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54화>
254. 너 살수냐
문지기는 단숨에 벼락처럼 뒤로 몸을 뺐다.
천무백의 손에서 쏟아지는 어마어마한 빙장이 문지기가 있던 장소를 한차례 휩쓸었다.
잘 다져진 돌바닥이 쩍쩍 얼어붙었다.
“……!”
문지기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갑자기 이 무슨……!’
의문을 입 밖으로 토하기도 전에, 천무백의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여기에 몇 명이나 있는지 말해. 여기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도. 거짓말은 하지 마. 참고로 말하자면 나 거짓말 무지무지 싫어해. 거짓말하는 놈만 보면 막 화가 나더라고.”
문지기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눈을 치켜떴다.
“네놈이 지금 여길 들어오면서 한 것도 거짓말 아니더냐! 유 씨 가문의 자제라는 것도, 저 계집이 금뇌상단의 막내딸이라는 것도 다 거짓이렸다!”
“내가 하는 건 나쁜 거짓말이 아니야. 살수를 잡기 위한 고육지책이지. 그래, 착한 거짓말이다. 하지만 네가 하는 거짓말은 나쁜 거짓말이다. 살수가 하는 거짓말은 진짜 나쁜 거짓말이지. 그래서 넌 거짓말을 하면 반드시 죽일 거다.”
“…….”
이 무슨 정파가 하면 협행이고, 사파가 하면 악행이라는 해괴한 논리가 아닌가.
문지기는 품에서 암기를 꺼낸 채 천무백과 대치했다.
아마 이 소란을 들은 전각 내의 살수들이 곧 움직이리라.
그래서 문지기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굳이 들어오자마자 소란을 일으켜?
지금 거짓말을 하면서 들어온 건, 그 허실을 확인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미리 잠입해서 상황을 확인하고, 추후에 공격을 하든가 말든가 결정하는 게 당연한 방향이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소란을 일으키면, 오히려 이들은 장원에 갇힌 형상이 된다.
높은 담장은 단숨에 넘기 어렵고, 온갖 살수들의 공격 속에서 어찌 빠져 나가겠는가.
그런데도 마각(馬脚)을 드러내며 소란을 일으킨 이유는…….
문지기는 문득 천무백의 얼굴을 쳐다봤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혹시나 하는 불길함이 머리를 치켜들었다.
‘일부러 다 도망치지 못하게, 대놓고 잡으라고 소란을 일으킨 건가?’
설마.
혼자서 월야방의 살수들을 상대하겠다고?
“미친놈.”
절로 튀어 나온 욕설에 천무백이 순간 미간을 좁혔다.
“나는 미친놈이 아니다. 말했지. 거짓말하는 놈 싫어한다고. 넌 방금 내가 미친놈이라는 거짓말을 했다. 그러니 너는 오 할의 확률로 죽게 될 것이다.”
천무백의 화법에 문지기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 무슨 해괴한 논리며, 또 죽을 확률이 오 할이란 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월야방에 소속된 살수들의 숫자와 용모파기를 주면 확률은 삼 할 이하로 떨어진다. 내가 용서할 마음이 칠 할이 된다는 거지.”
“정녕 미친놈이로구나.”
“방금 죽을 확률이 육 할로 올랐다. 자업자득이다.”
문지기는 참지 못하고 암기를 뿌렸다.
햇빛에 날카로운 빛을 번뜩이는 암기들이 맹렬하게 쏟아졌다.
끝에 독이 묻었는지 번들거렸다.
하나 암기들이 향한 건 천무백이 아니었다.
천무백을 따라온 일행들이었다.
제갈설아, 곡지흠, 황보숭, 소항, 당수군.
그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천무백에겐 내공 한줌 느껴지지 않았지만 방금 어마어마한 빙장을 썼다.
그 말인즉슨 자신이 내기를 읽을 수조차 없는 막강한 고수라는 점이다.
나머지는 내기의 흐름이 분명했다.
다들 아무리 봐도 최대 일류였다. 크게 위협이 될 수준은 아니지만, 천무백을 처리하는 도중에 끼어들면 귀찮아질 가능성은 크다.
그러니 일단 우선 손발을 잘라 놓고 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다음에 몰려오는 살수들과 손발을 합쳐 천무백을 친다.
하지만 그의 오차가 없으리라 여겼던 계획은 이어지는 광경에 처참하게 부서졌다.
채채채채챙!
“……!”
문지기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전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암기를 쳐 냈다. 심지어 한두 명은 쳐 낸 암기를 내공으로 방향을 바꿔 문지기에게 되돌리기까지 했다.
상당한 수준의 내기 수발이었다.
“이 무슨, 내공을 숨겼단 말이냐?”
“숨긴 게 아니라 금제 당한거지!”
황보숭이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금제? 이 미친놈…… 여길 잠입하려고 무인이 스스로 내공을 금제해? 이런 미친놈들…….”
미친놈이 맞다. 월야방이란 걸 알고 온 놈들이 순순히 내공을 금제해?
만일 중간에 들켜서 공격당한다면?
금제한 내공을 풀 틈도 없이 당할 텐데?
