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47화>
247. 당근과 채찍
“의약당에 사람이 모자라?”
“예. 의약당주께서 급히 근방의 의원들이라도 수배를 해달라고 전해 왔습니다.”
들려오는 보고에 제갈여강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의약당에 소속된 의원이 많은 건 아니긴 하다만, 갑자기 모자르다고?
최근에 전투를 치른 적도 없어서 다친 사람도 없을 텐데.
오히려 지금 한가해야 할 곳이 의약당이 아닌가.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한 걸 깨달은 제갈여강의 눈이 차가워졌다.
“무슨 일인지 자세히 알아보고 보고하도록! 그리고 자네는 당장 근방의 의원들을 수배해!”
“예!”
얼마 지나지 않아 자세한 사실을 확인한 제갈여강은 탄식을 터뜨렸다.
“천룡검협 이 자식이 기어코 사고를 쳤구나!”
의약당의 병상에 가득 찬 사람들은 다름 아닌 후기지수들이었다.
하필 척마대에 속한 무사들이란 사실에 저절로 한가지 가정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애들을 장악하라 했지, 누가 때려잡으라 했나?”
아무래도 천무백이 그들을 휘어잡는 과정에서 한차례 싸움이 발생한 게 아닐까.
무인들을 굴복시키는 간단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칼로 다스리는 것이다.
무인이 원체 일반적인 상식과는 궤를 멀리하다 존재다. 뛰어난 실력에 감복해 스스로 허릴 숙이는 건 흔한 일이니까.
다만 그 정도가 문제다.
“의약당에 다 실려 갈 정도면 대체…….”
대체 얼마나 두드려 팬 거야?
“그렇다고 30명이 전부?”
척마대 전원이 의약당에 실려 갔단 얘기에 제갈여강의 얼굴이 묘해졌다.
천무백이 강한 건 알고 있지만.
후기지수들이 어떤 후기지수들인가. 정의맹에 소속된 이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애들이다.
손도 못 쓰고 당했으리라고 생각하자 제갈여강은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제갈여강은 잠깐 생각하다 직접 의약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허…….”
현장에 도착하자 헛웃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다들 팔다리는 멀쩡한데…….”
다행히 어디 부러지거나 잘린 건 없어 보인다.
죽은 듯이 누워서 얕은 신음을 내뱉으며 잠이 든 삼십 명을 보자, 왠지 모를 안타까움이 들었다.
표정들이 창백한 게 영락없이 크게 지친 모습이었으니까.
“…….”
제갈여강은 가만히 제갈설아를 바라봤다.
묘한 시선을 느낀 제갈설아가 흠칫하면서 짐짓 변명했다.
“나, 나는 진법밖에 설치 안 했어요!”
“진법?”
제갈여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무리 제갈여강이 딸에게는 팔불출의 면모를 보이지만 매사 자비로운 것만은 아니다.
어릴 때는 제갈여강에게 많이 혼나본 적이 있는 제갈설아는 그간 있었던 일을 줄줄이 읊을 수밖에 없었다.
“허. 내공을 금제하고 진법을 설치한 산에다가 던져 놨다고?”
제갈설아가 쭈뼛거리며 시선을 피하자 절로 한숨이 튀어나왔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해서 차마 딸을 타박할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설명을 듣고 나서야 왜 이런 상황 이해가 됐다.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단전이 상한 건 아니니 다행이다만…….”
제갈여강의 얼굴이 묘해졌다.
“탈진에 탈수에 감기에…….”
무슨, 무인들이 이런 병에 걸리나.
그것도 절정이나 그에 근접한 작자들이.
“오셨습니까? 총군사.”
“천룡검…… 아니 대주. 이게 무슨 일인가?”
천무백이 어깨를 으쓱이며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터무니없더군요. 기본 체력이 엉망입니다.”
“그야 내공을 금제했으니까…….”
내공을 금제했다.
뿐이랴. 산에 진법을 설치해서 감각을 교란했다.
듣자 하니 수십 번이고 정상을 밟았단다. 하지만 그것도 모른 채 계속 산을 탔다고 하니, 이건 숫제 학대나 다름없다.
내공을 쓰지도 못한 상태에서 진법을 어떻게 뚫는가?
다름 아닌 제갈설아의 진법인데.
하나 천무백은 냉소를 지었다.
“내공을 금제했다고 진법 하나 뚫지 못하면, 내공이 있으면 개떼 같은 마도 놈들은 뚫을 수 있답니까?”
“……!”
제갈여강의 눈빛이 흔들렸다. 천무백의 목소리가 이례 없이 차가웠다.
천하의 제갈여강도 기세에 잡아먹힐 정도였다.
“삼재검성이 처음 무림을 열었을 때, 그에게 내공 한 줌이 있었겠습니까?”
“그야…….”
당연히 없다. 삼재검성이 지금에 있어 신화적인 평가를 받는 건, 단전과 내공의 개념이 없던 시절에 삼재검이란 검 하나로 이민족을 다스리고 평정했다는 것이다.
이후로도 내공이란 개념이 발생하기까진 어마어마한 시간이 걸렸다.
