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46화>
246. 다들 검 버리라고
꼭두새벽부터 연무장에 모여드는 척마대 면면의 얼굴은 크게 일그러졌다.
“참. 이 나이에 새벽부터 일어나서 단체 수련이라니······.”
다른 평범한 후기지수라면 모를까.
적어도 척마대에 소속된 이들은 제법 끗발 있는 가문의 후계자나, 그에 필적하는 위치였다. 또는 출중한 사문에서 소수의 인원으로만 무공을 철저하게 익혔다.
당연히 이렇게 새벽부터 다 같이 모여서 수련을 하는 건 어색했다.
여기저기서 불평불만이 튀어나왔지만, 대놓고 드러내는 건 소수였다.
황보숭이나 교문척, 당수군은 그냥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분위기 파악하시오, 이 사람들아······.”
몇몇 불만을 터뜨리는 무사들에게 교문척이 눈을 부라렸다.
교문척의 위세에 무사들은 시선을 피하면서도 중얼거렸다.
“거참. 누가 괜히 일을 벌여서 이렇게 됐는데.”
“······.”
차마 할 말이 궁색한지라 교문척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사실 자신이 자초한 일이니, 변명할 거리도 없다.
‘그 정도일 줄이야.’
교문척은 침음을 삼키며 어제 일을 상기했다.
단 한 방에 정신을 잃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빠악, 빠악! 하는 경쾌한 타격음에 눈을 떴다.
시야에 잡히는 건 충격적이었다.
자신도 승부를 장담하기 힘든 황보숭과 당수군이 맞춰 날아가는 모습은 충격적이었고, 다른 무사들이 뺨 한 대씩 맞는 소리는 경쾌하기까지 했다.
차마 잊혀지지 않는 끔찍한 기억이다.
부르르!
“젠장. 오한이라도 들었나.”
새벽이라 그럴까. 순간 몸에 한기가 스며들었다.
“수련이라. 솔직히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단체 수련을 한다고 실력이 쑥쑥 늘 경지는 벗어나지 않았나?”
“그렇지. 스승님도 말하길, 절정에 가까워지거나 절정에 닿으면 개인의 수양이나 아니면 치열한 실전경험만이 답이라고 하지 않았소?”
“대체 무슨 수련을 시키려고······.”
“어쩌면 우리끼리 비무를 시키지 않겠소?”
“비무라, 그게 그나마 가장 그럴듯하구먼.”
여기저기서 여러 말이 오갔다.
솔직히 조금이나마 기대하고 있었다.
어찌 됐건 천무백에게 된통 당했지만, 그걸 떠나서 무공을 봐준다고 했으니 기대가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저 막연하게 느껴지던 천룡검협이란 명성이 아닌, 실체를 단면이나마 목격했다.
오만하고, 야망에 가득 차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였지만 적어도 천무백이 어제 보여 준 대단함을 누구도 부정치 않는다.
부정하기엔 뺨에 새겨진 고통이 뚜렷하니까.
그러다 불현듯 누군가 말했다.
“근데 말이오. 매일 시험을 본다고 했는데, 설마······ 진짜 귀싸대기를 날리겠소?”
“······.”
순간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았다.
이미 지난 일이지만, 당시의 충격은 지워지지 않는다.
온몸이 무기력하게 훌훌 날아가는 아찔함, 뺨에서 느껴지는 용암 같은 뜨거움, 어금니 몇 개가 거침없이 흔들리는 고통까지.
그걸 매일 한다고?
“······난 하루 수련으로 그걸 피하거나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못 한단 말이오.”
“하루라니. 난 한 달 수련해도 못 피하오.”
“그쪽 자신감이 넘치는데? 난 반년을 수련해도 못 막을 거 같은데.”
“반년이면······ 매일 귀싸대기를 맞는다 치면, 허허 180번은 넘게 맞겠구려.”
“······.”
누군가 구체적인 수치까지 말하자 거짓말처럼 모두 입을 다물었다.
180번의 귀싸대기라······.
황보숭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옆에 있던 교문척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형씨도 한기가 드나 보오?”
“······흥. 새벽 날씨가 춥군.”
더 성장할 수 있다는 기대심보다, 이내 매일같이 쏟아질 귀싸대기에 후기지수들의 얼굴에 두려움이 언뜻 떠올랐다.
당수군이 조용히 말했다.
“······그냥 다 같이 덤벼들면 어때?”
“······.”
조용한 목소리였지만, 새벽을 가로지르기엔 충분했다.
“······그러니까 내가 독을 쓰고, 다 같이 우르르 덤벼들면.”
“다 죽지.”
“······!”
그때였다. 어느샌가 끼어드는 낯설지 않은 담담한 목소리에 모두 얼어붙었다.
특히 독을 운운했던 당수군의 얼굴은 볼만했다. 황보숭이나 교문척은 내심 실소를 흘렸다. 늘 조용하고 음침하기 짝이 없던 당수군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파리해진 얼굴은 처음 보는 거였으니까.
