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249화 (249/318)

<검신재생 249화>

249. 신참 왔다

남궁진천의 눈동자에 당혹감이 어렸다.

평소 냉정한 성품에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다는 소리를 듣는 남궁진천이었다.

오죽하면 남궁세가의 검이 아니라, 북해의 빙공을 익혔으리라는 소문이 돌았겠는가.

그만큼 남궁진천은 감정을 다스리는 데 능했다.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끔뻑하지 않고, 냉정을 유지했다.

한데 그런 냉정이 잠깐이나마 흔들렸다.

“이 건방진……!”

“건방지고 나발이고. 한번 싸워 보자고 온 거잖아? 왜 이리 혓바닥이 길어? 주둥아리로 칼자루 쥐냐?”

“······.”

솔직히 말해 남궁진천은 입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자신이 상상하던 천룡검협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홀로 우뚝 서서 마도와 싸우는 협객은 도대체 어디에······.’

천룡검협에 처음 이야기를 들은 건 바로 화산의 수호검, 청현진인으로부터다.

청현진인은 수도 없이 천무백에 대한 감탄과 칭찬을 늘어놓았다.

진정한 협객이라고.

그래서일까. 머릿속엔 자신이 꿈에 그리는 전형적인 협객으로 어렴풋이 생각해 왔다.

한데 지금의 모습은 웬 건달 하나가 대놓고 껄렁대는 모습이 아닌가.

남궁진천은 당혹스러움을 애써 억누르며 냉정을 되찾았다.

‘천하에 자자한 명성을 지닌 자다. 그런 자가 한낱 시정잡배일 리가 없어.’

남궁진천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이며, 천무백의 전신을 훑었다.

그 순간, 남궁진천은 격렬한 충격을 받았다.

‘틈이 없다.’

빈 곳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검이 향할 만한 투로가 수없이 많아 보였지만, 자세히 살피고 있노라면 둔중한 충격이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것 같았다.

‘함정, 이것도 함정. 저것도 함정이다.’

얼씨구나 좋다고 검을 뻗으면, 단숨에 역공을 당할 만한 공간들.

일부러 내어 준 틈이다. 역설적으로, 빈틈 따위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철저하게 계산된 행동이라, 이건가?’

그제야 남궁진천은 이해했다.

‘격장지계(激將之計)다!’

감정을 흔들어서 원하는 대로 이끌어가는 계책.

천무백의 언행을 이해한 남궁진천의 입가가 말아 올라갔다.

“과연, 마도 놈들과 수없이 싸웠다더니. 싸움에 있어서만큼은 자신의 명성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거로군.”

“······?”

“하긴. 그런 독심을 지녀야만 마도와 싸울 수 있겠군. 어쩌면 그것이 마도와 싸워야 하는 협객의 모습일지도 모르겠군.”

별안간 혼잣말하며 홀로 감탄하고 탄식하는 모습을 보며 천무백의 미간이 내천(川)자를 그렸다.

“희한한 방식으로 미친놈이로구나.”

“흥. 그대가 어떤 고약한 말로 날 흔들려고 해도 상관없소. 내 검은 흔들리지 않을 터이니.”

“얼씨구? 그래서 언제 덤빌 건데?”

“남궁세가의 대공자, 진천이 천룡검협에게 비무를 신청하는 바요.”

남궁진천이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천무백이 답답하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는 찰나, 굽혀졌던 허리가 펴지며 검광이 번뜩였다.

“허?”

천무백의 입가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다짜고짜 기습해?”

하는 짓은 정파의 전형적인 고루한 인물처럼 무예를 겨룰 것처럼 굴더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거침없는 발검(拔劍)이 파고들었다.

째앵!

비겁하다 싶을 정도로 내뻗은 기습이었건만, 천무백의 일장에 허무하게 막히자 남궁진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평범치 않은 장법이다.’

상대를 경시하는 마음 따위는 진즉 날려 버렸지만, 오히려 생각보다 더 강력한 모습에 속이 거북해졌다.

“당신은 검 안 뽑나? 듣기론 검의 대가라고 했는데?”

“응 안 뽑아.”

“흥! 아직도 격장지계 같은 같잖은 수를 써!”

“지랄.”

천무백이 순간 접근하자 남궁진천이 벼락처럼 몸을 돌렸다.

강한 돌풍과 함께 칼날에서 무자비한 살기가 쏟아졌다.

‘제법!’

천무백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남궁진천의 반응속도가 예상보다 더 빨랐다.

오히려 투로를 미리 파악해서, 역으로 한 박자 빠르게 검이 번쩍였다.

가공할 쾌검, 투로의 빈틈을 역으로 노리는 과감한 일격, 어째서 남궁가의 용이라 불리는지 알 만한 면모였다.

다만.

“······!”

천무백의 대응은 남궁진천의 반응이 무색하게 더 빠르고 과감했다.

남궁진천의 칼이 번쩍이는 순간, 이미 천무백의 쌍장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남궁진천의 눈이 크게 뜨였다.

‘빙장(氷掌)?’

새하얗게 물든 좌수(左手)를 보고 급하게 검을 거둬들였다.

