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266화 (266/318)

<검신재생 266화>

266. 혐오하는 남자

쿠웅!

천무백은 십사성의 시체를 바라봤다.

새삼 자신이 벌여 놓은 위력에 나지막한 감탄이 튀어나왔다.

태극은 무당의 무공이다.

그러나 오로지 무당만의 것은 아니다.

만물이 생겨난 이래 태극의 원리는 무당 개파 전부터 존재했다.

음과 양.

상반된 두 기운의 조화. 무당이 무공으로 완성하기 이전부터 존재해 왔던 일종의 무리(武理)였다.

수많은 현인이 은연중에 깨달았던 도(道).

천무백은 그 무리를 자신의 손끝에 담았다.

‘예상외로 충격이 컸어.’

귀곡광애는 외부의 공격을 무력화하는 철벽이지만, 귀마의 연이은 공격은 감당해 내기 힘든 큰 충격이었다.

다른 이였다면 진즉 죽고도 남았을 그야말로 폭력적인 파괴력이었으니까.

더구나 하필이면 살왕을 쫓느라 경천혼공을 극도로 운용했던 상황.

지금껏 만난 상대 중 가장 강한 축에 속한 귀마의 도강은 치명적이었다.

상단전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흔들리며 항마기가 차츰 무너졌으니까.

‘그래선 안 되지.’

항마기는 마도를 상대하는 데 가장 극악한 무기다. 항마기가 무력화되면 당장 귀마를 죽이기 힘들어진다.

천무백은 그래서 머리를 굴렸다.

빙공 만으로 귀마를 상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애당초 상성에 있어 딱히 좋지는 않으니까.

‘그러나 항마기를 보조하는 용도로만 사용된다면?’

그래서 떠올린 것이 바로 태극이다.

본래 태극은 음과 양이다.

극음지기는 음이나, 항마기는 양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마기를 불태운다는 시점에서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극에 달한 양기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태극을 만들었다.

두 가지 기운을 조화롭게 그렸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선기.’

천무백의 눈이 반짝였다. 극음지기와 항마기가 원을 그렸다면, 그 원을 채우는 것이 바로 선기였다.

효과는 어마어마했다.

여러 충격에 힘을 다소 잃었던 항마기였지만, 세 기운이 어울리니 십사성쯤 되는 입신지경을 앞둔 고수도 단 한칼에 몸이 잘렸다.

천무백은 격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귀마의 얼굴을 쳐다봤다.

“고맙다. 덕택에 새로운 방식을 깨달았네. 이래서 강호에선 싸움을 멈추면 안 된다니까.”

천무백은 실로 흡족했다.

중단전의 선기를 얻은 이후에도, 사실 세 가지 기운을 제각각 사용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물론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파괴력이었지만 굳이 따지면 오히려 천무백의 손이 더 바빠지고 복잡해지는 번거로움이 더 컸다.

방금 만든 태극은 세 기운을 하나로 만들었다.

천무백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깨달음을 무공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만일 귀마 정도 되는 대마두가 위협을 느끼게 할 정도의 충격을 주지 않았다면, 천무백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그런 감사의 인사를 받은 귀마의 눈은 일그러졌다.

‘이런 개 같은…….’

하필이면 자신의 공격을 받고 깨달음을 얻었단 말인가.

그리고 그 깨달음을 곧장 무공에 접목해?

가능하단 말인가?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머리이기에, 어떤 신체이기에, 그딴 게 가능하단 말인가.

억울하고 또 억울했지만, 귀마는 냉정을 되찾았다.

짧은 찰나. 여러 생각이 교차한 귀마가 별안간 소리쳤다.

“죽여라!”

그러자 귀마의 수하들이 거침없이 천무백에게 달려들었다.

천무백은 예상했다는 듯이 반응했다.

귀마쯤 되는 인물이 십사성 하나만 데리고 먼 길을 나올 리는 없다. 하물며 천무백의 기감에 숨어 있던 기척이 진즉 느껴졌으니 천무백은 당황하지도 않고 응수했다.

하지만 하나 당황스러운 점이 있었으니,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린 귀마가 거리낌 없이 몸을 돌려 도주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천무백은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세상에. 저쯤 되는 인물이 제대로 싸워 보지도 않고 도주를 해?

나름 신선하긴 했다.

“늙더니 눈치는 더럽게 빨라졌네.”

천무백은 달려오는 마인들을 보며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허공에 검흔(劍痕)이 새겨졌다.

아스라이 연기처럼 타오르는 항마기와, 얼어 버린 이슬이 섞인 흔적.

그랬다.

항마기와 극음지기가 섞인 새로운 검기였다.

