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55화>
255. 천무백의 방식, 살수의 방식
천무백은 가만히 문지기를 바라봤다.
월야방의 특급살수.
이자가 바로 특급살수다. 그가 말한 대로 의방 내에 있던 살수는 스물한 명.
여기 문지기마저 죽이면 시체는 딱 스물한 구가 나온다.
거짓말은 아니다.
“문지기야. 그래서 네가 죽을 확률은 오 할 아래로 내려갔다.”
“…….”
“나는 관대하고 여기 제갈소저가 말했듯 좋은 사람이니 네가 죽을 확률을 낮추는 방법을 알려 주겠다. 말해 봐. 어째서 여기엔 살수가 이것밖에 없지? 그리고 그 잘난 살왕(殺王)의 면판은 왜 보이지도 않냐?”
살수 스물한 명.
그중 특급살수는 여기 문지기 하나.
유당의방의 거대한 규모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인원.
적어도 이 정도 장원이라면 못해도 백여 명이 머무를 만한 곳이다.
그것도 최소치다. 건물을 관리하고, 청소하고, 음식하는 잡다한 인원까지 생각하면 더 늘어난다.
문제는 이게 전부다.
살수가 아닌 이들이 단 하나도 없다.
천무백이 이곳에 잠입한 순간, 곧장 계획을 바꿔 문지기에게 시비를 건 이유였다.
‘기척이 너무 적었어.’
살수가 아무리 기척을 숨기는데 능해도 천무백의 기감에 잡히는 것이 극히 적었다.
이상함을 느낀 천무백은 곧장 칼을 뽑았고 뒤집었다.
“여기가 본진이 아니구나. 문지기야.”
“본진? 그것도 한 달 전 이야기인데, 소식이 늦구나.”
문지기가 이죽이자 옆에 있던 제갈설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정보가 틀린 것이다.
천무백은 귀찮다는 듯이 귀를 후볐다.
“그거 안됐군.”
“안됐지. 이젠 네놈은 잘 때도, 먹을 때도, 쉴 때도, 똥오줌을 눌 때도 긴장 바짝 하고 살아야 할 거다. 아주 안됐지. 월야방이 언제든지 네놈의 뒤를 노릴 테니까.”
“아니, 그게 안 된 게 아니라 월야방이 안됐다고.”
“뭐?”
“사실 본진만 털면 와해해서 세력이 축소되거나 찢어지거나 분열해서 저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느라 강호일에 신경도 못 쓸 줄 알았거든. 그럼 내버려 두려고 했지. 내가 살인귀도 아니고, 그 많은 살수를 왜 다 죽이겠어?”
말 속에 숨겨진 함의를 깨달은 문지기의 몸이 빳빳해졌다.
“그거 안됐어. 정말로. 이렇게 되면 본진 찾겠다고 거점이란 거점은 깡그리 다 털어서 태워야 하잖아. 쯧쯧.”
문지기는 이를 악물었다.
거점을 모조리 파괴하고 전부를 죽이겠다는 실로 광오한 말.
하지만 지금껏 보여 준 무력에 문지기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그리될 수도 있다는 걸.
차라리 여기가 본진이어야 했다.
살왕이 이곳에 있어야 했다.
그래야 이 미친놈의 살업을 여기서 막고, 월야방은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자 말해라. 네가 동료의식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본진이 어디 있는지 말해라, 문지기야. 그것이 네가 살고 네 동료들이 산다. 너도 엿 같잖아. 자고로 본진에서 호의호식하는 놈들은 전선에서 구르는 놈의 마음을 모르는 법이지. 본진 놈만 죽이고 월야방을 살려라, 문지기야. 나는 관대하다.”
“나도 모른다.”
천무백은 가만히 문지기의 눈을 들여다 봤다.
문지기는 순간 온몸의 힘이 쭉 빠져나가는 무기력함을 느꼈다.
어찌나 깊은지 마주하는 순간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천무백은 혀를 찼다.
“애석하다. 문지기야. 진짜 모르는구나. 만일 그 눈빛이 연기라면, 넌 특급살수가 아니라 살왕이 되어야 했을 것이다.”
천무백은 그리 말하고 곧장 검을 휘둘렀다.
섬전과도 같은 빛이 공간을 가르고, 새빨간 선혈이 솟구쳤다.
찰나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문지기의 머리가 뚝 떨어졌다.
사람이 죽는 광경이지만, 흠칫 몸을 떠는 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경탄하기까지 했다.
“천룡검협의 칼날은 시간이 갈수록 깊어지고 날카로워지는군. 막아 낼 엄두가 안 나.”
곡지흠이 조용히 중얼거렸지만, 좌중의 무사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천무백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꽤 바빠질 것 같다.”
