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262화 (262/318)

<검신재생 262화>

262. 저승차사는 뭐 하나 몰라

“북검회주의 목을 노리는 살수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천무백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본인을 북검회주라고 소개하다니, 조금은 우스웠다.

“북검회주는 무슨, 월야방 살수 주제에.”

“월야방의 살수이되, 동시에 나는 북검회의 회주다.”

“그 말, 원래 북검회주가 들으면 기막혀할 것 같지 않아?”

“그럴 리 없다. 이미 20년 전에 땅 밑에 묻혔으니까. 내가 그들에게 회주의 자리를 받아 북검회를 다스렸으니 나는 북검회주가 맞다.”

“얼씨구.”

“그리고 네놈도 살수가 아니다. 중원 살수 중에 월야방의 살수를 죽이려는 미친 살수가 있을 리 없다.”

천무백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북검회주라면 제법 괜찮은 상대였지만, 당초 생각하던 목적과는 거리가 멀다.

‘하긴, 살왕이라고 보기엔 부족하지.’

살왕이었으면 고작 이 정도는 아니었겠지.

북검회주의 수준은 지금껏 만난 특급살수와 엇비슷했다. 그보다 관록이 붙어서 더 깊은 느낌은 있다만, 엄청난 차이는 아니다.

“세상엔 미친 살수도 있는 법이란다.”

천무백은 대수롭지 않게 검을 휘둘렀다.

푸악-!

섬뜩한 파육음을 내며 핏물이 솟구쳤다.

천무백의 검이 벼락처럼 북검회주에게 향하는가 싶더니, 급격하게 방향을 틀어 바닥을 찍은 것이다. 깊게 박힌 바닥에서 핏물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

북검회주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실로 어처구니없게 은신하고 있던 살수 하나의 목숨이 사그라진 터. 북검회주의 마음이 격동한 건 단순히 살수 하나가 죽어서 그런 게 아니다.

이미 저 가공할 강기에 휩쓸려 죽은 살수가 어디 한둘인가.

‘은신을 다 눈치채고 있었다고? 그렇다면…….’

그 순간, 천무백이 강하게 진각(震脚)을 밟았다.

콰앙!

바닥이 크게 무너지며 땅이 들썩였다. 바닥 아래에는 넓은 공간이 있었다. 지하실이다. 지하실에서 살벌하게 검을 겨누고 있던 살수들 사이로 천무백의 몸이 쑥 추락했다.

살수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온갖 병기를 내질렀다.

까가가강!

제법 공력이 실린 암기라 위력적이었으나, 천무백은 모두 가볍게 쳐 냈다.

마치 하나의 운율처럼 묘한 금속음과 함께 검이 선을 그렸다. 유려한 검무가 살수들 사이에서 펼쳐졌다.

애당초 철신고검 하나만으로도 희대의 명검이었다.

칼을 처음 잡는 초보도 단지 검의 위력만으로 사람 베는 게 어렵지 않을 날카로움을 지녔다.

거기에 검을 쓰는 사용자가 다름 아닌 천무백이었다.

대가는 도구를 탓하지 않는 법이라고 했던가?

그 말을 달리 생각해 보면, 진정한 대가에게 최고의 명품이 들린다면 대체 어떤 위력을 발휘하겠는가.

지금 북검회주의 눈 앞에 펼쳐지는 참상이 바로 그를 증명했다.

천무백은 망설임 따위는 갖지 않았다.

찌르고 베고, 휘두르고.

일련의 동작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마치 한 폭의 검무를 펼치는 듯한 아름다움 속에, 살수들의 몸이 빨려 들어가 갈기갈기 찢겨지는 듯이 보였다.

북검회주는 비교적 차가운 어조로 소리쳤다.

“지금이다.”

끼기기긱-!

주변의 벽과 부서진 가구들이 기묘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살수들의 희생 너머로 기관진식이 작동했다.

북검회주가 그나마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가 기관진식의 존재 덕분이다.

상대의 가공할 실력에 경악하긴 했지만, 그도 끝내는 살과 피로 이뤄진 피육일 터.

저 기관진식에서 몸 성히 빠져나올 수 없으리라.

‘하지만…… 마음이 편치 않도다.’

북검회주는 마음 한구석에 피어오르는 불안함에 고개를 저었다.

아마 살수들이 너무 많이 희생돼서 그런 것이라고 애써 자위했다.

하나 이어지는 광경에 그 불안함의 원천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콰아앙! 콰아앙!

“저, 저 무슨……!”

북검회주의 동공이 거세게 진동했다.

천무백은 단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강기를 발출했다.

강기는 사실 상승의 공부다. 단전에 쌓인 내기를 날카롭고 위력적으로 가공하여, 밖으로 표출하여 상대를 타격하는 수법.

방향을 조종하여 원하는 목표물을 타격해야 치명적인데, 절대 쉬울 리가 없다.