검기는 단숨에 한 명의 신형을 세로로 쪼갰고, 그것으로도 멈추지 않아 뒤에 있던 놈의 가슴팍을 찢어버렸다.

푸아악!

단 일격에 두 명의 마인이 명을 달리했다.

천무백은 몰랐지만, 무려 혈귀곡에서 서열 30위 안에 드는 두 고수를 죽인 천무백은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공중으로 솟구쳐 걸었다.

건곤창응보는 허공에서도 대지를 밟듯 자유로이 보법을 밟는 절세의 신공.

흔히 말하는 공중부양과는 달랐다.

웬만한 고수들은 허공에서 싸움을 할 수 있다. 허공에 떠오른 온갖 부산물들을 밟아 껑충껑충 뛰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건곤창응보는 거기서 기인한 무공이다.

하늘에 밟을 게 없다고?

그럼 만들면 될 일이 아닌가. 라는 생각에서 시작됐다.

허공에 얇은 기막을 만들어 그 위를 밟는 고도의 공부.

극에 달한 내기의 운용과 동시에 여러 행동을 같이해야 하는 엄청난 집중력까지.

“……!”

귀마의 명령에 속속 몸을 던지던 마인들의 얼굴에 당황이 번졌다. 이들 대부분은 정마대전을 겪지 못한 이들. 창천검신에 대해서는 지독히도 들었으나, 실제로 그의 무공을 목격하는 건 처음이다.

그 잠깐의 당황이 그들에겐 치명적이었다.

서걱!

천무백의 검이 단숨에 수확하는 농부처럼 목을 잘랐으니까.

순식간이었다.

귀마가 나름 시간을 벌기 위해 명령을 내렸던 다섯 마인이 모두 죽었다.

천무백은 기감을 넓게 펼쳤다.

“더 없네.”

단순하게 결론을 내린 천무백은 곧장 시선을 돌렸다.

공중에 올라 보법을 밟으니 저 멀리 도망치는 귀마의 등이 보였다.

천무백은 거침없이 경공을 펼쳤다. 어쩐지, 도망치는 상대를 보면 쫓고 싶은 게 사람의 심리다.

“귀마야. 귀마야. 이 추악하고 더럽게 늙은 괴물아. 생긴 건 더없이 추하고, 도망치는 꼴도 생쥐보다 초라한 귀마야. 너 그거 아니?”

단숨에 몸을 던지는 수하들을 전부 베어 버린 천무백은 경공의 속도를 높였다.

쭉쭉 늘어난 신형이 빛살처럼 공간을 격하며 뛰어넘었다.

귀마 역시 만만치 않은 속도였지만, 천무백의 경공은 더 했다.

절대지경.

상단전, 중단전, 하단전의 모든 내공을 하나로 섞어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기의 운용에 있어 엄청난 발전이었다.

단순히 내공의 총량만으로도 1대 1대 1로 각각 사용되던 것들이 완벽하게 하나로 어우러져 3, 아니 그 이상의 힘을 발휘하게 됐으니까.

더구나 천무백은 경공에 집중하면서도 끊임없이 상대를 자극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노인네니까 모르는 게 없겠지? 응? 하늘의 뜻을 아는 지천명을 진즉에 넘었잖아? 지천명이 아니지. 거의 뒈지기 직전인데, 모르는 게 없다면 머리가 돌대가리인 거지.”

“…….”

“이 병신아. 이 추악한 노괴야. 능허보다 못난 새끼야. 능허보다 못생긴 새끼야. 능허보다 늙은 새끼야. 능허보다 느린 새끼야. 능허보다 잘난 거 하나 없는 새끼야.”

천무백의 어조는 특이했다. 무덤덤한 것 같은데 사람의 신경을 긁는 묘한 무언가가 있었다.

마치 감정을 실체화시켜서 그걸 바늘로 톡톡톡 찌르는 느낌이랄까.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천무백은 정말 자신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가장 혐오적인 표현을 마구 해 댔으니까.

천무백은 진심으로 혐오하고 있었다. 세상에 진심보다 더 절실히 다가오는 건 없다.

“능허보다 멍청한 놈, 능허보다 잠버릇 고약한 놈, 능허보다 냄새나는 놈, 능허보다 밥 많이 먹는 놈, 능허보다 더러운 놈! 아무튼, 능허보다 다 못난 놈!”

“대체 능허가 어떤 놈인데 지랄이더냐!”

“너보다 잘생긴 놈! 너보다 젊은 놈! 너랑 달리 부인도 있는 놈! 너랑 달리 딸아이도 있는 놈! 우와. 이렇게 말하니 너 진짜 답이 없구나. 그 나이 먹고 부인도 없고 자식도 없어? 능허도 있는데? 능허보다 못난 인생이네? 그냥 무조건 마도에 충성해? 정마대전 때 더럽게 처맞고 정신이 어디 헤까닥했니? 응? 머리가 돌았니?”

