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243화 (243/318)

<검신재생 243화>

243. 공동의 적

기세 좋게 천무백의 방을 박차고 나갔지만, 사실 결과가 정해진 신경전이다.

분위기가 그랬다. 교문척이나 황보숭, 당수군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미 척마대 창설이란 화두는 후기지수들 사이에서 가장 시끄러운 화제였다.

“이거야 원…….”

돌아가는 상황에 황보숭이 한숨을 내쉬었다.

파벌의 수장이라지만, 명령을 내리면 바로 수행하는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다.

그저 뜻이 비슷한 이들끼리 뭉친 것일 뿐이다. 주종관계가 아니다.

“천룡검협과 함께 마도와 싸울 기회니까.”

절대다수의 무인들에겐 천무백은 말 그대로 선망의 대상이다.

여러모로 그랬다.

명문세가의 직계도, 구파일방으로 대변되는 사문도 아니다.

오로지 홀로 우뚝 선 존재.

그가 이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대다수가 척마대에 들어가길 원했다.

“끄응. 이러다간 우리 입지가 좁아질 것이오.”

“우리?”

교문척의 말에 황보숭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알게 모르게 서로 신경전을 펼치던 사이였는데 갑자기 우리라니.

황보숭의 날이 선 반응에 교문척이 코웃음을 쳤다.

“지금 그쪽이랑 싸울 상황일 것 같소?”

“······.”

“생각해봅시다. 그쪽도 정의맹에 투신한 이유가 공을 세우고 명성을 날려서 가문의 후계자 자리를 꿰차기 위함이 아니오?”

“으음.”

“그러려면 우리가 두각을 드러내야 하지. 일부러 젊은 무인들을 주도하면서 따르는 이들을 챙긴 이유가 그렇지 않은가 이 말이오.”

황보숭이 침음을 삼키며 교문척을 바라봤다. 새삼 제 생각과 똑같단 사실에 묘한 공감대가 형성됐다.

젊은 무인들을 이끌며 정의맹에서 공을 세우는 것.

그래서 일부러 뜻이 비슷한 이들, 실력이 뛰어난 이들을 챙기며 파벌을 형성한 것이 아니던가.

문제는 이 파벌 자체가 새로 드러난 변수 앞에 무의미하게 되버렸다.

“천룡검협이 이끄는 척마대는 우리 파벌과 상관없이 후기지수들을 흡수할 게 틀림없소.”

“흥. 그쪽은 불안한가 보오. 그쪽을 버리고 척마대에 다 들어갈 것 같나?”

“당연한 거 아니오? 지금 우리 곁에 모인 건, 우리 목소리가 크고, 우리가 강하니 그렇지. 하지만 천룡검협은 그것보다 더하오. 솔직히 나도 지금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를 깊이 흠모하니까. 정녕 당신은 문제없을 것 같소?”

“······.”

황보숭은 입을 다물었다.

천무백의 냉담한 반응에 화가 나서 문을 박차고 나왔었다.

나오면서도 혹여 붙잡지 않을까 뒤를 돌아봤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실제로 황보숭도 천무백을 깊이 숭앙했다.

강호의 행적을 듣고 있노라면 절로 가슴의 웅심이 치솟는다.

동시에 흠모하는 만큼 강렬한 경쟁심도 따랐다. 좋게 말하면 호승심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시기였다.

나도 혈귀곡과 싸우면 저만한 명성을 얻을 수 있을 텐데 같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천룡검협이 우릴 모르겠소? 옆에 제갈 소저가 있소. 우리의 실력이 어떤지 다 알고 있을 거요. 가장 위험한 임무를 맡을 척마대에 필요한 건,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후기지수요. 그런데도 우릴 잡지 않았지.”

“그래서 교문 소협께선 고개를 숙이고 척마대에 들어가시겠다?”

“그렇소.”

“허. 척마대에 들어가서 마도를 멸살하고 공을 세우면 뭐 하나? 그러면 이미 명성이 자자한 천룡검협이 모든 공적을 다 가져갈 텐데. 사람들은 역시 천룡검협이라며 그의 이름을 연호하겠지!”

“그럼 대체 어쩌자는 거요? 우리가 이대로 있으면 어차피 무인들은 전부 천룡검협을 따르리란 건 자명한 거 아니겠소?”

황보숭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교문척의 말은 사실이었으니까.

“천룡검협이란 명성 앞에는 등불 앞의 반딧불에 불과하오.”

“뭣이라?”

“등불도 많이 친 거지. 태양 앞의 반딧불이오.”

교문척이 냉소를 지었다.

“냉정하게 보자고, 형씨. 천룡검협의 명성은 강호에 자자해도, 당신이나 나나 그럴듯한 별호가 있긴 하오?”

물론 별호가 있긴 하다.

뇌섬도객(雷閃刀客)이니, 철강호(鐵鋼豪) 같은 별호.

