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253화 (253/318)

<검신재생 253화>

253. 역시 전문가를 써야 해

사람을 속이는 일은 어렵다. 곡지흠의 분장술이 천하일절이라 해도 한계가 존재한다.

사람 자체가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천무백이야 전생을 거듭하며 겪어 온 인생 경험을 절실히 녹여 내기에 행동이 자연스럽다.

흑회에서 능허도 자연스러웠다.

‘걔는 더럽게 뻔뻔하고 넉살 하나 좋으니까. 원래 흑도 놈이니 흑도인 척 하는 건 두 발로 걷기보다 쉽지.’

어쩐지 저 멀리 하남에서 능허가 귀를 파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천무백은 곡지흠에게 정확하게 주문했다.

“자연스럽게 해 주시오.”

“자연스럽게? 무슨 여인네들 화장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식으로 요구를…….”

곡지흠이 난색을 보이며 툴툴댔다.

“그래야만 하오.”

아무리 다른 사람처럼 분장해도, 숨길 수 없는 것.

“고관대작, 부호처럼 꾸며도 행동만큼은 똑같이 따라 할 수 없지.”

행동은 당장 바꿀 수가 없다. 가벼운 발걸음부터 손짓, 아주 작은 습관까지.

다른 문파에 잠입하는 일이라면, 천무백도 이렇게까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다만 이번 상대가 월야방, 바로 살수다.

살행 대상 관찰에만 수개월에서 수년은 투자하는 미친놈들이다.

사람을 관찰하고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이 습관이 된 작자들이다.

눈썰미 하나만큼은 천무백도 혀를 내두르는 놈들이니, 곡지흠을 부른 이유였다.

역용술은 내공을 이용해 골격을 일시적으로 변형한다.

기의 흐름에 있어서 같은 경지의 무인보다 더 예민한 이들이 살수들이니 단번에 알아차릴 확률이 높다.

내공을 쓰지 않되, 확실하게 변장할 수 있는 건 곡지흠의 솜씨뿐이다.

하지만 곡지흠의 솜씨로도 어쩔 수 없는 것이 바로 행동과 습관이었다.

천무백은 자신 있었지만…….

“얘들이 너무 어려서 말이오.”

그 말에 척마대원들이 모두 샐쭉한 눈빛으로 천무백을 쳐다봤다.

제갈설아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천 공자님, 아니 대주님이 여기서 가장 어린 걸요.”

“나도 가끔 깜빡하고 있소. 여하튼 강호 경험이 그리 많지 않은 건 사실이니까. 살수들은 금방 알아차릴 거요.”

그러면서 천무백은 곡지흠을 쳐다봤다.

“그러니까 그 행동이나 습관마저 어색하지 않게 만들게 해 달라는 뜻인가?”

“맞소. 어떤 행동을 하든, 그것마저 자연스러워 보이게 만들어 주시오. 할 수 있소?”

말은 권유였지만, 느껴지는 바는 강요였다. 곡지흠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여기까지 달려온 것도 하오문주 체면도 체면인데, 이 말도 안 되는 요구라니. 사람의 어색한 행동마저 이해될 수 있게끔 분장을 해 달라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천무백으로부터 많은 걸 얻게 된 곡지흠은 꾹 분기를 억눌렀다.

“아니…… 분장이 무슨 사술(邪術)인 줄 아시오?”

“암진혜검의 구결이 완성되면 천하제일의 절기 중 하나가 되지.”

“사실 내 분장술은 사술이나 다름없지. 마음만 먹으면 부모도 속이거든.”

곡지흠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뭣들 하나? 자네들은 어서 얼굴부터 세면하고.”

의욕적으로 나서는 모습에 척마대원들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곡지흠은 흑회 내부에서 일하면서, 흑도들이 결집하면 얼마나 하오문에게 큰 위험이 될지 깨달았다.

하여 흑회 내에서 수적, 산적, 그리고 태룡방이 서로 분열하게 만드는 데 힘을 썼다.

천무백의 입장과 일치했다. 천무백 역시 흑회가 정마대전의 틈바구니에 끼어들지 못하게 혼란에 빠지는 걸 원했다.

곡지흠 역시 흑회가 결집하면 하오문에 직접적 위협이 될 걸 깨달았기에 모든 힘을 다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만약을 위해 하오문의 전력을 증강할 방도를 궁리했다.

‘답은 암진혜검이다!’

암진혜검의 완벽한 구결만 얻는다면 하오문의 전력은 단숨에 뛸 것이다.

천무백이 암진혜검을 내줄 수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설령 불가능하더라도.

‘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

곡지흠은 눈을 빛내며 그간 쌓아 온 실력을 마음껏 발휘했다.

