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263화 (263/318)

<검신재생 263화>

263. 살려만 다오!

살왕은 과연 살수들의 왕이란 별호가 아깝지 않은 인물이었다.

작정하고 기척을 죽인 채 도주하니, 추적 자체가 어려웠다.

하나 가만히 있으면 모를까.

사람인 이상, 생물인 이상 움직이면 미세한 기의 흐름이 변하기 마련이다.

적어도 사람을 둘러싼 주위의 외기가 미세하게 요동치는 것이다.

제아무리 엄청난 고수라도 어찌할 수 없는 종류였다.

자신의 몸에 있는 내기를 철저히 숨기는 것도 상승의 공부.

외기의 흐름마저 제어하며 급박하게 도주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틀린 말이다.

내기를 숨기는 능력만으로도 고수들의 시선을 피하기에는 충분하다. 누가 외기의 흐름마저 예민하게 반응하고 추적하겠는가.

“거, 더럽게 잘 도망치네.”

단 한명.

천무백만이 혀를 차며 치밀하게 살왕을 쫓았다.

“하긴, 살수 짓 하다가 실패하면 도주하고 몸을 숨기는 게 가장 중요한 법이니. 그걸 가장 잘하는 놈이니까 살왕 아니겠어?”

추적 중에 천무백도 몇 번이고 살왕의 기척을 놓쳤다.

그만큼 빠르면서도 은밀했다. 하지만 천무백과 살왕의 거리는 멀어지기는커녕 더 좁혀졌다.

핑핑핑핑핑핑!

활짝 열린 상단전 사이로 어마어마한 기가 거대한 장강처럼 도도하게 흘렀다.

흐름은 도도하고 진중하여 무척 느렸으나, 워낙에 넓고 깊었다.

간단한 법칙이다.

아이가 아무리 맹렬하게 뛰어도 어른의 큰 걸음걸이를 따라잡지 못하듯이.

천무백이 관장하는 기의 흐름은 이제 절대지경에 접어들며 더 넓어지고, 깊어졌다.

“왼쪽에서 틀었군, 그리고 직진. 수풀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척하면서 크게 우회하는군. 하는 짓이 깜찍하네. 아주.”

천무백인 냉소를 지었다.

보지 않는다. 듣지 않는다. 감각을 감춘다. 대신 전신의 모든 감각을 상단전에 집중했다. 역설적으로 경천혼공은 주위의 외기(外氣)와 한 몸처럼 동화됐다. 기의 모든 흐름이 천무백에게 전달된다.

살왕의 방향이 틀어진 일도, 살왕이 밟은 바닥 주위로 파동을 이루는 기의 흐름까지도.

절대지경.

사람으로서 신에 가까워진다고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인 입신지경.

입신지경 안에서도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절대지경에 오른 천무백은 그야말로 사람이 아닌 힘을 보여 줬다.

상단전의 경천혼공은 절대지경에 오른 이후에 한 번 더 급격한 변화를 꾀했다.

자체적인 내공의 총량이 급격하게 늘어나진 않았다.

이전에도 외기의 흐름에 관여할 수 있던 것이 바로 경천혼공.

작금에 있어서 경천혼공은 주위의 외기와 하나처럼 동화됐다.

이게 무슨 뜻이겠는가.

“어딜 끝까지 도주해 보거라. 쯧. 그냥 좀 쉽게 잡히면 얼마나 좋아?”

천무백의 손바닥 위에서 살왕은 벗어나려고 악을 쓰는 셈이었다.

도주하는 살왕도 죽을 맛이었다.

‘천룡검협이 추적의 대가라 제갈가의 딸을 구해 냈다더니. 그 말이 정녕 사실인가 보구나!’

살왕은 탄식을 토했다.

자신은 최대한 기척을 숨기지만, 천무백은 숨기지도 않고 대놓고 쫓아왔다.

기감에 예민한 살수다. 살수에서도 제일의 경지에 오른 살왕이 쫓아오는 천무백의 기척을 못 느낄 리가 없다.

한데 역설적으로 살왕은 그것이 한탄스러웠다.

너무도 잘 느껴진다.

상대는 기척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고 맹렬하게 쫓아온다.

살왕이 몇 가지 속임수를 써서 방향을 틀어도, 다른 길로 빠져나가도 귀신처럼 쫓아온다.

저건 시위였다.

자신이 아무리 잘 숨고, 도주해도 끝까지 쫓아올 수 있다는 시위.

그러니까 저리 대놓고 기척을 드러내며 맹렬히 추적하는 게 아닌가.

살왕은 침음을 흘렀다. 점점 그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렸다.

‘이렇게 되다니. 이렇게. 아무리 살수들이 무인들과 정면대결에서는 실력을 터무니없이 발휘하지 못한다지만…… 단신으로 월야방을 어찌 무너뜨린단 말인가!’

월야방에는 언제든 위험이 닥쳤다.

그러나 무너지지 않았다.

방법은 간단했다. 거점에 숨어 웅크리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천무백은 달랐다.