애당초 그런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았단 뜻이다. 그리고 대문을 넘어 들어온 순간부터 은밀하게 금제를 풀었다는 것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순간 머릿속에 스쳐 가는 생각에 문지기의 매서운 눈빛이 천무백에게 닿았다.
“일부러 이상한 말 지껄이면서 내 이목을 흔들어놓았구나!”
다짜고짜 몇 명이나 있는지 물어보고, 말투도 바뀌었다.
그 모든 행동이 문지기의 신경을 살살 긁었다.
불길함을 드러나게 했고, 신경 쓰게 만들었다. 그사이에 다른 이들은 모두 금제를 풀었다.
새삼 일련의 행동이 모두 계산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문지기는 순간 한 단어가 떠올랐다.
‘사냥.’
사냥이다.
그것도 그냥 사냥이 아니다.
‘모습을 숨겼다. 정체를 감췄다. 그리고 의심할 수 없게 상황을 만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흐름 속에 철저하게 꾸며진 모습을 드러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연기해 냈다.
그리고 상황을 몰아갔다.
모든 것이 계산된 과정이었고, 결과로 드러났다.
어쩌면 여기서 소란을 일으켜 살수들을 불러 모으는 것도 계산이리라.
‘이건 마치…….’
너무나 잘 짜인 살행 방법.
“너 살수냐?”
천무백이 미간을 확 좁혔다.
“거짓말은 아니지만 네가 죽을 확률은 팔 할로 올라갔다. 나는 살수가 싫거든.”
* * *
문지기는 곧장 암기를 마구 뿌렸다.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당장 떠오르는 건 여기서 이들을 죽여야 한다는 것.
하지만 혼자서는 무리다.
그는 선택했다.
‘시간을 끈다.’
일이 벌어진 걸 깨달은 살수들이 우르르 몰려오리라.
그때까지면 버티면 된다.
하지만 그것이 말도 안 되는 난이도라는 사실을 문지기는 깨달았다.
후웅!
곡지흠의 커다란 대도가 스쳐 가자 문지기는 발이 꼬였다.
황급히 몸을 굴렀지만, 그다음에 천무백의 칼날이 파고들었다.
서걱!
“꺽!”
왼쪽 팔이 어깨에서 잘려나가 바닥에 뚝 떨어졌다.
곧장 다음 공격이 이어졌다면 무조건 죽은 목숨이었으리라.
하지만 천무백은 칼을 거둬들이며 검면을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말해. 여기뿐 아니라 월야방 소속된 살수가 몇 명인지.”
“그게 지금 상황에서 중요한가? 날 죽일 기회를 저버릴 정도로?”
그 사이 문지기는 급히 물러나 혈도를 짚어 지혈했다.
그리곤 품에서 다시 암기를 꺼냈다.
천무백이 나직이 감탄했다.
“이야. 무슨 주머니가 무한정으로 다 들어가는 주머니냐? 아주 이것저것 다 튀어나오네.”
“닥쳐!”
“그리고 죽일 기회? 그걸 왜 놓쳐. 기회는 찾아오는 게 아니라 만드는 법인데.”
문지기의 얼굴빛이 파리해졌다.
언제든지 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가 너무 뚜렷하지 않은가.
천무백은 검면을 톡톡 두들겼다.
“대답해. 거짓말할 생각하지 말고. 몇 명이야? 혹시나 하는 건데, 거짓말하면 다 아는 수가 있어요.”
“대체 그게 이 상황에서 왜 중요하단 말이더냐! 어차피 죽이러 와 놓고!”
천무백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중요하지. 다 죽였는지 확인하려면 숫자하고 시체가 맞는지 확인해야 하지 않겠어?”
문지기의 낯빛이 파리해졌다.
그때였다.
천무백이 별안간 검을 휙 휘둘렀다.
까가가가강!
화려한 불똥이 시퍼렇게 튀었다.
동시에 천무백은 호신강기를 일으켰다.
그간 별로 사용할 필요도 없던 귀곡광애가 새하얀 빛을 드러내며 번졌다.
“맙소사……!”
누군가 나직이 탄식을 터뜨렸다. 새하얀 빛을 전신에서 흘러나오며 후광처럼 비쳐지는 광경은 단숨에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하나 그 충격은 천무백을 기습한 살수들의 얼굴에서 더 크게 두드러졌다.
파아아아앗.
쏟아지는 암기, 검기, 검강, 독침, 비수, 장법, 각법, 탄지공…… 모든 것들이 새하얀 빛무리에 삼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천무백에게 쏟아진 공격만 그 정도였고, 그 말은 곧 천무백을 공격했던 살수의 숫자가 무려 아홉 명이 넘는다는 사실이었다.
문지기는 그야말로 입이 쩍 벌어졌다.
순간적으로 쏟아진 모든 기습을 무(無)로 되돌리는 저 신공은 대체 뭐란 말인가.
천무백이 혀를 쯧쯧 찼다.
“거, 내가 팔이 여덟 개인 괴물도 아닌데. 아홉 명이 전력을 쏟아 내면 어떻게 막으라고 해? 사람 섭섭하게 참.”
