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64화>
264. 애들 그만 괴롭히고
천무백은 적잖이 당황했다.
만일 주위에 제갈설아나 능허가 있다면 눈을 동그랗게 떴을 게 틀림없다.
늘 흔들림 없던 천무백의 얼굴에 파문의 균열이 생겨났으니까.
“군천악이 죽었다고?”
“이미 이십 년 전에 명을 다한 천마가 아닌가. 나 역시 혈불에게 들었다.”
군천악.
전대 천마이자, 당시 창천검신의 유일한 호적수.
정마대전을 피로 물든 고금제일악인.
그의 손에 무참히 죽어 나간 곤륜파는 불타서 아예 모든 맥이 끊겼다.
소림도 봉문했고, 무당도 무너졌다.
가공할 인물이다.
나이를 떠올리면 지금쯤이면 거의 구순에 가까울 테니, 역천을 행하지 않는 한 천수가 다하긴 했으리라.
천무백은 지금 혈귀곡과 새외에도 마도세력이 결집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직 군천악이 살아있으리라 판단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마교가 다시 일어설 수는 없으니까.’
합리적인 판단이었고, 당연한 결론이었다.
창천검신에게 무참히 짓밟힌 마도다.
볼품없이 작아지고 부서졌다.
한데 40년 만에 그런 마도가 더 큰 위험이 돼서 강호에 직면했다.
빌빌 되는 게 아니라, 더 강해져서 돌아왔다.
‘과거의 마도보다 더 지독해졌잖아?’
적어도 천무백이 혈귀곡을 상대하며 느낀 바가 그랬다.
군천악이 아니고서야, 상징이나 다름없는 그가 아니고서야 마도의 재건을 이룩해 낼 수 없다고.
이미 이십년 전에 죽었다고?
작금의 천마가 군천악이 아니라는 뜻.
‘군천악이라면 지독한 욕망에 닿은 놈이었다. 내 생전, 아니, 내 모든 전생을 통틀어 욕망의 화신이라 불릴 만한 놈은 그놈밖에 없었다.’
일생에 도를 이뤘다는 평가를 받는 대단한 노고수들도, 순순히 천수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더 오래 살고자 하는 건 수많은 권력자와 힘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게 역사의 증명.
천무백은 역사를 살아오면서 똑똑히 봤다.
천명을 거부하고 역천(逆天)을 꿈꾼다.
평생 쌓아 온 내공과 깨달음으로 목숨을 이어 대자연의 섭리를 거부한다.
‘그런 놈들이 곤륜에 수두룩하지.’
역천하여 억지로 삶을 이어 가는 전대, 전전대의 노괴들.
그들을 중원오재(中原五災)중 하나로 곤륜의 노괴들이라고 일컫는다.
거대하고 장엄한 곤륜산맥에 숨어서 살아가는 역천자들은 한둘이 아니다.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면 중원에 재앙이 몰려온다고들 한다.
이렇게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역천을 꿈꾸고 행한다. 자신은 아니리라고 여기는 고승도, 도력이 깊은 도사들도.
그런데 군천악이 역천을 행하지 않고 순순히 천명을 받아들였다고?
천무백의 머릿속에 순간 벼락이 쳤다. 천무백의 새하얀 손이 공간을 갈랐다.
살왕이 흠칫하며 반사적으로 피하려 했으나, 벗어날 수 없었다.
“군천악은 누가 죽였어?”
살왕의 목을 움켜쥔 천무백의 눈이 시퍼런 안광을 토했다.
숨이 막혀서, 아니 어쩌면 천무백의 기세에 잠식당해서.
살왕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
“누가 죽였냐고.”
“그, 그야 지금의 천마가…….”
살왕으로선 답답할 얘기였다. 전대 천마를 죽인 사람이 결국 곧 새로운 천마로 추대되는 건 마도의 논리상 당연한 일이니까.
하나 그 당연한 일인 천무백에게 적잖이 심각했다.
‘군천악을 죽인 놈이 지금 천마라고?’
당장 천무백의 머리가 맹렬하게 돌아갔다.
40년이란 세월의 간격을 생각하면 당장 떠오르는 인사는 하나였다.
‘혈불!’
40년 전, 천무백에 추후 마도제일인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신진고수.
그만한 잠재력을 가진 놈이니 지금 혈귀곡의 우두머리일 터.
하나 살왕은 혈불은 죽일 수는 있다고 말했다. 전대 천마하고는 다른 인물처럼 말했다.
“불쾌해. 아주 불쾌해.”
진심이었다.
천무백은 저 깊은 곳에서부터 불쾌함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지금껏 모든 계획과 움직임이 천무백의 머릿속에서 이뤄졌다.
혈귀곡의 존재 자체도, 천무백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난 적이 없다.
면면의 인물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설령 모르더라도 하오문과 개방의 정보력에 한발 앞서 알아내고 대비했다.
하나 이번만큼은 아니다.
