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259화 (259/318)

<검신재생 259화>

259. 이기는 방법

“허 참. 살다 살다 살수한테 공격을 당해 보네. 에이 썅. 내가 뭔 원한을 샀다고. 이게 다 천무백 그 양반 때문이라니까.”

능허는 새삼 변한 자신의 인생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흑도로 살 때 같은 흑도들에게 뒤통수 맞는 거나 걱정했지, 세상에. 자신이 월야방의 암살 대상이 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그의 한쪽 눈이 바닥에 널브러진 시신에 닿았다.

“역시, 가장 의심스러운 몇 놈들이 문제였소.”

“눈썰미 제법이야? 허 표사?”

시신 몇 구는 다름 아닌 청성표국의 표사의 행색이었지만, 허성의 얼굴엔 안타까움이 아니라 싸늘함이 깃들었다.

“적어도 삼 개월 전에 들어온 표사들이고, 내가 직접 살핀 애들인데…….”

“됐어. 뒤늦게라도 정체 알았으면 됐지. 결국, 잘 정리했잖아?”

진짜 정체는 월야방에서 잠입한 살수들이었다.

표사부터 시작해서 쟁자수까지 다양했다. 그래도 표사가 월등히 많았다. 표사를 선발할 때 직접 관여했던 허성은 가슴이 서늘했다. 자칫하면 큰 재앙을 맞이할 뻔했다.

“……내가 잘한 게 아니라 도련님이 미리 일러주신 덕분이지.”

“크. 그 양반, 정말 귀신이야. 표국 내에 잠입한 월야방 놈들이 있을 테니까 최근에 들어온 애들 중심으로 의심스러운 애들 찾아놓으라고 했으니.”

“천 리 길에서도 일을 예지하시는 것 같아서 때때로 소름이 돋는군.”

“예지는 무슨, 천리통도 아니고. 그 양반도 사람이야, 사람. 싸가지는 사람 같지가 않긴 한데, 사람 맞아.”

능허는 툴툴대며 건들거렸다.

하지만 그도 허성처럼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살수들의 암살대상에 자신도 포함된다는 걸 알고 가슴이 서늘하지 않았던가.

얼마 전 득녀한 능허로서는 절대 그럴 순 없다.

‘내 새끼 냅두고 먼저 갈 수야 없지. 응?’

능허는 새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이야 미리 대비해서 막아냈다지만, 만일 몰랐다면?

자는 중에 목에 칼을 꽂으면 능허라고 별수가 있겠는가.

“그것도 그렇고, 그래도 피해가 없을 수가 있을까 싶었는데. 나도 몸에 칼침 몇 개 박히는 건 생각도 해 놨고. 근데 너무 쉽게 끝났는데. 어떻게 표행을 나오자마자 거짓말처럼 습격하냐?”

“그것도 도련님의 서찰에 적힌 내용이다.”

“썅. 진짜 천리통인가. 하긴, 저 노인네가 갑자기 찾아온 것도 그 양반이 보낸 서찰 때문이지?”

“…….”

허성이 입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말해 몸에 소름이 오돌토돌 올라왔다.

바닥에 놓인 살수들을 보며 간단히 합장하며 명복을 빌어 주는 초로의 노인.

그저 볼품없는 노인처럼 보였지만, 허성은 감히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사실상 저 노인이 살수들의 절반을 참살했으니까.

자신이 죽인 살수들의 명복을 빌어 주는 광경도, 모든 걸 알고 보니 으슬으슬 몸이 떨렸다.

노인이 명복을 다 빌고 능허와 허성에게 다가왔다.

“이젠 끝난 거 같구만. 근방에 살수의 기척은 없으니까. 이게 전부야. 그간 표국 근처에서 느껴지던 쥐새끼들이 전부 나온 거야. 더는 없어.”

능허와 허성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노인이 말하는 근방의 지척은, 적어도 둘의 기감보다는 더 넓을 게 틀림없다.

세상만사에 불만이 가득한 능허도 딱히 대거리할 만한 위인이 아니니까.

“고맙습니다. 약선 어르신.”

약선이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껄껄 웃었다.

“어르신은 무슨. 자네가 표두 아닌가? 나는 객원표사고. 그럼 자네가 내 상관이지. 암.”

“제가 감히 어떻게…….”

“됐네. 아이구. 천룡검협이 돌아오면 이 늙은이를 그만 부려먹으라고 하게나. 은혜 갚으라며 소림사를 지키라고 객원표사로 고용하질 않나, 이번엔 살수들도 막으라고…… 나 참 객원표사니까 표국을 지키는 건 당연한 거 아니냐고 서찰을 보낼 땐 아주 기가 막혔다. 기가 막혔어. 다 늙은 사람을 이리도 부려먹다니.”

허리를 두드리는 약선을 보며 능허가 뚱한 어조로 말했다.

“뭐 어쩔 수 있겠소, 노인장. 시키는 대로 해야지.”

“끙. 자네도 천룡검협이랑 같이 더니 물이 들었구만? 내가 강호에선 자네의 훨씬 선배인데?”