“……!”

그야말로 울화통이 터졌지만 귀마는 입술을 깨물며 도주를 멈추지 않았다.

격장지계임을 노회한 그가 모를 리가 없다.

솔직히 귀마는 온몸이 절로 떨렸다.

천무백이 태극으로 십사성을 단 한 수에 죽일 때, 부끄럽게도 두려움이란 감정이 전신을 지배했다.

마치 과거의 창천검신을 정면에서 목격한 기분이었다.

‘내 실력으론 이길 수 없다.’

귀마쯤 되는 고수라면 객관적으로 자신을 평가할 줄 안다.

현재의 천무백을 이길 수 없다고.

정말 수치스러웠지만, 이대로 죽는 것보다 나았다.

혈귀곡의 이인자인 자신이 천무백에게 죽어 버린다면, 백도는 새로운 창천검신을 얻게 되는 셈이다.

마도에게 있어 그만한 치명적인 일이 또 있을까.

새로운 창천검신이 자신들 편에 있다고 생각한 순간, 백도는 마도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그건 안 된다.

그래서 귀마는 도주를 선택했다.

하지만 더 무서운 건, 천무백의 경공이 제 생각보다 더 월등하다는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격차가 유지되나 좁혀지진 않았다.

귀마도 그야말로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경공의 속도를 극한까지 올렸다.

‘잠깐 놈에게 반응해서 멈추면 안 된다!’

그런 생각으로 귀마는 천무백의 조롱과 자극에도 꾹 참았다.

하나 참는다고 한들, 부처처럼 초연해질 수는 없었다.

“귀마야. 귀마야. 너 경공 몇 년 익혔니? 한 80년 익혔니? 그거 아니? 난 800년이 넘게 경공 익혔단다. 벗어날 수 있을 거 같아?”

“닥쳐! 닥치란 말이다!”

“내가 내 입으로 말하는데 무슨 문제 있니? 꼬우면 너도 말해. 병신아.”

“으득…….”

“세상사 그런 법이란다. 귀마야. 산에서 곰이나 호랑이 만나면 해서는 안 될 짓을 몰라? 그건 능허도 알겠다. 이 늙기만 한 머저리야.”

“…….”

“곰이나 호랑이를 만나면 등을 보이고 도주하면 안 된다는 건 능허도 안다고. 병신아.”

대체 능허가 어떤 놈이길래 저러는 거야?

하지만 어쩐지 능허도 아는 걸 자신도 모른다는 사실에 귀마는 기분이 무척 나빠졌다.

참으로 감탄이 나올 정도로 교묘한 재주다.

‘입담만으로 천하제일을 논할 새끼 같으니라고!’

“왜 도주하면 안 되는지 알려 줘야겠구나. 능허도 아는 걸 모르는 병신이란 걸 내가 깜빡했어. 자고로 선인들께서 모르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랬지. 암, 그럼 내가 알려 줘야지.”

귀마는 점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참을 인(忍)자를 끊임없이 새겼지만 이어지는 천무백의 말에 인내심도 한계에 달했다.

“등을 보이면 아무리 배부른 호랑이라도, 막 욕망이 꿈틀거리거든. 아, 쟤 내 사냥감이구나. 사냥감이 도망치네? 그럼 잡아야겠네? 막 자극한단 말이야. 그래서 등을 보이면 안 돼.”

그쯤 듣자 귀마는 결심했다.

이대로라면 지옥 끝까지 이 격차가 유지되면서 저런 듣기 싫은 조롱이 계속 들려오리라.

‘도강 딱 하나만 먹이고 튀자!’

제아무리 천무백이어도 귀마의 도강을 흘려 낼 순 없다.

귀곡광애로 꿋꿋이 버티던 걸 떠올리면, 천무백도 잠깐 경공을 멈출 수밖에 없을 터.

그 틈에 거리를 벌려 훌쩍 도망간다.

그런 생각으로 귀마는 내공을 격렬하게 끌어올리며 몸을 홱 돌렸다.

순간 귀마의 눈이 찢어질 듯이 부릅떠졌다.

귓가에 뼈가 시릴 정도의 차가운 숨결이 닿았다.

“이거 먼저 알려 줬어야 했는데.”

“…….”

저 멀리 있으리라고만 여겼던 천무백의 하얀 얼굴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희미하게 떠오른 미소, 그러나 웃음기 하나 없는 차가운 눈동자.

“등을 보인 사냥감은 절대 맹수에게서 못 벗어난다는 것 말이야.”

새하얀 이빨이 드러났다.

천무백은 맹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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