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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재생-267화 (267/318)

<검신재생 267화>

267. 꼭 한번 보고 싶다

후웅!

그래도 귀마는 귀마였다. 천무백이 손을 뻗는 찰나, 뒤로 허리를 꺾어 아슬하게 피했다.

천무백이 혀를 찼다.

“거, 노인네가 운동은 꾸준히 했나 봐? 유연하네. 그래도 능허보다는 뻣뻣하네.”

귀마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 능허란 놈에 관해 얘기를 듣노라면 숫제 절대지경에 올라선 위인이 따로 없구나.”

“지랄. 그냥 네가 못난 거야. 어디서 평가를 쳐올리고 있어? 그러면 네가 뭐 엄청난 고수라도 된 줄 아니?”

“…….”

“이젠 지쳐서 도주 못 하니? 그래, 좀 숨 좀 고르고 쉬어라. 물이라도 줄까?”

당장이라도 사생결단을 내듯 쫓아오던 천무백이었지만, 막상 귀마가 공격 범위에 들어오자 여유를 부렸다.

귀마의 머리가 맹렬하게 돌아갔다.

“날 바로 죽일 생각이 없구나?”

천무백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름대로 감탄의 표시였다.

“늙은 추남이 눈치는 빠르다더니.”

“……내 인생 처음 들어보는 말이구나.”

“내가 방금 만든 말이야. 추남끼린 통하는 게 있나봐. 능허도 눈치는 빨랐거든. 역시 끼리끼리란 건가. 칭찬이야. 너 눈치 빠르다는 말이니까.”

귀마는 똥이라도 씹은 것처럼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체 어느 부분에서 저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귀마도 능허가 누군지는 어느 정도 안다. 천무백의 측근으로 독안사라는 흑도 출신 협객 아니던가. 그러나 별 볼 일 없는 인물로 판단했다. 정확히는 큰 위험이 아니라고 여겼다.

그만한 실력자는 강호에 널리고 널렸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천무백이 계속 자신과 비교하는 걸 보니…….

혹시.

‘진짜 뭐 있는 놈인가?’

매번 제 수족처럼 끼고 다니던 놈이 아닌가.

천무백 쯤 되는 인물이 데리고 다니는 거면 혈귀곡이 미처 판단하지 못한 실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굳이 자신하고 비교하는 것 보면 어쩌면 입신지경일지도…….

머리가 복잡해진 귀마는 습관처럼 맹렬하게 생각하고 또 고심했다.

그는 암종의 종주.

온갖 계략과 모략에 능한 암종인 만큼 의심이 많았다.

하나 어느 순간, 생각을 거듭하던 귀마는 천무백의 호선을 그린 눈을 보며 허탈해졌다.

‘말려들었군.’

당장 지금 바로 죽일 생각이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그걸 알아야 이 상황을 모면하던가 하지 않겠는가.

새삼 지금 상황에 쓸데없는 능허의 실력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으니, 이 모든 일이 어쩌면 천무백이 의도한 바가 아닌가 싶었다. 자신이 제대로 된 판단을 못 내리게끔.

저 웃고 있는 눈을 보면 확신이 짙어졌다.

“능허보단 머리는 잘 굴리지만, 결과물은 더 형편이 없네.”

“닥쳐라.”

“응, 내 입이야. 안 닥칠 거야.”

“…….”

귀마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진지해야만 하는 현 상황이 유치해지는 모습에 머리까지 어질어질했다.

꾹 참고 목소리를 낮게 내리 깔았다.

“곧장 죽이려고 들지 않는 걸 보니, 나한테 원하는 게 있구나. 애송아.”

“맞아.”

천무백은 순순히 인정했다.

귀마는 오기가 생겼다.

마치 언제든 죽일 수 있다고 자신하는 모습이 아닌가.

자신이 언제 저런 취급을 당했는지,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을 지경인지라 귀마는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하지만 최대한 냉정을 유지한 채 천무백을 노려봤다.

“정보를 원하는가?”

“그것도 맞아.”

“어떤 정보를 원하지?”

“그야 뭐 뻔한 거 아니겠어.”

“알려 주면 살려 줄 건가?”

귀마의 말에 천무백이 눈을 크게 떴다.

“미쳤어? 당연히 죽여야지.”

“……그게 협상의 방법인가? 협박하는 게?”

“협박이라니. 진짜 너 죽일 거야. 넌 귀마잖아. 귀마. 정마대전 때부터 온갖 사람들을 싹 다 죽여 온 추악한 노괴야. 죽어 간 사람들의 원한이 있지, 내가 어떻게 널 살려 줄 수가 있겠어?”

“흥. 약해빠진 놈들의 원한을 대신 갚아 주겠다는 건가? 참으로 백도 애송이 다운 협의심이로구나.”

귀마가 입술을 뒤틀며 비웃었다. 동시에 귀마의 손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후앙-!

귀마의 도가 춤을 추듯 궤적을 그렸다.

궤적 사이로 검붉은 도강이 번쩍이면서 유성우처럼 쏟아졌다.