“선배는 개뿔. 같은 표국에서 일하는 객원표사인데.”

“허허허…….”

“그리고 내가 물이 든 게 아니라. 그 양반이 내 물이 든 거요.”

“……그게 자랑스럽나?”

“암. 아주 자랑스럽지.”

능허는 그리 말하며 퍽 자랑스럽다는 듯이 가슴을 폈다.

그 광경에 약선이나 허성이나 실소를 흘렀다.

만일 전대의 고수인 약선이 아니었다면 제법 골치 아픈 싸움이 되었으리라.

하지만 약선은 격이 다른 고수.

능허는 혀를 내둘렀다.

이런 약선을 그저 객원표사라는 명목으로 소림사 경비를 맡기더니, 이제는 살수들까지 막게 했다.

새삼 천무백의 수완에 절로 몸이 떨렸다.

‘거 대단한 양반이긴 하다니까.’

제법 오랫동안 천무백 곁에 있어서 능허도 이젠 천무백에 대해 나름 알 만큼 알게 됐다.

겉보기와는 달리 자신의 것들을 끔찍이도 소중히 여긴다.

바로 천무백의 울타리일 것이다.

하나 지금은 아니다.

그간 천무백이 하나둘씩 쌓은 수많은 인연이 하나의 포석이 되어 쌓였다.

여기 약선이 바로 그런 포석 중 하나다.

수많은 포석이 차곡차곡 쌓여 울타리를 거대한 성벽으로 만들어 냈다.

능허는 이 성벽 위에서 나름대로 잘 지킬 생각이다.

그리고 여차하면…….

“슬슬 도와주러 가봐야 할 거 같은데.”

성 밖을 나가 적을 요격하는 별동대처럼 말이다.

밖에서 싸우고 있을 천무백을 도와야 하지 않겠는가. 능허도 슬슬 몸이 근질거리는 걸 느꼈다.

“누가 누굴 도와?”

물론 옆에서 허성이 어처구니없다는 소리로 한마디 했지만.

능허는 천무백이 아닌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능허가 있었으면 좋았을 법했군.”

“능허 아저씨요?”

갑자기 능허가 거론되자 제갈설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본 흑도 중에서 가장 흑도의 전형 같은 놈이었거든.”

“아……. 있었으면 좋았겠네요.”

제갈설아가 동감했다.

청해성은 확실히 중원과 달랐다.

이곳도 중원의 변경이긴 하지만, 사람들의 외모부터가 미묘하게 달랐다.

외모는 둘째치고 분위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견 잘 모르는 선비들이 왔으면 흑도 건달들의 세상처럼 보인다고 혀를 찼을 것 같아요.”

“좋게 말하면 자유분방한 거지.”

행색이나 분위기, 언행까지 무언가 알게 모르게 격식에 차 있는 중원과는 달리 비교적 자유분방함이 물씬 느껴졌다.

이런 곳에 천무백 일행이 도착하니 세간의 이목이 쏠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북검회는 이곳에서 제법 내로라하는 위세를 떨쳤다.

아마도 천무백을 바라보는 외간의 시선 중엔 북검회에 달려가 보고하는 이도 있겠지.

“이런 데에는 능허가 제격이거든. 워낙 배알 없는 놈이라 잘 섞여서 여기저기서 필요한 정보 잘 가지고 오거든.”

“음. 그거 칭찬이죠?”

“칭찬이오. 개똥도 약에 쓸데가 있는 거니까.”

“새삼 능허 아저씨를 많이 그리워하는 것 같네요.”

천무백의 얼굴이 똥이라도 씹은 것처럼 일그러졌다.

아무리 천무백 옆에 찰싹 달라붙어도 보지 못할 다채로운 표정이라, 제갈설아는 간혹 능허 얘기가 나오면 이렇게 놀리곤 했다.

그때마다 반응이 워낙 재밌어서 일부러 그러는 것이기도 했다.

제아무리 천무백이어도 저런 말을 들으면, 표정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그놈 꼴도 보기 싫소. 그냥 아기랑 잘 놀아 주라고나 전해 주시오.”

그리 말한 천무백은 주위를 슥 둘러보았다.

“…….”

주위 사람들이 아무 말도 안 하고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간혹 이랬다.

천무백과 제갈설아 둘이 대화하고 있노라면, 어쩐지 묘한 시선으로 일행들이 쳐다만 봤다.

“뭘 그리 보시오?”

“흠흠. 아니오. 그야 대주와 부대주 아닌가. 무슨 작전회의를 하나 해서 조용히 있었지.”

“곡문주, 그대는 척마대가 아니니 그럴 필요 없소.”

“지금은 뭐, 천룡검협 말 따르는 건 마찬가지 아니오?”

곡지흠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어느새 좌중엔 사천당문과 정의맹에서 복귀한 당수군과 황보숭도 있었다.

두 얼간이를 보며 천무백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복귀했냐? 거기 있는 게 편할 텐데.”

