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61화>
261. 나는 살수다
당수군이 당당하게 정문으로 나아갔다.
천무백은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적당히 시선만 끌어주면 그만이다. 잠깐만이라도 저들의 경계가 풀어진다면, 단숨에 잠입할 수 있으니까.
“그리 따지면 많이 위험한 것도 아니야.”
괜히 당수군에게 돌아오지 못할 위험한 임무를 시킨 게 아니다.
시선만 끌고 조금만 헐거워지게 만들면 그만이다.
정문에서 가볍게 소란을 일으키는 정도?
이후에 몸을 빼내는 일쯤이야 당수군의 실력이라면 충분하리라.
“다들 준비해.”
천무백의 낮은 목소리에 모두 긴장한 눈빛으로 상황을 주시했다.
정문으로 거침없이 걸어간 당수군은 별안간 장포 속에서 양손을 꺼내며 활짝 펼쳤다.
“뭐야?”
“멈춰라!”
문지기들이 잔뜩 경계하며 앞을 막았다. 당연한 반응이다.
야밤중에 정문으로 다가오는 놈의 행색이 야행복에 녹의장포를 걸친 괴상한 차림이었으니까.
당수군은 멈추란 말에 당연히 멈추지 않았다.
문지가 심각한 표정으로 검을 뽑으려는 찰나.
'어?'
당수군의 커다란 주먹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콰득!
단숨에 손을 뻗어 문지기 두 명의 얼굴 정면을 아작을 냈다. 이목구비가 모여있는 얼굴은 대충 때려도 모두 급소인 법.
문지기가 무력화됨과 동시에 양손에 강기를 휘몰아 대문을 마구 때렸다.
콰앙! 콰아아앙!
“어…… 음.”
지켜보던 천무백이 뻘쭘한 목소리를 냈다.
“저렇게까지 열심히 하라고 한 건 아니었는데.”
당수군이 아무리 천무백에게 무시당한다지만, 강호에서 보기 드문 실력자다.
휘몰아치는 장력에 강철 대문이 우그러지면서 부서졌다.
야밤중에 누군가가 정문을 대놓고 부수니 시선이 향할 수밖에 없는 노릇.
담장 너머에서 고함 소리와 여기저기서 급하게 움직였다.
단순히 한두 명이 아니라 우르르 몰려나왔다. 이건 천무백이 기대한 정도를 뛰어넘는다. 거의 담장을 지키던 경계 인원을 다 부른 꼴이 아닌가.
그러면서도 당수군은 마치 발악하듯이 소리쳤다.
“다 드루와! 이 새끼들아!”
천무백은 저도 모르게 낮게 웃었다.
“거 참. 너무 열심히 하네.”
저렇게까지 성실한 녀석일 줄이야.
내가 사람을 잘못 봤네, 잘못 봤어.
천무백의 그런 중얼거림을 들은 황보숭은 어쩐지 마음이 처연해졌다.
‘귀싸대기 세대보다 차라리 혼자서 북검회를 상대하는 게 싸게 먹히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구나.’
어쩌면 저 자리가 자신의 자리가 될 수도 있었기에 황보숭은 그저 당수군이 안타까웠다.
하긴, 귀싸대기 세대라면.
부르르!
잠깐 상상해 본 황보숭은 당수군의 마음을 백 번 이해했다.
차라리 북검회와 정면승부하는 게 낫다.
지금 당수군이 벌인 짓이 그렇다.
당수군은 그야말로 단순한 소란을 벌인 게 아니었다. 대놓고 정문을 부쉈다. 정문을 부순다는 건 딱 하나의 의미를 내포한다.
“저 새끼, 지금 혼자서 북검회에 전쟁 선포한 거 아닙니까?”
단순한 시선끌기가 아니라 전쟁선포였다.
“이거야 원…….”
천무백도 혀를 내둘렀다. 여기저기 휘날리는 횃불 아래로 시커먼 그림자들이 정문을 향해 무수히 쏟아졌다. 어마어마한 병력이었다.
천무백은 그들의 발걸음을 유심히 살폈다.
‘무인들의 보법을 흉내 내고 있지만, 절대다수는 살수들이군.’
살수들의 걸음과 무인의 걸음은 다른 법.
천무백은 잠시 고민했다.
원래 계획은 은밀히 잠입해 살수들의 방식으로 하나씩 제거.
하지만 저들의 생각보다 엄중한 경계, 이어지는 당수군의 예상을 뛰어넘는 성실함에 그러기 쉽진 않았다.
당장 담장을 넘기는 쉬워졌어도, 적들을 모두 깨운 셈이니까.
살수처럼 은밀히 자고 있는 놈들 목에 칼을 박을 수는 없게 됐다.
더구나 당수군이 저기서 얼마나 버틸지도 의문이었다.
천무백은 나머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가서 당수군이랑 같이 싸워.”
당수군을 도와주리라는 건 이들도 예상한 지시.
하나 천무백의 지시에서 무언가 이상한 걸 느꼈다.
