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56화>
256. 저승차사 되는 거야? 어?
사천에서 당문의 영향력은 천무백의 기대 이상이었다.
당수군이 사천당문에 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월야방의 점조직들을 연결하는 끈들을 몇 발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사천에서만큼은 당문의 영향력이 관(官)을 능가한다더니…….”
곡지흠이 서찰을 보곤 눈을 크게 뜨며 혀를 내둘렀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천무백의 눈치를 봤다.
‘교토삼굴(狡免三窟)이라고 해야 하나. 조금 상황에 어울리는 말은 아니다만…….’
교토삼굴.
꾀 많은 토끼가 굴을 세 개나 파 놓는다는 의미.
어떤 액운이 닥치든 그걸 교묘하게 피해 낼 수 있게 굴을 세 개 준비한다.
천무백이 그랬다.
당수군을 사천당문으로 보낸 것과 동시에 곡지흠을 따로 불러서 사천 하오문의 정보망을 가동했다.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황보숭을 정의맹의 지부로 보내 개방의 정보력을 요구했다.
엄연히 개방은 정의맹의 한축.
천무백이 정의맹의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만큼, 정보를 요구할 권한이 있었다.
‘여하튼 일 하나 처리하는데도, 빈틈없이 한단 말이야.’
생각해보니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세상 어떤 강호 인사가 사천당문과 하오문, 개방의 정보를 동시에 다룰 수 있단 말인가?
흘깃 천무백을 본 곡지흠은 입안이 바짝 말랐다.
탁자 위에 올라선 세 종류의 서류.
하나는 사천당문, 하나는 하오문, 하나는 개방에서 온 내용이다.
각자 유당의방과 거래하던 상인, 약초를 납품하던 약초꾼, 밥하는 식모, 청소하는 하인들까지…….
유당의방과 접점이 있었던 모든 사람의 신상명세가 가득 담겨 있었다.
“확실히 당문에서 온 정보가 더 정확하고 세심하긴 하네요.”
“독을 쓰는 당문에게 있어 고작 종이 한 장 차이인 의방은 아무래도 경계 대상이었을 테니까.”
제갈설아의 말에 천무백이 그리 대답했다.
하오문과 개방이 조사한 내용도 알찼지만, 당문이 보내온 정보에는 비교할 수 없었다.
단순한 신상명세뿐만 아니라 용모파기까지 곁들여 있었으니까.
거기에 월야방의 점조직을 이어 주는 끈으로 의심되는 몇몇 이들을 자세하게 분석한 내용까지 있었다.
여기서 곡지흠이 놀란 건 천무백의 다음 행동이었다.
‘단순히 정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정보를 두고 판단하고 고민하고 고찰한 뒤에 결론을 낸다.’
모든 정보를 통합해서 분석하고, 판단하는 통찰력이 엿보였다.
지금 당장 천무백이 하는 방법이 그렇다.
사천당문, 하오문, 개방.
이 세 단체의 정보를 한데 모아 그중에서 알짜배기만 뽑아내고 있었다.
옆에서 제갈설아가 적절이 도와주고 있지만, 사실상 천무백의 수완이었다.
‘나 대신 하오문주가 됐어도 정보단체로선 개방을 뛰어넘을지도 모르겠어.’
지켜보던 곡지흠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으니 오죽하겠는가.
시간조차 많이 걸리지 않았다.
무려 사천에서의 당문의 정보력, 중원보다 부족하다지만 하오문과 개방의 정보력.
그 세 정보력을 통합하고 분석해서 핵심만 간추렸다.
“이놈, 이놈, 이놈. 딱 세 놈만 잡자고.”
천무백이 손가락으로 세 명의 용모파기를 딱 짚었다.
“살생부로군.”
곡지흠이 퍽 농을 던졌지만, 천무백은 어깨를 으쓱였다.
“저승차사가 되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천무백은 진심이었다.
* * *
“여. 한 씨. 이젠 약초를 어디에 대보려고 그래? 유당의방이 완전히 날라갔다면서?”
약초꾼 종씨는 객잔에서 한 씨를 보고 어깨를 두들기며 반가운 체했다.
사실 진정 반가워서 인사하는 게 아니라는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잔뜩 입에 걸린 웃음은 상대가 처한 곤경을 생각하면 지을 수 있는 것조차 아니었으니까.
그럴 만했다.
사천에서 유당의방에 약초를 대거 납품하는 한씨는 온갖 질투의 대상이었다.
유당의방에 줄만 잘 대도 밥줄 걱정은 안 한다는 게, 사천 약초꾼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도는 이야기.
한데 한 씨는 무슨 재주인지 유당의방과 거래를 지속해왔다.
얼마나 부러웠던가. 몇 번이고 줄을 대달라는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할 땐 화가 나기도 했다.