“흥, 누가 봐도 차이가 크지 않소. 천룡검협이란 별호에 비교하면.”

“끄응.”

황보숭은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인들은 하나둘씩 척마대에 입단하기를 희망하며 천무백을 중심으로 뭉칠 것이다.

“······내 무사들은 아닌데.”

그때, 조용한 목소리로 당수군이 끼어들었다.

교문척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야 당신의 혈족이니까 그렇지. 하지만 생각해 보시오. 고립될 뿐이야. 당문의 혈족이 강력한 건 알지만, 결국 위험한 임무는 다 척마대가 할 것이고 공적 역시 척마대가 세울 터. 그럼 당 공자께선 그냥 손가락이나 빨고 있을 것이오?”

교문척의 이어진 설명에 당수군은 얼굴만 찌푸릴 뿐 반박하지 못했다.

황보숭이 답답하다는 듯이 물었다.

“하면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척마대에 들어가서 내부를 우리가 장악합시다.”

“장악?”

황보숭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내 탄성을 터뜨렸다.

“우리와 뜻이 잘 맞는 정예 무사들만 들어가서 척마대를 장악하자는 것인가?”

“그렇소. 척마대 대주가 천룡검협이면 뭐 하오? 조직에 속한 무사들을 우리 뜻대로만 움직일 수 있으면, 천룡검협도 결국 우리의 눈치를 볼 수 있지 않겠소?”

“아하······!”

“위험한 임무에만 투입된다 하니, 소수 정예로 갈 것은 자명할 일. 각 이끄는 무사 중에서 실력 좋고 믿을만한 이들을 확실히 회유하면서 입단합시다. 그래도 우리가 그간 무사들을 챙겼으니 의리가 있는 이들이라면 우릴 말을 쉬이 무시하지 않을 거요.”

어찌 됐든 이들 역시 젊은 무인들의 마음을 훔쳐 파벌의 수장이 된 자들이다.

그만큼 무사들에게 여러모로 신뢰를 받았다.

교문척의 명쾌한 설명에 황보숭과 당수군은 말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만 된다면 오히려 척마대를 진짜 이끄는 건 이 셋이 될 게 자명했다.

하면 상황에 따라 공을 세울 수도 있고, 명성을 떨칠 수도 있으리라.

아무리 대주라지만, 대원들 대다수가 따르지 않는다면 자연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을 터.

“좋소. 그렇게 합시다.”

“당 공자께선?”

“······하겠다.”

“좋소. 좋아. 이로써 한시적 동맹인 것이오. 아, 그리고······ 흠. 제갈 소저 말이오.”

제갈설아가 거론되자 두 사내의 눈이 번쩍였다.

교문척은 내심 고소를 삼켰다.

“뭐 다들 제갈세가의 배경을 얻고자 제갈 소저를 마음에 품은 거로 보이는데······.”

“흥.”

“뭐, 길게 얘기하지 맙시다. 어찌 보면 우리 모두 연적(戀敵)일지도 모르겠다만, 지금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오.”

“무슨 소리지?”

“천룡검협 말이오. 제갈 소저가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더이다.”

“제갈 소저가 천룡검협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뜻인가?”

“난 그렇게 따뜻한 눈빛과 따스한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란 걸 이제야 깨달았소. 우리에겐 단 한 번도 보여 주지 않던 모습 아니오?”

황보숭이 침음을 삼키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그저 제갈세가의 후광을 빌리고자 접근했다.

하지만 그 외모를 목격한 순간, 어쩌면 여기 셋 모두 동일한 감정을 품었으리라.

그러나 단 한 번도 앞에서 제대로 웃어 준 적도 없을 정도로 차가웠다.

그저 차가운 성정이라고만 막연히 알고 있었는데, 천무백의 곁에선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그야 천룡검협의 위명이 워낙 높으니 그렇겠지. 그러니 우리 셋 모두가 그보다 더 높은 명성을 가질 수 있게, 일단 힘을 모읍시다.”

아무리 치고받고 싸우더라도 공통된 외부가 적이 나타나면 뭉친다던가.

셋은 굳은 결심으로 뭉친 채 천무백을 찾아갔다.

* * *

“월야방?”

제갈여강의 떨리는 시선이 천무백에게 향했다.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아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연신 되물었다.

하나 천무백의 답은 똑같았다.

“월야방을 칠 계획입니다. 승낙해 주시죠.”

“……월야방이 내가 아는 월야방 맞나?”

“중원제일살수문 월야방을 생각하고 있다면, 맞습니다.”

척마대의 인원 구성이 끝나자마자 찾아온 천무백이 내세운 계획에 제갈여강은 입안이 바싹 메말랐다.

“월야방이라니. 미친 건가?”

제갈여강이 그리 소리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터무니없는 계획이다.

천무백은 일전에 있던 월야방의 습격을 밝혔다. 제갈여강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월야방이 마도의 의뢰를 승낙했다니…….”

