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45화>
245. 꼬우면 강해지던가
“문척아.”
“성이 교문이고 이름이 척입니다.”
“쓰읍.”
“이제부터 제 성은 교 씨고 이름은 문척입니다.”
“그래, 문척아. 외자 이름보단 두 글자 이름이 더 부르기 편하잖아?”
“······그렇습니다.”
가문의 성씨를 마음대로 바꿔 부르는데도 교문척은 단 한마디도 반박하지 못했다.
자랑스러워하는 가문의 성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무릎 꿇고 있었는지 종아리에 아려왔다.
‘뜨겁다.’
왼쪽 볼이 얼얼하다.
‘오른 어깨는 감각도 없어.’
휭휭 날아가서 나무에 얼마나 강하게 처박혔는지 어깨뼈가 부서진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내가 잘 생각해 봤는데 말이다.”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교문척이 상념에서 깨어나 바짝 긴장했다.
“네.”
“네가 도와주겠다고 하니, 내가 거부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다.”
“······그렇습니까.”
“그래. 무사들을 잘 이끌게끔 도와주겠다고 하니, 아주 기쁘게 받아야지. 다만 말이다, 문척아.”
“네.”
“도와주려면, 응? 그만한 실력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면서 천무백은 주위를 슥 둘러보았다.
서른 명이 무릎을 꿇고 있는 광경이 아주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하물며 모두 하나같이 오른쪽 뺨이 얼굴의 반쪽만큼 시퍼렇게 부어 있었으니.
모두가 하나같이 천무백의 무서움을 몸으로 느꼈다.
‘그걸 어떻게 피해?’
당수군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사실 피하는 건 자신이 있었다.
당문의 혈족이라면 움직임을 쫓는 동체 시력이 아주 중요했다.
상대의 공격을 피하거나 흘려보내면서 적절한 시점에 독공을 쓰거나 암기를 뿌리는 것이 바로 당문의 특징이었으니까.
그래서 자신 있었다.
교문척은 방심하다가 당한 거라고 여겼다. 자신이라면 피할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하지만 숨을 들이켜는 순간, 이미 자신의 시야에 천무백은 없었다.
주변의 풍경이 휙휙 지나갔다. 뒤늦게 볼에서 용암같은 화끈함이 몰려왔고, 이내 정신을 잃었다.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기의 흐름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무기력하게 아무것도 눈으로 쫓지 못한 건.
몸이 반응이 느릴 수는 있다. 하지만 움직임의 궤적은 조금이라도 볼 수 있어야 정상이 아닌가.
당수군의 인생에서 두 번째였다.
‘아버지 이후로 처음이구나.’
당가의 가주는 세상이 공언하는 천하십대고수.
천무백을 바라보는 당수군의 시선이 떨렸다.
‘아버지와 동격이란 말인가?’
비단 몸을 떠는 건 당수군만이 아니었다.
천무백을 올려다보는 황보숭의 얼굴도 복잡했다.
‘호신강기가 그렇게 무력화될 줄이야.’
황보숭의 선택은 막는 것이었다.
외공을 깊이 탐구했다고 해도, 내공을 전혀 익히지 않은 건 아니었다.
황보숭은 적어도 호신강기만큼은 철저히 갈고 닦았다.
‘용의 역린처럼, 단단한 외공 사이에 수련이 힘든 약점들이 있으니까.’
외공이 으레 그렇다.
아무리 갈고 닦아도, 미처 외공으로 수련이 불가한 부분이 있다.
흡사 용의 역린(逆鱗)처럼.
그런 부분을 보호하기 위해 외공의 고수들은 철저하게 호신강기에 집중한다.
다른 내공은 몰라도 황보숭은 호신강기에 자신이 있었다.
결과는······.
‘종잇장처럼 찢어 버렸구나.’
그걸 누가 단순한 귀싸대기로 볼까.
거기까지면 그래, 차라리 이해한다. 내공을 잔뜩 실은 일격이면 깨질 수도 있지. 천룡검협이잖아?
하지만 외공으로 단단하게 근육을 결집했음에도, 어금니가 두어 개가 날아갈 땐 황보숭은 철저하게 느꼈다.
‘급이 다르다······.’
말 그대로, 수준이 달랐다.
“에휴.”
천무백이 한숨을 내쉬자 서른 명이 일제히 움찔했다.
“어떻게 한 명도 피하거나 막지를 못해?”
“······송, 송구합니다.”
“그래 놓고 도와주겠다고?”
“저희가 오만했습니다!”