한결같은 여유로운 모습에 모습을 드러낸 살수들은 침묵했다.
천무백의 눈이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스물하나.”
“……!”
문지기의 몸이 크게 경련했다.
“숨어 있는 놈들이 열하나. 지금 나온 놈 아홉, 그리고 문지기 너 하나. 총 스물하나인데. 문지기야, 문지기야. 이 스물한 명이 전부가 맞느냐? 다시 말하지만 난 거짓말을 싫어하는 사람이다.”
“스물한 명. 맞다. 오늘 여기서 스물한 명이 모두 너희를 반드시 죽일 것이다.”
“스물하나. 알겠다. 여기 싹 다 죽여서 시체 숫자하고 맞아 떨어지는지 확인해 보자.”
동시에 천무백이 몸을 날렸다.
천무백을 기습했던 아홉 명의 살수들은 정면으로 달려들자 크게 당황했다.
합격에 익숙하지 않은 살수들의 틈을 단숨에 파고든 것이다.
서걱!
언제 휘둘러진 것일까.
검의 궤적조차 보지 못했던 살수 한 명의 머리가 뎅강 잘렸다.
쾌속함을 넘어선 빛이 직선을 그렸고, 그 위로 새빨간 핏물이 뒤늦게 솟구쳤다.
어정쩡하게 피하려던 살수의 몸이 단숨에 허물어졌다. 바닥에 데구루루 구르는 얼굴에 드러난 건 의혹. 자신이 어떻게 당하였는지도 모르는 표정이었다.
그 순간, 문지기가 처절하게 비명처럼 소리쳤다.
“저놈은 피해! 무조건 도망쳐! 나머지 놈들부터 정리한 뒤에 노려!”
그 말을 시작으로 여덟 명의 살수가 몸을 피하며 천무백의 이목을 끌었다.
그사이에 숨어 있던 열한 명의 살수가 병기를 번뜩이며 솟구쳤다.
* * *
황보숭은 신기했다.
“월야방이라면서, 왜 이렇게 약해?”
황보숭은 암기를 쳐 내고 단숨에 달려들어 살수의 목을 붙잡아 그대로 비틀었다.
허무하게 목이 꺾인 채 시체로 변해 버리는 광경에 황보숭은 고개를 갸웃했다.
“살수라서 정면대결에서 약한 건가?”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이리 허무하게 죽을 살수들이 아니었다.
황보숭뿐만이 아니다.
곡지흠이야 배분 자체가 다른 대선배이니 살수 두셋을 단숨에 처리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나머지 당수군이나 소항도 무리 없이 하나씩 차근차근 베어 내고 있었다.
셋 모두 똑같은 심정이었다.
몸이 가벼웠다.
‘영약을 먹고 내공이 갑자기 늘어난 것도 아닌데.’
‘검로가 보인다.’
‘감각으로 전해져.’
그랬다.
내공이 늘어난 건 아니었지만, 살수들의 공격이 보였다.
매섭고 빠르고 은밀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눈에 보였다.
설령 눈에 보이진 않아도, 감각에 여지없이 잡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보숭은 저도 모르게 탄식을 터뜨렸다.
“그래, 아무리 빨라 봤자 그 괴물 같은 귀싸대기보다 빠르겠냐! 더 아프겠냐!”
그랬다.
아무리 살수들의 공격이 은밀하고 빠르더라도, 그간 수없이 피하려고, 막으려고 미친 듯이 악을 썼던 귀싸대기보단 느리고, 은밀하지도 않았다.
거기에 설령 보이지 않더라도 감각은 여전히 공격의 방향을 여지없이 잡아냈다.
“내공 없이 산에 올라 진법을 찾아내려고 애쓰던 것 때문이야.”
당수군이 나직이 감탄했다.
내공을 쓰면 감각을 날카롭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금제된 상태에서 오로지 직감과 감각만으로 진법을 찾으려고 애쓰다 보니, 절로 감각을 단련하게 됐다.
거기에 내공의 금제가 풀어진 지금, 예민해진 감각은 살수들의 움직임 하나, 하나까지 잡아내고 있었다.
드디어 수련의 성과가 몸에 체감되자, 셋은 거침없이 날뛰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곡지흠과 제갈설아까지 합쳐서 열한 명의 살수를 처리하는 건 금방이었다.
기세 좋게 다 처리한 황보숭은 어깨를 으쓱이며 천무백을 바라봤다.
아무리 둔감해도 천무백에게 달려든 아홉 명의 수준은 확연히 남다르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러니 도움이라도 줄 생각이었다.
한데…….
“수련이 덜 됐군. 뭐가 이렇게 오래 걸려?”
이미 아홉 명을 전부 베어낸 천무백의 뚱한 목소리에 황보숭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천무백은 혀를 쯧쯧 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 처리했는데도 천무백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의 살짝 일그러진 얼굴이 문지기에게 향했다.
“여기가 본거지가 아니구나? 거점 중 하나였어.”
천무백의 맹수같은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친 문지기는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천무백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어딨냐. 너희의 방주, 살왕(殺王)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