“혈귀곡의 의뢰를 받아들인 순간부터 그들은 마도의 편에 선 겁니다.”

“으음.”

“당장은 저 혼자 습격을 받았지만, 차후 진짜 전쟁이 시작되면 어떻게 될까요?”

“그야…… 하아.”

“무림의 명숙들이 죽어 나갈 겁니다. 기재들이 죽어 나가겠지요. 물론 전부는 아닐 겁니다. 하지만 월야방이 어둠 속에서 갈고 닦은 칼은 날카롭습니다. 능히 사람의 목숨을 뺏을 칼날이죠.”

“그래서 척마대를 이끌고 월야방의 거점을 타격하겠다?”

“그렇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정의맹 전부가 움직여야 하는 일이다.”

“안 됩니다. 정의맹의 핵심이 나서면 혈귀곡이 어떻게 움직일지 모릅니다.”

“빈집을 노릴 수 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너무 위험한 임무야. 자네는 몰라도 척마대의 후기지수들이 큰 손실을 입을 거야.”

“맞습니다.”

태연한 대답에 제갈여강은 순간 흠칫했다.

제갈여강이 묘한 눈빛으로 조심스레 천무백을 살폈다.

“자네 혹시…… 옥석을 고르겠다는 건가? 싸움 중에 살아남는 이들만 데리고 가겠다는 건가?”

생각하기도 힘든 잔혹한 수다.

하지만 그것만큼 지금 상황에서 비정하지만 확실한 수는 없다.

제갈여강 역시 척마대 내부의 분위기를 잘 안다.

세 파벌의 수장들이 천무백에게 반감을 품고 있다는 것.

한데 그들 중 일부가 싸움 중에 죽어 버리면?

반감을 품은 상대를 손도 안 대고 제거한 것이며, 동시에 남은 이들의 결집을 유도할 수 있다. 공동의 적, 공동의 원한이 생긴 거니까.

어쩌면 천무백의 비상한 두뇌라면 거기까지 생각한 게 아닐까?

그래서 무리라고 판단되는 월야방 공격을 계획한 거고?

순간 제갈여강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아닙니다.”

천무백은 부정했다. 제갈여강이 미심쩍은 기색으로 천무백을 쳐다봤다.

“……정말인가?”

“지금의 상태로 월야방을 공격했다가는 역으로 당할 확률이 높습니다. 지금 척마대에 구성된 무사들의 실력을 될 수 있는 대로 제가 봐줄 생각입니다.”

“무공을 손봐 주겠다는 것인가?”

“적어도 죽지 않게끔은 만들어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천무백의 말에 제갈여강은 팔짱을 꼈다.

사실 전권을 준다고 했으니, 계속해서 거부하는 건 본인이 한 말을 부정하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월야방을 없애서 미리 혈귀곡의 칼을 치워 버리는 것도 꽤 훌륭한 계획이다.

제갈여강은 천무백의 눈을 들여다 봤다.

흔들림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진중한 눈빛이다. 제갈여강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모르겠군. 하나만 약속함세. 진행 중에 무리라고 판단하면 임무는 포기하기로.”

“알겠습니다.”

사실상 승낙을 받아 낸 천무백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무공을 손봐 준다고 실력이 확 늘까요?”

제갈설아의 물음에 천무백은 잠시 생각했다.

월야방 정도 되는 살문을 공격하면, 치열하고 위험한 전투가 전개될 터.

격한 사투에서 전우애가 생겨나는 건 당연한 일.

공동의 적을 맞이해 척마대가 뭉치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더구나 혈귀곡의 무서움을 뒤로한 채, 그저 명성을 떨칠 수 있다는 젊은 혈기에 찬 후기지수들에게 진짜 현실이 어떤지 경각심을 줄 것이다.

그렇다고 천무백은 척마대가 큰 피해를 보는 걸 바라지는 않았다.

‘어차피 마도와의 싸움에서 내가 할 일은 가장 위험한 곳에서 가장 강력한 적들을 죽이는 것.’

가령 혈귀곡의 우두머리인 오성 안에 드는 고위 서열.

마류칠종의 종주들. 거기에 천마까지.

당연히 뒤를 받쳐 주는 척마대의 역할도 커질 건 자명하다.

“그렇게 만들어야지.”

천무백은 이들을 날카로운 칼로 만들 생각이었다.

“오, 제갈소저. 오셨구려.”

“모두 모였습니다. 소저, 아니 부대주라고 해야 하나?”

제갈설아를 보고 희번득하는 세 얼간이를.

‘죽지 않게끔만 굴리면…….’

딱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이면.

거짓말처럼 실력이 쑥쑥 느는 법이니까.

‘차라리 죽여달라고 빌 정도로 굴려주마.’

순간 세 명의 몸에 오돌토돌 소름이 올라왔다.

천무백의 번뜩이는 안광에 어쩐지 셋은 불길한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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