시시각각으로 변해 가는 척마대를 보면서 천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전문가를 써야 해.”

천하의 하오문주를 한낱 분장가로 치부하는 천무백의 흡족한 말에 척마대는 모두 침묵했다.

* * *

유당의방.

한낱 의방이라 보기엔 높은 담장과 화려한 전각으로 이뤄진 거대한 장원이었다.

화려하고 큰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의방은 유난히 조용했다.

원래 예약된 사람만 받는 곳으로 유명해서 다짜고짜 찾아오는 이들이 없었다.

특히 근 한 달간 의방은 내부에 변고가 있는지 병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확히 내가 습격당한 이후부터로군.”

“맞아요. 하오문과 개방의 정보를 통합해 보면, 그 이후로 월야방의 거점으로 의심되는 곳들 대다수가 활동을 중단했어요. 표국이든, 상단이든, 의방이든요.”

“좋아. 각자 역할 잘 알겠지?”

천무백은 흘깃 슥 둘러보았다. 천무백과 제갈설아를 제외하면 나머지 척마대는 큰 변화가 없었다.

어느 정도 분장을 하긴 했지만, 오히려 전형적인 무인의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조금은 어수룩한 느낌이 더 강화된 것처럼 보였다.

반면 그 사이로 피범벅으로 부축된 곡지흠이 있었는데, 천무백도 알면서도 진짜 중상을 입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교묘하게 만들어진 분장이었다.

단순 분장이라면 천무백의 눈을 속이지 못하겠지만, 어찌나 표정 연기가 절절한지 고통스러운 기색이 피부로 전해질 정도였다.

상태를 확인한 천무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짜고짜 대문을 두들겼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의방의 문지기는 미간을 좁히며 문을 열어 고개를 내밀었다.

문지기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천무백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쳐갔다.

* * *

“누구시오?”

온갖 피로와 짜증이 잔뜩 묻어난 눈매. 일에 치이는 평범한 말단 무사의 얼굴 그대로였다.

하나 대문을 두드리는 무리를 보는 순간, 그 표정 너머로 눈빛이 빠르게 반짝였다.

‘중늙은이 하나. 선남선녀 둘, 거기에 호위무사들?’

문지기의 눈이 순식간에 모든 이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짧은 순간에 문지기의 머릿속에 천무백 일행의 모든 행색이 복사라도 되듯이 입력됐다.

단순히 머릿속에 들어온 것만은 아니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분석과 평가가 빠르게 이뤄졌다.

-고귀한 태도와 은은하게 느껴지는 기품. 명문세가의 자제일 확률.

-옆에 있는 여성도 마찬가지. 다만 이목구비가 불일치. 남매는 아님.

-젊은 나이.

-내공 느껴지지 않음.

-나머지 무사들에겐 어느 정도 내기의 흐름. 일류급.

-중늙은이의 부상 정도는 복부에 자상. 칼에 당함.

순식간에 특이점을 하나씩 찾아낸 문지기는 가만히 천무백을 쳐다봤다.

천무백은 황급히 포권을 취하며 허리를 숙였다.

문지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일방적으로 문지기한테 이런 식으로 과한 예를 치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특히 유당의방을 찾는 이들은 대다수가 고관대작이나 엄청난 부호.

그도 아니면 자존심 강한 무인들이 은밀하게 찾는다.

하여 문지기에게 예를 취하는 건 보기 드문 광경이다.

“사천에 숙부님을 모시고 유람하는 길에 습격을 당했습니다. 근방에 가장 실력 좋은 의방이 있다 하여 찾아왔으니, 부디 청하건대 내치지 말고 숙부님의 진료를 맡아 주십시오.”

목소리가 얼마나 절절한지, 매사 세상 모든 것을 의심하는 문지기는 순간적이나마 의심이 옅어질 정도였다.

하지만 문지기는 마음을 풀지 않았다.

어쩐지 왠지 모를 불길함이 마음속에 스쳐 갔기 때문이다.

“다쳤단 말이오? 누구한테?”

“자세히는 모릅니다. 다만 붉은 두건의 산적들이었는데…….”

천무백은 다급한 얼굴로 제대로 말을 잇지도 못했다.

일견 말을 더듬고 뒤죽박죽이라 의심이 들 법한 태도였지만, 오히려 그것이 문지기에게 더 진실하게 다가왔다.

‘꾸밈이 없어. 실제로 갑작스러운 기습을 당했다면 저것이 당연한 반응이지. 내뱉는 말은 모두 뒤죽박죽이지만 핵심은 분명해…… 붉은 두건이면 홍적회 놈들일 텐데, 근방에서 당했다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고.’

문지기는 쉽사리 문을 열지 않았다.

유당의방은 폐업 상태.

