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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재생-257화 (257/318)

<검신재생 257화>

257. 이 또한 예상했다

한 씨는 당장 본진이 어디에 있는지도, 본진이 어디인지 아는 연락책도 몰랐다.

하지만 천무백은 한 씨를 잡은 걸 후회하지 않았다.

톡톡히 제 역할을 해냈기 때문이다.

유당의방을 비롯해 사천에서만 세 곳 거점을 오가며 연락을 도맡은 인사였다.

그 말은 천무백에게 나머지 두 개의 거점으로 안내할 수 있는 충실한 길잡이라는 뜻.

심지어 나머지 두 곳 중 하나는 제갈설아도 기존에 모르던 거점이었다.

“하오문하고 개방의 정보망이 합쳐졌는데도, 이렇게 모르는 거점이 있다니…….”

“천하제일살문으로 오래된 놈들이니 그리 만만하겠소.”

천무백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천무백, 제갈설아, 소항, 곡지흠. 고작 넷으로 이뤄진 소수였지만, 그만큼 더 빠르고 은밀했다. 살수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쳤다.

대비하기도 전에 들이닥쳐 거점을 파괴하고 불태웠다.

여기서 천무백의 기민한 대처가 빛을 발했다.

곡지흠이 혀를 내둘렀다.

“과감한 거야? 무모한 거야?”

솔직히 말해 곡지흠의 눈에는 무모해 보였다.

만일 한 씨가 말한 것들이 거짓말이라면?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사람을 풀고 며칠 동안 거점으로 의심되는 곳을 지켜봐야 하지 않겠는가. 실제로 거점이 맞는지 아닌지.

하지만 천무백은 몇 번 확인해 보고, 곡지흠의 분장술로 일단 어떻게든 안에 잠입하면 한 시진도 안 되어서 확신했다.

이곳이 월야방의 거점이라고.

곡지흠으로선 어처구니가 없었다. 일견 무모해 보이기까지 했다. 만일 월야방이 아니라면 큰 실수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지없이 월야방의 거점이었다.

“대체 어떻게?”

곡지흠으로선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천무백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감이오. 감.”

곡지흠으로선 알 수 없는 일이다.

거듭된 전생 속에서 수없이 살수와 싸웠던 경험이, 지금에 있어서 빛을 발하고 있다는 것을.

그저 곡지흠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천룡검협이 살수의 천적이로군.”

거점을 부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한 씨와 같은 연락책을 재빨리 찾아냈다.

“한번 잡으니 고구마 줄기 같구만…….”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나왔다. 점조직을 연결하는 연락책들은 거점마다 존재했다.

그리고 한 씨에게 사용했던 협박을 똑같이 사용했다.

연락책도 살수의 간담을 지녔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천무백의 손에 무참하게 깨져나가는 거점을 보면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으니까.

월야방의 거점들이 하나둘씩 무너지는 소문은 빠르게 저들의 귀에 들어가고 있으리라.

이젠 천무백이 오히려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상황이 어떤지 파악하려고 접근해 오는 연락책들이 생기고 있는 지경.

천무백은 그물을 쳐놓고 물고기를 잡듯 기다리면 그만이었다.

스스로 그물 속에 얽혀 왔으니까.

곡지흠의 말대로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나왔다.

하나를 잡으면 그 하나가 두셋을 불렀으니 지켜보고 있는 곡지흠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세상에, 누가 월야방을 이런 식으로 공격해?’

강호에서 살문에 원한을 불태우고 공격을 했던 역사는 분명 여럿 존재했다.

절대다수가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 같은 방식으로 살수와 싸웠단 얘기는 금시초문이었다.

효과는 확실했다.

연락책을 두들겨 패면 거점이 튀어나오고, 거점을 불태우면 새로운 연락책이 굴러 들어왔으니.

끝내 사천성을 넘어 청해성에 가까워질 때 새 연락책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북검회(北劍會)?”

제갈설아가 화들짝 놀랐다.

천무백이 고개를 갸웃했다가 곡지흠을 바라봤다. 아는대로 얘기하라는 무언의 눈빛이었다.

곡지흠이 뻘쭘한 얼굴로 턱을 긁었다.

“청해 쪽엔 하오문의 영향력이 약하다 보니…… 자세히는 모르지만 청해성의 검파로서 제법 세를 떨친다고 들었소.”