천무백이 터벅터벅 걸어왔다.
“결과는 뻔해. 다 죽어.”
“······.”
고요해진 가운데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됐다. 언제 떠들어댔냐는 듯 침묵이 가라앉았다.
“다 덤벼들면 될 거 같지?”
“그, 그것이”
“그럼 귀싸대기로 안 끝나. 목이 날아가지.”
당수군은 그야말로 기절이라도 할 것처럼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천무백이 혀를 쯧 찼다.
“너희들의 무공은 온갖 속이 빈 강정이다.”
“······!”
별안간 연무장을 가르는 천무백의 일갈에 모두 흠칫 굳었다.
당연한 일이다.
자신이 평생 익혀 온 무공을 낮잡으며 깎아내리는데 누가 담담하겠는가.
사실 같은 무인끼리는 저런 식으로 대놓고 말하지 않는다.
최대한 우회하여 서로의 부족한 점을 지적할 수는 있지만, 저런 식으로 말하는 경우는 딱 하나다.
바로 윗사람.
자신보다 배분이 훨씬 높거나 강호의 명숙들, 격이 다른 고수들이나 저런 식으로 직설적으로 지적한다.
한마디로 지금 천무백은 자신들을 같은 수준의 무인으로 보지 않고 있다는 의미였다.
“왜? 틀린 말 같아? 내공이 절정에 달하면 뭐해? 검과 도를 갈고 닦으면 뭐해? 귀싸대기 하나도 못 피하잖아?”
“······.”
천무백은 아예 노골적으로 조롱했다.
몇몇 무사가 꿈틀거리며 검집에 손을 올렸지만 뽑지 못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이성을 붙잡을 판단력 정도는 갖춘 이들이다.
억지로 참았다.
그렇다고 천무백을 바라보는 흉흉한 눈빛이 사라진 건 아니다.
‘물론 천룡검협이 틀린 말은 한 건 아니지만······.’
황보숭은 이를 꽉 다물었다.
황보세가의 둘째로 태어나 세상 무서울 게 없던 그였다.
타고난 무(武)에 대한 재능도 빛났다. 천신지체는 아니지만, 근골이 우수해서 어린 시절부터 온갖 기대를 받았다.
비교적 범재에 가까운 형을 꺾고 가문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동반했다.
물론 황보숭은 오만하지 않다. 자신이 천하제일 유아독존이라고 여기진 않는다. 당장 곁의 교문척이나 당수군이나 승패를 장담하기 힘든 실력자였으니까.
하면 속에서 끓어오르는 이 뜨거움은 무엇인가.
억울함? 분노? 자괴감? 아니다.
‘차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구나.’
천무백이 저렇게 일갈해도, 차마 반박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고작 귀싸대기 하나마저도. 막지 못하면서 속 빈 강정이란 말에 뭐라 반박한단 말인가.
그런 분기는 비단 황보숭뿐만이 아니었다. 나머지 무인들 사이에도 은연중에 흘렀다.
천무백은 피부로 전해지는 분위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공동의 적이 꼭 외부에 있을 필요는 없지.’
천무백은 가만히 옛 기억을 떠올렸다.
언제였던가.
천무백의 여러 전생 중에는 수많은 인연도 있었다.
그중에는 여러 삶을 지나서도 기억에 뚜렷이 남은 인상적인 인물들도 몇 있었다.
‘남궁세가의 석대교관(石臺敎官)이었지.’
검왕으로 살던 때였으니까······.
콧대 높은 남궁세가의 가주가 직접 버선발로 초빙한 교관이었다.
개인의 무력은 그리 대단치 않지만, 희한하게도 훌륭한 무력집단을 만들어내는 데 수완을 갖췄다.
그의 손으로 길러낸 창룡대, 비룡대는 지금까지고 남궁세가의 강력한 검으로써 명성이 자자했다.
본래 높은 경지의 무인을 길러내려면, 스승의 지도편달이 무척이나 중요하다.
그러니 스승 역시 무공에 조예가 깊어야 했다. 이론적인 지식을 갖춰야 했고, 자연히 본인의 수준 역시 고명해야 했다.
한데 석대교관의 수준은 아무리 잘쳐봤자 절정의 초입이었다.
남궁세가의 가주가 버선발로 붙잡을만한 실력자라기엔 어폐가 있었다.
그런 천무백의 생각을 송두리째 흔드는 그만의 교수법이 있었다.
-내가 기르는 건 훌륭한 무사 한 명이 아니라, 엄청난 결집력으로 이뤄지는 가장 강력한 무력단체입니다.
-이미 재능 있는 무사들입니다. 이런 이들은 개개인이 훌륭한 무사일지는 몰라도, 집단으로서는 불확실하죠.
석대교관의 교수법은 결론은 간단했다.
