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50화>
250. 태산, 구름, 창천
“…….”
남궁진천은 수련하는 척마대를 조용히 지켜봤다.
동시에 천무백과의 비무를 머릿속으로 복기했다. 복기하다보니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비무라고 하기엔…… 일방적이었는데.’
밖에서 보기에는 자신이 몰아치는 것처럼 보이니, 결과를 떠나 남궁진천이 잘 싸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 내용을 자세히 보면 전혀 아니다.
‘시종일관 여유로웠어.’
사실 여유라고 표현하기에도 적절하지 않다. 다만 마땅한 표현이 없었다.
그런 거 있지 않나.
막냇동생이 아장거리며 걸을 때, 제 딴에는 아버지나 형님을 따라 한다고 목검을 마구 휘두른다.
그게 어디 아프거나 위협적이던가.
아니다. 하나도 위협적이지도 않다. 귀엽기 짝이 없다. 하지만 밖에서 보면 애가 마구 휘두르니 저러다 혹여 누가 다치지 않을까 염려할 정도는 된다.
적어도 남궁진천이 복기하는 비무가 그랬다.
‘그냥 어디 할 수 있는 건 해 봐라. 같은 느낌이었지.’
마치 자신이 동생이 목검을 휘두르는 걸 귀엽다고 지켜봐 주는 것처럼.
남궁진천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서로 검을 겨눠 자웅을 겨룰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강호가 넓긴 넓구나.’
자만이었을까.
당장 저기 수련하고 있는 척마대 중에, 남궁진천을 상대로 몇 합이나 버틸 사람이 있을지조차 의문이다.
기껏해야 세 얼간이 정도가 제법 겨뤄 볼 만하겠지만, 그마저도 눈에 차진 않는다.
아버지, 남궁조가 바로 검성이다.
그런 아버지에게 배우고, 갈고 닦았다. 물론 무조건 이기리라곤 생각하진 않았다.
강호에 들려오는 소문의 절반만 믿어도 천무백의 실력은 자신보다 윗줄이었으니까.
그래도 이 정도 차이일 줄이야.
‘마치 아버지와 겨룰 때 느낀 막막함 같아.’
어느 순간, 천하제일인이라는 검성과 천무백을 같은 반열에 두고 생각하게 됐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저 어린 나이에 어떻게?’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기연? 강력한 무공? 엄청난 영약?
그중에서 남궁진천이 부족한 게 무엇이 있었나.
‘내가 가진 조건이 저 친구보다 나빴나?’
전혀. 하나도.
나쁜 조건은 없다. 아니, 강호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최상의 배경과 조건에서부터 시작했다. 스승이 누군가. 천하제일인 검성이 아닌가. 많은 이가 불공평하다고 한탄을 할 정도로 출발선 자체가 달랐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괴감이 드는군.’
되새길수록 입안에 맴도는 쓴맛은 더 씁쓸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하나다.
저 모든 조건과 배경을 월등하게 뛰어넘는 우월한 무언가.
‘재능. 그야말로 찬란한 재능.’
사람들이 일컬어 자신을 천신지체와 비견되는 희대의 재능이라 말했다.
많은 사람이 치켜세워 줬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다음 세대의 천하제일이 되리라 누구도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달리 말씀하셨다.
‘너의 재능과 나의 재능은 태산에 비견할 수 있다.’
태산.
하늘 높을 줄 모르고 오롯이 서 있는 거대한 산악(山岳).
그것을 칭찬이라 여겼다.
하지만 아버지의 얼굴에 떠오른 건 씁쓸한 미소였다.
어쩐지 자조 섞인 미소였기에, 남궁진천은 되물었다.
‘태산은 이 넓은 중원 땅에 하나뿐입니다. 그러면 중원 땅에 따를 재능이 없다는 것입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태산의 정상에 이르는 길은 험악하다. 끝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있다. 오르려면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이겨야 한다. 그건 산사태일수도, 실족일수도, 아니면 날짐승들일 수도 있지.’
‘소자, 태산과도 같은 재능을 지녔음에도, 자만을 갖추지 말라는 조언으로 알아들었습니다. 맞습니까?’
‘반대다.’
‘예?’
아버지는 한참이나 침묵했다. 이해 못하는 남궁진천을 가만히 쳐다봤다.
타오르는 안광. 그러나 그 속에 담긴 건 안타까움.
남궁진천의 머릿속이 복잡해질 때, 아버지의 입이 열렸다.
‘너의 재능은 노력하는 재능이다. 치열하게 노력하고 끝없이 정진하며, 포기하지 않는다면 저 하늘 아래 높은 태산에 오를 수 있으니까. 넌 태산에 오를 수 있는, 노력과 근성의 재능을 갖췄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고.’
