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258화 (258/318)

<검신재생 258화>

258. 급한 건 이젠 쟤네야

그는 정의맹 내부에서 제법 좋은 대우를 받았다.

북검회의 부회주.

비록 북검회가 청해의 문파였지만, 역설적으로 부회주가 대접받는 이유였다.

청해성에서까지 정의맹에 입맹을 원할 정도로 정의맹의 영향력이 대단해지는 걸 증명하는 인사였고, 곧 선전에 아주 효과적이니까.

어쩌면 제갈여강이 북검회의 입맹을 허락한 이유에도 분명 큰 비중을 차지하리라.

‘덕택에 이미 오래전에 북검회를 장악한 보람이 있군.’

부회주는 여러모로 바쁘게 움직이는 정의맹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정의맹에 들어온 북검회의 무사는 일곱 명.

대부분 정의맹에서도 제법 중요한 조직에 들어갔다.

각자 실력이 출중한 덕분이다.

덕택에 정의맹은 북검회의 평가를 상향했고, 자연히 부회주의 입김이 조금은 더 강해졌다.

부회주는 그것이 썩 마음에 들었다.

‘천무백을 잡으려고 들어왔지만, 새옹지마라. 용은 놓쳤지만, 온갖 늙고 젊은 호랑이들은 잡을 수 있겠다.’

부회주의 눈이 일순 살기를 담은 채 번뜩였다.

북검회의 부회주, 동시에 월야방의 특급살수.

북검회란 문파가 이미 20년 전에 월야방에 의해 은밀히 무너지고, 완전히 장악당한 사실은 그 누구도 몰랐으리라.

‘나만 해도 북검회의 부회주로 18년을 살았으니.’

정의맹도 만만치 않다.

과거 행적까지 정보력이 닿는 한 최대한 조사했으리라.

그러나 어쩌겠는가.

정파 요인의 암살 시기를 기나긴 시간 동안 기다린 월야방의 특급살수.

결국 저들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부회주는 본래의 정체를 드러낼 시기가 다가왔음을 느꼈다.

‘무제한 암살명령이 내려진 게 얼마만인가?’

부회주의 눈이 스산하게 번뜩였다.

명령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명료했다. 천무백이 척마대를 이끌고 월야방을 대대적으로 습격한 일대사건.

소식을 들은 부회주는 혀를 내둘렀다.

언제 월야방이 공격당했는지, 그의 기억 속에도, 역사 속에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방주의 명령이 일견 이해가 갔다.

‘무제한 살행. 무제한.’

천무백과 관련이 있는 인사라면 무제한.

“준비됐나?”

“됐습니다. 곧 제갈여강에게 보고를 해야 하는데, 모든 군사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어 아마도 독대 자리가 될 것 같습니다.”

“좋군.”

문사 행색을 한 문인을 바라본 부회주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북검회의 인사이자, 군사부에 들어간 월야방의 살수.

“나도 같이 간다. 제갈여강이 만만치 않은 인사니, 홀로 결행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제갈여강의 목을 먼저 따고, 화산의 청현진인, 종남의 전현의 목을 벤다.”

“맹주는 포기합니까?”

“늙은 호랑이는 건들지 않는다.”

“존명.”

수하는 고개를 숙이며 곧장 제갈여강의 집무실로 향했다.

부회주는 기민했다. 명석하고 남다른 판단력과 통찰력을 갖췄다.

제갈여강, 청현진인, 전현.

현재 가장 부회주가 죽일 수 있는 인물 중에서 정의맹에 가장 치명적인 상처가 될 게 틀림없다.

더구나 저 셋은 천무백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또한, 정의맹 내에서도 천무백을 가장 강력하게 지지하며, 힘을 실어 주는 인사들.

셋을 제거하면 정의맹이 혼란에 빠지는 건 물론, 천무백의 지지 세력이 급격하게 힘을 잃는다.

정의맹이라고 모두 천무백을 지지하는가?

아니다. 어느 세력이나 조직이든 하나의 목소리만 내지 않는다.

하나의 목소리만 내는 것처럼 보이는 건, 그 목소리가 워낙 커서 나머지가 묻히는 것이다.

천무백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세력들도 정의맹 내부엔 분명히 있다.

만일 저 셋을 제거하면, 그들 세력이 조금씩 힘을 얻으리라.

‘맹주가 걸리긴 하지만…….’

다만 정의맹주인 투신 곽용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마음 같아선 그도 제거하고 싶었지만 무리다.

‘적어도 수년은 준비해야 할 인사다. 과욕일 뿐이야.’

냉정하게 상황을 정리한 부회주는 곧장 움직였다.

이미 수하가 들어가 제갈여강과 대면하고 있을 터.

특급살수인 자신과 정예살수인 수하의 합공이라면 제아무리 제갈여강이라도 몇 합 버티지 못하리라.

“들어오시오, 부회주.”

이미 수하의 보고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제갈여강은 부회주를 반겼다.

“어쩐 일이시오?”