일련의 과정이 지극히 짧은 찰나.

귀마의 말이 끝나기 전에도 이뤄졌으니, 그야말로 제대로 된 기습이다.

“이야. 암종의 종주 맞아? 암종도 다 죽었네, 다 죽었어. 눈에 뻔히 보이는 수라니.”

천무백은 그리 조롱하며 검을 맞서 휘둘렀다.

뻔히 보이는 수라는 건 그만큼 정공에 가깝다는 뜻이다.

귀마 정도 되는 고수가 뻔히 보이는 수를 썼다?

그건 겉으로 드러나는 면모지, 속은 절대로 아니다.

실제로 천무백이 검을 맞서 응수하여 얽혀들자, 귀마의 도포가 바람으로 거칠게 펄럭였다. 품속에 들어가 있던 왼손에서 팔뚝만 한 작은 도가 별안간 솟구쳤다.

쌍도(雙刀)였다.

후우웅!

지금껏 귀마는 도 하나만을 사용했다. 천무백의 귀곡광애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할 때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귀마의 독문무기가 도 한 자루라고 생각할 게 틀림없다.

격하게 칼과 도가 섞이는 와중에 별안간 작은 도가 또 튀어나온다는 건, 분명 상대가 예상할 수 없는 변수였다.

하지만.

“새끼. 이제야 제대로 싸울 생각이구나?”

천무백은 심드렁한 얼굴로 맞받아쳤다. 귀마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마치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태연한 반응이 아닌가.

까가가가가가강!

두 개의 쌍도가 쏟아 내는 도강은 천무백의 철신고검에 막혀 온갖 불똥만 만들어 냈다.

“큽!”

귀마는 양 손목에서 전해지는 둔중한 충격에 눈을 크게 떴다.

절로 목울대가 출렁였다.

‘이 정도란 말인가?’

벼락같은 충격이 머릿속을 강타했다.

방금 합에서 느꼈다. 밀린 건 자신이라고. 더 충격적인 건 단순히 무공에서 밀린 게 아니다.

‘내가 내공에서 밀렸다고?’

귀마의 얼굴이 아연했다.

방금 합은 순전히 내공에서 밀렸다.

‘아무리 항마기를 지녔다고 한들…….’

이건 아니다. 상성이 극악이라고 해도 귀마는 무려 80년 넘게 무공을 닦아 온 노강호.

내공의 총량에서 비교가 될 리가 없다. 귀마가 그나마 자신했던 바가 바로 내공이다.

여차하면 압도적인 내공을 바탕으로 동귀어진의 수를 써서 상황을 모면할 생각이었으니까.

‘이런 격차라면 동귀어진은커녕, 내가 잡아먹힌다!’

까가강! 까가강!

길게 생각을 이을 틈도 없이 천무백의 검이 몰아쳤다.

쌍도와 철신고검이 어지러이 얽혔다. 일견 보기에는 비등한 공방. 서로 밀고 밀리는 치열한 싸움.

하지만 귀마는 느꼈다. 손목에 누적되는 충격과 전신으로 밀려들어 오는 아찔한 항마기는 자신의 마기를 불태우고 있었다.

‘항마기? 아니다. 항마의 기운이 아니야.’

아주 미묘하게 몸이 둔해지는 걸 느꼈다.

‘빙공? 지금 빙공을 쓰는 건가?’

도통 이해하기 어려웠다.

천무백이 마구 뿌려대는 검강은 항마의 기운이 투철했는데, 그 속에 온몸이 꽁꽁 얼어붙을 강렬한 냉기를 머금고 있었다.

두 가지의 상반된 기운이 마치 하나처럼 어울려진 모습에 귀마는 충격을 받았다.

‘대체…….’

그런 귀마의 놀람을 봤음일까. 천무백이 미소를 지었다.

“귀마야. 네 덕택에 깨달은 것이니, 마음껏 느껴 보거라.”

“이익!”

귀마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싸움 와중에도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자신이 밀리고 있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압도적인 차이는 아니다.

분명 귀마는 버티고 있었다.

하나 결말은 뻔했다.

‘이대로라면 결국 내 목이 잘린다.’

귀마는 산전수전 다 겪은 노강호이자 대마두.

정말 목숨이 위협에 달하자 사고의 범위가 넓어지고 냉철해졌다.

까앙!

그때였다. 귀마가 한번 도강을 크게 터뜨리며 천무백을 밀어냈다.

그리곤 도를 잡은 양손을 축 늘어뜨렸다.

입술을 질끈 깨문 채 천무백을 노려봤다.

천무백은 피식 웃으며 공격을 멈췄다.

“……애송이. 정말 여유를 부리는구나.”

귀마는 불쾌한 감정을 담아 말했다. 방금 한 수는 일종의 도박수였다.

싸움을 포기한 것처럼 도를 늘어뜨린다?

그건 상대에게 죽여 주십사 하고 목을 길게 내미는 꼴이나 다름없다.

천무백은 공격하지 않았다.

두 가지 이유다.

하나는 언제든지 죽일 자신이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만큼 자신에게 원하는 정보가 있다는 뜻이다.