‘강호 역사상 개방과 하오문의 정보력을 양손에 움켜쥔 인사가 있었던가!’

절로 몸서리쳐졌다. 그럴 일은 없었다.

누가 강호의 양대 정보단체의 정보력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를 수 있었단 말인가.

무림맹주? 천하제일고수?

그래, 그럴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단순히 정보를 넘겨주는 일 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월야방은 살수다. 그러면서도 강호에 얽매여 있다. 강호에 얽매인 순간, 은원(恩怨)의 물결 속에서 유영(遊泳)하는 법.’

자신들의 정보를 내준 개방과 하오문에게 살수들이 원한을 가지는 건 당연한 일.

자연히 피의 보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살왕으로선 쉬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개방 거지새끼들이나 하오문의 잡놈들이 정신이 나갔나?’

천무백이 이렇게까지 추적해 오는 건, 두 정보단체의 힘이 컸다.

단순한 정보거래가 아니라, 두 단체의 정보력을 최대한 가동한 결과다.

개방과 하오문이 미쳤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러다가 보복을 당하면 어쩌려고?

그렇지 않아도 살왕은 천무백과 관련 있는 강호인사들에 대한 무제한 암살명령을 내렸다.

무제한 암살을 내렸지만, 핵심인물들에 대한 암살은 속속 실패하고 있단 소식만 들려왔다.

기껏해야 잔챙이들만 몇몇 죽였을 뿐.

“……!”

그제야 살왕은 어째서 천무백이 이토록 자신들을 몰아붙이는지 이해가 됐다. 개방과 하오문의 행적도.

‘의심하지 않고 있구나. 고작 저 애송이 하나가 이 월야방을 무너뜨리란 걸 의심치 않고 있어!’

놈들은 월야방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개방도, 하오문도, 정의맹도.

“곧 월야방이 천룡검협에게 무너지리라 확신하는 거야!”

그러니 전력을 다해 천무백을 돕고 있다.

무제한 암살명령?

살수의 암살이란 건 모르는 사이에 당하니까 효과가 극대화되는 법.

하지만 미리 준비되면 성공하기가 쉽지가 않다.

오히려 살수들만 무참히 죽어 나간 결과만 보여 줬다.

‘자충수로구나. 자충수!’

살왕은 몸서리가 쳐졌다.

‘고작 스무 살밖에 안 되는 저 애송이가, 정파의 명숙들에게 신뢰를 받는단 말인가. 당당하게 월야방을 없앨 수 있다는 말마저 신뢰하게끔?’

착오였다.

자신이 천룡검협을 잘못 판단한 것이다.

정파의 신진고수이자 미래의 천하제일인.

이것만 해도 엄청난 평가였지만, 백도무림에서 어떤 존재로 받아들여 지는지 살왕의 판단은 전적으로 틀렸다.

‘곧 벌어질 정마대전의 새로운 구심점이자 새로운 창천검신.’

절대적인 신뢰를 보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살왕은 이를 악물었다.

‘그렇다면 천룡검협은 반드시 월야방을 없앨 것이다.’

단순히 월야방이란 문파를 없애는 게 아니다.

근원마저 뿌리째 없애는 것이 목표이리라.

살수란 살수는 모두 죽이고, 살수들이 가진 모든 저력을 불태우는 것.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도주하던 살왕의 발이 우뚝 멈췄다.

“그런 각오라면, 내가 도주할 수 있는가?”

자문하건대, 아니다.

살왕의 원래 계획은 만일 천무백이 쳐들어온다면, 살수들을 최대한 동원한 뒤 자신이 목숨을 끊어 버리는 것.

하나 실패했다. 그래서 다음 계획을 떠올렸다.

강호는, 아니면 저 멀리 서장이든 철저하게 숨긴다.

수 년, 수십 년, 아니, 자신의 목숨이 끊기기 전까지 숨어서 기회를 노린다.

장구한 세월 중엔 기회가 한번은 반드시 있기 마련.

그때 살수로써 어둠 속에서 목을 찌른다.

이것이 지금 살왕의 계획이었다.

하나 천무백이 만일 지독한 각오를 했다면, 자신이 과연 도주할 수 있는가.

불가능이다.

살왕의 머리가 핑핑 돌았다.

착!

그때, 등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살왕은 입술을 깨물며 등을 돌렸다. 천무백이 귀찮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어때? 부처님 손바닥 위의 제천대성이 된 기분이?”

“…….”

“아니지. 고작 등 뒤에서 칼질하는 놈에게 제천대성이라고 부르긴 뭐 하지. 금고아를 쓴 제천대성이라도, 암. 그건 아니지.”

“……천룡검협.”

“자, 이제 현실을 자각했지? 자결할래? 아니면 내 칼에 죽을래?”

마치 선심이라도 쓴다는 듯이 자비로운 얼굴로 말하는 천무백이었다.

하나 내용마저 자비롭진 않았다.

어떤 선택이든 죽는다는 건 똑같았으니까.