남궁진천의 눈빛이 흔들렸다. 노력하는 재능이라니. 태산에 오를 수 있는 재능이라니.
무언가 의미심장했다. 아버지는 위를 올려다보며 탄식했다.
‘세상은 지금 나를 천하제일이라 부른다.’
‘당연합니다. 틀림없는 사실이니까요.’
‘틀렸다.’
‘……!’
‘나는 무수한 노력 끝에 태산 위에 올랐다. 사람들의 눈에는 태산에 오른 내가 천하제일처럼 보였을 것이다. 가장 높은 곳을 정복했으니까.’
‘소자,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간단하다. 나는 천하제일이 아니다.’
‘설마, 강호에서 자취를 감춘 검존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과거라면 모를까, 지금 아버지의 경지는 그보다 더……!’
‘아니다. 그는 구름이다.’
‘구름……?’
‘태산이 아무리 높다 하되, 구름 아래에 있을 뿐이다. 검존, 유백기는 구름에 비견할 재능을 가졌다.’
‘구름의 재능이라니, 대체.’
남궁진천은 곤혹스러웠다. 검존이 대단한 건 안다. 하지만 강호에서 자취를 감췄고, 이제는 명실상부 천하제일인은 검성이라고 누구나 망설이지 않고 말한다.
대체 얼마나 대단했던 이였기에, 아버지가 아직도 저리도 자조한단 말인가.
‘구름은 간혹 산꼭대기에 걸릴 때도 있다. 구름의 재능이라고 해도, 노력하지 않는다면, 태산보다 낮을 수도 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구름은 태산보다 높다. 그리고 각고의 노력을 통해 태산에 올랐다 한들, 구름엔 노력만으로 오를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사람이니까 그렇다. 너도, 나도, 사람이기에.’
‘아……!’
그제야 남궁진천은 아버지의 의중을 이해했다. 하지만 이해한 순간 격렬한 두려움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자신이 보기엔 아버지야말로 구름과도 같은 재능이다.
그저 타고난 오성만으로도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처럼 보였다.
‘노력만 한다면, 그래 사람이 노력만 한다면, 태산에 오를 수 있다. 하지만 구름은 아니다. 각고의 노력을 해도, 인간은 구름 위에 태산의 정상은 밟아도, 구름 위에 올라설 수는 없는 법이다. 타고 나야 한다. 그것이 바로 검존이다.’
‘…….’
‘아들아. 너도 내가 보기엔 태산이다. 강호에 들려오는 후기지수들에 대한 소문을 듣노라면, 너는 유일한 태산으로 오롯이 서서 천하제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만일…… 구름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나처럼 좌절할지도 모른다.’
‘아버지…….’
‘하지만 걱정 말거라. 태산의 재능은 한 세대에 두셋은 나오더라도, 구름의 재능은 고금을 통틀어 몇 번 나오지 않는다. 그러면 나보다 낫지 않겠느냐.’
아버지가 답지 않게 별안간 웃었다. 약간은 울분이 맺힌 서글픈 웃음이었다.
‘구름의 재능을 타고난 검존만 해도 평생 올려다볼 수밖에 없지만, 그보다 더한 재능을 보고 절망했으니까.’
‘구름보다 더한 재능이라고요?’
아버지의 얼굴에 언뜻 기이한 빛이 스쳐갔다.
그것은 존경과 경외를 넘어선, 무언가였다.
‘태산, 그리고 구름, 그 모든 것도 닿지 못하는 저 높디높은 창천(蒼天).’
남궁진천의 가슴 속에 창천이라는 두 글자가 깊게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새끼. 이것 봐라.”
“……!”
그때였다.
한참 과거의 일을 되새기고 있던 그의 귓가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꽂혔다.
도통 적응되지 않는 껄렁한 어조.
천무백이었다.
“무, 무슨 일이냐.”
남궁진천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주춤거렸다. 천무백의 낮게 깔린 시선이 어쩐지 마주보기가 어려웠다.
천무백의 입가가 씰룩였다.
순간 불길한 기운이 엄습했다.
“무슨 일? 지금 무슨 일이냐고 묻는 거지? 내가 묻는 게 아니라, 네가 묻고 있는 거지? 무슨 일인지 내가 설명해 줘야 하는 거지?”
“……!”
어째서 화가 난 걸까.
어쩐지 씰룩이고 있는 천무백의 입가를 보면, 저게 웃는 건지 화가 난 건지 헷갈렸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잘 갈고 닦아 온 남궁진천의 감각이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무슨 일? 정녕 몰라서 묻는 거야? 이봐.”
“……뭐, 뭣.”
“너 척마대지?”
“내가?”
“내가 들어오라고 했잖아?”