한데 그리도 대단했던 유당의방이 하루아침에 무림인들의 싸움으로 사라져버리지 않았던가.
그러니 유당의방과 거래를 트던 한 씨는 하루아침에 망한 거나 다름없었다.
그게 퍽 즐거웠던 종씨는 한 씨를 잔뜩 골려 줄 생각이었다.
“응? 한 씨. 정 안되면 내가 줄 대는 의방에 면식 좀 트여줄까? 뭐 어려운 건 아닌데…….”
“닥쳐라.”
“……!”
허나 고개를 돌린 한 씨의 얼굴을 본 순간 종 씨는 말 그대로 얼어붙었다.
사람 좋았던 한 씨의 얼굴이 마치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그만큼 지금 일이 화가 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건 뭔가 달랐다.
종씨의 몸이 덜덜덜 떨렸다.
‘눈빛이 무슨…….’
약초꾼은 담이 세다. 산을 타고 숲을 헤쳐야 한다. 산적을 만나고 맹수를 만나는 건 예삿일이다. 그러니 배포 하나는 두둑하다.
그런데 종씨는 지금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포악함이 가득 담긴 눈빛 하나에 온몸이 떨렸다.
산적? 맹수? 그 까짓것들하고 비교도 안 되는 눈빛이었다.
바닥에 발이 박힌 듯 땀만 뻘뻘 흘릴 뿐, 움직일 수도 없었다.
기세에 잠식당한 것이다.
한 씨의 입술이 뒤틀렸다.
“꺼져.”
“……으, 으아악.”
종씨는 헐레벌떡 객잔에서 도망쳤다.
“같잖은 것들까지 기분을 잡치게 하는군.”
홀로 남은 한 씨는 이를 으득으득 갈았다.
그때였다.
“합석해도 되겠소?”
“……?”
별안간 들려오는 목소리에 한 씨는 인상을 찌푸렸다.
슬쩍 보니 검을 차고 있는 평범한 청년이었다. 아까부터 객잔 한구석에 있던 사람이었는데…….
한 씨가 가시를 세웠다.
“자리 많은데 왜 합석이 필요하오?”
“보아하니 약초꾼 같아서 말이오. 약초꾼이 사천의 산길이란 길은 다 안다 하니, 내 개인적으로 길잡이 하나 부탁드리려고 하외다.”
“길잡이라? 일 없소. 다른 사람 찾아보시오.”
“아니, 그대여야만 하오. 한 씨.”
“…….”
그러면서 청년은 맞은편에 턱 하니 앉았다.
한 씨의 얼굴에 일순 긴장감이 흘렀다.
그의 손이 탁자 밑에서 은밀하게 움직였다.
동시에 입이 열렸다.
“길잡이라. 셈은 얼마나 줄 셈인가? 또 어디로 가는데 그러시오?”
“셈은 섭섭지 않게 줄 터이고, 가는 곳은…….”
그때였다.
말을 시켜놓고 동시에 한 씨의 발이 탁자 밑에서 벼락처럼 청년의 정강이를 찍었다.
꽈앙!
“……헙!”
하나 충격을 받은 건 한 씨였다.
마치 강철을 때린 듯한 강한 충격에 발목이 아작나는 고통이었다. 하지만 한 씨는 독심(毒心)을 품은 지독한 남자다.
멈추지 않고 양손을 펼치며 뻗었다.
청년 역시 빙그레 웃으며 양손을 뻗어왔다.
두 사람의 손바닥이 허공에서 부딪치며 딱 달라붙었다.
콰아아앙!
이것이 사람들 몸에서 나올 수 있는 소리가 맞을까.
한차례 장력을 교환하자, 한 씨는 손을 뗄 수 없었다.
‘떼는 순간 죽는다!’
단 한 번 장력교환으로 알았다.
가슴이 들썩였다.
숨을 쉴 때마다 폐를 주먹으로 꽉 쥐어짜듯이 고통스러웠다.
상대의 장력이 단숨에 밀고 들어와 가슴을 두드렸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를 크게 뜨며, 한 씨가 씹어 삼키듯 말했다.
“누…… 구냐!”
“거, 길잡이를 찾는다니까. 원래 사천 약초꾼은 이렇게 기가 센가. 허참.”
청년은 빙글빙글 웃었다.
그제야 한 씨는 체감하고 탄식했다.
자신은 모든 전력을 다해서 상대의 장력을 밀어내려는데 급급한데, 상대는 웃으면서 장력을 겨룬다.
이건 숫제 봐주기다.
당장이라도 자신의 심장을 내공만으로 부서뜨릴 실력자다.
그때서야 한 씨의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렸다.
‘설마?’
갑자기 자신을 찾는 정체불명의 청년고수.