살왕은 침음을 삼켰다.

자신이 살수들의 왕이라는, 지고한 경지에 올랐으나 정면승부로는 살수로서 이길 수 없다.

천무백은 말 그대로 정통의 무인이다.

이런 상대를 정면으로 싸운다는 건, 제아무리 살왕이라도 자살행위다.

살왕은 결단을 내렸다.

그 결연한 표정에서 기색을 느낀 천무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뽑았다.

하긴.

누가 자결을 선택하겠는가. 적어도 살왕이라는 엄청난 별호로 불리던 사람이니.

천무백은 아무리 살수라도, 그가 이룩해 낸 경지에 찬탄을 표하는바.

단 한칼에.

“깔끔하게 죽여…… 응?”

털썩!

그때였다.

말을 하며 검을 뽑던 천무백의 몸이 그대로 멈췄다.

결연한 얼굴로 맞서 싸우리라 믿어 의심치 않던 살왕이 갑자기 무릎을 꿇은 것이다.

아니, 단지 무릎만 꿇은 게 아니다.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절절하게 부르짖었다.

“살려만 다오! 천룡검협이여!”

“……이건 내 계산에 없었는데.”

마지막 순간, 절절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살왕을 보며 천무백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 * *

“허. 자존심도 없니?”

“살려만다오! 모든 걸 바치겠다! 월야방도, 살수들의 지휘권도, 살왕으로서 모든 권한도! 그대가 원한다면 내 그대의 진실한 종이 되겠노라!”

설마 이렇게까지 목숨을 구걸할 줄은 몰랐던 천무백은 미간을 좁혔다.

강호에서 이런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차라리 미련하다 싶을 정도로 객기를 부리다 죽는 게 허다하니까.

이건.

‘똑똑해야 한다고 할지. 아니면 그만큼 제 목숨이 소중하다는 건지.’

후자라면 좀 웃기다.

다른 사람들 목숨을 작물을 낫으로 수확하는 농꾼처럼 거리낌 없이 사람들을 죽여 와 놓고 제 목숨은 중하다고?

‘둘 다겠군.’

천무백은 놈의 노림수를 알 것 같았다.

무려 살왕이라는 칼이다. 강호 인사라면 누구나 가지길 원하는 좋은 칼이다.

살왕은 그걸 바치는 대신 목숨을 구명하는 일종의 거래를 제시한 셈이다.

‘하지만 확실히…….’

나쁘지 않은 제안이긴 했다.

천하의 천무백도 순간 혹할 정도니까.

‘그러나 치명적이란 게 비단 내 적들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지.’

양날의 검이다.

잘못 휘두르면 휘두르는 본인도 다칠 수 있는.

천무백은 잠시 살왕을 노려보다 말했다.

“혈불을 죽여 올 수 있겠나?”

“……가능하다.”

잠깐의 망설임.

천무백은 피식 웃었다.

“하지만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겠지?”

“……그렇다. 혈불은 혈귀곡의 최강자. 그를 한번 마주해 본 적이 있다. 죽일 수는 있지만,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천무백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필요 없다.

시간이 필요하다?

“그전에 내가 찾아 죽이는 게 더 빠르겠어.”

“……!”

그러자 살왕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천무백은 혀를 찼다. 살왕은 진짜로 제 목숨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

어찌 보면 소인배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긴, 그러니까 살수 노릇이나 하겠지. 칼 좀 쓴다면서 말이야.’

천무백은 살왕을 목을 치기로 결심했다.

그러자 살기를 느낀 살왕이 다급하게 움직였다. 살기에 민감한 살수인 그는 천무백의 결심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이는 죽여 줄 수 있다. 누굴 원하는가?”

그 다급한 모습에서 천무백은 잠깐의 장난기가 생겼다.

“군천악.”

“……!”

살왕의 몸이 우뚝 굳었다. 마치 돌처럼. 그러다가 암울한 얼굴로 천무백을 노려봤다.

천무백은 코웃음쳤다.

자신이 던진 말에 담긴 의중을 알아챈 것이 분명했다.

죽일 수 없는 인물의 이름을 말했으니까.

“불가능하다. 불가능해. 불가능한 이를 말하는 건, 결국 날 살릴 생각이 없구나.”

“뭐야. 살왕이라면서. 고작 사람 하나 못 죽여? 혈불처럼 시간을 달라는 말도 안하네?”

당연한 일이다. 애당초 암살이 통할 상대가 아니니까.

하나 이어지는 살왕의 말에 천무백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었다.

“어찌 이미 죽은 사람을 죽이라는 암살에 성공할 수 있단 말인가! 내 모든 자존심을 접고 구명을 원하는데, 천룡검협이여! 정녕 월야방의 모든 걸 죽일 셈인가!”

“뭐? 죽은 사람이라고?”

천무백의 목소리가 깊게 가라앉았다.

죽은 사람이라니.

군천악.

그는.

“천마가 죽은 사람이라고?”

전대 천마의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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