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265화 (265/318)

<검신재생 265화>

265. 죽은 검신이 산 마도를 죽인다

이 자리에 불심(佛心)이 깊은 사람이 있다면 당장 합장하며 불경을 외울 것이 틀림없다.

무애광명.

부처의 빛이 가장 적합한 표현이다. 그리 볼 수밖에 없는 순백의 후광이 어둠을 집어삼키며 자욱하게 퍼졌다.

건곤창응보로 하늘을 거닐고, 귀곡광애로 빛을 내뿜으며 등장한 천무백의 모습은 경외적이다 못해 시각적 충격을 안겨줬다.

“…….”

노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홀로 당수군과 황보숭, 소항을 반쯤 무너뜨렸다. 하오문주인 곡지흠과 제갈설아의 진법 조합도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박살냈다.

격렬한 싸움 중에 눈썹 하나 꿈틀하지 않은 노인의 얼굴이 딱딱하다 못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파르르 떨리는 눈썹 밑으로 불신의 빛이 역력했다.

전신으로 격렬하게 느껴지는 지독한 불쾌함.

온몸을 불태우듯이 뜨겁고, 얼려버리듯이 차갑고, 칼로 찌르듯이 고통스럽다.

단전의 마기가 거칠게 몸부림치며 울부짖는다.

이건 항마의 기파(嗜波).

“저게 어떻게……저것이 지금 어떻게?”

거듭되는 불신의 시선이 천무백에게 닿았다. 눈을 가득 메우는 후광.

어둠을 잡아먹고 마기를 밀어내는 철벽.

사람의 기억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퇴화하지만, 강렬하게 각인된 감정은 절대 지워지지도, 잊히지 않는다.

노인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순전히 의문이었다. 저게 왜 눈앞에서 드러나고 있는가.

“아니다. 아닐 거야.”

직면한 순간 처음 부정했다. 하나 가슴이 거세게 방망이질하자, 이제는 저 먼 기억 저편으로 물러난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그가 왔다!

-왔다!

40년 전, 전장.

유례없는 백도무림과의 치열한 전투가 반복되는 가운데, 별안간 그런 외침이 들려왔다.

백도와 마도, 양측에서 모두 한 사람을 보고 동시에 소리쳤다.

그러나 감정의 곡선은 극단적으로 달랐다.

백도는 환희, 마도는 좌절감과 절망을.

떠오르던 빛이 바로 저 빛이었다.

-죽여! 닥치는 대로 공격해!

마도의 고위 장로들과 고수들은 발작적으로 그리 외쳤다.

아무리 유리하게 이끌어 나가던 싸움도, 저 빛이 한번 잠식하는 순간 모든 게 뒤집혔다.

하나 이어지는 광경에 마도는 좌절을, 백도는 환호를 쏟아 냈다.

마도 고수들의 내로라하는 강기가 빛에 삼켜지는 순간 허무하게도 사그라들었다.

그때 마도의 인물들이 느낀 감정은 형언할 수가 없었다.

뼈에 새겨진, 아니 감정에 새겨진 상흔(傷痕)이었다.

“귀곡광애라니…… 창천검신?”

노인은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부정하고 또 부정했다.

설마 새외로 간 검존이 돌아오기라도 한 건가?

아니다.

저 젊은 얼굴을 보라.

혈귀곡 내부에 공유되는 천무백의 용모파기와 동일하다.

천무백이다.

하지만 동시에 창천검신의 후인이다.

그제야 노인의 몸이 벼락이라도 치듯 크게 흔들렸다.

“창천검신은 죽어서도 마도를 노리고 있었구나! 죽은 검신이 산 마도를 죽이고 있다니, 참으로 질긴 악연이로다!”

검존이 마도를 새외에서 끊임없이 추적해오는 건 잘 알았다.

하나 최근 혈귀곡을 궁지로 몰아넣는 천룡검협도 창천검신의 후인이라니.

노인은 새삼 창천검신이란 이름에 이가 절로 갈렸다.