-내가 철저한 악역이 되면 됩니다. 찢어 죽이고 싶을 정도로 악귀가 되면, 지들끼리 말하지 않아도 뭉치고 결집하더라고요.
천무백은 이미 검증된 방식을 선택했다.
정의맹에 투신한 후기지수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이들인만큼 오성과 재능은 출중하다.
석대교관의 방식이 가장 잘 통할 이들이기도 했다.
“검 버려.”
“……?”
“검 잡고 뭘 할 수준이 안되니까 다들 검 버리라고.”
“……!”
삽시간에 주위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건 단순한 지적이 아니라 무인으로서 삶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거나 다름없다.
하지만 어제 천무백이 보여 준 모습에 아무도 쉽사리 나서지 못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대들다간 똑같은 결말이 있으리라는 건 자명했으니까.
생각보다 인내심이 깊은 좌중의 모습에 천무백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쯤 하면 한두 명쯤 대들 줄 알았는데.’
어제 너무 충격을 줬나. 좀 살살할걸.
여하튼 자신을 노려보는 눈빛이 모두 심상치 않다는 것만으로도 천무백은 만족했다.
그리고 자신의 말에 감히 반박하지 않는다는 사실 역시 흡족했다.
“따로 반론이 없는 것 같으니, 그럼 이제부터 시작해 보자고.”
* * *
“이건 우릴 무시해도 너무 무시한 처사 아닌가.”
황보숭은 시도 때도 없이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자 교문척이 어깨를 으쓱였다.
“왜,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수련을 기대했소?”
“흥. 난 외공을 극한까지 익힌 몸이야. 신체를 단련하는 건 아주 도가 텄지. 그런데 이런 시시한 거나 식힌다고?”
교문척의 시선이 뒤를 따라 산을 오르는 척마대에 닿았다.
“고작 산 하나를 오르고 내리는 게 무슨 수련이란 말인가. 우리가 열 살도 안 되던 시절에 했던 것들인데.”
그랬다.
불만을 품으면서도 은근히 기대했던 천룡검협의 수련의 실체가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고작 산을 오르는 것이라니. 이미 절정 경지에 올라선 황보숭이 투덜댈만했다.
하지만 교문척의 표정은 묘했다.
“그렇게 시시한 건 아닌데…….”
몇몇 특출 난 무인을 제외하곤 대다수의 무인이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양 발목에는 10근(≒6kg)의 모래주머니를 차고 있었고, 등에는 100근이 넘는 돌덩이들을 짊어지고 있었다.
사실 우스운 이야기다.
바위를 부수고 산도 가른다는 무인들이 무거운 거 들고 산을 오른다 한들 땀이라도 흘릴 일이 있겠는가.
“내공을 금제 당했으니 순수하게 근력과 균형으로 버텨야 하는데, 이게 쉽지는 않지.”
교문척이 혀를 내둘렀다.
그의 미간에도 어느덧 한줄기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황보숭이야 외공의 고수라 지금 발군의 모습을 보여 주지만, 어디 다른 무인들이 똑같겠는가.
“설마 내공을 그리도 간단하게 금제할 줄은 몰랐지.”
“난 날 죽이려는 줄 알았어.”
“내공을 금하는 혈도는 사실상 사혈이잖아? 내공을 금제하다가 잘못 건드려서 죽이는 건 흔한 일이니까.”
천무백이 내공을 금제했다.
사실 내공을 금제한다는 건 고도의 공부다.
혈도를 짚기만 해도 내공이 금제 된다?
그렇게 간단하면 왜 다 보편적으로 활용하지 않는가.
간단하다.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내공을 금제하는 건 몸에 흐르는 기운을 막아 버린다는 것. 자칫하면 사람의 생기까지 막아 버리기에 조금만 실수해도 사혈이 되기에 십상이다.
아주 세밀하고 고도로 집중된 내공의 운용으로 철저하게 혈도를 짚어야 하는데, 시전자의 수준이 보통 높은 거로는 부족하다.
“끄응. 무슨 젓가락질보다 더 쉽게 금제해 버리니…….”
누군가 한탄을 내뱉었다.
별생각도 없이 훌훌 짚고 ‘다음’만 외치던 천무백의 모습에 모두 경악했다.
“근데, 이 산이 이렇게 높았나?”
“아니. 별로 높은 산은 아니지.”
“근데 왜 두 시진은 오른 것 같은데, 정상이 안 보여?”
“……어?”
순간 좌중에 침묵이 맴돌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무언가 깨달은 교문척이 이를 악물었다.
“……제갈 소저가 안 보였었지.”
“어. 그랬소. 제갈 소저는 수련은 안 받는 것 아니겠…… 어?”
그제야 이상한 걸 깨달은 황보숭의 얼굴 역시 일그러졌다.
내공도 금제 됐다. 오로지 신체의 균형과 감각, 근력만 믿어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진법까지 깔아 놔? 이런 뭣 같은…….”
교문척의 얼굴에 땀이 흥건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