“그게 다요?”

“흠흠. 청해는 사실 중원사람들이 똑같은 중원으로 보지는 않지 않소. 워낙 거리가 멀기도 멀거니와…… 뭐 그래서 그리 아는 게 없지.”

“하긴. 청해성까지 하오문이 영향력 끼쳤으면 거지들 체면이 우습겠지.”

“흥.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소. 개방 거지들의 발은 새외까지 뻗어 있는 노릇이니.”

“점소이하고 기녀 없는 곳은 있어도 거지 없는 곳은 없으니까.”

천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애석하게도 하오문을 더 캐내도 딱히 북검회에 대한 정보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문주인 곡지흠부터가 개방을 들먹여도 순순히 인정하고 있으니까.

그러면 답은 하나다.

개방. 그러려면 정의맹을 통하면 빠르다.

슬쩍 제갈설아를 돌아보니, 이미 제갈설아는 북검회에 대해 아는 눈치였다.

“북검회에 아는 바가 있소?”

제갈설아의 얼굴이 다소 굳어졌다.

“북검회는 정의맹에 정식으로 입맹을 선언한 문파에요.”

“입맹했다고?”

천무백의 미간이 미미하게 좁혀졌다. 무심한 시선이 구석의 움츠린 사내에게 향했다.

온몸에 구타의 흔적이 뚜렷한 사내는 바로 북검회를 거론한 연락책이었다.

정의맹에 입맹한 문파의 이름을 거론한 것이라면…….

두 가지 가정을 할 수가 있다.

“하나는 의심암귀(疑心暗鬼)로 맹 내부에서 사이를 갈라치려는 속셈이겠죠.”

제갈설아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사내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서늘하다 못해 날이 서 있었다.

“의심암귀라. 이간책이라고 생각하시오?”

“정의맹은 아무 문파나 입맹을 허락하지 않아요. 살수의 위장문파였다면 진즉 알아차렸을 거예요.”

“개방의 정보망을 거쳤을 테고, 부친의 까다로운 성격상 맹 내부적으로도 철저하게 조사했겠지.”

“맞아요. 문파의 역사, 연혁, 역대 회주, 청해성 내의 입지, 강호에 떠도는 소문의 사실 여부까지. 모조리요.”

“소저께서 직접 본 적은 있소? 북검회의 인사말이오.”

“저는…… 못 봤어요. 제가 마침 공자님을 찾아 산동으로 갔을 때였고, 또 같이 하남에 있을 때니까요.”

“살수란 본인의 정체를 가장 잘 숨기는 작자들이니…….”

제갈설아가 멈칫했다가 고개를 맹렬하게 내저었다.

“맞아요. 하지만 아버지가 직접 살피고 허락했어요.”

천무백은 쓰게 웃었다. 제갈설아의 차가운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건 절대적인 신뢰였다. 그만큼 아버지인 제갈여강이 그녀에게 큰 믿음의 대상이었다.

설령 자신은 틀렸더라도 아버지는 틀리지 않았으리라는 믿음.

“만일 이간책이라면 충분히 효과적인 수예요. 어쩌면 저치가 비상하게 머리를 굴린 것일 수도 있죠. 고작 말 한마디지만…….”

“여파는 장난 아니겠지.”

“정의맹에 입맹한 문파가 알고 보니 월야방의 위장문파라는 거짓 주장이 흘러나오면, 맹 내부적으로도 혼란스럽고 시끄러워질 테니까요.”

“조사단도 파견할 테고. 조사해서 오해였음이 드러나면 다행이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어디 늘 대범할 수는 없죠. 저 먼 청해에서 정의맹에 입맹하고자 찾아온 이들인데.”

만일 오해라면?

북검회는 억울하다. 오해였음이 밝혀져도 섭섭한 감정은 분명 은연중에 남는다.

또 이런 사건이 외부로 퍼져나가면?

아직 정의맹에 입맹을 결정하지 못한 중소문파의 신뢰는 어디로 가겠는가.

의심암귀.

맹 내부에 간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생기면 정말 그리 믿게 되는 사람이 분명 생기리라.

말 한마디로 연합 자체를 뒤흔드는 고도의 계략일지도 모른다는 게 제갈설아의 생각이었다.

천무백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면 진짜 월야방의 위장 문파일 수도 있지.”