마치 자기들끼리만 당수군을 도우라는 얘기 같았으니까.
“그럼 대주님께선?”
황보숭이 묻자, 천무백은 어깨를 으쓱였다.
“급이 맞는 놈이랑 놀아야지.”
동시에 천무백의 신형이 하늘로 솟구쳤다. 단 한 번의 도약으로 담장을 뛰어넘은 천무백은 거침없이 내달렸다.
공중을 내달린다는 것이 가능할까 싶지만, 천무백은 가능했다.
담장을 밟고, 전각의 지붕을 밟고, 마치 지상을 내달리듯이 단숨에 북검회의 중앙으로 파고들었다.
곡지흠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저 당가 놈이나 도와주러 갑세. 저 양반 걱정하는 것보다 당가 놈이 더 걱정이야.”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살왕을 홀로 상대해야 하는 천무백이었지만, 걱정되진 않았다.
* * *
정문으로 향해 쏟아지는 시커먼 병력들은 굳이 따지면 조무래기에 불과했다.
천무백이 단숨에 중앙으로 파고들자, 그를 포착한 움직임이 곧장 뒤따랐다.
정문의 소란에도 튀어나가지 않고 안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병력들이다.
북검회의 무인들.
아니, 월야방의 살수들이 고개를 치켜들며 천무백을 비웃었다.
홀로 대놓고 중앙을 향해 돌진해 오는 저돌성부터, 발각 된 이후에도 공중에서 내려오지 않는 행동까지.
실력 있는 무인이라면 각법을 이용해 공중에 몸을 띄우는 건 충분히 가능하다.
내공을 실어 엄청난 도약력으로 뛰어오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웬만해선 무인들은 그러지 않는다.
‘공중에선 피할 데가 없으니까!’
지상에선 두 발을 대고 땅에 대고 있으니, 전후좌우 그리고 머리 위까지 오방(五方)만 조심하면 그만이다.
허공에 몸을 띄운 찰나는 아니다.
사방팔방 모든 방향으로 공격당할 수 있다.
한 사람이 모든 방위를 방어하는 건 쉽지 않다.
호신강기를 일으키면 되지 않냐고?
그것 역시 쉽지 않다.
이미 공중으로 솟구치며 내공을 적잖이 운용하는 상황.
일반적인 무인이라면 극히 짧은 찰나에 호신강기를 마음먹은 대로 일으킬 순 없다.
결국 위험한 일부분만 호신강기로 보호해야 하는데, 지금 쏟아지는 무수한 암기를 전부 막기란 불가능이다.
더구나 암기를 던진 살수들이 어디 보통 살수들인가.
월야방의 정예들.
손톱보다 작은 암기에도 강맹한 강기가 실렸다. 거의 밤하늘을 가득 뒤덮을 정도로 수많은 암기가 천무백을 향했다.
만천화우는 아니었지만 그에 근접한 철의 비.
살수들 모두 천무백이 허공에서 암기가 빼곡히 박힌 채 추락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만 때때론 믿음이 배신하는 법.
까가가가가강!
“……!”
살수들의 눈이 찢어질 듯이 부릅떠졌다.
단 하나의 암기도 천무백의 몸에 박히지 못했다.
호신강기도 아니었다.
천무백이 양손을 뻗자 대기가 급변하며 소용돌이쳤다.
어디선가 불러온 매서운 돌풍이 단숨에 암기들을 모조리 쳐 내버렸다.
“저 미친!”
살수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내공으로 대기를 짓이겨 강제로 돌풍을 만들어 내는 거야 여러 번 봐 왔다.
그런데 저 찰나, 몸에 허공에 띄워진 상황에서 돌풍을 일으켰다고?
"저게 된다고?"
하나 어쩌겠는가.
눈앞에 떡하니 벌어졌는데.
한번 몰아친 돌풍이 천무백의 양손을 휘감았다.
어마어마한 공력이 양손에 실리면서 돌풍이 흡사 커다란 태풍처럼 몰아치며 휘감겼다. 그 위로 차가운 냉기가 실렸다.
살수들의 얼굴이 푸들푸들 떨렸다.
‘강기를 일으켜 돌풍을 만들고, 그 위에 냉기를 더한다……?’
‘무슨 두 개의 내공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처럼 저런 운용이라니!’
애석하게도 살수들의 경악은 거기서 끊겼다.
천무백이 있는 힘껏 양손을 휘둘렀다.
강기로 이뤄진 돌풍.
거기에 주위의 수분이 얼어붙어 뾰족한 가시가 곳곳에 스며든 강기 돌풍이 단숨에 살수들을 직격했다.
꽈과과과과과광!
살수들이 숨어 있던 지붕, 담벼락, 기둥이 모조리 처참하게 박살 났다.
천무백에게 암기를 던졌던 살수란 살수는 강기의 돌풍에 휘말려 처참하게 깨져 나갔다.
