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52화>
252. 왔으면 일부터 하시오
천무백이 척마대를 굴리는 동안, 제갈설아는 착실하게 계획의 뼈대를 세웠다.
“월야방을 없애는 거야. 무려 그 월야방을!”
솔직히 말해 겁도 살짝 났다.
강호에는 은원(恩怨)이 흐른다.
드넓은 장강의 물결보다도 넓으며, 퇴적된 황하의 모래보다도 더 많다.
천하제일살문인 월야방에 한이 서린 원한을 지닌 강호인들이야 수두룩했다.
원한을 갚는 건 강호에서 당연한 일이다. 월야방을 찾아 어떻게든 피가 서린 원한을 갚고자 하는 무수한 노력이 뒤따랐다.
그중에는 이름만 들어도 노소를 불문하고 알 법한 고수도 수두룩했다.
다만 결과는 늘 똑같았다. 지금 월야방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활동하는 상황이 증거다. 원한을 갚고자 하는 이들은 실패했고, 오히려 월야방의 철저한 보복에 싸늘한 고혼이 됐다.
“가능할까?”
입안이 바짝 말랐다.
천무백이 월야방을 정리하겠단 의도를 넌지시 비칠 때만 해도 망설였다.
지금은 아니다.
“가능해. 이 정도면 가능성 있어.”
계획의 뼈대를 세우고 수많은 정보를 하나씩 모아서 정리하다 보니 길이 보였다.
“월야방의 위치를 알아.”
제갈설아의 눈이 반짝였다.
왜 그간 수많은 문파가 공격을 시도했다가 실패로 끝났던가.
바로 본거지의 정확한 위치를 몰랐기 때문이다.
은밀함을 최고의 덕목으로 생각하는 월야방은 흔적마저 유추하기 어려웠다.
하나 천무백의 사전 지식과 거기에 하오문의 치열한 정보력이 겹쳐졌다.
뿐만이 아니다.
정의맹에서도 맹 자체적으로 전력을 다했다.
비록 척마대의 임무지만, 강호에서 정의맹이 하는 공식적인 행사 중에 가장 큰 일이 될 것이 자명한 일.
정의맹의 자체 정보력, 구파일방을 중심으로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비선(秘線)에 하오문에 질 수 없다고 절치부심한 개방의 정보력까지.
당장 정의맹의 총군사인 제갈여강이 말했다.
이건 혈귀곡과 백도의 싸움에 있어서 전초전이라고.
안개처럼 뿌옇던 월야방의 흔적들이 하나둘 뚜렷해졌다.
“문제는 천 공자님이 이들을 다 처리할 수 있냐는 것인데.”
제갈설아는 그리 중얼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무언가 자신의 직감이 아니라고 소리쳤기 때문이다.
“아니지. 이게 아니라 척마대의 피해 없이 그들을 정리할 수 있는지가 쟁점이야.”
제갈설아는 수많을 가능성을 점검했다.
특히 천무백이 패배할 수도 있다는 가정을 떠올려봤다.
필요한 조건들을 빠르게 나열했다.
“보다 강력한 무력, 천 공자님이 사용하는 무공에 대한 정보를 저들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저들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얼마나 되어야 천 공자님을 패퇴시킬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수많은 조건을 최대한 머리를 굴려 하나씩 늘어놓아 보면…….
“그려지지 않잖아?”
제갈설아의 표정이 묘해졋다.
천무백이 패배한다는 것, 당한다는 결론이 나오려는 조건 자체가 성립되기가 무척 어려웠다.
“정면대결에서 진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야. 살수들이잖아? 그렇다고 살수들의 특기인 기습이나 암살? 글쎄. 당할 것 같지 않아.”
가령 이런 거다.
“창천검신이 그런 것에 당하지도 않았잖아?”
기습, 습격, 암살은 비열하지만 치명적인 수법이다.
성공만 한다면 단숨에 거인도 쓰러뜨리는 신의 한 수가 된다.
하지만 그 누구도, 심지어 이를 갈던 마교도 감히 창천검신에게 암수(暗數) 따위는 시도치도 않았다.
어차피 통하지 않을 걸 알았기 때문이다.
지금 제갈설아가 생각하는 천무백의 느낌이 딱 그러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라면 월야방은 지극히 위험한 상대야.”
월야방도 만만치 않다.
만일 제갈설아가 월야방 편에 섰다면?
“가장 약한 고리부터 차근히 뜯어낼 거야. 그리고 종국에는 천 공자님 홀로 남겨 둬서, 전력을 다해 공격하겠지. 혈귀곡의 조력을 받아서라도.”
최선이다.
그러면 척마대에 대한 피해도 엄청날 터.
제갈설아는 잠깐 생각했다.