본인의 예상 안에 없던 존재가 불거지자, 천무백은 심히 지독한 불쾌감을 느꼈다.
불쾌감을 치워 버리는 답은 하나다.
‘내가 직접 놈을 만나 죽여야지.’
한편으로는 약간의 설렘마저도 느꼈다.
이번 삶에서 천무백이 마도를 추적하는 건, 과거의 은원은 물론이고 현생의 울타리를 지키기 위함이 크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호적수…….’
천무백의 모든 삶을 통틀어 몇 없던 호적수다.
당장 떠오른 사람만 해도 여동빈과, 군천악이다.
물론 군천악도 천무백만 만나면 몇 번 겨루다 결국엔 도주했지만.
당시 창천검신과 몇 번이고 싸워서 몸 성히 도망친다는 사실만으로도 호적수로 인정할 만한 실력자였다.
천무백은 무인이다.
수십, 수백의 전생을 거듭하며 뼈에 새겨진, 아니 영(靈)에 새겨진 무인으로서 혼이었다.
자신의 실력을 돌이켜볼 수 있는 호적수.
바둑이나 장기도 두는 사람이 아니라, 보는 사람이 훈수를 잘 두는 법처럼.
밖에서 보면 보이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보통 천무백은 본인을 관조함으로써 그걸 극복해 내지만, 그런데도 모르는 점이 있다.
간혹 그런 요소가 호적수와의 치열한 싸움 중에 발견되곤 하니, 이는 곧 깨달음이다.
무려 군천악을 제거한 놈이다.
20년 전이라면, 군천악이 그리 많이 노쇠한 것도 아니리라.
오히려 창천검신에게 당했던 부상에서도 회복한 지 오래일 터.
한마디로 군천악보다 강한 놈이다.
그러니까 나머지 마도 세력이 그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재건을 이루고, 고작 40년 만에 다시 한번 강호를 노리는 것이겠지.
수완이 보통이 아니다.
마도에서의 수완은 지극히 간단하다. 계략? 머리싸움? 다 필요 없다.
‘철저한 실력주의!’
그야말로 지독한 강자존의 세계!
천무백은 새로운 천마를 만날 생각에 호승심이 솟구쳤다.
하나 그것과는 별개로 천무백은 다시 냉정을 되찾았다.
냉혹한 눈빛이 살왕에게 닿았다.
이미 부지불식간에 천무백의 손아귀에 붙잡힌 살왕이다.
너무도 급작스러운 움직임이었지만, 한 동작만으로 살왕은 느꼈다.
정면승부는 턱도 없고, 자신이 평생 기회를 엿봐도 장담할 수 없는 상대라고.
‘어쩌면 혈불, 그 대단한 사람보다도 더…….’
손아귀에 목이 잡히지 않았다면 차라리 검을 나누며 발악할 시간으로 도망칠 기회를 엿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답이 없다.
오로지 천무백의 손에 달린 일이다.
천무백이 물었다.
“혈불에게 들었다고?”
“그렇다. 군천악은 못 죽여도, 혈불은 죽일 수 있다. 그에게 가까이 갈 수 있으니까.”
“혈불을 잘 아나 보군. 단순히 혈귀곡의 일인자란 사실 외에도 말이야.”
“…….”
어쩐지 천무백의 어조가 묘하게 바뀌는 걸 느낀 살왕의 머리가 맹렬하게 돌아갔다.
목소리의 어조, 표정, 눈빛.
그 모든 것에서 예민한 살수의 기감이 빛을 발했다.
“말하겠다. 전부.”
살길이 보였다.
그 순간, 천무백의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걸렸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혈불이 마교의 내부 사정을 알려 줄 정도면, 단순한 의뢰를 수행한 게 아니라 이미 긴밀한 관계였다는 것. 사실상 마도의 세력이나 다름없다는 거지.’
월야방은 마도의 칼이다. 더없이 확실해진 사실이다.
천무백의 눈빛이 냉혹하게 변했다.
‘지금 이것도 결국 일단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에 불과하지. 이미 마도인 놈이야.’
지금 혈불에 대해 얘기하는 것도 모두 진실일 리가 없다.
천무백은 그중에 쓸 만한 정보를 고르고 결단을 내렸다.
“자, 이제 한줌 흙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그, 그 무슨!”
살왕이 당황하여 뭐라 외치려는 찰나.
천무백의 칼이 섬전보다 빠르게 살왕의 목을 베었다.
한때 월야방의 절대자로 군림했으나, 살수로서의 장점을 살릴 수 없는 마지막 순간에는 터무니없이 허무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삶이었다.
담담하게 검에 묻은 피를 내공으로 태워 버린 천무백이 납검하는 찰나.
휘이이이익- 퍼엉!
“……?”
하늘에 떠오르는 신호탄에 천무백의 시선이 홱 돌아갔다.
다름 아닌 제갈설아의 신호탄이었다.