생전에는 홀로 마도를 막아 낸 방패이자, 마도를 부숴 버린 검이요.

사후에는 길러 낸 후인들로 하여금 마도를 꽁꽁 묶고 있으니 이 얼마나 원통한 일이란 말인가.

노인의 눈이 붉은 안광을 번뜩였다.

그때, 천무백의 신형이 천천히 땅에 착지했다.

“…….”

질식할 것 같은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천무백은 혀를 찼다.

“제갈소저. 저 얼간이들 데리고 피해계시오. 적당히 지혈 좀 해주고. 저러다 죽을라.”

그리 말한 천무백은 노인을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순간 눈빛을 마주한 노인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왠지 모르게 반가운 눈빛이었기 때문이다.

“혈불인 줄 알았건만, 귀마였군. 용케도 오래 살아 있네. 거, 노인네들이 욕심은 많아서 아득바득 오래 사네. 오래 살아.”

“……나를 알아?”

노인, 귀마의 신형이 딱딱하게 굳었다.

“혈귀곡의 두 번째 별, 그리고 암종의 종주. 출세했네. 종주까지 해먹고 말이야.”

귀마의 눈에 당황스러운 빛이 스쳤다. 혈귀곡 마인들의 정보는 철저하게 차단되었다.

하위무사도 그러할진대, 최상위 수뇌부인 다섯 명의 오성(五星)은 말할 것도 없다.

백도들도 수뇌부들을 이름과 별호도 없이 그저 별(星)이라고만 부른다.

한데 천무백이 자신의 정확한 별호를 말했다. 출신을 말했다. 신분을 거론했다.

‘개방의 정보력? 하오문의 정보력이 저 정도라고? 아니야. 저 하오문주 놈도 내 얼굴을 못 알아봤지. 그러면 개방? 그럴 리가. 거지새끼들이 어떻게 알 건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상대가 모르고 있어야 할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일은 심각해지는 것이다.

별호 하나를 안다고 뭐 그리 심각하겠냐지만.

‘때때로 강호에서 명성이 높은 것이 오히려 독이 되는 법이지.’

노인은 산전수전 다 겪은 대마두이자 노강호다.

대단한 명성이 오히려 독이 되어 죽어 나간 많은 고수를 봤다.

별 이름 없는 무명고수가 어디 대단한 누구누구를 죽였다는 얘기는 흔했다.

방심해서? 설마. 전 강호에서 통용되는 명성을 얻은 이들이 그리 호락호락할까.

‘별호가 알려졌다는 건, 그가 쓰는 독문무공이 알려졌다는 것이고, 알려졌으면 그 즉시 파훼할 방법이 나오기 마련이다.’

오히려 별호를 꼭꼭 숨기는 이들도 있다.

가명을 사용하고, 인피면구를 쓰고, 전혀 다른 사람인 척 구는 사람도 있다.

강호에 출두하는 젊은 애송이들은 누구나 거대한 명성을 원하지만, 정작 강호를 살아가는 노강호는 명성을 경계한다.

혈귀곡의 고수들이 별호와 이름을 감추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백도의 저력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창천검신이 이룩해 낸 거대한 위엄이 백도 무림에는 아직 숨 쉬고 있다.

검존도 그렇고, 창천검신을 우러러보며 싸우던 젊은 백도무인들이 이제는 백도의 수뇌부들이 되었다.

그러니 혈귀곡은 이름과 별호를 감췄다.

귀마는 침중한 얼굴로 천무백을 노려봤다.

“그럼 천룡검협, 너는 창천검신의 후인이더냐.”

“뭐, 그건 알아서 생각하시고.”

하나 귀마는 자신이 불리하다고 생각되진 않았다.

예상치 못한 일이긴 했으나, 자신도 천무백의 무공에 대해 안다.

‘귀곡광애와 건곤창응보.’

정마대전 당시 현역으로 뛰었던 귀마다.

단지 이름만 들어본 무공이 아니라, 직접 겪었다.

