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260화 (260/318)

<검신재생 260화>

260. 그래야 분위기가 살지

야행복, 복면, 두건.

강호에서 이런 행색을 보는 건 쉽지 않다.

대놓고 저런 복장으로 돌아다니는 머저리는 없기 때문이다.

볼 일이 별로 없다는 건, 웬만해선 입어볼 일도 없다는 말과 같다.

“잘 어울리는군.”

천무백이 당수군과 황보숭, 소항을 보며 그리 말했다.

황보숭의 이마에 내천(川)자가 그려졌다. 천성이 무인이자 호방한 외공고수인 그는 살수를 혐오했다.

지금 입은 야생복과 두건, 복면은 전형적인 살수의 복장.

흔히 상상하는 살수의 모습과 일치했다.

잘 어울린다는 말은 숫제 모욕이었다.

“표정 펴라.”

“······!”

“얼굴 가렸다고 모를 줄 아냐?”

“아, 아닙니다.”

“입 가렸다고 욕하지 말고.”

“······안 했습니다.”

“다 보인다. 나는 말이다. 복면으로 가려도 얼굴이 보인다. 투시안(透視眼)을 가졌단 말이다.”

장내에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천천히 준비하던 곡지흠과 제갈설아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천무백이 그런 분위기를 휘휘 둘러보곤 미간을 좁혔다.

“뭐야. 농담도 이해 못해? 하. 이럴 땐 능허가 차라리 그립다니까. 그 머저리는 여기서 개소리하지 마십쇼. 하고 훅 들어올 텐데. 됐고 준비나 해.”

“예.”

농담이라니.

황보숭은 떨떠름한 얼굴로 당수군을 툭툭 쳤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아닐까?”

“투시안이?”

“그래.”

“······대주는 도사도 아니다. 신선도, 아니다. 그리고 부처도, 아니야.”

“근데 저 양반이 괜히 저런 말을 한 거 같아?”

“······.”

“어쩌면 저 사람이면 투시안은 물론이고 관심법도 익혔을 거 같지 않냐? 다른 사람이 저런 말 하면 농담이겠지만, 어휴. 저 양반이 저런 말하니 농담 같지가 않아. 보통 사람 같아야지.”

“음.”

당수군은 침음을 흘렀다. 옆에 있던 소항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맞아요. 저도 가끔 느껴요.”

“그치?”

“정말 관심법을 익힌 게 아닐까 싶다니까요. 가끔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제가 무슨 생각하는지, 우울한지 즐거운지 다 알아보신다니까요.”

“어? 나도 그렇게 느낀 적 있는데.”

그들이야 모르겠지만, 천무백이 가진 선안의 힘이다.

상대의 감정을 빛으로 유추할 수 있는 능력.

어쩌면 모르는 이들에겐 숫제 ‘관심법’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천무백은 선안의 효율적 사용에 아주 능숙해졌다.

파벌 싸움 하던 거친 후기지수들을 완벽하게 통합해 냈고, 자신의 명령에 철저하게 움직이도록 만들었으니.

“젠장. 그러면 이제 속으로도 욕 못하겠네.”

“그랬구나. 지금까지 속으로 욕해 왔었구나.”

“······!”

천무백의 목소리에 황보숭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어찌나 새하얗게 질렸는지 안타까운 마음이 절로 들 정도였다.

천무백이 혀를 찼다.

“일 끝나고 오랜만에 시험이나 치르자. 너희 모두.”

셋의 얼굴이 똥이라도 씹은 것처럼 일그러졌다. 복면과 두건으로 가렸지만 천무백에겐 다 보였다.

“표정 피고.”

“······!”

“오늘 밤 활약해 주면, 시험을 치르지 않고 통과하는 걸 고려해 보지.”

순간 셋의 눈빛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지켜보던 곡지흠은 혀를 내두르며 제갈설아에게 말했다.