“다름이 아니라 북검회 관련하여 이야기를 드리려고 왔습니다. 총군사님. 혹여 바쁘시면 추후에 찾아뵐까요?”

“아니오, 여기 있는 곽 군사도 북검회 소속 아니오? 들어도 무방할 것 같은데.”

“맞습니다.”

부회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갈여강이 자리를 권했다.

부회주의 눈이 스산하게 번뜩였다.

‘거리낌이 없고 경계심이 없다.’

단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얼굴. 표정에는 약간의 피로함만이 있을 뿐, 경계심은 허물어져 있었다. 수많은 경험으로 보건데, 지금이 완벽한 환경이었다.

순간적으로 부회주와 수하의 눈빛이 오갔다.

“자. 그럼 들어봅…….”

제갈여강이 손에 깎지를 끼며 말하는 순간.

파아아앗!

수하가 먼저 품에서 암기를 뽑아냈다. 과연 제갈여강이었다.

황망한 상황에서도 반사적으로 손을 뻗은 것이다.

그러나 바로 옆에 있던 부회주가 날카로운 단도를 쭉 뻗었다.

맹렬한 강기가 실린 채 섬전처럼 대기를 갈라 버린 단도는 단숨에 제갈여강의 목에 박혔다.

“……!”

새빨간 선혈이 솟구쳤다. 제갈여강이 두 눈을 부릅뜨며 피가 솟구치는 제 목을 더듬거렸다.

콰당!

비틀거리며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그대로 주저앉아버린 제갈여강.

“이게 강호 아니겠소.”

부회주는 냉정하게 말하며 그대로 칼로 목을 쳤다.

서걱!

아무 말도 유언으로 남기지 못한 채 제갈여강의 목이 잘려 바닥을 데구르르 굴렀다.

수하가 그 모습을 바라보다 침착하게 말했다.

“전 전현에게 가겠습니다. 부회주님께선 청현진인에게 가시…… 부회주님?”

수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늘 냉정했던 부회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채,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던 것이다.

“왜 그러십니까?”

“……혈향이 나지 않는다.”

“네?”

“내 코가 마비된 것이더냐? 어째서 비릿한 그 혈향이 안 나느냐.”

“……!”

그제야 수하도 후각을 찌르는 혈향이 전혀 없음을 깨닫고 낯빛이 파리해졌다.

그때였다.

“제아무리 월야방의 특급살수라도, 제갈세가의 진법에 갇히면 바보가 되는군. 새삼 제갈가의 위상을 알겠소.”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들어오는 자는 다름 아닌 초로의 노인, 곽용이었다.

너무나 태연한 태도와 표정, 그리고 그 옆 제갈여강을 본 부회주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렸다.

“제갈…… 여강.”

제갈여강이 학우선을 흔들거리며 웃었다.

“내 진법 안에서 실컷 날뛰는 게 마치 한폭의 검무를 보는 거 같아 즐거웠소이다. 부회주. 아니, 월야방에서 특급이라지?”

“……어찌.”

“천룡검협이 살수들이 근처에 있을 거라고 경고했기에, 충분히 알 수 있었지. 아예 몰랐다면 모를까. 그런 경고도 있는데 어찌 가만 앉아 당하겠소?”

“천룡검협이…….”

부회주의 얼굴이 거칠게 일그러졌다.

“제갈가의 두뇌와 개방의 정보력을 무시하지 마시오. 살수가 있다고 경고하면, 아무래도 최근에 들어온 문파를 의심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제야 자신이 농락당했단 사실에 부회주는 입안이 바싹 메말랐다.

한마디로 천무백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꼴이 아니던가.

“하나 확실치는 않았지. 그대가 급히 움직이지 않았으면 몰랐을 거요.”

“급히 움직였다고?”

“만일 조용히 있었다면 의심의 눈으로 쳐다볼지언정 확신은 못 했겠지.”

그제야 부회주는 자신의 실수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본래 살행이란 건 완벽한 환경을 만드는 것.

그러기 위해서 상대의 의심을 완전하게 지워 버려야 한다.

의심을 없애기 위해 고작 몇 달이 아니라 몇 년의 시간이라도 인고한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급해졌다.

왜?

“……천무백이 월야방을 무너뜨리고 있으니까.”

그랬다.

기다리기 힘들었다. 천무백이 계속해서 월야방의 거점들을 무너뜨렸다는 소식이 연이어 들려왔다.

‘그것이 내 마음을 흔들었구나.’

완벽한 준비가 이뤄지기도 전에 마음이 급해진 것이다.

천무백이 나머지 거점을 다 파괴하기 전에, 월야방을 완전히 무너뜨리기 전에 그가 발길을 돌릴 수 있는 치명상을 입혀야 했으니까.

“설마……이것도?”

이런 것마저 예상했던 것이라면…….

부회주는 눈을 질끈 감았다. 천무백의 안마당인 하남으로 간 살수들.

그들 역시 아마도…….

“곧 저승에서 만나서 술이나 나누게.”