“부족한 실력으로 감히 협조를 해 주겠다니, 마니, 저희가 오만했습니다!”
“오만하면 끝나냐?”
“······네?”
“남아일언 중천금이라 했으니, 도와주겠다는 말을 물릴 수야 없지.”
“······.”
뭔가 불길한 기색이 무사들 사이에 맴돌았다.
그들을 보며 천무백은 혀를 찼다.
‘쯧. 생각보다 더 형편없군.’
만일 천무백의 생각을 누군가 들었다면 기함했으리라.
여기 모인 서른 명의 무사는 확실히 수준이 높았다.
세 얼간이는 물론이고, 나머지도 마찬가지다. 당장 이들로만 이뤄진 타격대가 공격하면 버틸 문파는 그리 많지 않다.
괜히 제갈여강이 월야방을 친다는 계획을 끝에 있는 가지 만류하지 않은 걸 보면 느낄 수 있지 않은가.
즉슨 그 말은, 일전보다 천무백의 수준이 월등하게 높아졌다는 것이다.
오성물 중 네 개의 성물이 간직한 힘을 자신의 것으로 녹여 낸 수준은 절세지경에 닿았으니까.
천무백의 눈에는 그저 이들의 움직임이 굼뜨기 짝이 없었고, 내공 역시 형편없어 보였다.
“내가 이것들이랑 기 싸움이니, 신경전을 펼치다니······아이고.”
천무백이 혀를 찼다.
“이것들 데리고 어떻게 혈귀곡과 싸우나······.”
순간 다들 발끈했지만, 누구도 일어나진 않았다. 은연중에 퍼져나가는 천무백의 기세에 이미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무사들이 조심스럽게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황보숭과 당수군의 날카로운 눈빛이 교문척의 등을 훑었다.
‘저 새끼가 괜히 나대서.’
‘자신이 알아서 할 테니까 보고만 있으라고 했지?’
‘아오, 저놈을 믿었다니.’
시선에 담긴 의미를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법.
교문척은 억울했다.
‘아니, 이렇게 될 줄 알았나?’
하나 그 억울함을 누가 알아주겠는가. 자초했는데.
“너희들이 도와주겠다고 한 그 절절한 마음을 차마 짓밟을 수는 없지. 하지만 이 정도 실력이라면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만 될 터. 하니 내가 너희들의 실력을 손봐 주겠다.”
무인들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실력을 손봐 준다는 건, 수련에 도움을 주겠다는 것이 아닌가?
‘천룡검협이?’
방금 전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모두 절실히 느꼈다.
격(格)이 다르다고 느낄 정도로 엄청난 수준 차이.
그만한 차이의 무인이 직접 수련에 도움을 준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를 사람은 이곳에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 나름의 명문세가며 출중한 사문에 속해 있지 않은가.
저만한 명성과 실력을 갖춘 이중에 성심성의껏 타인의 무공을 봐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니,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순간 무사들의 얼굴에 떠오르는 은은한 열기에 천무백은 그제야 조금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영 어설픈 놈들은 아니군.”
우물 안 개구리니, 공명심에 빠진 애들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무(武)에 대해서는 다들 진심이었다. 하긴, 진심이 아니었다면 애당초 저 젊은 나이들에 이 정도의 수준에는 오르지 못했겠지.
천무백의 목소리가 다소 풀어졌다.
어찌 됐건 천무백도 무인이고, 검극에 닿기 위해 매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무도가다.
이들의 반응이 썩 나쁘진 않았다.
그래서 흔쾌하게 말했다.
“적어도 다음 임무를 수행할 때 죽지 않을 정도는 돼야겠다.”
“······.”
기대감 어린 눈빛에 천무백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준은 오늘과 같다.”
오늘과 같다······?
처음엔 무슨 의미인지 곧장 받아들이지 못했던 무사들은, 이내 낯빛이 파리하게 질려갔다.
오늘과 같은 기준이라면······.
천무백이 씩 웃었다.
“귀싸대기 딱 한 대. 이 일타(一打)만 피하거나 막아 낼 때까지 말이다.”
“······!”
순간 똥 씹은 표정처럼 일그러진 그들의 얼굴을 보며 말을 이었다.
“매일 인시 말(오전 5시)에 모여 수련을 시작한다. 그리고 끝날 때, 바로 시험을 치른다. 시험은 오늘처럼. 딱 한 대만 때릴 거다.”
“······.”
“매일 같이. 하루도 빠짐없이 시험을 치르마.”
모두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매일 같이······.”
“하루에 한 대씩······.”