말 그대로 초창기 무림에는 내공 자체가 없었다.
“내공은 검을 쓰는데 보조적인 수단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절정의 내가고수? 거대한 내공을 지닌 절대 고수? 결국엔 보조일 뿐입니다. 내공을 버텨 낼 신체와 감각이 없으면 오히려 잘 쌓은 내공을 허투루 쓰는 것에 불과하니까요.”
제갈여강은 그제야 천무백의 목소리가 왜 이리도 냉담한지 깨달았다.
기세가 담겨 있었다.
특별히 고저도, 강한 억양이 들어간 것도 아닌데 귀에 그대로 꽂혔다.
제갈여강은 슬쩍 시선을 돌려 병상을 쭉 둘러봤다.
아마 자신이 아니라 저들에게 하는 말이리라.
실제로 저들 중 몇몇은 꿈틀거리면서 표정이 변했으니까.
“자네의 수련법인가?”
“최소한 어디 가서 칼침 맞고 허무하게 죽지는 않게 만들 수 있죠.”
“하긴…….”
“강호에서 가장 흔한 게 산공독이니까요.”
산공독.
내공을 쓸 수 없게 만드는 독이다.
무슨 고수가 고작 산공독에 당하겠냐고 하겠지만, 의외로 가장 쉽게 당하는 게 산공독이다.
가장 치명적인 효과를 내니까.
하여 그 방식이 긴 시간 동안 수없이 개량됐다.
대기 중에 뿌리는 것부터 산공독을 이용한 무공의 창안까지.
물론 절정 이상의 경지에 오르면 쉽사리 당하지 않지만.
무림의 절대다수가 절정도 되지 않는 것임을 감안하면, 가장 치명적인 독임은 틀림없다.
“마교에서도 독을 잘 쓰기로 유명하니까.”
괜히 독마의 악명이 자자한 게 아니다.
천하의 창천검신도 번번이 놓친 만큼 독에서는 대단했으니까.
물론 그 독마도 지금의 천무백에게 죽었다.
“하여튼 제가 큰 문제 없이 지휘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천무백이 칼같이 선을 긋자 제갈여강은 잠시 멈칫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자네에게 전권을 위임했으니, 자네의 행사를 방해하지 않겠네. 아…… 다만.”
“……?”
“혹시 내 딸아이도, 같은 수련을 받나……?”
천무백은 슬쩍 제갈설아를 바라보곤 고개를 저었다.
“그럴 일은 없으니 안심하세요.”
“아니, 뭐 청탁하는 게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
“아빠, 그만하고 좀 일하러 가세요!”
“…….”
제갈여강이 섭섭한 표정으로 등 떠밀린 채 나가자, 천무백은 곧장 주위에 있던 침통에서 침을 꺼냈다.
갑자기 천무백이 침을 꺼내 들자 후기지수들을 봐주던 의원이 화들짝 놀랐다.
“대, 대주님 지금 무얼 하시려고?”
“내일 수련하려면 애들이 오늘 중으로 일어나야지.”
“내일 수련이란 말입니까?”
의원이 목소리가 절로 높아졌다.
“혹시 체력 회복을 위한 재활이라면…….”
“아니, 오늘과 똑같아”
순간 병상에 시체처럼 누워 있던 후기지수들의 몸이 꿈틀거렸다.
몇몇 안색은 더 창백하게 질렸다.
의원의 얼굴이 굳어졌다. 의약당에 들어올 의원이라면 기의 흐름에 명석하기는 마찬가지. 즉 기본적인 무공을 익히고 내공을 갖췄다.
하나 그렇다고 해도 천룡검협이란 명성을 지닌 천무백에게 맞선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런데도 의원은 굳은 표정으로 명백하게 만류했다.
“불가합니다. 이 상태론 내일 일어난다고 해도 몸이 정상이 아닙니다. 거기에 오늘과 같은 정도의 수련을 더하면, 몸을 축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어쩐지 후기지수들의 고개가 꿈틀거리며 위아래로 흔들렸다.
격렬하게 공감하는 듯한 모습이 흡사 처절하기까지 했다.
“맞는 말이야.”
천무백이 순순하게 인정하자 의원의 눈이 크게 뜨였다.
후기지수들의 얼굴에 밝은 빛이 떠올랐다.
하나 이어지는 말에 다시 창백하게 질렸다.
“오늘 다 털고 일어나지 못하면 그 말이 맞지만, 오늘 다 털고 일어나 버리면 문제없잖아?”
“그게 무슨…… 단순히 체력이 떨어진 게 아닙니다. 근육이 크게 다쳤습니다. 날씨 때문에 감기 같은 자잘한 병을 앓게 된 환자도 많고요.”
적어도 며칠 푹 쉬면서 정양을 하는 게 가장 좋다.
근데 이걸 하루 만에 떨쳐내고 일어나게 한다고?
혹시 영약이라도 쓸 셈인가?
아니면 내공을 이용해서 억지로 일으켜 세울 셈인가?