그때도 무공들을 파훼하기 위해 마도에서 얼마나 노력했던가.

하물며 상대는 창천검신 본인도 아닌, 후인이다.

‘오히려 지금이 기회다. 천룡검협을 죽일 기회.’

저 젊은 나이에 이만한 경지에 오른 인물이다.

더 늦기 전에 죽어야 한다. 당장 5년 후, 10년 후를 예상해도 어디까지 더 무서워질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후우우웅-!

귀마의 도가 맹렬하게 빛을 뿜었다.

동시에 검붉은 도강이 수장 길이로 늘어나며 단숨에 공간을 격하고 천무백을 찔렀다.

천무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저 소일거리 없이 늙진 않았군.’

천무백도 그저 웃고만 있을 수는 없는 고강한 강기였다.

새하얀 빛 사이로 검붉은 도강이 파고들었다.

콰지지지지직!

귀곡광애가 크게 출렁였다.

천무백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틈을 노리는군.’

세상에 완벽한 호신강기는 없다. 호신강기는 결국 기파로 이뤄진 하나의 강기.

면면부절(綿綿不絶) 이어지는 기의 흐름이 마치 하나의 막처럼 보이는 것일 뿐, 결국 사이를 연결하는 고리가 있긴 마련이다.

호신강기가 깨지는 이유는 크게 보면 두 가지다.

하나는 압도적인 힘으로 처참하게 부수는 것.

다른 하나는 기의 흐름을 완벽하게 파악해서 연결고리를 끊어버리는 것.

놀랍게도 귀마는 두 가지 방법을 동시에 사용했다.

당장이라도 어둠을 모조리 집어삼킬 것 같던 순백의 빛이 옅어지면서 갈가리 찢기고 있었으니까.

자신의 공격이 통한다는 걸 확인한 귀마가 별안간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귀곡광애라. 맞구나. 네놈은 창천검신의 무공을 그대로 이었어. 애송아, 세상에 절대적인 무공은 없는 법이다. 제아무리 검신의 무공이어도 시간이 흐르면 파훼법이 나오기 마련이란다!”

실제로 그랬다. 천무백도 공감했다. 귀곡광애의 틈을 노리는 귀마의 솜씨에서, 과연 마도에서 파훼법을 준비했다고 느꼈다.

하나 그러면서도 맹렬하게 머리가 돌아갔다.

천무백은 저 웃음에서 한 가지 단서를 찾았다.

‘백기 녀석이 어지간히 마도놈들을 귀찮게 했나 보군.’

창천검신이 죽었으니 그 무공을 지금까지 파훼할 방법을 고안하는 건 어쩌면 허사에 불과한 일.

그러나 지금 천무백을 상대로 파훼법을 발휘한다는 건, 그간 계속해서 연구해 왔다는 방증.

아마 검존이 끊임없이 마도와 싸워 왔음이고, 또 아직 유백기가 살아서 마도를 견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사실에 천무백은 적잖이 기분이 좋아졌다.

가장 믿었던 제자였으니, 지금 시점에서 가장 믿음직한 강자였으니까.

“십사성(十四星)! 호신강기가 깨지면 즉시 공격해라!”

귀마는 천무백이 무언가 반격할 틈도 없이 도강을 마구 쏟아 냈다.

꽈가가가가강!

강대한 내공이 저 볼품없는 노인의 몸에서 나온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면면부절, 끊임이 없었다.

천무백이 뭐라 반응할 틈도 주지 않는 맹렬한 도강 사이로 귀곡광애가 차츰 옅어졌다.

그때 비교적 젊은 장년인이 옆에서 튀어나왔다.

십사성.

귀마가 데리고 온 혈귀곡의 고위 간부였다.

천무백의 눈이 빠르게 상대를 훑었다.

‘적어도 입신지경에 가까운 인물이군. 벽 하나만 넘으면 입신지경이야.’

잘 벼려진 칼날 같은 기세를 풍겨내는 검객이었다.