“……대주님, 죄송합니다. 제가 세운 계획과 정보가 달랐어요.”
“아니오, 아무리 하오문과 개방의 정보력이라고 한들, 그리 쉽게 찾을 수 있었으리라곤 생각 안 했지. 본진이든 아니든 이렇게 거점이라도 잡은 게 잘된 일이오.”
천무백이 답지 않게 제갈설아를 다독이자 주위의 분위기가 묘해졌다.
황보숭이 흘깃 당수군하고 소항과 시선을 교환했다.
“원래 저렇게 자상한 양반이었나?”
“수련할 때 실수 한번 하면 폭언으로 머릿속을 헤집어 놓고, 폭력으로 몸을 다스리던 사람이……”
“사람 차별 너무 심한데.”
“시끄러워. 다 들린다. 얼간이들아.”
주위를 조용히 시킨 천무백은 곧장 계획을 밝혔다.
“얼간아.”
“네.”
“네.”
순간 당수군과 황보숭이 동시에 대답했다. 주위에서 피식거리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언제는 얼간이라고 부르면 죽일 것처럼 달려들더니, 이제는 둘이 동시에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는 모습이라니.
천무백은 그 중 황보숭을 가리켰다.
“당장 정의맹과 연락을 통해서 남궁 놈이나 교문놈 상황 알아보고 정보 공유해.”
“알겠습니다.”
“당 가야.”
“네.”
“본가에 좀 다녀와라.”
“예?”
“사천에 유당의방만 있을 리가 없을 것이다. 큰 점이 하나 있으면, 그 근방으로 연관된 아주 작은 조직이 더 있을 거야. 하도 작아서 하오문이나 개방의 정보망에 잡히지도 않는 놈들.”
“정보망에도 잡히지 않는 놈들이 있단 말입니까?”
“당장 의방에 약재를 공급하는 약초꾼들, 나무를 공급하는 나무꾼들, 식량을 공급하는 상인놈들 이놈들이 다 평범하겠느냐. 아무리 점조직이라도, 점과 점을 연결하는 끈이 있는 법. 이들을 족친다.”
“아…….”
“이곳은 사천이고, 당문의 영향력이라면 사천 내에서 개방과 하오문이 감히 범접 못 하니. 당수군아. 네가 해야 할 일이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나와 같이 일단 파악된 거점을 친다.”
“저와 당수군이 빠져도 괜찮겠습니까?”
황보숭이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끼어들자 천무백이 이상한 놈 쳐다보듯 바라봤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가.
“살수랑 싸우다가 머리 다쳤니?”
“아니…… 그건 아닌데요.”
“너는 정의맹하고 연락을 통한 뒤에 당문으로 가 있어. 곧장 정리하고 갈 테니까.”
“알겠습니다.”
“소수 정예로 간다. 나, 여기 제갈 소저, 소항, 그리고 곡지흠. 넷이서 급습해서 태우고 불태우고 죽인다.”
“으음? 나도 말이오?”
곡지흠이 뻘쭘한 목소리로 자신을 가리켰다. 천무백이 뚱한 얼굴로 반문했다.
“설마 복건에서 여기까지 와 놓고 분장만 하고 가려고 했소?”
“…….”
“설마 천하의 하오문주가 고작 분장하나 한다고 여기까지 행차하신 것이오? 본인의 절세무공이 분장술법이오?”
“……크흠. 당연히 도와드려야지. 천룡검협이 살수들과 싸우는데, 강호의 협객으로서 가만있을 도리가 없지!”
“신속하게 움직이는 데 중점을 둡시다. 아, 전부 죽이지는 말고 가장 약한 놈 한두 명쯤은 도망치게 냅두자고.”
“도망치는 걸 추적하려고요?”
제갈설아의 질문에 천무백은 고개를 저었다.
“도망치는 놈들은 잡졸일 터이니, 다른 거점이 어디 있는지 모를 거요.”
“그러면 왜……?”
“소문이 나겠지.”
“소문이요?”
“철벽과도 같았고, 누구도 보복을 무서워해 공격할 엄두를 내지도 못했던 거점들이 부서지고 파괴되는 걸 직접 목격한 생존자가 소문을 퍼뜨릴 거요. 다른 거점의 위치는 모르더라도, 그 거점과 거점을 연결하는 끈이 무슨 일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접근할 터이니.”
“아…….”
계속해서 거점의 피해가 늘어나고, 공포에 찬 소문이 퍼져 나가 살수들이 동요한다면.
천무백이 본진을 찾는 것보다 아마 참지 못하고 살왕이 먼저 튀어나올 확률이 더 높아질 것이다.
살왕이 죽고, 특급살수들이 전부 죽어 버린다면?