“복귀 안하면 가만히 내버려 두겠습니까?”

“귀싸대기 몇 대 좀 맞겠지. 사내자식들이 그게 무서워서 쪼르르 달려온 거야?”

“……이왕이면 임무를 위해 곧장 복귀했다고 생각해 주십시오.”

“그래. 이 얼간이들아. 그래서 대놓고 중원에서 왔소이다. 하고 티를 내면서 왔니?”

“…….”

당수군과 황보숭은 고개를 푹 숙였다.

사실 천무백은 이미 청해성이 중원과 분위기나 행색이 다르다는 걸 알고, 곡지흠의 도움을 받았다.

특유의 분장술로 나름 이쪽 문화에 맞게 잘 스며든 것이다.

한데 당수군과 황보숭이 복귀하면서 온갖 시선을 다 끌었으니, 객잔에서 조용히 숨어서 상황을 살피던 천무백으로선 말짱 도루묵이 되어 버린 셈이다.

“쯧. 별수 없지. 어차피 여기 앉아 있다고 일이 해결될 것도 없고. 당장 밤에 북검회를 친다.”

“당장 말입니까?”

“적의 숫자가 얼마나 있는지, 또 북검회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문파와 상가들이 얼마만큼 북검회와 연관이 있는지, 또 그들이 월야방의 진짜 정체를 아는지, 모든 게 불확실하오.”

곡지흠이 급히 제동을 걸었다.

그가 아는 천무백은 모든 환경을 만들어 놓고 싸운다.

이기려고 싸우는 게 아니라, 이길 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한다.

매사에 철두철미하며, 대범한 것 같으면서도 치밀하기 짝이 없다.

만일 적으로 만난다면, 곡지흠은 도저히 상대해 볼 엄두가 들지 않을 정도로 전략적 식견도 훌륭하다 못해 놀라웠다.

“여러 방면의 정보로 봤을 때, 북검회가 지금 월야방의 본진이라는 추측이 가능성이 있소. 하면 살왕이 있겠지. 살왕 뿐이겠나? 특급과 정예살수들도 즐비하겠지. 그런데 정확한 조사 없이 싸우겠다? 이건 당신이 늘 싸우는 방식과 다르오.”

“내가 싸우는 방식?”

“이기는 방법을 정확히 알잖소.”

“그거 궁금하군. 이기는 방법.”

“이길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 놓지. 적이 가장 약할 때를 노리고, 가장 치명적일 때를 노리지.”

그러자 주위의 척마대들이 살짝 생각하는 듯하다가 이내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보기에도 천무백은 대범하게 막 움직이는 것 같았지만, 이길 수밖에 없는 흐름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하지만 천무백의 표정은 이상했다.

“그게 무슨 참신한 개소리요?”

“……?”

“늘 이길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니. 내가 언제 그렇게 만들고 싸웠소?”

“……그럼 아니오?”

“그냥 싸우니 이겼소. 됐소?”

“…….”

“뭐 틀린 말은 아니겠군. 내가 나서면 이길 수밖에 없는 환경이니까.”

“…….”

이 무슨 천상천하유아독존과도 같은 말인가.

모두 뜨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어쨌건 모든 결과가 그리 말해 주지 않는가.

상승불패(常勝不敗).

늘 이겼으며, 지지 않는다.

천무백이 쌓아 온 공적이 그랬다.

소림에서부터 충격적인 등장으로 강호에 명성을 떨친 이래.

단 한 번의 패배도 그에게는 없었다.

당장 천무백의 손에 죽어 나간 혈귀곡의 면면만 봐도 놀랍다. 와중에 단 한 번의 패배도 없다는 사실이 천무백의 대단함을 새삼 다시 한번 되새기게 했다.

그러자 좌중 사이로 무언가 간질거리는 바람 한 줄기가 스쳤다.

‘이런 사람하고 같이 싸우고 있었지…….’

어떤 싸움이든, 어떤 곳이든, 어떤 적이든 패배하지 않고 이긴다.

그리고 그런 사람과 함께 싸운다.

적이 설령 살왕(殺王)이 있을지도 모르는 곳임에도, 가슴 속에서 무언가 강렬한 힘이 솟구쳤다.

천무백이 그들을 보며 말했다.

“밤에, 살수들을 잡자고.”

그러면서 천무백이 꺼낸 건 검은 야행복이었다.

“……야행복?”

“이번엔 우리가 살수가 된다.”

“살수 말입니까?”

“얼마나 재미있어? 살수를 잡는데 살수의 방식처럼 잡는 거. 쟤들로서 골 때리겠지.”

어쩐지 그렇게 말하는 천무백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살수 잡을 땐 살수가 되어야지. 지들도 자다가 칼침 맞고, 화장실에서 일 치르다가 칼침 맞고, 밥 먹다 독살 당해 보고. 어 그래 봐야 정신 차리지 않겠어?”

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차피 죽는 건데, 정신 차려서 뭐 하게?

일견 이해가 안 간다는 시선을 받으며 천무백은 여전히 웃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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