온몸이 저릴 정도로 차디찬 빙공에 대응하는 빠른 반응이었다.

그러나 곧장 이어지는 광경에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혼공쌍장(混功雙掌)?’

우수에는 투명한 강기가 일렁였다.

왼손, 오른손에 서로 각기 다른 강렬한 기운이 담긴 채 몰아쳤다.

혹여 소문으로만 접했던, 각기 양손에 서로 다른 기운을 담는다는 절기가 머릿속에 스쳐갔다.

‘하면 장법에 있어 천하제일이었던 나한선자의 진전을 이었단 말이야?’

하지만 의문을 풀 시간 따위는 없었다.

양쪽에서 쏟아지는 극한의 빙기와 맹렬하게 다 짓 이길 것 같은 강기를 막기 위해선 모든 걸 집중해도 부족했으니까.

콰앙!

남궁진천의 검이 연신 강기를 쏟아 냈지만, 완전히 막는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강력한 충격이 전각을 뒤흔들었고, 남궁진천은 튕겨 나가 반쯤 벽에 박혔다.

“크으으윽.”

벽에 박힌 채 파르르 떠는 남궁진천으로부터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천무백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조금 가까이 다가갔다.

너무 초장부터 박살을 냈나 싶었는데 천무백의 기감에 내기의 은밀한 흐름이 잡혔다.

남궁진천의 검이 별안간 솟구치며 코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허?”

“피해?”

동시에 양측에서 비슷한 반응이 흘러나왔다.

어찌 됐건 서로에게 놀란 것이다.

천무백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다친 척, 무력화된 척했다가 기습을 해? 너 백도 놈 맞아?”

“싸움에서 마도 놈들이 백도의 방식을 존중하겠나?”

“그야 그렇긴 한데. 내가 마도는 아니잖아. 이건 비무고.”

“칼을 뽑았으면 비무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법. 그것이 칼을 쓰는 방법 아닌가?”

“와.”

솔직히 말해, 그쯤 됐을 때 천무백은 남궁진천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와, 이거 물건이네?’

남궁씨의 용이며, 정파에서 남궁세가가 차지하는 비중과 명성을 생각했을 때.

전형적인 강력한 후기지수지만, 성격은 오히려 백도의 고루함을 그대로 체득한 젊은 꼰대라고 생각했다.

한데 생각보다 머리가 트이지 않았나.

반면 남궁진천도 놀람을 감추기 어려웠다.

“분명 제대로 노렸는데?”

완벽한 살수(殺手)였다.

애당초 천무백의 실력이 자신이 아무리 지독한 살수를 날린다고 해도, 죽을 리가 없다는 걸 알기에 오히려 전력으로 내뱉은 공격이다.

죽진 않는다.

쌍장과 그에 따르는 내기의 완벽한 수발, 물처럼 흐르는 유연한 움직임.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래도, 제대로 한 방 먹일 줄 알았다.

적어도 낭패한 천무백의 표정을 볼 줄 알았다.

“어떻게 피했지?”

철저하게 내기의 흐름을 최소화했다.

아무리 기감에 예민해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내기를 최소화해서 가장 위력을 증폭시킬 수 있는 부분에만 집중한 판단은 훌륭했다.”

“······!”

“내공의 힘으로만 뿌려낸 살수가 아니라, 극한으로 단련된 근육과 뼈가 끌어낸 움직임 역시 날카로웠고.”

“······.”

남궁진천은 입을 쩍 벌렸다.

자신의 몸을 관조(觀照)하는 것처럼 읊어대는 천무백의 모습에 소름마저 돋았다.

자신의 의도와 생각을 완벽하게 꿰뚫어 보고 있지 않은가.

“내기에 예민한 내가고수도 당했을 거야. 내공이 움직이는 게 안 느껴지니까 말이야.”

“그런데 그대는 어떻게?”

천무백이 어깨를 으쓱였다.

“난 보통 예민한 내가고수가 아니니까.”

“······하.”

어쩌면 광오하다 싶은 천무백의 발언에 맥이 탁 풀렸지만, 남궁진천의 눈빛에 생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맹렬하게 타올랐다.

파바바바박!

남궁진천의 맹렬한 공격이 연신 이어졌다. 천무백이 순수하게 감탄했을 정도로, 남궁진천은 백도의 고루한 무인이 절대로 아니었다.

내뻗는 검로 사이에 다양한 공격이 뒤섞였다. 각법, 지법, 장법, 탄지공…….

보통 비무를 할 때 검을 들었으면, 일방적으로 검으로만 겨누는 게 백도의 흔한 무인이다.

하나 남궁진천은 정말 일생일대의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처럼, 자신이 뽐낼 수 있는 다양한 수법을 쏟아 냈다.

이때, 소란을 들은 척마대 무인들이 몰려왔다.

벽이 부서지면서 전각이 반쯤 무너졌으니까.

“이게 무슨……. 비무라도 하는 건가?”

“비무? 무슨 비무를 저리 생사결을 펼쳐?”

“말려야 하는 거 아닌가?”

“말려? 누가? 저걸 어떻게 말려?”