귀마가 끊임없이 도강을 쏟아 내 천무백의 발을 붙잡은 사이, 귀곡광애가 깨져나가는 순간 저 검객이 틈을 노리고 칼을 내지르겠단 속셈이다.

‘뻔히 보이는 평범한 정공법이지만, 그래서 더 골치 아프거든.’

이래서 무림 고수들이 다수와의 싸움을 괜히 경계하는 게 아니다.

변수가 많고 생각할 게 많아지니까.

그러나 천무백은 다수를 상대해 본 경험이 수없이 많다.

경험은 귀마도 많지 않겠냐고?

‘우스운 얘기.’

고작 한번의 인생을 강호에 던진 애송이와 수십, 수백의 인생을 강호와 함께한 경험이 어디 똑같겠나.

천무백은 순간 전신으로 흘려보내던 기운을 거둬들였다.

순백의 빛을 뿌려 대던 귀곡광애가 단숨에 모습을 감췄다.

‘……기회!’

순간 귀마의 눈이 번뜩였다. 더 길게 늘어난 도강이 마치 채찍처럼 후려치듯 휘감아 왔다.

비단 귀마만이 아니다. 십사성 역시 검을 단숨에 내질렀다.

밖에서 보면 누구나 결과를 예상할만한 전개였다.

정면에서는 귀마의 어마어마한 도강이, 측면에서는 십사성의 날카로운 찌르기가.

그 순간, 천무백의 양손이 천천히 곡선을 그렸다.

“……?”

도강을 내지르던 귀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순간 미간이 좁혀지면서 의문이 떠올랐다.

‘잠깐, 귀곡광애가 깨진 것이었나?’

아니다. 귀마의 눈에는 기의 흐름이 보였다. 스스로 거둬들인 것이다. 더는 호신강기를 유지하는 게 손해가 크다는 판단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만일 그게 아니라면?

귀마의 시야에 무심한 얼굴의 천무백이 보였다.

왼팔, 오른팔이 물결처럼 파동하며 원을 그렸다. 느렸다. 아주 느렸다. 천천히, 또 천천히. 그런데 이상하게도, 십사성이 내지르는 쾌속한 검이 그 느림을 따라가지 못했다.

느림의 동작을 따라가던 귀마의 시선이 일순 거세게 떨렸다.

저걸 대체 뭐라 해야 할까.

커다란 원.

두 개의 뚜렷한 실선이 팔의 동작을 타고 원을 그렸다.

하나는 순백의 항마기. 방금까지 귀마의 모든 강기를 막아내던 귀곡광애와 똑같은 순백의 빛이었다.

상단전의 경천혼공이 토해지는 항마기.

그리고 맞은편 실선은 푸른빛을 띠었다. 순백 속에 떠오르는 푸른빛은 주위를 얼렸다.

냉기였다.

아니, 평범한 냉기가 아니라 저 북해에서나 볼법한 극음지기.

하단전의 빙백신공이 만들어 낸 극음지기가 곡선을 그렸다.

두 가지 기운이 선을 그리며 원을 만들었다.

순백과 푸른빛이 원을 그리고, 십사성의 검이 거짓말처럼 그 원의 한 중앙으로 향했다.

귀마의 눈이 일순 부릅떠졌다.

“뒤로 빠져라! 십사성!”

비명처럼 내질렀지만, 이미 늦었다.

커다란 원 안으로 십사성이 마치 빨려 들어가듯 들어가자, 이내 스걱-하는 섬뜩한 소리가 들리고 십사성의 육신이 절만으로 두 동강이 나며 바닥에 쓰러지는 광경이 보였다.

귀마가 십사성을 불렀을 땐, 이미 눈동자에는 생기가 사라졌다.

얼마나 깔끔하게 단면이 잘렸는지 피가 흘러나오지 않고 단면에 몽글몽글 맺혀 있을 정도였다.

그제야 귀마는 그 원이 무엇인지 알았다.

무언가 다르지만, 틀림없었다.

……

……태극(太極).

천무백만의 태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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