귀마의 머리가 맹렬하게 돌아갔다.

“거래하자.”

“거래?”

“네가 원하는 정보를 주겠다. 그리고 여기서 날 살려 줘라. 죽이는 건 언제든 가능하니, 나중에 만날 싸움에서 죽여라.”

“얼씨구? 도대체 어떤 사냥감이 맹수한테 나중에 잡아먹어 달라고 말해?”

“방금 네놈이 날 당장 죽일 생각이 없는 걸 확인했다. 완전히 공간을 열어 줬는데 그러지 않지 않았느냐.”

천무백이 코웃음을 쳤다.

“지랄. 귀마 새끼야. 네 도포 안에 온갖 암기들이 숨어져 있는 거 아는데. 제아무리 나라도 코앞에서 암기가 쏟아지면 어떻게 다 막아?”

“……!”

귀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쯧쯧쯧. 머리 쓰지 마라, 귀마야. 네가 통발 굴리는 거 다 들린다. 다 안다. 나는 다 안다 귀마야. 왜냐고? 넌 능허보다 못난 새끼지만, 난 능허보단 잘난 놈이니까.”

귀마는 입을 다물었다. 차마 뭐라 말할 게 없었다. 천무백은 정말로 다 알았다.

자신의 별호, 자신의 무공, 자신의 독문무기, 자신의 머릿속까지.

천무백의 머릿속에 다 있었다.

귀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비상한 두뇌를 가진 귀마인 만큼, 자신이 불리하다는 걸 절실히 느꼈다.

“그럼 내가 여기서 살 방도는 뭐지?”

천무백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어느 정도 작업이 된 건가?’

천무백은 내심 흡족했다.

선안에 보이는 현란한 색깔의 빛채. 상대의 감정을 추론한다는 건 큰 장점이다. 심리전에서 엄청난 우위니까.

지금껏 칼을 휘두른 게 사실은 심리전이었다.

‘마도만큼 독종인 놈들은 없지.’

정보 거래? 우스운 얘기다. 오히려 이상한 정보를 살짝 끼워 넣어 혼란을 유도할 거다. 독종이라서 뒈질 때도 입을 안 열 것이다. 적어도 귀마쯤 되는 놈이라면.

그래서 천무백은 수를 썼다.

‘내가 원하는 게 있다는 걸 암시하고, 살길이 있다고 알려 주는 거지.’

그다음에는 간단하다.

몇 번 부딪쳐서 언제든 죽일 수 있음을 보여 준다.

한데도 죽이지 않았으니, 상대는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머리를 굴릴 것이다.

더 확률이 높은 방안이 바로 거래를 하는 것.

‘그렇지만 거래에선 우위를 내가 가져야 해.’

상대는 나에 대해서 잘 아는데, 나는 상대를 모른다? 이것만큼 치명적인 건 없다.

지금이 그 결과였다. 귀마는 의욕이 많이 떨어진 채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 천무백은 쉽사리 판단하지 않았다.

아직도 저 화려한 빛의 감정의 색 중엔 음흉한 야심이 깃들어 있으니까.

‘완전히 기를 죽이긴 쉽진 않아. 음흉한 놈이기도 하고.’

그리 생각한 천무백은 말했다.

“내가 원하는 정보를 뱉어 내. 그 후에 죽이겠다.”

“…….”

참으로 어이없는 거래요, 협박이었다.

어차피 죽일 건데 정보를 말하라고?

저런 말을 들으면 백 중 구십구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천무백의 수 싸움을 겪어본 귀마는 말에 담긴 함의를 간파했다.

‘내가 뱉을 정보가 가치 있을 때 동안은 살려 주겠다는 뜻이군. 한마디로 좋은 정보를 계속 뱉어내야만 살 수 있단 뜻이다.’

귀마는 순간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대로 싸워서 장렬히 죽어야 하는가?

그도 아니면…….

‘거짓 정보를 내주면서 놈을 함정으로 끌어낼 수도 있지.’

순간 귀마의 머릿속이 번뜩였다.

하나, 천무백은 이미 웃고 있었다.

화려하게 바뀌는 감정의 색깔.

‘조작된 정보로 날 유인할 생각이겠지.’

하지만 천무백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거짓 정보, 조작된 정보라고 해도 교묘하게 속이려면 진실 속에 거짓을 숨겨야 하는 법.

그러나 천무백은 그 거짓을 간파해낼 힘이 있었다.

‘개방과 하오문의 정보력, 그리고 혈귀곡에 잠입한 검종의 내부 정보까지. 모든 정보를 교차검증하면 진실만 캐낼 수 있거든.’

천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어떻게 할래?”

“거래에 응하겠다.”

“쯧쯧. 어차피 이럴 거면서 뭘 굳이 반항했어. 능허는 곧장 넙죽 숙였을 텐데. 쯧쯧 능허보다 고집 세고, 능허보다 미련한 새끼.”

“……꼭 한번 보고 싶군. 만나서 한번 거하게 싸워 보고 싶군.”

귀마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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