곽용이 냉정하게 말하며 검을 휘둘렀다. 이미 의지가 바닥난 부회주는 감히 맞설 수 없었고, 서늘해진 감각이 목을 가르는 걸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 *

“괜찮을까요?”

제갈설아의 물음에 천무백은 어깨를 으쓱였다.

“정의맹엔 투신도 있고, 화산의 수호검도 있고, 무엇보다 소저의 부친이신 총군사도 계시지 않소. 경고해드렸으니 충분히 대비했을 것이오.”

제갈설아가 고개를 저었다.

“정의맹의 어른들이라면 충분히 막아 낼 거로 생각해요. 천 공자님이 경고하셨다면 이미 대비했을 거예요. 하지만 공자님의 가족은…….”

“아, 내 가족 걱정이셨소?”

“그야 당연하잖아요. 공자님의 가족이라면 저에게도…….”

제갈설아는 그렇게 말하다가 갑자기 말끝을 흐렸다. 빤히 쳐다보는 천무백의 눈빛 때문인지, 갑자기 무언가 걸렸는지 뜨끔 하는 모습이었다.

천무백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표국엔 소저께서 직접 설치한 수가기문도가 있지 않소. 절세고수도 들어오면 뼈도 못 추릴 텐데. 특급살수 셋이 가도 뚫을 수 없소.”

“문제는 표국이라는 점이잖아요. 표사들의 표행은 계속 진행될 테고요.”

제갈설아의 걱정은 당연했다.

표국의 사정상 표행을 멈출 수는 없는 법이고, 그 외 외부활동도 존재한다.

하지만 정말 못할 것도 없다.

“아주 중요한 표행을 제외하곤 최대한 멈출 수는 있소. 손해는 막심하겠지만, 못 버틸 것도 없지.”

“멈출 수 있다구요?”

“전부는 아니오.”

그 순간, 제갈설아의 머릿속에 무언가 잡힐 것처럼 간질거렸다.

천무백의 말에는 늘 여러 뜻이 담겨 있었다.

‘전부는 아니다?’

천무백은 월야방의 행적을 미리 예견했다. 사실 그것도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정의방의 제갈여강에게 대비해 놓으란 것만으로 이미 증명된 사실이다.

하면 표국의 모든 행동도 일시적으로 멈출 수는 있을 것이다.

표국 밖으로만 나가지 않으면 수가기문도는 살수에겐 덫이나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손해가 극심해.’

하루만 멈춰도 재정에 치명적이리라.

천무백이 그걸 생각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러니 전부는 멈추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나.

하나 재정 문제가 심각하더라도, 안위를 위해서라면 전부 멈출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천무백이다.

그런 과감성을 지녔으니까.

하지만 전부는 아니라는 건…….

“설마 일부러?”

천무백이 가볍게 웃었다.

“꽁꽁 숨어 있으면 저들도 딱히 방도가 없어서 그냥 지켜만 볼 수밖에 없소. 인내심이 큰 족속이라 잘 참지. 하지만, 그 와중에 시시각각으로 월야방의 거점이 파괴되고 있단 소식이 들리고 있소.”

“그럼 점점 다급해지겠죠?”

“자신들이 처리해야 할 대상이 꽁꽁 숨어 있으니 조급함은 더해지겠지.”

“그런데 그런 와중에 일부 표행 행렬이 밖으로 나온다?”

“기회로 보일 것 같지 않소?”

“아…….”

“살수에게 가장 큰 적은 조급함이오. 그리고 계획이 대상에게 들키는 것이지.”

천무백은 씩 웃었다.

저 너머로 북검회의 넓은 장원이 보였다.

“살수가 언제쯤 공격해 오리라는 걸 알고 대비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건 엄청난 차이지.”

비단 천무백만이 움직이고 있는 건 아니다. 교문척과 남궁진천도 맹렬하게 월야방의 거점을 파괴하고 불태우고 있다.

이 소식이 시시각각으로 전해지고 있으니, 청성표국을 공격 준비를 하던 살수들은…….

“이제 급해진 건 쟤네야.”

그러면 필연적으로 조급하게 움직이리라.

그리고 그것이 함정이 될 것이다.

“함정이요?”

“허 표사도 있고, 장노도 있고, 그리고 조금 믿기 어렵지만 능허도 있잖소.”

“하지만 월야방의 살수들은…….”

“걱정하지 마시오. 객원표사도 있으니까.”

“곽 공자 말씀하시는 건가요? 물론 훌륭한 후기지수지만.”

“소저.”

“네?”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합시다.”

천무백은 의심치 않았다. 곽천후나 능허나 허성이나, 그리고 장노다.

모두 자신의 손길 아래 한층 더 발전한 이들이다.

괜히 천무백이 마음이 넓어서 그들에게 가르침과 깨우침을 전해준 건 아니다. 바로 지금처럼.

천무백이 제 울타리를 벗어나 걱정 없이 마음껏 날뛰기 위해서.

천무백의 시선이 북검회를 향했다.

“우리 할 일을 합시다. 이제.”

천무백이 검을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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