“대체 저 시험이 뭐요? 소저. 말 한마디로 대원들의 의욕을 이끌어 내는 저 시험 말이오.”

“음. 자신의 무공 수위가 어느 정도인지 판가름하기엔 아주 좋은 시험이에요. 척마대원 모두 저 시험에 응시했고, 남궁진천도 쉽게 통과 못 했어요.”

“허어. 그 남궁가의 용 말이오?”

“네.”

“대체 무슨 시험이길래.”

제갈설아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궁금하시면 제가 천 공자께 말씀드려서 한번 받을 수 있게 도와드릴까요?”

“정말이오?”

곡지흠이 눈을 빛냈다. 그도 하오문 답지 않게 천생 무인이다. 그래서 암진혜검의 구결에 그리도 매달리는 것이다.

천룡검협의 의미심장한 시험이 무엇인지 호기심이 슬그머니 떠올랐다. 궁금했고, 경험해볼 수 있단 사실에 절로 가슴이 뛰었다.

“물론이에요. 그게 뭐 어렵다고.”

“고맙소, 소저. 과연 제갈가의 장녀가 아주 성품이 미려하다더니, 하오문의 제갈가에 대한 정보가 틀림이 없구려.”

“그럼 오늘 작전 끝나고 바로 말씀드릴게요.”

“핫핫. 고맙소, 소저.”

“아니에요.”

제갈설아는 그저 웃으며 겸양을 표할 뿐이었다.

어쩐지, 천무백에게 가장 물이 많이 든 건 능허가 아니라 제갈설아일지도 모르리라.

* * *

가끔 천무백은 생각하곤 했다.

중원인들은 참 달을 좋아한다고.

이태백이 그리도 달을 좋아해 달을 노래한 건 둘째치고도.

많은 시인과 문학가 선비들이 수도 없이 달을 노래했다.

비단 문사들만 그러하랴.

무인들도 마찬가지다.

검법이나 권법, 도법이든 각종 무공에 달(月)이 들어간 게 수두룩했다.

문파의 이름도 그렇다.

지금 천무백의 발걸음이 향하는 길.

월야방(月夜幇).

“지들이 무슨 이태백이야? 월야방이 뭐야 월야방이.”

밤하늘에 유난히 창백한 달이 달빛을 흩뿌렸다.

달이 뜬 달밤, 월야(月夜).

천무백이 굳이 곡지흠 말대로 철저하게 조사하고 나서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북검회가 월야방이다.’

모든 감각이 그리 말했다.

기감에 선기의 신묘한 힘이 깃들어 예민하다 못해 새로운 감각에 눈을 떤 천무백은, 이 도시에 살수들이 웅크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사실 천하의 천무백이어도 그건 불가능하다.

기감만으로 이 넓은 도시에서 살수를 찾는다고?

어불성설이다.

그런데도 천무백의 날카로운 기감이 말했다.

‘살수가 있다.’

아무리 숨기고 또 숨겨도, 역설적으로 숨길수록 더 강해지는 짙은 혈향.

이건 단순한 살수가 아니다.

천무백이 느낀 위험한 냄새는 딱 하나다.

“살왕(殺王)이 여기에 있다.”

그랬기에 천무백은 나섰다.

북검회는 월야방의 작은 거점이 아니다.

지금에 있어서 살왕이 머무르는 월야방의 본진.

“북검회라······. 그래서 이곳을 선택했겠군.”

북검회(北劍會)는 청해의 문파. 하지만 중원사람들은 북쪽(北)이 아니라 오랑캐(僰)를 써서 북검회(僰劍會)라 부른다.

중원인들이 청해의 문파라고 멸시하는 것이다.

그러니 중원의 시선에서 벗어난다. 누구도 관심 가지지 않고, 신경도 쓰지 않는다. 월야방이 위장하기에 가장 더없이 좋은 환경이다.

충분한 세력, 지역에서의 공고한 영향력, 중원으로부터 멀어진 관심.