강기를 발출하는 목표를 향해 정밀하게 제어하는 능력은 극에 달한 집중력과 완벽한 기의 운용능력이 필수다.

치밀한 계산과 타고난 재능, 수많은 경험이 따라야 한다.

한데 만일 목표물을 정밀하게 설정하지 않는다면? 아니, 그럴 필요가 없다면?

그 결과가 시야에 담겼다.

꽈아앙! 꽈앙! 콰앙! 콰앙!

적아를 구분치 않는 무분별한 공격. 오로지 더 강한 공력을 발출하는 것에만 집중한 이상.

여기서 누구도 천무백의 강기를 단 한 번이라도 막아 낼 자는 없었다.

독이 묻은 온갖 날붙이들, 바닥이 꺼지며 솟구치는 송곳, 양옆에서 쏟아지는 화살까지.

전부 천무백의 강기에 무참하게 박살 났다. 기관뿐만이 아니다. 초개처럼 목숨을 던지던 살수들도 여지없이 죽어 나갔다.

그쯤 되자 북검회주는 일이 잘못됐다는 걸 절실하게 느꼈다.

정문에서 소란이 발생한 즉시, 이상한 점을 느껴 정예살수들을 잔뜩 준비했건만.

모조리 죽어 나가고 있었다.

절로 장탄식이 튀어나왔다.

‘설령 살아남는다고 해도 오늘의 이 손실은 어찌 복구한단 말이냐!’

앞뒤 가리지 않고, 후환을 두려워하지도,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월야방의 살수들로 무참한 살육을 벌이는 자.

오직 한 명이다.

‘천룡검협이 이 정도였단 말인가!’

야행복 차림에 복건을 써서 처음엔 못 알아봤지만, 모든 상황이 누구인지 가리켰다.

천무백이다.

북검회주는 가슴이 욱신거렸다.

‘어떻게 해야 이 난국을……!’

짧은 찰나, 모든 기관이 천무백의 강기에 박살이 나고, 어떻게든 칼날을 몸에 박으려고 몸을 날리는 살수들이 한줌 핏물로 돌아가는 상황에서 머리를 굴렸다.

답은 하나다.

‘나는 살지 못하더라도, 월야방은 살려야 한다.’

북검회주의 결연한 생각이 곧 행동으로 이어졌다.

단 일말의 시간이라도 벌어야 한다.

어느새 모든 공격으로 기관을 박살 낸 채, 그 위엄을 사방팔방에 떨치는 천무백을 보았다.

‘……시간,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

항거할 수 없는 상대다.

북검회주의 머릿속엔 딱 하나의 단어가 떠올랐다.

‘대적불가(對敵不可)!’

대적불가 그 자체.

바로 천무백이다.

‘방주께서 나서도 이길 수 없을 거다. 이런 자가 덤벼드니 우리 월야방의 모든 거점이 깨져나간 것이다. 월야방의 명맥이 여기에 달렸다.’

월야방의 명맥이 끊어진다는 건, 강호의 유구한 살수의 역사가 끊긴다는 것.

명맥을 보전하는 방법이란 간단하다.

‘방주께서 살아야 한다.’

살왕 한 명만 존재해도 월야방은 무너지지 않는다.

살문이란 곧 살행을 얼마나 성공을 잘하느냐에 따라 존속할 수 있는 노릇.

시간만 있다면 세상 그 누구도 암살할 수도 있다는 사내가 바로 살왕이다.

솔직히 말해 북검회주는 살왕이 천무백도 암살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어둠 속에 스며들어 기회를 엿보는 살왕의 칼날은 천무백이어도 죽일 수 있다.

하나 정면승부는 다르다. 살수에겐 정면대결만큼 치명적인 건 없다. 월야방의 내로라하는 살수들이 떼거리로 죽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였다.

지금 살왕이 나서도 천무백에게 죽는다.

정면대결은 절대적으로 피해야 한다.

‘그러니 살왕이 살아만 계시면, 저놈은 언제든 죽을 수 있다.’

그리 믿은 북검회주는 결단을 내렸다.

여기서 목숨을 버린다. 그리고 지킨다. 월야방의 존속을.

결단과 동시에 북검회주의 단도가 시퍼런 빛을 뿌렸다.

한밤중이라 그런 걸까.

시퍼런 빛이 달밤 아래 유난히 번쩍였다. 마치 화광이 충전되듯이 번쩍였다.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강맹한 강기의 빛이었다.

그 순간, 천무백의 칼날이 북검회주의 가슴에 꽂혔다.

“……컥!”

북검회주의 눈이 찢어질 듯이 부릅떠졌다. 도저히 믿기 어렵다는 불신의 빛이 어린 시선이 가슴을 관통한 철신고검에 닿았다.

검은 묵빛에 스며드는 핏물이 유난히도 선명했다.

“어째서……?”

떨리는 목소리에선 힘이 빠졌다. 북검회주는 숨이 가빠지고 초점이 흐려지는 가운데에서도 의문이 불쑥 솟구쳤다.