혹여 임무 도중 떨어져 움직이다가, 위급한 일이 생길 시 보내는 신호.
천무백은 여기서 저 신호탄이 터질 줄은 몰랐기에 미간이 좁혀졌다.
‘북검회에 남은 잔당 중에 그만한 자가 있나?’
제갈설아만 있으면 모를까. 이제는 천무백이 나름 그 실력을 인정한 세얼간이 중 두 명, 황보숭과 당수군도 있다.
뿐이랴. 곡지흠도 있다. 적어도 천무백이 살왕을 쫓기 전에 느낀 기척으론, 월야방의 잡졸들밖에 없었다.
충분히 상대하고도 남음이다.
그런데도 신호탄이 터졌다는 건…….
‘외부에서의 위협.’
이 순간에, 월야방을 구원할 편이 어디 있겠는가.
잠깐만 생각해도 답이 나온다. 혈불과 예상치도 못한 밀접한 관계임이 드러난 살왕.
그리하다면…….
천무백의 냉막한 시선이 싸늘한 시신에 닿았다.
“도주하는데 나름 시간을 끄려는 속셈이었겠군.”
마도다.
그리고 만일 그중 혈불이 있다면.
천무백의 눈이 차가워졌다. 단숨에 그의 신형이 하늘로 솟구쳤다.
* * *
“버텨야 해요!”
제갈설아가 부르짖듯이 소리쳤다.
버틴다.
말은 쉽다. 희망찬 발언이기도 했다. 이긴다는 목표가 아니라, 버틴다는 목표는 결국 누군가 구해 주러 오리라는 얘기니까.
하나 그것도 쉽진 않았다.
제갈설아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주위를 바라봤다.
황보숭과 당수군, 소항은 피를 흘리며 반쯤 무력화 된 상태였다.
오로지 곡지흠만이 검을 들고 서 있었다.
‘월야방이 아니야. 혈귀곡이야!’
제갈설아는 곡지흠의 맞은편에서 귀찮은 기색이 가득한 노인을 보며 파르르 떨었다.
살수가 아니다. 정면으로 대결해서 당수군, 황보숭, 소항 셋이 나가떨어졌다. 곡지흠도 제갈설아가 중간중간 주위의 돌이나 나뭇가지로만 간단한 진법을 교묘하게 펼치지 않았다면 진즉 당했으리라.
“천룡검협은 없군. 대신 제갈가와 당가, 황보세가에 하오문주라. 나름 나쁘지 않은 전리품이겠어.”
노인은 그리 중얼거렸다.
곡지흠이 이를 으득으득 갈았다.
“같잖은 마도 놈이 기세가 아주 등등하구나!”
“같잖은 하오문 시정잡배가 어디서 제법 괜찮은 검법을 익혀서 기가 아직 살아있구나.”
노인이 그리 이죽이자, 곡지흠은 표정을 굳혔다.
천무백으로부터 칠할 정도 전수 받은 암진혜검이라 그나마 이 정도 버텼다.
하지만 더는 한계다.
그 한계를 느낀 건 상대도 마찬가지.
노인은 벼락처럼 도를 휘둘렀다.
쩌어어어억!
어마어마한 도강이 대기를 찢어발기며 곡지흠을 강타했다.
하나 그 순간 공간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곡지흠의 모습이 흐릿해지더니 도강이 애꿎은 전각만 날렸다.
노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귀찮은 계집 같으니라고……!”
아주 간단한 진법이다. 고작 돌 하나, 나뭇가지 하나만으로 공간을 일그러뜨리게 하는 건 간단하지만, 중요한 순간에 변칙적으로 사용되면서 곡지흠에게 적잖은 도움을 줬다.
다만 꼼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귀찮은 건 마찬가지. 노인은 곡지흠을 내버려 두고 곧장 몸을 날렸다. 제갈설아를 노린 도강이 발출됐다.
“……!”
너무나 빠른 쾌속함이라, 제갈설아는 무언가 수를 쓸 틈도 없었다.
그대로 도강이 작렬했다.
꽈아앙!
그때였다. 도강은 허공에서 무력화되면서 흩어졌다.
노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외기의 흐름을 일그러뜨려서 도강을 흘려냈다?’
노인은 단숨에 수법을 알아봤다.
그야말로 상승의 공부.
‘곡지흠? 제갈설아? 아니, 고작 두 명의 실력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순간, 거대한 기세를 느낀 노인의 목이 부러지라 돌아갔다.
“……!”
무애광명(無碍光明)이란 단어가 불현듯 노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모든 어둠을 쫓아내는 새벽에 떠오르는 빛처럼, 어둠을 잠식해 버리는 순백의 빛에 노인의 얼굴이 거세게 일그러졌다.
지독히도 불쾌하고, 숨이 턱 막혀 버리는 기운.
어마어마한 항마(降魔)의 기세.
노인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애들 그만 괴롭히고, 어른들끼리 결판내지?”
새하얀 순백 속에서 천무백이 하얗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