그리고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린 월야방의 거점, 유당의방.
한 씨의 눈이 찢어질 듯이 부릅떠졌다.
“너로구나! 네가, 네가……!”
“거, 길잡이 할 거요 말 거요?”
“길잡이라니, 대체 무슨!”
“당신들 본진으로 데려다줄 길잡이. 그도 아니면 본진을 아는 당신 같은 거점을 연결해 주는 ‘끈’으로 가는 길을 알려 주는 길잡이.”
“……!”
“선택하시오. 길잡이가 되던가, 아니면 길잡이가 되던가.”
한 씨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대체 이게 무슨 선택지란 말인가?
“이 얼마나 관대하오. 죽이겠다는 선택지가 없고, 그저 길잡이만 하라는 선택지만 있으니. 나는 관대하니, 선택하시오.”
한 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다면?”
“그러면 저승차사 만나는 거지. 선택 안 해? 그럼 그때부터 어? 웃는 얼굴 말고 저승차사 되는 거야. 알겠어?”
한 씨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어금니에 사이에 있던 독단을 씹었다.
“허……?”
순간 꺼무죽죽해지는 얼굴을 보며 청년이 혀를 찼다.
한 씨가 퍼져나가는 극독을 느끼며 이죽였다.
“좆까. 병신아.”
한 씨는 저 당당한 얼굴이 일그러지는 광경을 기대하며 노려봤다.
하나 청년은 혀를 찰지언정 당황하진 않았다.
오히려 안쓰러운 기색으로 말했다.
“쯧. 먹을 게 아무리 없어도 독을 먹으면 쓰나. 걱정 마시오. 내 별호 중 하나가 하남신의 천무백이오.”
“천무백……!”
“그러니 이 독 따위야.”
천무백의 장력이 거침없이 밀고 들어왔다. 독이 퍼지는 순간인지라, 한 씨는 더 막지 못하고 그대로 열어 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기경팔맥에 밀려오는 낯선 기운.
순백의 기운은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극독을 서서히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 미친……!’
한 씨가 기함했다.
내기로써 독을 다스리는 것 자체가 상승의 공부다.
하물며 무인들을 대상으로 쓰는 극독은 끊임없이 개량되어 왔다.
웬만한 내기로 밀어낼 수 없는 독기를 품게 된 것이다.
한 씨가 씹은 독단이 그렇다.
솔직히 한 씨가 아무리 용을 써도 내기로 다스릴 수 없다. 그러니까 자결용으로 쓰는 독단이지 않겠는가.
죽음의 순간에 마음이 바뀌어 독을 몰아낼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타인의 몸에 스며든 독기를 내기로 밀어낸다고?
대체 이건 어느 정도의 수준이란 말인가!
천무백이다. 상대는 천무백이다.
유당의방을 무너뜨린 괴물이다. 처음으로 특급 살수 두 명에 정예살수들이 우르르 몰려갔지만 모조리 죽인 괴물이다.
그제야 한 씨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거무죽죽해지던 낯빛은 천무백이 다 극독을 밀어내 버려서 정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천무백이 씩 웃으며 순식간에 한 씨의 혈도를 짚었다.
퍼퍼퍽!
“……!”
“선택지는 그대로야. 길잡이가 되던가, 또는 성심성의껏 길잡이를 하던가. 그런데 말로만 선택지를 제시하니, 잘 모르는 것 같아서. 설명이 부족한 것 같더군.”
천무백이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했다.
“우선 독은 완전히 밀어내지 않았어. 심장 부근에 그대로 봉해 놨지.”
“……!”
“그리고 독을 조금씩 풀 거야. 아아, 걱정하지는 마. 죽이진 않아. 선택지에 죽인다는 건 없잖아? 얼마나 관대한 처사야. 그치? 다만 고통스러울 거야. 죽진 않게 내가 내기를 밀어내겠지만, 서서히 온몸에 퍼지는 건 어쩔 수 없잖아. 그치?”
“…….”
“독이 서서히 퍼지면 팔 다리 정도는 잘라내야겠지. 걱정마. 입만 살아 있으면 안내하는 데는 문제없잖아?”
“……!”
“그러니까 말이다. 네 선택은 가장 빠르게 확실한 길로, 본진이 있는 데로 안내해. 그래야 고통도 덜해. 그리고 팔다리도 멀쩡해. 자. 선택해. 한 씨.”
그저 맑은 눈동자였지만, 한 씨는 지독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월야방의 살수로써 한 번도 느끼지 못한 지독한 공포.
제아무리 살수라도, 독심을 품은 사내라도, 결국 인간이다.
그리고 천무백은, 인간의 수많은 삶을 버텨 온 초월자였다.
“……길잡이가 되겠소.”
한 씨는 굴복했다.
천무백은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