얼마 전 월야방의 살수들 상당수가 죽어 나간 사건 때문에 모든 살행이 중지된 상황이다.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은인자중 중이니, 외부 인물을 들이는 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일이다.

“애석하지만 유당의방은 모두 예약을 통해서만 병자를 들이오.”

“들었습니다. 하지만 도와주십시오. 의술은 곧 활인(活人)인 법이 아니겠습니까. 돈은 당장 있는 것은 내어 주고, 부족한 건 운항표국을 통해 내일이나 내일모레까지 마련하겠습니다. 이대로 돌아가기 전에 숙부님의 상태가 더 심해질까 봐 겁이 납니다.”

그 말에 문지기는 흠칫했다.

‘운항표국이면 금뇌상단이 운영하는 곳인데. 표행을 한번 맡으려면 표를 뽑고 기다려야 할 정도인데. 당장 내일이나 내일모레까지 돈을 가지고 오게 한다고?’

문지기는 조심스레 다시 한번 불청객들을 살폈다.

“혹시 가문이 어찌 되시는지…….”

그의 시선이 제갈설아에게 닿았다.

‘금뇌 상단의 막내딸이 딱 저 나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 눈빛을 읽었을까.

제갈설아가 다소 조급한 움직임으로 포권을 취했다.

“금뇌상단의 금소용이라고 해요.”

“……하면 이분은 혹시 연자이신가?”

그 말에 제갈설아는 움찔했지만, 이내 옆에 있던 천무백이 고개를 끄덕이며 제갈설아를 품에 살포시 안았다.

순간 떨던 제갈설아의 흔들림이 잦아들었다.

그 모습이 문지기에겐 습격에 두려워하던 여인을 다독여 주는 모습으로 보였다.

“맞습니다.”

“허. 금뇌상단의 막내딸께서 곧 혼례를 올리신다는 건 들었는데, 하면 댁이 대학사를 지낸 유 씨 가문의 공자이시구려?”

“그것도 맞습니다.”

문지기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골치 아프군. 하필 금뇌상단과 유 씨 가문이라니.’

금뇌상단과 유 씨 가문은 사천에서의 영향력이 무림으로 따지면 사천당문과 같은 반열이다.

만일 여기서 거절했다가 숙부라는 작자가 죽어 버리면?

두 가문을 척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당의방은 곤혹스러워질 것이 자명하다. 그들에게 살행을 의뢰하는 이들이 고관대작이나 부호가 대다수인데, 모두 두 곳의 눈치를 보니 살행을 의뢰하러 찾아오는 것조차 꺼리게 되리라.

문지기는 곰곰이 판단했다.

‘자상쯤 치료해 주는 거야. 간단하니 문제없다. 오히려 이 기회에 금뇌상단과 유 씨 가문과 연을 만들어 둔다면야…….’

사실 이런 걸 어찌 문지기가 결정을 내리겠느냐지만.

오히려 문지기이기에 가능한 결정이었다.

유당의방.

진실한 정체는 천하제일살문 월야방.

월야방을 찾아오는 이들을 문 앞에서 살펴서 위험한지 판가름하는 중요한 역할이 바로 문지기다.

월야방에서도 손꼽히는 살수만이 맡을 수 있는 역할.

바로 그가 특급살수였다.

더구나 명색이 의방으로 위장했는데, 병자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오히려 의심을 사리라.

‘방주께서 금지한 건 살행이었으니까.’

문지기는 끝내 결론을 내렸다.

“들어오시오. 진료부터 합시다.”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

* * *

“의원이 몇이나 됩니까?”

문지기의 안내에 따라 안에 들어온 천무백이 불쑥 물었다.

“그건 비밀이오.”

“의원의 숫자가 비밀이란 말입니까?”

끈질기게 물어보는 천무백의 언행에 순간 문지기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잠깐 고민하던 문지기가 천무백을 흘겼다.

“영업 비밀이오.”

그러자 천무백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조금 전까지 숙부를 치료해 달라며 다급했던 표정이 아니었다.

“왜…… 그러시오?”

문지기의 얼굴에서 경계심이 뚜렷이 드러났다.

“그게 의방의 영업비밀이란 말이지?”

“그렇…… 소. 근데 갑자기 말이 짧아지는구려.”

“본래 문지기한테 말을 높이는 예는 없으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문지기는 잠시 당황했다.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 고귀한 유 씨 가문의 자제라고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거친 어조.

천무백이 웃었다.

“아니, 말은 정확하게 하자고. 의방의 영업비밀이 아니잖아.”

“…….”

“월야방의 영업 비밀 아닌가? 소속된 살수들의 숫자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

문지기는 입을 다물고 천무백을 쳐다봤다. 천무백의 손이 새하얗게 번뜩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