단단한 돌과 강철로 이뤄진 건물들도 버티지 못하는 강맹한 공격을 사람의 육신이 어찌 버티랴.
그런데도 천무백의 강기를 피한 잽싼 살수들이 있었다.
완전히 피한 건 아니었다. 흡사 하나의 그물이었다. 강기의 돌풍 속에 뒤섞인 얼음 가시들이 온몸 곳곳에 박혀 피를 흘렸다.
자신이 만들어 낸 처참한 광경을 한번 훑어보던 천무백의 미간이 좁혀졌다.
“거, 잽싸게 도망쳤나 보네.”
자신에게 암기를 쏟아 낸 살수들 중, 유난히 날카로운 기세가 있었다.
사실 그를 노리고 쏟아 낸 일격이었다. 천무백도 나름 자신의 공력을 왕창 쏟아 낼 만큼, 반드시 잡아 내리라 생각했건만.
피칠이 된 살수들 중에 놈은 보이지 않았다. 시신 역시.
하긴, 그 정도 날카로운 기세라면 충분히 피해 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천무백이 다시 몸을 띄우려는 찰나.
별안간 뒤편에서 화살이 쏘아졌다.
콰득!
천무백이 벼락처럼 몸을 돌려 화살을 손으로 잡아 냈다.
“노(弩)?”
짧은 깃대를 보면 쇠뇌였다.
천무백은 화살을 쏘아 보낸 인물을 바라봤다. 피칠을 한 채 바닥에 쓰러졌던 살수의 넓은 소매가 걷어지며 팔목에 착용된 소형 노(弩)가 드러났다.
암살에 특화된 개량노였다.
짧은 찰나, 살수의 실력을 가늠한 천무백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너구나.”
천무백이 유난히 예민하게 느낀 날카로운 기세.
바로 그 살수였다.
심지어 천무백은 적잖이 감탄했다.
온몸에 피칠을 한 채 쓰러진 놈이었건만, 자세히 보니 피칠을 한 것도 제 몸의 피가 아니었다.
그 짧은 시간에 위장을 한 채 기회를 엿본 것이다.
“천생 살수인 놈이구나. 그 말이 뭔지 알아? 천생 죽일 놈이라는 얘기다.”
살수는 무심한 얼굴로 천무백을 바라봤다.
천무백은 무심한 듯 보인 그 얼굴에서 감정의 파편을 엿봤다.
적잖이 당황해하는 감정이 선안으로 선명하게 보였다.
격동하는 심장이 겉으론 전혀 보이지 않으니, 정말 천생 살수였다.
“왜? 당황스러워? 고작 이거 화살 하나 막았다고?”
천무백이 손아귀에서 가루가 되어 버린 화살을 바닥에 털어냈지만 살수는 여전히 무심했다.
천무백은 코웃음 칠 뿐이었다. 아무리 표정관리를 잘해도, 선안 너머로 보이는 건 선명했으니까.
하긴, 평범한 화살은 아니다. 암살을 위해 개량된 노인만큼, 강기가 제대로 실렸다.
아마 웬만한 무인도 정면에서라면 막지 못하고 피하는 게 최선이리라.
더구나 천무백은 뒤를 노렸으니, 상대가 나름 치밀하게 시도한 것이다.
살수는 마흔 초반으로 보이는 아주 평범한 인상이었다.
시중에 돌아다니면 한번쯤 봤을 법한 특색 없는 흔한 얼굴.
살수가 천무백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감히 북검회를 습격해?”
“북검회는 지랄. 월야방 잡졸 놈이.”
“…….”
살수는 한차례 침묵했다가 다시 물었다.
“넌 누구냐.”
저 말을 대체 몇 번 들었을까.
무수한 전생을 거듭 떠올리면, 가장 숫자를 잘 안다는 대상인도 세기를 포기할 것이다.
그런데도 천무백은 대답해 줬다.
어깨를 편 채, 자신의 모습을 누구나 볼 수 있게 드러내면서.
야행복, 두건, 복면.
흡사 자랑스럽다는 듯이 뽐내면서.
“보면 몰라? 나는 살수다.”
“……!”
그토록 무심한 살수의 얼굴이 잠깐이나마 일그러지는 걸 보는 건 꽤 감흥이 있었다.
천무백은 혀를 찼다.
“동종업계 사람도 못 알아보고 다짜고짜 칼질이라니, 허망하구나. 허망해. 이토록 각박한 업계였다니.”
살수의 입이 벌어졌다.
“…….”
다짜고짜 들어와서 강기를 쏟아낸 게 누군데?
“말은 바로 해야지. 너희들 먼저 암기들 쏟아 냈잖아? 아이고야. 말세다 말세야. 같은 동종업계한테 다짜고짜 암기 뿌려대다니. 에라이. 마도 놈들도 안 이래. 능허도 안 그래.”
능허는 또 누군데.
천무백은 그리 말하며 칼을 뽑았다.
“그러니 벌을 받아야지?”
도대체 이 무슨 해괴한 논리의 연속인지.
살수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