구심점을 잃은 월야방은 쪼개지는 법. 각자도생하게 되니 한동안 혼란스러울 것이고, 이어질 혈귀곡과의 싸움에 관여할 수 없으리라.
‘그리고…… 이왕이면 더 큰 물고기도 잡아야지.’
천무백은 굳이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하지 않았다.
살왕(殺王).
살수들의 최정점에게만 붙여지는 별호를 가진 이를 잡는 것도 일대사건이다. 그만한 거물이 어디 쉽게 당하겠는가.
하지만 천무백의 진짜 목표는 아니다.
‘고작 살왕 따위.’
기껏해야 어둠 속에서 암습을 노리는 살수 따위.
‘애써 자신의 수중에 들어온 월야방이 완전히 와해될 위기에 처했는데, 과연 혈귀곡이 가만히 있을까?’
천무백의 입가에 미약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혈귀곡 내부에 잠입한 검종의 마인들로부터 전해져 오는 소식에, 천무백은 혈귀곡의 내부 사정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혈귀곡의 지배자이자, 일성(一星).
‘혈불이여. 이 가짜 땡중아. 얼마나 실력이 늘었는지 내가 한번 확인해 보겠다.’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
* * *
암(暗)중의 흑의인들이 그림자 속에 스며든 채 말했다.
“사천에서는 유당의방이 당했습니다. 감숙성에서는 유천표국, 해내상단, 일향루가 깨져나갔습니다.”
“감숙성의 세 곳이 전부다?”
반대편에서 놀라운 음성이 튀어나오자, 보고하던 흑의인은 침음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숙으로 간 자가 남궁진천입니다.”
“그럼 당할 만하군.”
“귀주성의 육화원도 당했습니다.”
“그쪽은 누군데?”
“교문세가의 교문척이 이끄는 애송이들입니다.”
“교문세가의 애송이가 그 정도 실력자였나?”
“정의맹의 정예무사들이 뒤를 받쳐 주고 있습니다.”
“정의맹이 대놓고 나섰군.”
대답하던 흑의인은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돌렸다.
상석에 앉은 채 침묵을 지키는 노인에게 시선이 닿았다.
이곳에 모인 흑의인들 전부가 범상치 않은 기세를 풍기는데, 노인만은 아무런 기세가 느껴지지 않았다.
어둠 속에 묻힌 것처럼 존재감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노인의 파리한 입술이 열리는 순간, 장내는 노인의 기세에 잠식당했다.
“천룡검협이란 애송이가 단단히 미쳤구나. 정의맹을 등에 업고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고 있어.”
느릿한 목소리는 그저 한탄을 하는 듯 평범한 노인네의 그것이었다.
그러나 흑의인들은 온몸이 저릿해지며 빳빳해졌다.
흑의인이 조심스레 반박했다.
“천룡검협은 강합니다. 일전에 혈귀곡의 의뢰도 실패했고, 아예 역공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의 손에 죽어 간 특급이 셋입니다.”
“셋 모두 정면대결이었다.”
“네?”
“살수의 법칙이다. 은신 중에 발각됐으면, 싸움을 시도하는 게 아니라 도주해야 한다. 은신을 눈치챘을 정도면 이미 살수의 실력을 월등히 능가한다는 것이니까. 그런데도 정면 승부를 시도한 것이니, 이 얼마나 멍청한 것이더냐.”
“…….”
틀린 말은 아니다. 살수는 무인과 정면대결을 펼치지 않는다. 오로지 기나 긴 은신 끝에 결정적인 순간에 암살한다.
만일 은신이 발각되면 도주하여 추후를 기약한다. 살수의 법칙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일은 다르다.
‘처음 혈귀곡 의뢰 땐 살수의 숫자가 엄청났다. 특급 둘에 정예들만 스무 명이었어. 설령 발각되어도, 나였어도 한번 모험을 시도했을 것이다.’
실제로 당시 천룡검협에 대한 월야방 내부 평가도, 분명 고평가했지만 죽일 수 있다는 것이 정론이었으니까.
그리고 이어진 유당의방 사건은 아예 국면이 다르다. 천무백이 월야방의 거점임을 알고 대놓고 쳐들어온 것이니까.
“놈을 잡으려면 살수의 방식으로 잡아야 한다. 어둠 속에서 칼로 목에 구멍을 내야하지. 그러면 되는 것이다.”
노인은 그리 말하며 허리를 굽혔다.
“지금부터…… 우리는 살수의 방식으로 대응한다.”
노인의 눈이 살벌하게 번뜩였다.
살왕의 명령이 곧 월야방에 소속된 모든 살수에게 전해졌다.
“천룡검협과 관련된 모든 인사에 대한 무제한 암살을 시행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