무백의 뜻을 간파했다.

“마도를 한낱 일개 강호문파로 만들겠다는 것인가?”

“정확히는 일개문파가 아니지. 북해빙궁이나 남만야수궁이나 어디 일개문파인가. 새외세력이지.”

“감히 천마신교를 그딴 새외의 잡것들과 비교하는가?”

“그 정도도 많이 쳐 줬다. 내 목표는 그거야. 천마를 죽이고 마교의 세력을 약화해서 새외문파로 국한하는 것. 지들 구역에서는 잘 나가지만, 그래도 강호침공은 노릴 수 없는 딱 그 수준. 어디 북해나 남만이나 감히 강호를 일통하겠다 덤벼드는가? 그러진 않지. 부족한 걸 아니까. 난 마교를 그리 만들 거다. 천산에 처박힌 새외문파로.”

“……!”

“그러면 다 죽일 수야 없고, 적어도 나하고 말이 통하는 사람이 마도를 이끌어야 하거든.”

“…….”

순간 귀마의 신형에 벼락이 치듯 움찔거렸다.

천무백이 입가에 미소를 띠웠다.

“어째, 살길이 있는데. 천하패권은 아니지만 적어도 마도 패권을 차지해 볼 생각 없으신가?”

“……나, 나보고”

천무백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한때 능허에게 연화루의 루주 자리를 맡으라고 했을 때처럼, 껄렁거리는 모습이 튀어나왔다.

“마교 대가리. 한번 해 볼 생각 있냐고. 대가리. 요거.”

격동하는 귀마의 눈동자를 보며, 천무백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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