“귀싸대기를······.”
그 아련한 중얼거림 속에 천무백이 즐겁다는 듯이 말했다.
“실력 빨리 길러서 피하거나 막던지.”
꼬우면 강해지던가.
* * *
천무백의 행적을 요약하면 독보강호다.
물론 곁에 능허나 제갈설아가 있었지만, 어떤 한 조직이나 단체에 속하진 않았다.
이건 비단 이번 삶에만 국한되는 얘기가 아니다.
전생으로 범주를 넓혀 봐도, 문파를 이끌거나, 또는 어디 문파에 속해서 움직이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패천검마의 경우도 있지만, 그건······.
“내가 이끌진 않았지. 지들이 따라왔지.”
이렇듯 천무백이 어느 한 문파의 수장이 되거나 조직을 이끄는 위치에 서는 건 거의 없었다.
그러니 지금 척마대를 이끄는 건 확실히 특이했다.
“마교 놈들이 워낙 극성이어야지.”
천무백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사실 이전 삶이 전해 준 교훈이 컸다.
전생, 창천검신으로서의 생엔 천무백의 삶 중 가장 높은 경지에 올랐다.
그런데도 마교와의 싸움은 버거웠다.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 소림이 봉문을 하고, 무당이 사라질 뻔한 적은, 개파 이래 처음이 아니던가.
그런 마도놈들과 싸우며 천무백이 얻은 교훈이 있다.
“홀로 싸우면 혼자서 이기지만, 전부가 이기지는 못한다.”
40년 전의 정파들이 그랬다.
그래, 차라리 무인들만 죽어 나갔다면 천무백은 입 안이 쓰겠지만 감수했을 것이다.
칼날 위에 서는 삶이 강호니까.
하지만 정마대전의 틈바구니에서 강호와는 상관없는 양민들이 죽어 나갔다.
칼을 잡지 않고 쟁기를 잡은 이들이 말이다.
불가항력이었다.
정파가 무너지니, 그들을 보호할 방패이자 칼이 사라졌다.
‘정파가 건재하다면, 마도 놈들의 강력함 앞에서도 맞서 싸울 저력이 있다면.’
그렇다면 정마대전의 참화가 강호 바깥으로 뻗어 나가지 않았으리라.
그래서 정의맹을 만들었다.
일찍이 정파의 힘을 결집하기 위해서.
그토록 천무백이 분주하게 움직인 결과였다.
그러니 천무백은 정의맹이 굳건히 서서 정파의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한데 내부에서 갈등이 생긴다면.
그리고 그걸 해결하지 못하면 젊은 무인들이 전쟁 속에서 무참하게 죽어 갈 건 자명한 일이다.
하면 마도는 더 기승을 부리겠지.
저번 삶에서처럼 후회스러운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이 정도가 정파 후기지수의 수준이라면, 마도를 이겨 내긴 힘들다.”
천무백이 본 마도의 수준은, 고작 두 개 종단에 불과한 혈귀곡의 수준만 봐도 오히려 40년 전보다 더 강해졌다.
하물며 새외에 있는 나머지 종단은 어떻겠는가.
“적어도 내 눈앞에서 죽지 않아야지.”
자질도 훌륭하다. 제법 치열한 노력도 동반됐을 것이다. 무에 대한 마음가짐도 분명하다.
다만 걸리는 건 가문의 후계자를 원하는 야망이겠지만, 그 야망을 적절히 제어만 할 수 있다면 더 크게 발전할 수 있다.
“제자까지는 아니겠지만.”
제자는 아니다.
적어도 완전히 마음에 차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혀를 찰 수준을 벗어나게끔 하는 게 목표니까.
“제자라······.”
불현듯 검존이 떠올랐다.
비록 많은 생에서 제자를 길러낸 건 손에 꼽지만, 검존이란 존재만으로 천무백의 가르침은 훌륭하다는 걸 증명하는 부분이었다.
-스승님······.
-왜.
-불초 제자를 싫어하시는 겁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차라리 죽기를 빌 정도로 고통스러운데.
-검의 길은 고난과 고달픔의 연속이니라.
-검의 길이 아니라 폭력의 길이 아닙니까.
온몸에 멍투성이가 된 과거의 검존을 떠올리던 천무백이 피식 웃었다.
“뒈지게 패다 보면 알아서 실력이 늘더라.”
천무백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 시각, 수련을 위해 꼭두새벽에 일어난 세 얼간이는 순간 엄습하는 한기에 파르르 몸을 떨었다.
“······겨울이 왔나. 웬 한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