치료에 내공이 도움이 되는 건 맞지만, 근본적인 치료법은 아니다.
지금 가장 필요한 치료는 휴식이다.
“이봐, 혹시 내 별호를 다 알아?”
“그야 천룡검협 아니십…… 아.”
순간 의원의 눈이 크게 뜨였다.
“하남신의!”
의원들 사이에서 대단한 소문이 돌았다. 하남에 나타난 신의가 중원을 떠들썩하게 했던 역병을 다스렸다고.
추후에 알려졌다. 천룡검협과 하남신의가 동일 인물이라고.
그저 역병으로 치부됐던 혈사문의 극독을 치료해 낸 사람이 아니던가.
소림을 찾아온 수많은 환자를 직접 일일이 챙겨서 살려냈다는 일화는 무림보단 의원들 사이에서 더 대단했다.
그 같은 명성을 떠올리자 의원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냥 한번 지켜봐.”
“아, 알겠습니다.”
의원이 비켜서자 후기지수들의 몸이 크게 경련했다.
이미 제갈여강과 대화 때부터 정신은 깨어 있었던 후기지수들의 얼굴에 아련한 빛이 떠올랐다.
‘시발…… 며칠은 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내일 또 수련한다고?’
‘아…… 제발.’
그러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았다.
‘아무리 신의라고 해도 몸 상태가 이런데 어떻게 일으켜 세워?’
‘영약이라도 먹일 셈인가?’
‘흥. 며칠 푹 쉬어야 할 텐데.’
무인들인 만큼 자신들의 몸 상태를 잘 파악했다.
내공을 쓰지 못한 상태에서 평소 쓰지 않던 근육까지 혹사한 몸이다.
아무래도 며칠 정양이 필요한 건 당연지사.
그러니 천무백이 침을 들고 다가오는 걸 보면서도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다.
하나…….
“어?”
천무백의 침이 환자들의 몸에 거침없는 속도로 꽂히기 시작했을 때부터.
무언가 잘못된 걸 느낀 후기지수들이었다.
몸이 점점 더 가벼워지고, 지켜보는 의원의 얼굴에 놀람이 번져가고 있으니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천무백이 마지막 환자에게 침을 놓을 때, 가장 먼저 침을 맞았던 교문척의 몸이 벌떡 일으켜졌다.
“……!”
놀란 눈빛이 쏟아지자, 교문척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빙빙 돌렸다.
“……왜 몸이 가벼워?”
마치 날아갈 것처럼 가볍다.
그 말은 곧.
“내일도 묘시 말에 모인다.”
천무백의 청천벽력과도 같은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쉬지도 못하게…….”
어쩐지 교문척의 목소리가 처연해졌다.
* * *
다음날.
똑같이 산을 오르는 후기지수들을 보며 천무백이 말했다.
“당근과 채찍이오.”
“당근과 채찍이라구요?”
그 말에 제갈설아가 산을 바라봤다.
땀을 뻘뻘 흘리며 움직이는 무인들은 무작정 산을 오르지 않았다.
진법을 깨기 위해 세심하게 움직였다.
“그럼 저건 채찍인가요?”
“채찍이지.”
사실 어제보다 더한 채찍이다. 천무백이 진법을 좀 더 보충해 달라고 했으니까.
어제와는 다른 진법이다. 더 교묘하고, 핵심을 찾기 어려운 진법이라고 해야 할까.
이미 진법의 존재를 알고 있으니, 저들이 산을 오르기보단 진법을 찾으려고 애쓸 건 자명한 일.
그러니 진법을 더 어렵고 복잡하게 만든 것이다.
“채찍이라기엔 너무 아픈 채찍인데…….”
뭐, 채찍은 그렇다 치자.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는 건 당연한 상식이니까.
그러면.
“당근은요?”
“어제 줬소.”
“네?”
어제 줬다고? 제갈설아는 곰곰이 생각했다. 어제 거의 천무백 옆에 있었으니, 자신이 봤을 텐데.
더구나 후기지수들하고 같이 있던 건…….
“의약당에서 뭘 줬어요?”
“치료해 줬잖소.”
“…….”
태연한 대답에 제갈설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 그러시오?”
“제가 생각하는 당근과 채찍의 의미가 다른지 곰곰이 생각해 보고 있어요.”
“당근 맞소. 저들은 단순히 체력만 회복한 게 아니니까.”
“네?”
“몸이 가볍다고들 했지. 단순히 체력이 회복됐다고 몸이 가볍다고 느끼겠소?”
“아…….”
제갈설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고 보니 저들의 움직임이 어제보다 민첩했다.
분명 감각을 교란하는 진법인데도, 크게 혼란스러워하지 않고 차근차근 나아가고 있었다.
그제야 천무백이 무언가 손을 썼단 사실에 제갈설아는 크게 감탄했다.
다만…….
“으아아악! 천무백 이 개자식 죽여 버릴 거다!”
저들에겐 채찍이 더 크게 느껴지고 있는 게 아닐까.
“소저.”
“네?”
“저놈 이름 적어 두시오.”
“…….”
아무래도 채찍이 더 가해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