“그야……”
그랬긴 했지.
듣자마자 기절해서 답은 못 했지만.
“근데 넌 왜 여깄어?”
“……?”
“나머지 애들은 죽어라 수련하고 있는데, 여기 앉아서 음풍농월을 외우고 계세요? 아주 한가하시네요?”
“……아.”
하지만…… 저런 산 타는 기본적인 거나 하라고?
이미 자신의 경지는…….
“저런 기본적인 건 우습다 이거지?”
“…….”
속을 훤히 들여다본 듯 천무백의 말이 정곡을 찔렀는지라, 남궁진천은 할 말이 궁색해졌다.
천무백이 혀를 찼다.
“넌 귀싸대기 세 번 통과하면 저거 빼준다니까.”
“세 번?”
순간 어제의 아픈 기억이 스쳐갔다. 왼쪽, 오른쪽 뺨이 동시에 아려왔다.
‘그걸 세 번이나?’
두 번은 버틸 만했다. 하지만 세 번째 맞는 순간 단전의 내공도 끌어올릴 생각조차 사라지더라.
“…….”
“저거 하기 싫어? 그럼 지금 시험 한번 쳐 볼래?”
우두둑.
그러면서 양손을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켜는 천무백을 보니, 남궁진천은 순간 마음이 팍 상했다.
아무리 자신이 처참하게 패배했다지만, 그래도 이건 숫제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언제 자신이 이런 대우를 받았겠는가.
“나는 척마대에 들어갈 생각이…….”
“응? 뭐라고?”
“……모래주머니를 줘야 수련하지 않겠는가.”
남궁진천은 끝내 체념했다.
다만.
‘굴복한 게 아니다. 수련을 통해 성과를 보인 뒤, 다시 도전한다.’
본인 그렇게 여기지 않았을 뿐이지만.
하지만 진심이었다.
어떻게든 다시 도전할 것이다. 확인해 보고 싶었으니까.
아버지가 해 줬던 말이 정말인지.
태산 위에 또 다른 재능이 있는지.
산으로 뛰어가며, 남궁진천은 흘깃 뒤를 돌아보았다. 팔짱을 낀 채 오롯이 서 있는 천무백.
“넌 태산인가, 구름인가, 창천인가?”
태산이면 따라가리라. 그리고 같이 서리라.
구름이면, 가장 높은 곳에서 바라보리라.
그리고 창천이면…….
“……모르겠군.”
구름까지라면, 그래. 끝까지 도전할 것이다. 간혹 산꼭대기가 구름 위에 있을 때가 있으니까. 자신이 그런 산이 되면 되니까.
하지만 창천이라면…….
“보겠다. 하늘이 정녕 있는지.”
인간이 가장 높이 오를 수 있는 곳, 태산에 올라서 최대한 하늘에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리라.
새로운 창천(蒼天)을.
* * *
“남궁조의 아들이라더니. 과연 강호에서 남궁가의 피가 가장 진하긴 한가 보군.”
천무백은 피식 웃었다.
옛 인연의 혈연을 지켜보는 건, 꽤 이상한 기분이지만 이제는 익숙했다.
당시 창천검신으로써 살 때, 천무백은 세상의 기재를 꼽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남궁조였다.
정확히는 제자인 검존 유백기를 제일로, 그다음으로 남궁조를 꼽았다.
남궁세가의 혈통에 타고난 오성과, 절세무공, 수많은 영약과 대대로 전해져 오는 깨달음과 가르침까지.
유백기라는 천하의 기재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남궁조는 천무백 다음의 천하제일이 될 것이 자명했다.
‘곽용이 녀석이 툴툴대긴 했지만.’
남궁조보다도 못하다는 얘기에, 젊은 곽용은 툴툴댔지만 별수 있겠는가.
사실인데.
곽용은 투신이란 별호처럼 맹렬한 정신력에서 진가를 발휘하지만, 순수한 실력으로만 따지면 남궁조는 대단했다.
그런 남궁조의 아들이라더니, 과연 명불허전이다 싶었다.
물론 천무백의 눈에는 아직도 한참 먼 애송이였지만.
‘절정의 막바지에서 몇 번의 깨달음만 있다면 언제든 입신지경에 오를 수 있는 실력자이니…….’
사실 귀싸대기 세 번이라고 했지만, 저들이 모르는 사실이 있다.
‘제법 힘을 좀 실었는데.’
척마대 수련의 성과는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도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는 건, 천무백의 귀싸대기가 점점 교묘하게 더 강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남궁진천도 왔고, 저 얼간이들도 제법 무사다워졌고.”
천무백은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움직여야겠군.”
그의 고개가 북쪽으로 향했다.
월야방이 있는 방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