살왕이 이곳으로 본진을 옮긴 이유도 그것이다.

중원으로부터 관심이 머니까.

하니 천무백은 거침없이 움직였다. 흩뿌려지는 달빛 속을 거닐며,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달빛이 피하는 골목과 지붕 위를 오다니며 주위의 모든 시선에서 벗어났다.

나머지는 그저 천무백이 밟는 길을 똑같이 걷고, 달렸다.

하나같이 눈빛에 놀라움이 번졌다.

북검회의 장원은 주위의 수많은 상가와 문파, 주점으로 보호되어 있다.

그들 중엔 북검회의 눈이 있고, 살수들이 있을 것이다.

한데 그들의 시선을 모두 피하고 있다.

제갈설아는 뒤따라가며 천무백의 등을 보며 나직이 감탄했다.

흩뿌려지는 달빛 아래에서 유난히도 천무백의 등이 넓어 보였다.

작전에 나서기 전, 대원들에게 묘한 감흥을 불러 일으켰던 말.

싸우니 이겼다.

어쩌면 참으로 광오한 말이지만, 지금에 있어서 그보다 든든한 말은 없다.

아직도 월야방을 상대하는데, 특히 살왕을 마주하는 데에 밀려오는 본능적인 공포를 단번에 깨끗이 씻어 보내 버리는 든든함.

‘같이 계속 가고 싶어.’

그런 생각이 불쑥 떠오르는 사이.

천무백은 커다란 장원 앞에 도착했다.

순간 대원들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다. 여기선 가장 선배이며 실력자인 곡지흠마저 굳은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모두의 시선이 천무백에게 향했다.

이제는 어떻게 할 것인지 의문이 담긴 시선이었다.

높은 담장 너머로 수많은 무인이 보였다. 담장을 넘는다고 해서 몰래 스며들기엔 무리다. 곳곳엔 횃불이 잔뜩 켜져서 이곳이 밤인지, 낮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이건 숫제 대라신선이 와도 몰래 들어가는 건 불가능이다.

갑자기 몸이 보이지 않는 선술이 아닌 이상 말이다.

모두가 천무백의 지시를 기다렸다.

천무백은 턱을 쓰다듬더니 당수군을 바라봤다.

“당가야.”

“······예?”

어쩐지 불길한 느낌을 받은 당수군은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가문에 머무르지 않고 정의맹에 들어오고, 척마대에 들어오고, 이 모든 것들이 다 큰 공적을 세우기 위함을 잘 안다. 그러니 내 공적을 세울 기회를 주마.”

“······.”

순간 당수군의 눈동자가 여러 빛으로 복잡해졌다.

공을 세우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천무백이 저리 말하는 걸 보니 위험한 일임이 틀림없다.

그러면서도 거절하지 못하는 이유가, 공을 세우고자 하는 마음은 누구보다 컸기 때문이다.

‘이미 반쯤 형님에게 후계자 자리가 돌아갔지만······.’

이번에 월야방의 연락책들을 잡기 위해 당문으로 가서 확인한 사실이다.

비교적 자신보다 실력이 모자란 형이 그저 장자라는 이유만으로 후계자 자리가 공고한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그러나 나이가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그걸 확실하게 정립하지 않은 이유를 당수군은 잘 알았다.

‘아직 기회가 남았다.’

아버지의 눈에 장자가 영 눈에 차지 않는 반면, 당수군은 천룡검협의 밀명을 받고 가문으로 돌아왔었다. 이것만 봐도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은 충분히 판단할 수 있다.

미래의 천하제일인이 유력한 천무백과 인연을 맺은 둘째라면······.

‘여기서 공을 세운다면 정말 불가능은 아니다.’

그리 생각한 당수군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습니다.”

“그래. 정문으로 가.”

“······잘 못 들었습니다?”

“정문으로 가.”

“······.”