“…….”

“입맹한 지 얼마나 됐소?”

“으음, 한 달이 좀 넘었을걸요.”

“공교롭군.”

“공교롭다고요?”

제갈설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천무백이 뭔가 아는 눈치였으니까.

“딱 나와 소저가 월야방에게 습격당한 시점과 가깝지 않소?”

“아……!”

“어쩌면 그때부터 수를 쓴 거겠지. 여차하면 정의맹 내부에 살수를 잠입시켜, 죽일 기회를 엿보았을 거요.”

“설마요……!”

제갈설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동공이 일순 거세게 흔들렸다. 충분히 합당한 의심이었다.

“살수들은 어디에든 동화되오. 시장에 가면 상인이 되고, 객잔에 가면 점소이가 되고, 주방이 되며 평범한 손님이 되지.”

“…….”

“북검회로 위장하는 건 그들에게 어려운 건 아니오. 살수는 수많은 무인을 죽였지. 단순히 의뢰 보상만 받지는 않소. 죽은 무인이 남긴 무공비서 한둘쯤이야 챙기지. 같은 무공을 익힌 이들을 암살할 때가 생길 수도 있으니 무공에 대해 파훼법을 정확히 알아야 하거든.”

“그렇다면…….”

“진즉 북검회가 월야방의 손에 처리되고, 이미 북검회로 월야방이 위장한 지 오래됐을 수도 있소.”

제갈설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만일 천무백의 가정이 진실과 그리 멀지 않다면.

그래서 정의맹에 미리 잠입했다가 천무백을 죽일 기회를 노리는 건 월야방으로서 할 수 있는 수법 중 하나다.

겸사겸사 정의맹에 간자까지 심어 놓고.

“정의맹 내부에 자객이 있다는 것인데…….”

제갈설아의 말끝이 흐려졌다.

실제로 북검회의 무사들이 정의맹의 전각에 머무르고, 여러 개의 타격대로 나누어져 있으니까.

심지어 북검회에서 머리가 뛰어난 이는 군사부에 들어가기도 했다.

제갈설아의 머릿속에 아버지 곁에서 간단한 사무 노릇을 하는 북검회 출신의 문사가 떠올랐다.

아버지의 무공실력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상대는 수많은 절대고수를 죽여 온 월야방의 살수.

그들이 제갈여강의 눈마저 속이며 들어왔다면, 실력이야 두말할 것 없다.

제갈설아의 몸이 잘게 떨렸다.

그때였다.

척.

천무백의 새하얀 손이 제갈설아의 작은 어깨에 올라갔다.

순간 거짓말처럼 제갈설아의 마음이 편해졌다. 잔뜩 날이 서던 긴장감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천무백의 깊은 눈빛이 보였다.

“걱정하지 마시오.”

마치 제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사람처럼 천무백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이 세상에서 살수와 싸움 경험이 가장 많은 자는 나요.”

“……네?”

제갈설아는 일순 멍을 때렸다.

살수와의 싸움 경험이 세상에서 가장 많다고?

이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란 말인가.

옆에서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곡지흠이 재밌다는 눈빛으로 천무백을 쳐다보고 있었다. 곡지흠 뿐만이 아니었다.

“어쩜…… 역시.”

소항은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며 작게 탄식하고 있었다.

“참. 이럴 때 보면 젊음이 좋긴 좋군. 허세를 저리도 광오하게 떠는 사내는 처음이군.”

곡지흠은 흐뭇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들로서 천무백의 저 말이 제갈설아를 진정시켜주기로 인한, 나름 귀여운 허세로 보였다.

철부지 사내의 허세라고 할까.

하지만 천무백은 진심이었다.

인간이 칼을 든 이래, 청부살인은 인간사에서 땔 수 없는 역사였다.

천무백은 늘 칼을 잡았고, 수많은 은원 속을 걸었다.

그리고 많은 칼이 겨눠졌으며, 그중엔 수많은 살수의 암기도 있었다.

사람이 평생 살수와 싸웠다고 해도 고작 한 번의 인생일 뿐이다.

하지만 천무백은 무수히 많은 삶을 살았고, 그 삶에서 매번 살수와 싸웠다.

그러니 살수의 모든 행동은…….

“그 또한 예상했소.”

천무백이 하얗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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