어디 가서는 어깨를 펴고 사는 세 얼간이도 입을 쩍 벌렸다.

남궁진천의 맹렬한 공격을 보면, 과연 자신들은 몇 수나 피하고 막을 수 있을까 고민이 들었다.

한데 천무백은 모든 공격을 단순하게 흘려보내거나, 막아냈다.

그것도 허리춤에선 검을 뽑지 않은 채로.

“저 정도였나…….”

오히려 너무 압도적이라서 그간 느끼지 못한 격차다.

하나 남궁진천은 자신들보다 높은 경지가 분명하지만, 천무백처럼 엄청나다고 느낄 경지는 아니다.

비교적 바라볼 수 있는 경지라고 해야 할까.

근데 그런 경지가 천무백의 터럭 하나 못 건들고 허사로 돌아가고 있단 사실에, 새삼 천무백의 압도적인 힘이 절실하게 느껴졌다.

그때였다.

빠아아악!

“……!”

몰려온 척마대 전부가 움찔 몸을 떨었다.

너무도 익숙한 타격음.

귓가에 들릴 때마다 한 명씩 삼도천에서 목을 축이고 돌아온다는 천무백의 귀싸대기였다.

남궁진천의 칼끝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안으로 파고든 천무백이 맹렬하게 상대의 뺨을 후려갈긴 것이다.

순간 척마대 사이에서 감탄이 터졌다. 남궁진천이 두 발로 서 있었다.

“오, 버텼어.”

“기절 안 했어.”

“와, 저 정도는 되어야 남궁 씨의 용이구나.”

남궁진천은 비틀거리며 얼굴을 붙잡았다. 귓가에 들리는 감탄이 조롱처럼 느껴졌다. 아니, 사실 신경 쓸 새도 없었다. 머리가 미친 듯이 울렸고 눈앞이 핑핑 돌았다.

“퉤엣!”

입안에서 제멋대로 굴러다니는 부러진 이빨을 뱉어내며, 남궁진천은 눈을 치켜떴다.

살벌한 패기였지만…….

빠아악!

“커흑…….”

왼쪽 뺨에서 전해지는 아찔한 고통에 다시 한번 몸이 크게 흔들렸다.

이번에도 넘어지는가 싶더니, 기적적인 균형감각으로 몸을 지탱했다.

여기저기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와. 두 대를 버텼네.”

“피하거나 못 막는 건 둘째 쳐도, 기절 안 하고 버틴 게 어디야.”

“과연 남궁진천!”

“으득…… 닥쳐라!”

남궁진천은 붉게 충혈된 얼굴로 검을 겨눴다.

온몸의 내공을 전력으로 끌어올리자, 흔들리던 신체도 균형이 잡혔다.

흔들리는 시야 너머로 무덤덤한 표정의 천무백이 잡혔다.

“이, 이익…….”

살면서 뺨을 처음으로, 그것도 두 번이나 맞은 남궁진천은 이를 악물었다.

휘이이잉!

검을 중심으로 대기가 일렁이더니, 거칠게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주위에서 웅성거리던 소리가 순간 뚝 멈췄다.

질식할 것 같은 정적이 내려앉은 가운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거…… 제왕파열검 아니야?”

제왕파열검.

현 남궁세가의 가주를 천하제일이라고 부르길 주저하지 않게 만들어 준 궁극의 신공.

미약하나마 분명 남궁진천의 검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시종일관 무덤덤했던 천무백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주위로 몰아치는 기의 흐름이 범상치 않았다.

“안 되겠다.”

“포기하는 것이냐? 비무는 아직 안 끝났다.”

“끝내야겠다.”

“이노옴! 누구 마음대로…… 컥!”

빠아아아악!

거칠게 기운을 내뿜던 남궁진천의 검이 바닥으로 힘없이 툭 떨어졌다.

벼락처럼 몰아친 세 번째 귀싸대기에 남궁진천은 흔들거리다, 끝내 버티지 못하고 폭삭 주저앉았다.

천무백이 손을 탁탁 털면서 혀를 찼다.

“너도 척마대에 들어와서, 수련해라. 다만 수준이 조금 더 높으니까.”

천무백은 팔짱을 꼈다.

“그래. 딱 세 대를 피하거나 막으면 통과로 하자.”

그 말을 끝으로 남궁진천은 거짓말처럼 정신을 잃었다.

그간 전해져 온 충격이 누적되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천무백의 발언이 그만큼 충격적이었는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신참 왔다. 잘 대해 줘라.”

“…….”

아무렇지 않게 손을 탁탁 터는 천무백을 보며, 세 얼간이는 확신했다.

“야.”

“응?”

“우리가 만약에 저 한 대를 피하거나 막는 걸 성공한다면.”

“응.”

“그럼 혹시 시험이 두 대로 늘어나는 게 아닐까?”

“…….”

순간 세 얼간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교문척이 음울한 얼굴로 말했다.

“남궁진천은 세 대라면서? 그럼 우리가 남궁진천 수준이 되면 세 대가 되는 거 아니야?”

“…….”

좌절감이 그늘처럼 내려앉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