“척마대의 피해를 달가워하진 않으실 거야.”
이젠 천무백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냉정해 보이면서도, 자기 사람을 알뜰히 챙긴다.
매번 의약당에서 손수 대원들을 치료해 줘서 다음 날 곧장 수련을 이어 가게 하는 것부터가 그렇지 않은가.
어떤 집단의 수장이 그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물론 이 생각을 척마대가 들었다면 기함했으리라. 그들에겐 그저 어떻게든 수련을 더 시켜서 혹사하겠다는 지독함처럼 보였으니까.
아무튼, 제갈설아는 결심했다.
“울타리…….”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살뜰히 챙기는 천무백이다.
척마대가 울타리 안에 들어가 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생판 남은 아니다.
따라서 어떻게든 척마대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계획을 세우는 것.
제갈설아에게 떨어진 당면과제였다.
소매를 걷어붙인 제갈설아가 맹렬하게 궁리했다.
그러다 문득.
“……난 울타리 안에 있으려나?”
머리가 복잡해졌다.
* * *
사천성의 자양(資陽)에는 유당의방이란 곳이 있었다.
워낙 많은 독물과 독초가 많은 사천인지라, 독공으로 압도적인 사천당문이 존재한다.
독은 때로는 약이 되는 법. 독에 있어서 사천당문이라면, 중원 사람들은 의술에서는 사천의 유당을 꼽곤 했다.
하지만 평범한 양민은 유당의방의 진료를 받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혀를 내두르는 엄청난 진료비를 요구하는 곳이라 부호나 고관대작만이 이용했다.
“세상사 모른다더니, 그런 의방이 월야방이라니.”
제갈설아가 의자에 앉아 짐짓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도 단순한 거점도 아니다.
월야방의 본거지일 확률이 가장 높은 곳으로 추정된다.
천무백이 원래 알던 장소도 40년이 지났으니 본거지를 옮겼을 확률이 높았는데, 모든 정보를 종합한 결과 유당의방이 가장 확률이 높았다.
천무백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원래 강호에서 함부로 믿으면 발등에 도끼 찍힌다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소.”
“그래도 그렇지, 사람을 살리는 의원들이 월야방의 살수라니. 이건 너무해요!”
“똑똑한 거지.”
“똑똑하다고요?”
“돈 많은 부호나 직위 높은 고관대작들만 이용한다 하지 않소.”
“그거야 진료비를 높게 받으니까…… 아!”
제갈설아는 단숨에 이해했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부호와 고관대작. 그렇군요. 살행을 가장 많이 의뢰하는 사람들이에요!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정계에서 살수들을 쓰고, 부호들도 돈이 많으니 언제든지…….”
부호와 고관대작들만이 찾는 의방.
아무래도 살행을 의뢰하기에 딱 걸맞지 않은가?
의뢰하는 측에서도 진료를 받으러 가는 것처럼 꾸밀 수도 있으니까.
“어휴. 하여간 나쁜 짓으로는 머리가 잘 돌아가네요.”
“원래 나쁜 짓도 머리가 좋아야 잘하는 법이니까.”
“전 머리 좋아도 나쁜 짓 않는데요.”
“좋은 사람이니까 그렇소.”
“공자님도 나쁜 짓 않잖아요.”
“많이 하지. 적어도 적들에게는 나쁜 짓이니까.”
“음, 그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겠네요. 괜찮아요. 나한테는 좋은 사람이니까요.”
“다행이군. 미움받지는 않아서.”
월야방의 본거지로 예상되는 곳 근방이라서 그럴까.
제갈설아는 일부러 생각나는 대로 천무백과 말을 주고받았다. 긴장을 푸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하지만 한참 대화에 빠지다 보니, 어느새 사위가 조용해진 걸 느끼고 시선을 돌렸다.
“…….”
당수군, 황보숭, 소항등 척마대 무사들의 묘한 시선이 닿아 있었다.
뻘쭘해진 제갈설아가 되려 목소리를 높였다.
“뭐, 왜요?”
“……아니에요. 부대주님.”
소항이 살포시 웃으며 입을 가렸다. 어쩐지 부끄러워진 제갈설아는 애써 표정 관리했다. 슬쩍 천무백을 바라보니, 천무백은 신경도 안 쓰는 사람처럼 그저 무표정했다.
“당가의…… 앞마당에서 살행을…… 하다니.”
그때 당수군이 조용히 분노에 찬 목소리를 읊조렸다.
아무래도 목적지가 사천이다 보니, 사천 출신인 당수군과 대동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여차하면 사천당가와 연계할 수도 있으니.
이것도 제갈설아가 짜놓은 인선이었다.
‘남궁공자가 이끄는 편은 감숙으로, 교문 공자가 이끄는 편은 귀주성으로.’