당수군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천무백은 태연하게 손가락으로 정문을 가리켰다.

당수군이 황당한 어조로 반발했다.

“이렇게 입은 채로요?”

야행복, 복면, 두건.

완벽한 살수의 행색.

설마 저들이 똑같은 월야방 살수인 줄 알고 들여보내 주리라 생각하는 건가?

천무백은 대놓고 말했다.

“가서 시선 좀 끌어. 여기저기 있는 인원들 다 몰려갈 정도로 거하게. 그 사이에 우리가 침투할 거니까.”

“······보통 위험한 게 아닌데요?”

“괜찮아, 괜찮아.”

“아니······.”

내가 안 괜찮다니까?

당수군 뿐만이 아니라 옆에 있던 황보숭도 당황했다.

그럴 거면 애당초 당수군은 대체······.

“야행복하고 복면을 왜 입힌 거야?”

“그래야 분위기가 살지.”

“아니 이 뭔······.”

“어허. 얼간아. 슬슬 말이 짧아지는 걸 보니, 귀싸대기가 부족하구나?”

“생각해 보니 술맛도 분위기에서 나오는 법. 칼질도 그런 것이겠지요. 대주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급격하게 태세전환하는 황보숭에 당수군이 죽일 놈 쳐다보듯이 노려봤다.

하지만 황보숭은 꿋꿋이 그런 시선을 견뎠다.

굴욕감?

그딴 게 무슨 소용이랴!

‘귀싸대기 맞으면 굴욕감보다 뼈가 시리다. 뼈가 시려.’

소항만이 이해한다는 눈빛으로 쳐다볼 뿐, 단 한 번도 맞지 못한 곡지흠은 ‘젊은 후기지수가 벌써부터, 잉. 쯧쯧.’하면서 혀를 찼고 제갈설아는 그저 안타까운 얼굴이었다.

그것이 한때 제갈설아를 연모했던 황보숭에겐 조금 마음 아팠지만.

“이해해요. 황보 공자.”

소항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모든 마음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뭐 해. 어서 가. 거하게 떠들어대. 막 독도 뿌리고 암기도 뿌리고. 독이나 암기나 저 살수들보단 당가의 것이 훨씬 낫잖아?”

“그야······ 그렇습니다만.”

“아, 그리고 이거 챙겨.”

천무백은 답지 않게 자상했다. 건넨 건 전투에 나설 때마다 몸을 두르던 녹의장포였다.

이번엔 야행복을 입어서 입지 않고 있었는데, 그걸 준 것이다.

“도검불침(刀劍不侵)이라 웬만한 공격은 그냥 받아 낼 것이다.”

당수군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평소 거칠기 짝이 없던 천무백의 언행을 생각하건데, 이런 배려는 그만큼 더 위험하다는 방증이었다.

당수군이 망설이자 천무백의 눈빛이 묘해졌다.

“아니면 그냥 시험이나 치를까?”

“······그.”

당순군은 망설였다.

귀싸대기 한 대냐, 아니면 죽을지도 모르는 사지(死地)로 가느냐.

‘귀싸대기가 낫지 않을까?’

죽지는 않잖아? 그런데 저긴 정말 죽을지도 모르고.

당수군은 결심했다. 공을 세우는 것? 이런 위험한 거 안 해도 천무백 뒤만 졸졸 따르다 보면 공적이 생기리라. 월야방을 결국에는 멸(滅)할 테니까.

모양 빠지지만 합리적인 마음을 먹은 당수군이 대답하려는 찰나.

“······!”

당수군의 눈앞에 슬그머니 손가락 세 개를 펴는 천무백이 보였다.

그 뜻은 명백했다.

‘······세 대를 맞으면 죽지 않을까?’

그 대단한 남궁진천도 세대 맞고는 온종일 숨도 못 쉬던데.

“······정문으로 가겠습니다.”

당수군은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

그는 이성적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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