섬전과도 같은 일격.

어떻게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보지도 못했다. 기척도 못 느꼈다.

벼락과도 같은 섬격이 아니다.

벼락이라면 응당 소리와 빛으로 듣고 볼 수 있으니까.

이건 흡사 유령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눈치도 채지 못하게 어느 순간 숨통을 끊어버리는 사자(使者)의 검.

천무백이 빙긋 웃었다.

“말했잖아. 나는 살수라고.”

이것이 살수의 검이었다.

눈치도 채지 못하게 상대를 암살하는.

그 마지막 상황에서도 이어지는 말장난에 북검회주의 의문은 더욱 깊어졌다.

묻고 싶어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저 신음만 흘러나올 뿐, 뻐끔거리는 게 전부였다.

궁금했다.

‘이 정도 실력이었다면, 애당초…….’

저 은신한 살수들을 상대할 필요가 있었나?

저 기관진식을 파괴할 필요가 있었나?

‘언제든 단숨에 날 죽일 수 있었는데.’

마음만 먹으면 내킬 때 언제든 자신을 죽이고도 남았을 실력.

한데 왜 그러지 않았단 말인가.

왜 자신이 별 같잖은 수를 다 하는 걸 지켜보고 기다려줬단 말인가?

그 의문이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머릿속에 맴돌았다.

마지막 끊어지기 직전.

북검회주는 천무백의 묘한 웃음기가 담긴 눈빛을 보고 전율했다.

‘……기다렸구나.’

자신이 결국엔 신호를 보내리라는 사실을.

알고 기다린 것이다.

* * *

“거, 더럽게 굼뜨네.”

천무백은 혀를 차며 가슴을 관통한 검을 뽑았다.

힘없이 스러지는 시신을 보는 천무백의 눈에는 어떤 안타까움도 깃들지 않았다.

오히려 미미한 혐오감이 떠올라 있었다.

“마도나 너희나. 맹종(盲從)하는 건 똑같군.”

본래 천무백의 목적은 월야방의 파괴였긴 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살수를 전멸시키는 건 아니다.

결국, 살수란 존재는 어디선가 또 나타나기 마련이니.

차라리 그들을 갈기갈기 찢어 힘을 분산시킬 요량이었다. 그러면 혈귀곡을 비롯한 마도세력과 협력은커녕, 서로 분열되어 싸우느라 바쁠 테니까.

하나 일이 틀어졌다.

“살왕이 절대 권력을 휘두르긴 했나보군.”

살왕은 단 한 번도 나서지 않았다. 모습을 절대로 드러내지 않았다.

한 문파의 장이 수하들이 모조리 죽어 나가는데도 나타나지 않는 건 보기 드문 일이다.

천무백은 익히 짐작했다.

“살수들을 모조리 던져서 날 죽이면 좋은 일이고, 아니다 싶으면 도주할 생각이었겠지.”

이 장원에는 살왕이 있다. 천무백의 기감에는 분명 잡혔다.

문제는 살왕이 괜히 살왕이란 별호가 붙여진 게 아니란 점이다.

살왕이 이 악물고 기척을 숨기니, 천무백도 정확한 위치를 구별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기다렸다.

‘날 죽이기 위해 나타나거나, 그도 아니면 상황을 보다가 도주하겠지.’

움직이면 느껴진다.

아무리 조심히 움직여도 예의주시하는 천무백에게 분명 느껴진다.

살수들을 다 때려죽였다. 그럼 못 참고 등장하리라 생각하고.

나타나지 않았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마지막 북검회주가 결연한 얼굴로 강기를 내뿜을 때 미세한 기척이 느껴졌다.

“그게 도주하라는 신호였겠지. 상대할 수 없다고.”

살수들의 생리를 잘 아는 천무백은 그리 생각했다.

월야방은 사라져도 살왕이 살아남으면 끝내 월야방은 부활하리라.

어쨌든 살왕은 드디어 기척을 드러냈다.

거점을 모두 파괴하고 살수들을 닥치는 대로 죽인다고 이 싸움이 끝나는 건 아니다.

살왕이란 별호는 괜히 붙여진 게 아니다.

물론 천무백은 살왕에게 자신이 암살당할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 다른 사람들이라면?

정의맹의 수장들은? 청성표국의 가족들은? 척마대의 수하들은? 제갈설아는?

살왕이 마음먹고 은신한 채 기회를 엿보면 누군가는 반드시 죽는다.

그러니 천무백은 살왕을 반드시 죽일 생각이었다.

“저승차사는 뭐하나 몰라. 내가 대신 살왕 놈 목도 따주고. 나중에 저승 가는 것에 성공하면 이 빚을 곱절로 받아내야겠어.”

천무백의 신형이 불쑥 솟구쳤다.

그의 시야에 장원을 빠져나가 산으로 숨어드는 신형이 잡혔다.

살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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