다른 거점들을 파괴하기 위해 움직였다.
뿐만이 아니다.
근방의 문파들과도 연계하기로 이미 연락을 통해 놨고, 정의맹의 수뇌부도 일부 병력을 파견해 놓은 상태다.
아예 이 기회에 정의맹 수뇌부에서도 완전히 척마대에 맡겨 놓는 게 아니라, 확실히 뿌리 뽑기를 원한 것이다.
다만 본거지를 치는 일만큼은 천무백에게 맡겼다.
수뇌부가 천무백에게 보내는 신뢰의 표시였고, 실제로 천무백만이 제대로 해낼 수 있을 거라는 무언가 강력한 믿음이었다.
“그럼 이제 야밤을 노려 기습하실 건가요?”
계획은 제갈설아가 세웠지만, 탁상공론이란 말이 있듯이 실상을 접해 보면 늘 계획은 바뀌는 법.
현장을 확인한 이후 계획대로 갈지, 변경할지는 오로지 천무백의 뜻이다.
제갈설아의 물음에 천무백은 한참 생각하다 말했다.
“다들 여기저기 몸 성한 곳이 별로 없지?”
“네?”
“온 김에 천하제일 의술을 쓴다는 곳에서 치료 좀 받아 보자고.”
제갈설아의 눈빛이 떨렸다.
저 말은…….
“기습이 아니라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겠다고요?”
“아무래도 뭔가 이상한 구석이 있어서. 들어가서 그 허실(虛實)을 파악해야겠소.”
“누가 봐도 무인들로 구성된 무리가 들어오면 반드시 의심할 텐데요.”
“적당히 숨기고 가야지.”
“어…… 역용술?”
“아니, 이쪽에 전문가가 있어서 불렀소. 미리 연락해 놨으니, 슬슬 올 때가 됐는데.”
그 말이 끝나고 얼마나 지났을까.
객잔의 문이 확 열린 뒤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의 기세를 읽은 척마대의 얼굴이 일순 딱딱하게 굳었다.
비범함, 그 자체였다.
날카로운 기세, 흡사 거대한 산악을 마주하는 듯한 아찔한 감각.
‘고수!’
‘범상치 않은 풍모의 고수다!’
척마대가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천무백의 수련 끝에 내공을 쓰지 않아도, 감각 그 자체가 월등히 발달된 성과가 드러났다.
하지만 그들이 칼을 뽑을 일은 없었다.
“빌어먹을. 복건성에서 사천까지 길이 몇 리나 되는지 알아? 중원을 횡으로 가로지르는 일정인데. 뭐? 정해진 날짜 안에 안 오면 가만 안 둔다고?”
사내는 씩씩 대면서 천무백의 멱살이라도 잡을 듯이 다가왔다.
물론, 그 앞에서 머뭇거리며 잡진 못했다.
“문주의 그 기가 막힌 분장술이 필요하니 별도리가 있겠소.”
“이익! 그래도 그렇지. 허어. 천하의 하오문주를 분장이나 시키려고 중원을 횡단하게 만드는 사람은 그대밖에 없을 거요.”
천무백은 어깨를 으쓱였다.
곡지흠의 말에 주위가 경악으로 물들어졌다.
“하오문주!”
비록 정파는 아닌, 정사지간의 인물이라지만 무려 하오문주다.
“강호 말학이 선배님을 뵙습니다.”
제갈설아를 필두로 분분히 포권을 취했다. 그제야 곡지흠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흘깃 천무백을 바라봤다.
‘그래, 이게 정상이지.’
이십대의 젊은 무인들이 곡지흠에게 보여 줘야 할 자세는 바로 이런 거다.
그런데 천무백은…….
“왔으면 일부터 하시오.”
“……하.”
세상에. 복건성에서 흑회 내부를 이리저리 꼬게 만드는 엄청난 일을 하고 있는데.
반대편인 사천까지 불러서 시킨다는 게 고작 분장술이라니!
물론 곡지흠의 분장술은, 역공술을 뛰어넘는 월등함을 갖추기도 했다.
천무백과 능허가 성공적으로 흑회에서 활동한 게 그 증거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천하의 하오문주를…
생각지도 못한 섭섭한 대우에 곡지흠의 몸이 잘게 떨렸다.
그때, 흘러나온 천무백의 말에 떨림이 뚝 멈췄다.
“온 김에 암진혜검 구결을 전해 드리겠소.”
“뭐 하나?”
“……?”
“준비 안 하고 뭐 하시오, 천룡검협. 당장 합시다. 내 그간 갈고닦은 수많은 기술로 완벽하게 다른 사람처럼 꾸며 줄 터이니.”
곡지흠이 시퍼런 안광을 토하며 소매를 걷어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